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제 4 장

1

방문에는 해빛이 쨍쨍하게 비쳐들어 문살그림자가 또렷하게 그려졌다. 그 방문을 등지고 문설주에 기대여 서있는 홍병일은 숨도 온기도 없는 시꺼먼 그림자처럼 보였다.

《종이는 어디다 쓰려구? 그런 고급지야 어디 있나-》

권일균은 은근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책상서랍을 뒤지였다. 그는 적위대 소대장으로 떨어진 후로 내내 자기에게 원한을 품고있던 홍병일이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종이를 빌려달라고 하는것이 화해의 암시인것 같아 친절을 다하려고 애썼다.

서랍안에 무질서하게 들어찬 종이들속에서 하얀 백지 여러장을 골라낸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홍병일을 돌아봤다.

《어디다 쓰려구 그러오? 이건 상급에 문건을 발송할 때에만 쓰려구 둬둔건데.》

홍병일의 눈이 차겁게 번뜩이였다.

《그건 묻지 마시오. 나한테도 사생활이란게 있으니까.》

《어- 그런 문제라. 그렇다면 도와야지. 암, 도와야지…》

홍병일은 종이를 받아쥐였으나 돌아가지 않고 그의 바투 깎은 머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토지는 언제 개인들에게 나누어주오?》

《토지개혁 말인가? 어, 그거야 토지개혁준비위원회에서 정하는건데… 아마 조국원정대가 돌아와야 하겠지.》

《난 그래도 리재명이랑 김진세령감이랑 같이 밀려다니길래 당당한 위치를 유지하고있는줄로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양이군?… 머리를 그렇게 깎으니 어떻소, 맑스머리때보다 시원하오?》

권일균은 그를 흡떠보다가 비위좋게 웃어보였다.

《그래 보기가 어떻소? 왕청골안에 젊은 투사들이 와글거리니 나두 좀 젊어지자는게요.》

홍병일은 문을 탕 닫고 나가버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권일균은 문쪽을 쏘아보며 미욱한 곰처럼 버티고 서서 숨을 거칠게 씨근거렸다.

(저자가 나를 도대체 뭘로 아는겐가?)

그는 요사이 심각한 좌절감을 체험하고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 부대를 이끌고 국경지대에로 나간 다음 근거지에는 박훈과 얼마간의 유격대원들을 내놓고는 모두 이전부터 왕청에 있던 사람들만 남아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가 이전에 자기의 손탁밑에서 놀던 사람들뿐이였다.

그런데도 모든것이 자기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느날 그는 리재명이더러 유격대식당에 감자 몇섬을 가져다주라고 말했다.

리재명은 즉각 집행하지 않았다. 그는 림성실, 김진세로인 등과 의논하는것 같더니 유격대에 가서 장룡산에게 식량사정을 확인해본 다음에야 감자섬을 날라갔다. 이렇게 된 사연을 보고하는 최형준이도 응당한 일처럼 여기는 얼굴이였다.

권일균은 이쯤한 일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질 위인은 아니였으나 리재명의 그런 소행이 괘씸했다.

리재명이 제일 미워났다. 이전에는 자기앞에서 찍소리 못하였으며 김중권의 부추김을 받아 반발하여나섰을 때에도 자기가 몇마디 하니 얼굴이 지지벌개지며 주눅이 들던 그였다. 그런데 요새는 토지개혁을 한다고 기승을 부리며 온 왕청골안을 돌아다닌다. 가는곳마다에서 호방한 소리를 탕탕 줴치면서 농민들을 들썩하게 웃겨놓는가 하면 쏘베트회장으로서 일을 쓰게 못한 자기를 타매해달라고 너스레를 피운다고 한다.

제 혼자 다니면서 그러는건 그렇다치고 소똥냄새가 풍기는 김진세령감을 달고 다니면서 토지등급을 매긴다고 법석을 떠는데는 정말 꼴불견이다.

얼마전 권일균은 길바닥에서 그를 만나 비꼬인 소리를 한마디 던졌다.

《여보, 재명동무! 하, 이건 온통 당신 세상인것 같소!》

《예, 정말 그런것 같습니다!》 이렇게 그는 반죽이 좋게 대답하고는 껄껄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를 생각하니 가슴에서 불이 황황 타오른다.

(중산층출신으로서 붓대만 놀려오던 네가 농군들을 생각해서… 진정 그들에게 경작지를 나눠주는 일이 그리도 제일처럼 기뻐서 열을 내며 돌아치는가?)

