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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4 회


제 5 장

7

그해 설날에는 아침부터 녀교원합숙 가까이에서 까치가 유난스레 우짖었다. 깍깍깍 하는 까치소리가 설맞이준비로 들레이는 집집마다에 저희들끼리만 통하는 언어로 무슨 사연인가를 열심히 전해주었다.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더니 누가 설세배를 오려나, 오면 어떤 사람들이 올가, 동주네가 올가, 아니면…

설을 계기로 오고가는 축하방문과 축하편지는 1년동안에 맺아진 인간관계의 총화이며 매개 사람들의 인간상에 대한 총평이다. 설날에 사람들이 얼마만큼 찾아오는가를 보면 대중이 자기를 어느 정도로 믿고 사랑하는가를 가늠할수 있으며 축하편지나 축하엽서를 몇통 보내오는가를 보면 자기자신에 대한 뭇사람들의 관심도가 어떤 계선에 있는가를 짐작할수 있다. 송금주는 어제까지 60여통의 신년축하장을 받았는데 학교적으로는 교장, 교무주임 다음가는 높은 수자라고 한다. 설에 축하장을 받을 때의 만족감이란 수학적개념으로는 계산할수 없는것이다.

그것을 어찌 몇냥의 황금이나 돈에 비길수 있겠는가. 축하장들의 대부분은 《희망찬 새해》라는 격식화된 표현으로 시작되는데 그래도 그런 표현이 들어가야 설맛이 난다. 7개년계획의 웅대한 리정표를 향해 온나라가 돌진하던 1960년대 전반기에 청춘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그것을 관습상의 수식어로 보면서도 년하장을 쓸 때면 《희망찬 새해》라는 문구를 즐겨 써넣군 하였다.

왜냐하면 실지로 천리마시대의 인간들은 아름다운 리상과 희망을 품고 온 세상을 진감시키는 변혁을 이룩해갔기때문이였다.

우리의 경제는 경애하는 김일성동지께서 마련해주신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과 대안의 사업체계라는 새로운 룡마를 타고 사회주의적공업화의 넓은 길로 질풍같이 내달리였으며 우리 인민은 한손에 총을, 다른 한손엔 낫과 마치를 들고 우리 조국을 부강하고 번영하는 사회주의락원으로 건설하기 위하여 《자력갱생행진곡》을 높이 부르며 세기를 누벼나갔다.

누구에게나 일감이 산더미같이 쌓인 벅찬 시대에 20대의 젊은이들이 나이 한살을 더 먹는것은 서글픈 일도 아니고 두려운 일도 아니다. 설익은 20대에 나이 한살을 더 먹고 철이 빨리 드는것은 좋은 일이다.

20대에 교단에 선 송금주는 25살의 처녀로 되였다. 9월 5일이면 그의 나이가 25살이 되는 날이다. 그때까지는 아직 아홉달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지만 그는 벌써부터 자기 나이를 25살로 계산하였다.

오늘은 무엇을 할가. 어떻게 설을 쇠면 이 설이 추억에 남는 설로 될가. 송금주는 아까부터 따뜻한 아래목에 올방자를 틀고앉아 한가지 생각을 굴리고 또 굴리였다. 아무리 궁리를 짜고 또 짜내도 그럴듯한 프로그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정애경이 있다면 심심치 않은 씨나리오를 제꺽 만들어내겠는데 독연을 하자니 그에 필요한 줄거리를 엮을수 없었다.

물론 설날의 관례로 되고있는 탄광화약고 박경만아바이와 박만삼운전사아저씨, 아간의 고모에게 세배를 드리는것은 고정프로그람이니 순차대로 실행하면 그만이였다. 여기에 교장과 교무주임에 대한 세배도 포함시켜야 했다.

송금주는 정애경이 있을 때 그랬던것처럼 화대천에 있는 빙상장에 가서 스케트를 타고 몸풀이를 하는것으로 1월 1일의 하루일과를 시작하려고 결심하였다. 은반우에서 설경을 배경으로 스케트운동을 하면 심신이 상쾌해지고 온갖 잡념이 다 사라진다.

