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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 회


제 5 장

1

금요일 오후에 송금주는 퇴원수속을 끝내고 병원문을 나섰다. 치료를 더 하지 않으면 병이 악화될수 있다는 담당의사의 엄포를 무시하고 강짜로 성사시킨 퇴원이여서 그런지 심신이 사뭇 거뜬하고 상쾌했다.

대지는 온통 눈부신 백광으로 가득 차넘치였다. 소독수냄새대신 신록으로 푸릿푸릿해지는 대지의 싱그러우면서도 순수한 냄새가 페장깊이 스며드는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리였다.

침상에서의 10일이 마치 1년이나 10년처럼 지겹게 느껴지던 따분한 생활이 이제는 벌써 과거의 일로 되여버리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10일동안에 있었던 일들이 고속으로 흘러가는 영화화면처럼 정겹게 떠올랐다. 그 추억속에 떠오르는 의사, 간호원들과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인간들이였다.

홀가운 기분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무심결에 얼핏 뒤를 돌아보니 담당의사와 간호원은 그때까지도 현관문앞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고있었다.

한주일에 한번씩 환자들이 퇴원할 때면 주기적으로 보게 되는 정경이였다.

두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뜨거운것이 울대뼈밑으로 치밀어오르며 불시에 눈굽이 쿡 쑤셔났다. 그 례사로운 정경이 왜 이다지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지 알수 없었다.

네거리 가까이에까지 갔을 때 등뒤에서 《선생님!》하는 귀에 익은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군병원에서 열관리공으로 일하는 최경운이라는 문학신인이였다. 《청년문학》잡지에 이미 2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얼마전에는 의사, 간호원들의 생활을 담은 단편소설의 초고를 써가지고와서 송금주의 조언을 받았다.

《선생님, 선생님이 주신 의견대로 수정했습니다.》

최경운은 송금주앞에 두툼한 16절지묶음을 내밀었다.

《한번 더 봐주십시오.》

학력을 놓고보면 송금주네보다 두학년 더 높은 선배였지만 그는 깍듯이 《넵》을 썼다.

《정열이 여간 아니군요. 한번 더 보지요.》

송금주는 청년의 충혈진 눈을 얼핏 스쳐보고나서 며칠동안 또 밤샘을 한 모양이구나 하는 짐작을 하였다. 최경운은 《선생님, 몸을 잘 돌보십시오.》하는 인사를 남기기 바쁘게 오던 길로 총총히 되돌아갔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모두가 심장을 만부하로 돌리고있다. 누가 심장을 발동기라고 했던가. 수백만 발동기들의 마력에 떠밀려 60년대의 한복판을 질풍같이 달려가는것이 조선의 천리마이다.

오전수업을 마친 중학생들이 학급별로 렬을 지어 가창행진을 하는 광경이 멀리서 바라보이였다. 영천중학교에서는 주에 한번씩 가창행진을 하는것이 정례화되였다.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듣는 순간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가슴을 후두두하게 하는 강렬한 흥분이 전류처럼 온몸에 번져갔다.

송금주는 자기가 침상에 묶여있는 사이 생활은 멀리 앞으로 전진하고 자기는 생활이라는 그 렬차에서 까마득하게 떨어져 미궁속에서 뭉기적 거리는것 같은감을 느끼며 그런 손실을 한시바삐 봉창이라도 하려는듯이 네거리쪽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읍중심부의 간선도로를 따라 역사방향으로 멀어져가는 가창행렬의 후위가 렬차꼬리처럼 눈에 밟혀왔다.

방문객들의 덕으로 바깥소식을 대충 듣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송금주에게는 궁금한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제일 궁금한것은 학급소식이다. 리철순선생이 림시담임을 한다니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벌차다고 소문난 학생들이여서 마음 한구석에 걱정이 없지 않았다. 수업규률이 문란해서 교원들의 말밥에는 오르지 않는지, 모자걸개는 교체했는지, 이번달 벽보편집은 계획대로 해놓았는지.

