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 4 장
3
근거지의 산야에는 바야흐로 봄이 다가왔다.
얼음장밑에서 돌돌 흘러내리는 눈석임물의 소심한 속삭임소리로부터 시작한 봄은 만물중에서도 제일 느리고 둔감한듯싶은 황소의 후각까지 못 견디게 자극하였다. 달구지를 끌고가던 황소가 앞발을 뻗딛고 서서 부풀어오르며 눅눅해진 땅에 코를 박고 코김을 세차게 내불며 무슨 냄새인가를 욕심스럽게 들이키는 일이 자주 있었다.
겨우내 마른 짚이나 콩깍지만 씹어온 그 미물은 땅속에서 올리미는 길짱구나 민들레싹의 향기롭고 싱그러운 냄새에 얼이 나가 주인의 욕질과 매질을 마다하지 않고 길가의 파릿한 반점에로 목을 내뻗치는것이였다. 봄은 길을 가는 황소가 매를 제일 많이 맞는 계절인가싶다. 근거지의 농군들은 희망에 젖어 농쟁기들을 고간에서 끌어내고 처녀들은 다래끼를 안고 버덩으로, 산기슭으로 내달렸다.
그무렵
이 책에는 조선혁명군과
《유격대동작》은 왕청현내의 유격부대들뿐아니라 훈춘과 연길, 황룡일대에서 활동하는 유격부대들에도 배포되였다.
《유격대동작》은 그 내용의 진리성과 독창성으로 하여 배포되는 곳 마다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각 유격부대들에서는 그 책을 빼앗아가며 돌려읽었다. 《유격대동작》을 해설하는 강습들이 조직되였다. 지휘관들과 초급지휘성원들은 《유격대동작》의 전문을 베껴쓰고 밑줄들을 그어가며 그 내용을 학습하였다.
훈춘에서부터 왕청과 연길을 지나 화룡땅에 이르는 광활한 유격구들에 산재한 부대들에서는 《유격대동작》에서 밝혀진 준칙들에 따라 전투훈련들을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 구령치는 법과 일과표, 모든 제식행동들이 하나로 통일되여 혁명군의 새로운 면모가 갖추어졌으며 여러가지 양상의 전투들에서 적은 병력으로 강한 적을 타승할수 있는 유격전법들과 묘술들이 습득되였다.
그무렵
전광식이도 연길지방으로 떠나갔다. 그리하여 남북만진출후 여기 근거지로 들어왔던 18명의 인원들은 거의다 떠나가고
모든 유격근거지들에는
이 봄에
마촌의 새벽은 하늘을 찌르는듯 한 나팔소리와 그에 뒤따르는 기상소리들로 밝아왔다.
허리에 곤봉을 차고 배낭을 멘 아동단원들은 등산훈련에 떨쳐나서 뒤산으로 뛰여오르고 자위대원들과 청년의용군들은 체조를 하고 제식훈련을 벌리였으며 유격대원들은 들썩하게 전투훈련을 시작하였다. 온 골안이 이른아침부터 지휘관들의 구령소리와 대원들의 동작소리로 들썩들썩하였다.
가난에 쪼들리고 절망에 시달려 봄이 언제 오는지도 모르던 산촌아낙네들이 이 봄에는 일찌기 개천으로 나가 겨우내 묵은 빨래를 하며 물방치소리로 새들을 날리였다. 처녀들은 메꽃으로 머리태를 장식하고 양지쪽산기슭에서 민들레며 달래를 캐다가 어느 유격중대 꼬마전령병이 날려보내는 버들피리소리에 정신을 파는가 하면 제김에 까르르 웃으며 냅다 도망쳐가는것이였다. 진정 봄다운 봄이 왔다. 이 봄에는 모든것이 따뜻하고 아늑하고 부드러운 정을 풍기였으며 희망과 희열에 차넘치였다.
이즈음
토지분여대장과 농민호구조사부가 든 가방을 안은 리재명, 토지부의 안경쟁이서기, 측량용으로 쓰는 새끼퉁구리를 멘 김진세가
토지개혁준비위원회를 무을 때에도
일제와 그 주구인 친일지주들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땅이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것이 그 원칙이였다.
토지에 대한 분배는 농호단위로 하지 말고 로력수를 기본으로 하여 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그리하여 로력자들을 빠짐없이 료해장악할것이며 주민들에 대한 이 모든 료해자료들은 주민호구조사부를 작성하여 등록하여놓아야 하였다.
토지에 대한 조사는 몰수하여 분배할 농경지를 정확히 정하고 그 평수와 토질을 과학적으로 료해장악하는것이였다.
토지는 비옥도와 위치, 여러가지 자연조건에 따라 1등전, 2등전, 3등전으로 분류하도록 하시였다.
누구에게 1등전을 주고 누구에게 2등전을 주겠는가? 3등전을 받은 사람은 섭섭해하지 않겠는가? 토지분배는 그야말로 복잡하고 골치아픈 문제들을 수없이 제기할수 있으나 유격근거지와 혁명의 계급적진지를 강화하는데 기본을 두면서 농민들의 전반적리해관계를 깊이 고려하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1등전은 고농과 빈농,
진지하고 열정적인 론의의 결과 분배대상자와 토지의 등급이 결정되면 그것이 곧 토지분여대장에 등록되였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도처에서 생기고있었다.
