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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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산회의후
3월하순 두만강연안에서는 마지막추위가 기승을 부리고있었다.
살을 에이는 칼바람을 맞받아나가는 대원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어른거렸다. 나무가지들에서 아츠러운 휘파람소리가 울부짖었다.
부대는 두만강복판에 있는 동섬을 거쳐 류다섬으로 들어갔다.
류다섬에는 예로부터 버드나무들이 많이 자랐다. 섬의 이름도 거기서 온것이였다.
섬기슭에 소소리 높이 솟은 버드나무들우에 까치둥지들이 많은것이 첫눈에 띄였다. 바람에 웅-웅- 소리를 내며 휘청거리는 가지들우에서는 까치들이 야단스럽게 우짖으며 날아다녔다.
버드나무들의 사이로 오붓한 마을의 지붕들이 바라보였다.
강기슭의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던 아이들이 우두커니 서서 섬으로 다가오는 대오를 바라보았다. 두 아이가 섬기슭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여오르는 모닥불을 발로 마구 밟아서 껐다. 재빛연기가 물씬 피여오르며 두 아이를 삼켜버렸다. 그중 커보이는 한 아이가 토끼털귀덮개를 바로잡아놓으며 대오를 향하여 조심조심 다가왔다.
그녀석은 눈이 불찌처럼 되여 빤히 보기만 하다가 굽석 하고 절을 하고는 홱 돌아서 냅다뛰여갔다. 그러자 썰매터의 아이들은 토끼떼처럼 앞을 다투며 섬기슭으로 뛰여올라갔다. 아이들은 마을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이윽고 마을어귀에 들어선 대오는 너무도 놀랍고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여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사이에 몇몇 사람들은 지붕에 올라서서 만세를 불렀던것이다.
남정들과 녀인들, 조무래기들은 퇴마루나 마당에 나와서서 집우에서 남정들이 부르는 만세소리에 맞춰 팔을 올리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유격대원들도 격정을 못이겨 지붕의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박수를 치기도 하고 웃어대기도 하고 목청껏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이 감격과 환희의 선풍속에서
《빨리 내려오게 하오. 상하면 어찌오. 저것보오, 지붕에 아직 눈이 있는데, 허허…》
이때 키가 훤칠하고 백발이 성성한 로인이 두루마기자락을 펄럭이며 의젓하게 걸어왔다.
로인은
《로인님!》
《어떻게 지붕에 올랐습니까?》
만세야 세상이 다 듣도록 높은데서 불러야 하는건데 이 섬에야 산이 없다나니 어디 올라갈데라구 있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이제는 그만들하고 내려오게 하십시오!》
그러자 로인은 지붕의 사람들에게 내려오라고 손을 저으며 껄껄 웃었다.
유격대원들은 로인의 안내로 마을의 여러 집들에 갈라져 들었다.
한설봉의 집은 추녀가 낮은 두칸짜리 초가였다. 방은 해볕이 잘 들어 환하고 따뜻하였다.
로인은 웃방아래목에 돗자리를 펴놓고
그는 서당에서 천자를 뗀 정도의 학식밖에 없으나 천성이 호방하고 세상물정에 밝아 3. 1만세때에는 경원읍에까지 나가 만세를 부르다가 상투를 잘리우고 콩밥을 먹은 일도 있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억척같은 그는 예순살이 되여서도 펄펄 날아다녀 독립운동자들의 짐을 지고 만주와 로령땅 안 돌아다닌데가 없었다. 독립군들이 망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솔가해서 두만강의 이 류다섬으로 들어와 왜놈들의 눈을 피하여 숨어살았다.
류다섬에는 집이 몇채 되지 않지만 모두 성씨가 다른 집들이였다. 대개가 살길을 찾아 북간도로 들어가다가 여기에 주저앉은 사람들이라는것이다. 고향을 등지고 떠난 걸음들이였으나 조국을 영 떠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발이 땅에 얼어붙어 차마 두만강을 건늘수 없었다는것이다.
마을에는 지주도 부농도 없었다. 모두 가난한 빈농민들이였다.
이 섬은 이때까지 경원군에 속한다고 하였지만 다른데처럼 왜놈의 학정이 심하게 미치지 못하고있었다. 섬마을에는 씨족공동체 비슷한 사회륜리가 작용하고있어 나이가 좌상인 한설봉이 일체 대소사를 주관하고있었다.
그는 가풍도 엄하게 세우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손자가 셋이라고 하지만 어느 아이 하나 웃방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고 며느리도 있는지 없는지 기척을 가늠할수 없다. 그저 로인이 물을 들여오라고 소리치면 사이문이 방싯 열리며 물대접만 들이밀뿐이고 그 틈에 초롱초롱한 눈들이 호기심이 가득차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설봉은 막내아들을 저주하고있었다.