송금주는 어제 벌써 체육기재창고에서 스케트를 꺼내다가 학교직일실에 간수하였다. 그는 솜옷을 걸치지 않고 가벼운 운동복차림으로 합숙을 나섰다.

설날치고는 비교적 잠풍하고 아늑한 날씨였다. 지난해나 그 전해, 그전전해와 같은 풍만한 설경은 없었다.

학교운동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디선가 《선생님!》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총알같이 날아왔다. 철금을 튕기는것 같은 김동주의 쟁쟁한 목소리였다. 송금주는 교문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소리나는쪽으로 돌아서서 손에 꾸레미 같은것을 들고 공설운동장쪽에서부터 속보로 걸어오는 김동주와 고철룡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이였다.

《선생님, 새해를 축하합니다!》

김동주와 고철룡이 합창시라도 읊듯이 입을 모아 인사했다.

《고마와요. 새해에도 공부를 잘해서 꼭 최우등을 하세요!》

송금주는 두 제자의 모습을 대견스럽게 굽어보면서 그들에게 부모들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김동주는 손에 들고온 꾸레미를 송금주앞으로 내밀었다.

《선생님, 저하구 철룡이가 구해들인 책입니다. 우리 마을 도서실재산으로 받아주십시오.》

《이거 내가 대단한 횡재를 하는데요. 설날아침부터 이런 금덩어리가 굴러들어오는걸 보니 올해에는 부자가 될것 같구만. 무슨 책들인지 어디 보자요.》

송금주는 포장지를 헤치려고 헝겊오라기로 된 끈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그러자 김동주가 옆으로 밀려난 헝겊오라기를 제자리로 밀어놓으며 황급히 만류하였다.

《선생님, 있다가 합숙에 돌아가 풀어보십시오.》

그가 한사코 포장을 터치지 못하게 하는것을 보면 무슨 쪼간이 있는것 같았다. 아니면 책들이 초라하다고 그러는지도 몰랐다. 두해째 음식꾸레미를 들고 세배를 오던 그들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책꾸레미를 들고 담임교원을 찾아왔다. 그들이 가치관에서 비록 미미하기는 하나 어떤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이, 귀중한 탄부의 자식들이 정신적으로 몰라보게 성장해가고있다. 정신만이 아니다. 육체도 달라졌다. 3년사이에 두 소년 다 키가 콩나물처럼 쑥 뽑히였다. 고철룡보다 손가락 한개두께만큼 작던 김동주의 키가 그와 어슷비슷해졌다. 말총같이 뻗두룩하게 일어서던 머리카락들도 이제는 뒤로 단정하게 넘어갔다. 손가락마디들도 굵어지고 어깨도 넓어졌다. 눈매는 또 어떤가. 수집음을 잘 드러내던 눈빛이 자신만만하면서도 서늘해졌다. 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의젓하게 변모되였다. 아이가 아니라 청년1기라고 할가. 어느모로 보든지 제법 총각티가 난다.

고철룡은 코밑에 감실감실한 수염터 같은것이 생기였다. 1학년, 2학년때보다 울대뼈가 더 도드라지고 관골이 감때사납게 불거져나왔다.

야장간의 모루처럼 탄탄하고 다부진 몸매는 레스링선수나 권투선수를 방불케 한다.

하여튼 고맙다! 설마다 잊지 않고 찾아와 인사를 하니 교원된 긍지로 가슴이 부풀고 힘이 용솟음친다. 이제 일곱달만 지나면 그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로 가거나 생산현장에 진출하게 된다. 한두해가 지나면 군복을 입고 조국의 방선을 지키는 초소로 떠나가는 제자들도 있을것이다.