유격근거지에서 토지개혁이 진행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이전에 근거지에서 나갔던 농민들과 땅이 없어 고생하던 타지방인민들이 적통치구역으로부터 유격구로 찾아들어오고있었다. 그들을 분배대상에서 제외하는가? 아니다! 살길을 찾아온 사람들이니 그들에게도 땅을 줘야 한다.
이렇게 되면 생산돌격대와 청년산업돌격대가 경작하기로 한 중간지대의 토지뿐아니라 근거지안의 농경지도 재분배하게 되니 그때까지 준비해온 토지분여안을 다시 뜯어고쳐야 하는것이였다.
봄바람에 탄
지쳐버린 리재명이와 안경쟁이가 밭머리에 앉아 다리쉼을 할 때에도
봄하늘의 연무속에 감빛으로 보이는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져있었다. 비탈밭우에 우거진 소나무숲속에서 참새들이 무슨 경사라도 난듯 야단스럽게 우짖었다. 그 자그마한 날짐승들도
안경쟁이와 김진세가 새끼줄을 늘여 평수를 재여보고 리재명은
밭을 다 돌아보신
그 밭은 흙이 더 시커멓게 보였다. 그리고 밭가운데에 배겨있는 너럭바위가장자리에서 땅김이 보일듯말듯 피여오르고있었다.
《저 밭은 몇등전입니까?》
《2등전입니다.》
리재명은
《이 밭은?…》
《역시 2등전입니다. 비탈밭들은 대체로 3등전으로 매겼는데 이렇게 비옥도가 높은 경우에는 2등전으로 정했습니다.》
《이 밭과 저 밭이 같은 2등전이란 말입니까?》
《비슷하게 생긴 비탈밭이고 비옥도도 비슷하기때문에 그렇게 판정이 됐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보십시오. 이 밭은 아직 흙속이 채 녹지 않아 꾸둑꾸둑하지만 저 밭에서는 김이 피여오르지 않습니까?》
《예?》
《저-기 저 바위옆에서 땅김이 피여오르는게 뵈지 않습니까? 이쪽은 음달인데 저쪽은 양지기때문에 해가 더 잘 들어 그렇습니다.》
옆에서 새끼줄을 사리던 김진세가
《김위원아바이, 양지밭과 음달밭에 곡식을 심으면 어느쪽에서 소출이 더 많이 납니까?》
김진세는 머리를 수굿하고 왼팔에 새끼줄을 슬슬 사리며
《몇해전에 제가 저- 큰배나무골에 들어가서 양지쪽과 음달쪽에 화전을 일구고 콩을 심어봤는데 양지쪽에서는 싹도 먼저 돋아나고 꽃도 먼저 피고 소출도 썩 많이 났습니다. 토질은 음달쪽이 더 걸었는데 소출이 너무 적어 그다음부터는 아예 양지쪽에만 화전을 일구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신
《그것 보시오! 그러니 저 밭과 이 밭을 같은 등급에 놓을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비탈밭의 등급을 매기는데서는 비옥도나 위치뿐아니라 해빛이 드는 정도를 깊이 고려하는게 중요할것 같습니다.》
토지부의 안경쟁이서기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 이거!》
김진세가
《2등전이면 어떻구 3등전이면 어떻구 제땅이 없어 피눈물나는 고생을 다해온 저희들이 그걸 타발하겠습니까!》
《농민들 심정은 그렇겠지만… 주먹구구식으로 되는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농민들에게 좋은 땅이 골고루 돌아가게 해야 됩니다. 우리가 좀 밤잠을 못 자고 좀더 수고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게 어떤 일입니까. 우리 나라 반만년력사에서 처음으로 밭갈이하는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는 일인데… 농민들을 땅의 주인, 혁명의 담당자로 일으켜세우는 큰일인데 어찌 소홀히 할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조국원정중에 저 두만강에 있는 류다섬에 들린 일이 있는데… 우리 동무들이 동섬이 라는 손바닥만 한 모래섬에 찾아들어와 낟알을 심을데가 없나 해서 눈속을 헤집어보는 농민을 봤답니다. 땅이 없어 헤매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하는 토지개혁이 근거지인민들뿐아니라 우리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줄 혁명적영향에 대하여 생각해보십시오. 때문에 빈틈없이… 티끌만 한 흠도 없이 해야 합니다.》
바람이 불어왔다. 구수한 흙냄새가 바람에 실려 비탈밭을 휩쓸었다. 훈훈한 그 바람은 저 푸른 봄하늘에 땅김을 뿌옇게 피워올리는듯 하였다.
눈석이가 시작되면서부터 불어난 소왕청하의 물은 해빛에 번쩍거리며 세차게 굽이쳐 흘러내려오다가는 징검다리우를 훌쩍훌쩍 뛰여넘는가 하면 바위들의 짬으로 쏴- 쏟아져내리며 시원한 바람을 일으켰다. 지난가을에 불을 놓아 검은 얼룩이 진 내가의 나지막한 둔덕에는 민들레, 씀바귀, 냉이싹들이 파릇파릇 돋아났다.
비탈밭에서 내려오신
《어- 시원하다!》
리재명은 신발을 벗고 물에 들어서며 열정에 넘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비탈밭에 대한 판정을 몽땅 다시… 다시 하겠습니다.》
《아, 봄! 이 봄이야 우리가 근거지에서 처음 맞는 봄이 아닙니까. 힘껏 일해봅시다!》
그 기쁨에 넘친 웃음소리에 화답하는듯 거품이 둥둥 떠가는 소왕청하의 물결도 주절주절 소리를 높이며 세차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