권일균은 좋건싫건 대세의 흐름에 맞추지 않으면 살수 없었다. 그는 우선 길다란 머리부터 깎아버리고 수염도 밀어버렸다. 그는 토지개혁준비와 근거지인민들의 생활을 안착시키기 위하여 뛰여다녔다. 어디에 가나 이제 땅을 나누어준다는 소문이 퍼져 농민들은 어깨춤을 들썩거리며 자기들이 해야 할 일들을 찾아서 번개같이 해치우는것이였다. 이전처럼 그가 말을 달려 돌아치며 열변을 토할 일도, 기갈을 할 일도, 《반혁명》을 찾아내여 준엄한 심판을 내릴 일도 없었다.

권세를 행사할 일이 없게 된 그는 농민들의 이런 자각적인 진출이 놀랍기도 하고 역겹기도 하였다. 누구도 자기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것 같았다.

이릉이릉한 불덩이같은 눈으로 문쪽을 쏘아보는 그에게는 홍병일이 적위대로 미끄러져내려갔는데도 자기보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보이는것이 이상스러워났다. 문득 그가 백지를 얻어간것이며 훈춘에서 박두남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하나의 사슬로 이어지면서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최형준이 와서 박두남이 지나가던 걸음에 친지를 찾아 들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간지 서너시간이 지나서 홍병일이 나타났었다.

박두남은 훈춘유격대 지휘관이다.

권일균은 그를 회의에서 몇번 만난 일이 있었다. 홍병일이와 화요파에 함께 가담했던자인데 훈춘현당에 있다가 어떻게 군복을 입고 유격대의 적지 않은자리에 올라앉았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화요파의 권모술수는 정말 당할수 없단말이야.… 저들이 모종의 꿍꿍이를 하는것이 아닐가?)

느닷없이 이런 의혹이 가슴에 갈마들기 시작하자 권일균은 방안에 가만히 서있을수 없어 밖으로 나갔다.

바깥날씨는 쌀쌀하였다.

홍병일이 든 동기와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 마당에서는 가라말이 안장을 얹은채로 구유에 주둥이를 박고 조짚을 서걱서걱 씹고있었다.

정지문밑의 개구멍에서 검둥이가 머리만 내밀고 이 불청객을 향하여 왈왈 하고 짖어댔다. 그것에는 아랑곳없이 궁둥이살을 푸들푸들 떨며 먹새질만 하던 말이 인기척에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말은 퀭하니 뜬 시커먼 눈으로 권일균을 돌아봤다.

권일균은 손을 뻗쳐 자갈띠를 잡고 말의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그는 말이마에서 번쩍이는 구리장식이며 울긋불긋한 안장밑깔개를 한눈에 살펴보고는 쓰겁게 웃었다.

(헝, 이건 만청기병이로군!)

권일균이 방에 들어서니 이마에 상처자국이 험상스러운 박두남이 말채찍손잡이로 턱을 고인채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방안에는 향긋하고 시큼한 냄새가 떠돌았다. 권일균은 홍병일의 손끝에 묻은 시꺼먼 먹물을 본 다음에야 방안에 떠도는것이 참먹냄새임을 알았다. 홍병일은 무슨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해쓱해져서 눈길을 벽쪽에 돌리며 손끝의 먹물을 닦고는 필갑같은것을 들고 얼른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박두남은 어디서 주어입은듯 한 낡은 밤색가죽외투의 앞섶을 헤쳐놓으며 앉음새를 편안하게 가지였다. 그의 치째진 눈에 야유와 적의의 빛이 번뜩이였다.

《안녕하오!》 하고 권일균이 먼저 인사말을 하였다.

《안녕하시오?》 하고 박두남이 메아리처럼 받아외웠다.

《허, 내가 이거 못 올데를 온게 아니요?》

《아니요, 당신을 찾아가려던 참이요!》

권일균은 어째서? 하고 들이대는듯이 그의 앞에 마주앉았다.

박두남은 그에게서 역겨운 냄새라도 풍겨오는듯 몸을 뒤로 비스듬히 젖히며 말채찍끝으로 코밑을 슬슬 쓸었다. 그의 눈에 신중한 빛이 어리였다.

《권선생, 젊어졌수다! 한때는 칼 맑스를 숭상하여 장발을 하더니 지금은 장발과 함께 그 숭배심도 줴버렸는가요? 신앙이 바뀔 때마다 머리단장을 달리하니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수다.… 나는 여태까지는 녀자들… 계집들만이 머리단장을 자꾸 바꾸는줄로 알았지요.》

권일균은 얼굴이 재빛으로 변하였으나 눈에는 재미있어하는듯 한 미소를 그리였다.

《그래서?》

《나한테 권선생같은 처세술이 있다면 며칠안팎에 천하를 휘여잡겠소. 거 그런 가금이 있지요. 게사닌가? 아니, 칠면조지. 그놈 새는 매일아침 볏을 새로운 색으로 물들이지만 비둔한 몸에 비해 날개죽지가 작아 높이 날지 못한다오. 돼지처럼 땅바닥을 게다니지요. 그래두 저- 고기맛은 달달해서 서양사람들은 카- 술을 할 때면 칠면조료리를 으뜸으로 친다는데 권선생은 염라국에 무엇으로 등록이 됐을가요?》

선뜩한 살기가 방안공기를 떨게 하였다.