그때면 정애경과의 작별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또 다른 작별의 감정이 송금주의 얼굴에서 함박같은 미소를 자아내기도 하고 강철이라도 녹일수 있는 뜨거운 눈물을 짜내여 얼굴에 구슬꿰미같은 수정방울들을 매달아놓기도 할것이다. 정애경과의 작별에서 받은 충격은 송금주에게 그 어떤 심리적타격이나 아픔에도 견딜수 있는 면역을 선물하였다. 생활은 그에게 그 어떤 상실도 이겨낼수 있는 강자의 심장을 주었다.

오직 생활만이, 우정을 위해 흘리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눈물마저 웃음속에 깊이 묻어두고 사업을 위해 아낌없이 몸을 내던진 주동적이고 창조적인 활동만이 그의 어깨에서 고뇌라는 무거운 짐을 벗겨주었다.

《동주, 철룡이, 우리 합숙에 가서 내가 만든 송편을 좀 먹어보지 않을래요?》

송금주는 손에 책꾸레미를 든채 두 소년을 떠밀었다. 해마다 합숙까지 찾아와 설인사는 하면서도 방에는 한번도 들어가지 않은 그들이였다. 송금주나 정애경이 방으로 들어가자고 잡아끌면 두 소년은 무엇때문인지 그 청을 매번 사양하였다. 오늘은 어떻게 하나 그들을 합숙에 끌고가 송편 한개라도 먹이고싶은 심정이였다.

김동주와 고철룡은 약속이라도 한것처럼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됐습니다. 선생님, 우린 또 가봐야 할데가 있습니다. 전차갱 갱장아저씨한테도 가야 하고 탄광 제재소책임자한테도 가서 세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책 300권을 선물한 정문호아저씨도 만나야지요. 지금 군려관앞에서 장수랑 기석이랑 우리를 기다리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알겠어요. 정말 좋은 생각을 했군요. 어쩜…》

송금주는 목이 메여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울대밑으로 삼켜버리였다.

《결국은 동주네가 이 선생이 해야 할 인사까지 대신하는군요. 학생들은 정말…》

좀전보다 더 세찬 격류가 또다시 울대밑으로 뜨거운것을 밀어올리였다. 그러나 송금주는 그 격류와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럼 어서들 가봐요.》하고는 돌따서서 교사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저 마음! 저 의리! 바로 저것이다. 총점 8위의 자리에서 뭉기적거리면서도 그 부끄러움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꾸준히 바라고바라던 목표! 저것이면 난 더 바랄게 없다. 바로 저런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국가가 억대의 자금을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학교와 가정과 사회를 포괄하는 3위1체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후대들에게 자기의 즙을 무한정 먹여주고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동주야, 철룡아, 내말 좀 들어봐. 너희들은 다들 조숙종들이야. 어느새 그렇게 철들이 들었니. 내가 제일 보고팠던게 너희들의 그 마음씨이고 성품이였어.

우리 수령님께서 제일 바라시는게 바로 그거야. 그건 너희들이 장차 훌륭한 인간으로 될수 있는 밑천이야. 그걸 알아야 해. 책도 좋은 기념품이지만 그 마음, 그 성품이야말로 너희들이 선생에게 줄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기념품으로 된다는걸 너희들은 모를테지. 아, 정말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구나.

직일실에 들어서자 지난해에 라남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에 온 총각교원 최팔룡이 다짜고짜로 봉투편지 한장을 내민다. 그리고는 무엇때문인지 송금주를 힐끗 치떠보며 까닭모를 웃음을 입귀에 흘린다.

당신들이 어떤 짝패였는가 하는걸 난 다 알아요 하는 의미의 웃음일것이다. 그것은 정애경과 강석민이 련명으로 보낸 신년축하편지였다.

련인의 편지라도 받은듯이 가슴을 울렁거리며 봉투를 뜯었다. 약간 곰보가 질사한 종이의 절반 조금남짓한 면적에 문법의 규칙대로 별행까지 해가며 또박또박 박아쓴 정애경의 활달하면서도 귀염상스러운 필체를 보는 순간 눈뿌리가 대뜸 확 달아올랐다.