《천하 후레자식입니다. 농사짓기 싫다고 돈벌이를 떠난 녀석이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저 고인탄광에 있으면서두 이태째 집에는 발길도 돌리지 않지요. 돈 한푼 보내주나, 제 새끼들만 잔뜩 이 늙은것의 무릎에 앉혀놓고는 저는 나가 무슨짓에 빠져있는지, 허- 저는 자식의 뉘를 보며 살 팔자가 못되는가봅니다.》
이때 주변정찰에 나갔던 박태화소대장이 최춘국이와 함께 방에 들어와 로인과의 이야기는 중단되였다.
얼굴이 벌겋게 언 박태화가 방안에 찬기운을 풍기며 정찰정형을 보고하였다.
그는 섬주변에서 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데 동섬에서 웬
그 말을 듣자 한설봉이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였다.
《에이구- 기막혀서… 또 그잘난 땅을 찾아왔댔군. 씨붙임이 되겠는가 해서 저 동섬에 그렇게 찾아왔다가 돌아간이가 한둘이게요. 씨붙임이 다 뭡니까, 맨 자갈밭인데. 예전에 이 섬에 사는 한 농군이 무슨 맘을 먹구 거기에 콩을 심었지요. 그해에 큰 장마가 져 섬이 물에 잠겨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그만 환장을 했던지 헤염쳐 건너갔는데 섬과 함께 물에 잠겨버려 종적없이 사라지고말았습니다. 저 섬에 맘이 끌렸다가 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요. 그래두 투전목처럼 궁한 사람들의 맘을 자꾸 홀린단 말이웨다. 땅이 없어 살길이 막히니 그 잘난 자갈섬에두 저렇게 찾아듭니다.》
《빨리 나라를 찾아야 그런 일도 없어질겝니다.》
밤중에 아래방문이 열리는것 같더니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온 집안이 들썩해지였다.
《아부지!》
《이게 웬일이냐, 공교롭게도 이런 날에 집에 기신기신 기여들다니?》
아들이 사이문을 열려는것 같았다.
로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얘!…》
《유격대동무들이 들었습니까?》
《아니다!》
《그럼?…》
《그저 그렇게 알구 아래목에 누웠다가 새벽에 떠나가거라.》
사이문이 열리며 수수한 검은색로동복차림에 름름하고 무게있게 생긴 청년이 방에 들어왔다. 그는
《고인탄광조직에서 저를 대표로 보내서 왔습니다.》
《저는 오면서도
《한대걸동무지요?》
《예!》
《온성에 나갔을 때 동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친님이 극진히 대해주어 불편이 없습니다.》
이때 한설봉이 들어와서 아들옆에 앉았다.
《이녀석이 제 아들놈입니다. 덩치만 컸지 써먹은데라고는 없습니다.》
한대걸은 머리를 수굿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집에서는 장한 아들을 두시였습니다. 나라를 찾자고 투쟁에 나선다는 일이 조만한 일입니까.》
그 말에 로인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여움이 번뜩이는 눈으로 아들의 뒤덜미를 쏘아보았다.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분격이 끓어번지나장군님앞이라 참는것 같았다.
《내
《아버지!》
한대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로인을 돌아봤다.
《조직에는 다 비밀이 있습니다.》
《비밀이라구? 너-들이 그래 비밀을 지키면서 했다는 노릇이 뭐냐? 경원읍에 나가보면 소방대것들까지 코대를 쳐들구 다니더라. 코구멍에 비물이 들어갈 지경이야! 제 백성하구 비밀비밀하면서 격을 지고 꿍꿍이를 해서야 판이 커지기는 다 글렀지.》
아무 말씀없이 앉아계시던
《아버님말씀이 옳습니다. 집에서도 알고 온 집안이 맞들어서 혁명을 하면 일이 더 잘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인민들을 멀리해서는 혁명을 못합니다. 우리 혁명은 전체 인민들이 맞들고 하는 혁명이지 몇사람의 영웅호걸이 판을 치는 잘망스러운 놀음이 아닙니다.》
아들을 윽박지르던 나머지 혁명이라는 대사에까지 삿대질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뉘우침이 들었던지 슬그머니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한대걸은 숨이 나가는듯 벌겋게 된 얼굴로 아버지가 사라진 사이문쪽을 돌아보고나서 어줍게 웃어보였다.
《에-에- 손아귀가 세놔서…》
《얼마나 좋은 아버지요!》
(얼마나 좋은 인민인가!)
새벽녘이 되여서야 경원일대의 정치공작원들과 지하조직대표들이 다 모였다.
회의는 계속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