권일균의 눈아래꺼풀에 경련이 스쳐지나가는것을 본것은 방안에 들어선 홍병일이뿐이였다.

《박동무, 내 분을 터치고싶은 모양인데 삼가하오. 피차간에 그게 좋을게요.》

권일균은 바지주머니에 슬며시 손을 넣었다. 그안에서 격철이 떨어지는듯 한 잘칵하는 소리가 났다. 이 찰나 홍병일이 몸을 날려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간만!》

권일균은 팔을 홱 내휘둘러 그를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몸을 와들와들 떨며 박두남을 향하여 회파람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서라! 일어서라! 여기서 나가라- 당장 떠나-》

홍병일은 그를 붙안고 완력으로 구석쪽에 밀어갔지만 분노한 권일균의 절규의 웨침만은 막을수 없었다.

《내- 내- 네놈이- 못된 독설가인줄은 알았다만… 누구앞에서- 나이로 보나 혁명년조로 보나 감히 네가-》

홍병일은 기겁을 하여 뛰여일어난 박두남을 다른쪽구석으로 밀어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러지들… 이러지들 마시오!》

그는 대각선상의 량끝에서 노려보는 두 적수의 불같은 눈길이 몸을 지지는듯 발작적으로 떨면서 그들을 번갈아 돌아봤다.

《그만… 그만… 누가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가라앉히시오! 제발…》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두남은 권일균의 면상에 대고 손가락총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이 사람에게… 홍동무 한사람에게 책임을 다 덮어씌우고 자기는 슬쩍 빠져나간 당신이 할 말이 있는가? 여기서 벌렸던 쏘베트시책치구 당신과 관련되지 않은 일이 있는가? 남을 희생시켜 그 피를 밟고 나가며 처세의 길을 닦는게 당신네 엠엘파의 수법이요?》

권일균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이제는 류혈이 불가피한것으로 되였다. 홍병일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권일균이 자중하려고 마음먹은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여보게 친구, 지금이 어디 파벌을 내휘두를 땐가? 쏘베트로선이 뒤집혀져 다같이 실업자처럼 된 처지에 조금이라도 분별이 있으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며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를 생각하게. 친구, 자중하는게 좋아!》

그는 방에서 나왔다. 봄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하여 투명하지 않고 푸르스레하게 흐린 하늘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권일균은 목단추를 끌러놓고 큰숨을 몇번 들이키고나서 가라말을 흘깃 돌아보고는 마당에서 나왔다.

그는 발이 가는대로 마을길을 걸어갔다. 가슴이 번거로왔다.

저들이 무슨 심상치 않은 수작질을 한것 같은 의심스러운 생각이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아동단학교쪽에서 수십명의 아이들이 길이 터지게 달려나오며 《야-》 하고 환성을 올렸다. 아이들은 가슴마다에 꽃다발을 안았다. 소나무가지에 종이꽃을 붙인 꽃다발이다. 아이들의 뒤에서 검정치마저고리를 입은 녀선생이 목에 두른 자주색목도리를 바람결에 날리며 달려오고있었다. 박현숙이였다.

《조직책동지! 모르세요? 유격대가 돌아와요! 장군님께서 돌아오셔요!》

박현숙은 발기우리하게 상기된 얼굴에 웃음을 활짝 피우며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 녀자의 곱게 뜬 눈이 유난히 시원하다. 그 눈은 사람의 가슴에 살뜰한 정을 가득 안겨주는듯싶으면서도 정의롭고 순결하고 오돌찬 그 무엇이 동자의 깊은 곳에서 발랄하게 빛발쳐나오는듯 하여 그지없이 인상적이다.

새별눈… 그사이 아동단학교선생인 그를 사람들은 이렇게 부르게 되였다.

《같이 가자요! 모두 마중을 나가요!》

박현숙은 기쁨에 겨워 처녀애처럼 동동 뛰여오르는것 같다.

《아- 나두 알고있소… 가지… 먼저 가오.》 하고 권일균은 얼버무렸다.

그는 환희의 선풍이 휘몰아쳐 지나간 길바닥에 홀로 서있었다.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서 떠들썩하게 달려가는 박현숙의 뒤모습을 바라보는 권일균은 가던 길을 내처 가지도, 그들을 따라 달려가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저렇듯 웃음꽃에 휩싸여 달려가는 생동한 삶을 보노라니 시기심같은 감정이 끓어올라 사고력이며 운동기능에 마비가 왔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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