송금주에게

금주, 새해를 축하한다.

나의 둘도 없는 벗, 사랑하는 동갑친구야. 우리는 어느새 25살이 되였구나. 요즈음은 어떤 인생의 악보를 그리고있는지. 물론 모든 악보가 다 명곡일테지. 꿈에도 너를 보며 지난날의 우정을 추억한다. 그 추억은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차있고 그 보물들에서는 아름다운 선률들이 끝없이 흐르는구나. 난 너와 나사이에 영원한 우정의 노래가 흐르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부디 복많이 받기를.

너의 충실한 벗 정애경


송금주선생!

멀리서 영천땅을 향해 뜨거운 설인사를 보냅니다.

우리는 짬만 있으면 금주선생이야기를 한답니다. 두 녀성이 엮어온 우정의 잎사귀들은 앞으로도 계속 푸른 색갈을 간직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그 우정의 잎사귀들이 락엽으로 되는 일이 없도록 이 강석민은 기꺼이 거름으로 될것입니다. 우리들사이에 딸이 태여나면 두 녀인의 이름에서 첫글자를 따 그 애의 이름은 강금애로, 아들이 태여나면 마지막글자를 한자씩 따서 강주경으로 되리라는걸 미리 알려드리는바입니다.


처음에는 뜻을 음미해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그러나 두번째부터는 매 문구들을 눈에 심지를 달고 샅샅이 새겨보면서 그 문구들사이의 여백에서 고동치는 두사람의 맥박까지도 꼼꼼히 가늠해보았다.

두사람의 심장에서 연소된 진정은 송금주를 감동시키였다. 그의 눈망울과 입가에서는 미소가 서서히 피여올랐다.

속지를 집어 봉투안에 넣고 김동주네가 두고간 책꾸레미를 끌어당겨 포장지를 짼 다음 그속에 그것을 밀어넣었다. 구석에 놓여있던 스케트를 들고 직일실을 나서면서 사흘전에 자기가 강석민과 정애경에게 보낸 신년축하편지의 글줄들을 되새겨보았다.


정애경에게

동천에서 아침해가 웃어주면 이 송언니가 보내는 설인사인줄 알거라. 네가 새 고장에서 참다운 인생의 악보를 그려갈 때 멀리 영천땅에서 대위선률을 그려가는 충실한 벗이 있다는걸 잊지 말아다오.

금주


강석민동지!

새해를 축하합니다.

수도 평양에 보금자리를 펴게 된 행운을 지닌 우리의 특명전권대사를 뜨겁게 사랑해주십시오.

송금주


정애경이네 부부가 내 편지를 받아보았을가, 설명절이 오면 중앙우편국이 축하엽서사태에 파묻힌다는데, 지금쯤은 애경이도 영천의 외기러기를 생각하고있을지 모른다, 지난해 이맘때도 나와 애경인 스케트를 타며 너덜거렸지. 아, 우정이여, 우정이여, 사랑이라는 폭군앞에서 공손하게 길을 내주지 않으면 안될 운명을 지닌 우정이여.

송금주는 시적인 명상에 잠겨 동뚝너머에 있는 빙상장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빙상장이다. 정애경과 함께 손을 잡고 입장식을 한다고 하면서 숫눈우에 4간 5선을 그리던 그날의 정경이 눈앞에 되살아왔다. 그때보다는 빙상장의 너비와 길이가 한배반정도 더 커졌다. 가을에 주로둘레의 뚝을 넓히고 물을 많이 잡아두었다가 얼쿤 덕이였다.

여기서 그와 함께 즉흥곡도 지었댔지. 이젠 그게 다 까마득한 옛일처럼 되였구나, 세상일이란 참.

스케트를 신고 간단한 몸풀이동작을 한 다음 가슴에 두팔을 엇걸어 붙이고 청얼음이 깔린 주로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아직은 속도를 내고픈 흥취가 나지 않았다. 머리에 무겁게 매달려 흔들거리는 잡념이 질주를 방해하고 은반의 정서를 앗아갔다. 교사지붕너머에서 아침해살의 한가닥이 문득 빙상장에 비쳐와 송금주의 눈섭끝에 매달렸다가 그의 곤색운동복저고리와 바지를 거쳐 은반우에 미끄러져내리였다. 순간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주로에는 불길이 확 번지였다. 그 불길은 송금주의 가슴에 그대로 옮겨왔다. 온몸을 화끈하게 하는 환희가 혈관속을 줄달음치며 그를 힘껏 앞으로 떠밀어주었다.

송금주는 팔을 량옆으로 기운차게 흔들면서 고속으로 은반우를 달리기 시작했다. 얼음에 스케트날이 가볍게 미끄러지는 상쾌한 감촉이 구두를 거쳐 무릎마디에까지 미쳐오고 얼굴에 와 부딪치는 기류가 귀바퀴우로 빠지면서 휙휙하는 회오리가 귀전에 일어났다.

한바퀴, 두바퀴 또 한바퀴… 걷잡을수 없는 희열과 랑만을 안고 눈뿌리가 시글도록 주로우를 계속 돌았다. 스케트를 타고 지구둘레를 도는것 같은 미친듯 한 쾌감으로 하여 온몸이 마치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우주의 종심깊이에로 내던져지는것 같은 짜릿짜릿한 환각이 일었다. 힘은 힘을 낳고 속도는 또 새로운 속도를 낳았다.

동뚝우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한데요!》

박수를 친 사람의 입에서 튀여나온 탄성이였다. 보위색솜옷을 입은 사람이 동뚝우에 서서 빙상장을 굽어보며 웃음을 짓고있었다. 송금주는 출발선에 이르러 360도급회전으로 스케트를 멈춰세우고 눈에 손채양을 붙이며 그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게도 몰라보겠소?》

보위색솜옷을 입은 사람이 동뚝우에 그냥 서서 씨물씨물 웃으며 말했다. 그때에야 송금주는 목소리의 임자를 알아보았다. 우리 마을 도서실을 꾸릴 때 엄호철과 함께 그를 도와주던 전차갱 탄부 최창화였다.

《창화동지!》

송금주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스케트를 신은채 빙상장동뚝을 넘어 최창화가 서있는 제방쪽을 향해 막무가내로 뛰여갔다. 눈무지건 돌밭이건 가리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다. 순간을 놓치면 기차에 오르지 못하고 락오자가 되고말 위기일발의 국면에 처한 사람처럼 리성을 잃고 한점의 목표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였다. 무슨 충동이 송금주를 그처럼 맹목적인 행동에로 떠밀었는지 그것은 그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진하면서도 격렬한 감정의 폭발이였다.

《아, 덤비지 말고… 천천히… 천천히…》

하지만 송금주는 장석으로 덮인 제방의 경사면을 미끄러지면서도 넘어지면서도 그냥 톺아올랐다. 칼날처럼 모가 진 굳은 눈에 손바닥살이 째지는것도 모르고 제방뚝에 올라서서는 최창화의 손을 덥석 그러잡고 원무라도 추듯이 탄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갔다.

《참 오래간만이군요.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오긴, 금주선생을 찾아왔지. 우선 새해를 축하하오!》

《엄호철동지랑 만삼아저씨랑 다들 무고하신가요?!》

《다들 건강하오. 정애경선생이 떠나간 다음 몹시 울적해한다는 소식을 들었소. 오죽하면 설날 아침에 빙상장에 나와 스케트를 타겠소.》

《그거야 해마다 반복되는 설날일과인걸요. 찾아와주어 고맙습니다.》

송금주는 최창화의 손을 놓고 정겨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철색이 도는 탄부의 리지적인 눈가에서는 만시름을 다 잊은듯 한 청순하고 인자한 미소가 넘실거리고있었다.

옹근 한달을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마을 도서실을 위해 시간을 아낌없이 바친 성실한 청년이였다.

《금주선생이 삼송에서 밀려나오는 대패밥을 보면서 아깝다고 말하던 생각이 나오?》

《나지 않구요.》

《내가 보자기에 대패밥을 싸가지고 가던것두?》

《물론이지요.》

《그 대패밥이 뭘로 변했는지 한번 좀 구경해보오.》

최창화는 손에 들고있던 보자기를 동뚝우에 내려놓고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붉은색과 보라색, 노란색으로 곱게 채색된 이름모를 꽃나무가 호함지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록색명주천을 빳빳이 감아 실물처럼 보이는 다섯개의 가지들에는 다리야 비슷하면서도 다리야는 아닌 화려한 꽃송이들이 매달려있었다.

《대패밥으로 만든 꽃나무가 옳긴 옳은가요?》

송금주는 손가락으로 빨간 꽃송이 하나를 조심스레 매만지며 물었다.

《왜? 믿어지지 않소?》

《너무 신묘해서 그래요. 솜씨가 기막힌데요.》

《금주선생에게 이 꽃을 기념으로 드리겠소. 자, 받으시오.》

최창화는 보자기에 꽃나무를 정히 싸서 송금주앞으로 내밀었다. 꽃나무가 아니라 커다란 불덩어리가 쿵- 하고 가슴에 와닿는것 같았다.

송금주는 두팔로 보자기를 그러안자 눈을 슴뻑거리며 입안의 소리로 중얼거리였다.

《창화동지, 고맙습니다. 전 아직 이보다 더 고운 꽃을 보지 못했습니다.》

《더 고운 꽃이 왜 없겠소. 그 꽃은 금주선생이 만든 꽃이요. 이것 보.》

최창화는 허리를 구부리고 송금주의 스케트날에 찍혀 눈우에 꽃잎같은 모양을 그린 가락지모양의 흔적을 가리켜보이였다. 톱날같은 무늬들이 치차모양으로 촘촘히 찍혀져 완결된 도형을 그린 그 흔적은 말그대로 생명을 가진 하나의 생신한 꽃잎을 련상시키였다.

《이보다 더 훌륭한 꽃이 어디 있겠소. 금주선생은 오늘 나에게 참으로 값비싼 꽃을 주었소. 자, 그럼 난 가보겠소.》

최창화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덕탄광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모습은 제방뚝너머로 점점 멀어져갔지만 송금주의 귀에는 그 발자국소리가 자기한테로 가까이 육박해오는것 같았다.

합숙방에 돌아와 최창화가 기념으로 주고간 꽃나무를 사기꽃병에 꽃아 책상 한쪽에 놓아두었다. 정애경을 대신하여 생명을 가진 합법적인 거주자처럼 이 합숙방에 느닷없이 나타난 대패밥꽃나무! 이 꽃나무우에 피여난 수십개의 꽃잎들은 방실방실 웃으면서 몇달동안의 기나긴 고독을 맛보며 쓸쓸하게 지낸 송금주에게 무슨 사연인가를 줄곧 정열적으로 속삭여주는것 같기도 하였고 보통꽃나무들에서는 한번도 맡아볼수 없었던 독특한 향기마저 내뿜으며 그를 즐겁게 해주려고 무진 애를 쓰는것 같기도 하였다.

송금주는 최창화를 너무 허술하게 바래준것 같은 자책속에서 몇번이고 자기의 거치른 처신을 두고 후회하며 몇분동안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동주네가 가져다준 책꾸레미속에서 포장끈을 풀고 포장지밑으로 보이는 백지장을 집어들고 거기에 적힌 김동주의 전보문 비슷한 글을 단숨에 읽어보았다.


담임선생님에게 부탁합니다

지금 우리 학급에서는 선생님이 정애경선생을 따라 인차 평양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는 소문이 나돌고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는 절대로 영천땅을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빕니다.

김동주, 고철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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