우리 마을 도서실이 정상적으로 문을 연다니 어린 사서들이 대견스럽다. 홍옥숙인 련주창으로 고생한다더니 수술을 했을가, 수술을 안하고 검은 고약으로 고름을 뽑으면 좋을텐데. 한창 맵시를 보는 처녀애의 목덜미에 허물자리를 내면 그것도 야단이 아닌가. 독자들이 대출해간 책들을 제때에 바치는지. 해진 표지들은 말짱 뜯어내고 새 표지를 붙이라고 한건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니였을가.

끝없이 넌출을 치는 상념에 떠밀려서인지 걸음발에 날개가 달리였다.

송금주는 네거리 게시판앞에 몰켜서있는 사람들을 보자 무작정 그앞으로 다가갔다. 미술과 문장에 조예가 깊은 군인민위원회 문화과 지도원(당시)이 직접 이 게시판의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고 한다.

오늘은 무슨 소식이 게재되였을가. 이리저리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게시판을 바라보았다.

《일곡중학교 3학년 3반 천리마학급칭호쟁취》

《1.4분기 석탄생산과제를 123%로 초과수행》

《토끼기르기의 명수 김인숙동무!》

이런 글발들이 시야에 연줄연줄 비껴들었다.

네번째 소식란을 더듬던 송금주의 눈가에서 불꽃같은것이 펑끗 피여올랐다.

《후대들을 사랑하는 마음》

교육자의 미거를 소개하는 글이겠거니 했는데 그것은 아니다. 읍협동농장에서 부대로력으로 일하는 최공수로인을 소개하는 글이다. 이 로인이 후대교양에 어떤 사연을 남기였을가. 읽어내려갈수록 충격은 커진다.

《전시하 애국미헌납의 선구자들중 한사람이며 협동조합의 조직과 그 발전에 큰 공헌을 한바 있는 최공수로인, 오늘은 후대들을 위해서도 한몫! 영천중학교 송금주선생이 운영하는 우리 마을 도서실의 야외열람실을 꾸리는데 쓰라고 왕복 30리길에 달구지를 몰아 월장석을 실어다주었다고 한다.》

최공수라면 중창조에서 고음조조장으로 있는 최영옥이네 할아버지다. 이 할아버지가 어떤 연고로 우리 마을 도서실에 나타났을가. 야외열람실이란 뭐고 또 그 열람실에 월장석은 왜 실어다주었을가. 아무리 머리를 쥐여짜보아도 그 동기며 전후사연이 어떻게 된건지 추리해낼 도리가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우리 마을 도서실에서 어떤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고있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애경은 왜 내앞에서 야외열람실이며 최공수며 월장석에 대해서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았을가. 정애경은 그렇다치고 참새들처럼 재잘대기 좋아하는 사서처녀애들은 왜 그런 사연을 입에 올리지조차 않았을가. 김동주도 고철룡도 두번이나 면회를 왔었는데 어른들한테서 얻어들은 뇌혈전에 대한 상식만 떠벌이다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러니 군인민위원회 지도원까지도 다 아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있었단 말인가.

온 천하가 짜고들어 아닌보살을 하는것이 얄미운 일이지만 어쨌든 흥미있는 일이다.

아무튼 60대에 이른 최공수로인까지도 달구지에 월장석을 싣고 우리 마을 도서실을 위해 왕복 30리길을 걸었다니 우리 도서실에 경사가 난것만은 틀림없다. 야외열람실은 어떻게 꾸리고 월장석은 어데다 어떻게 썼을가.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설계하고 강행한 주역은 누구들일가.

송금주는 이런 생각에 잠겨 게시판앞을 떠났다. 한초가 급하게 나의 합숙, 나의 도서실로 돌아가고싶은 욕망으로 가슴이 달아오르고 보폭이 커졌다. 그는 학교에 들려 교원, 학생들과 인사부터 나누려던 계획을 버리고 먼저 녀교원합숙부터 찾아 변모된 도서실의 풍경을 본 다음 입원할 때 그대로 걸치고갔던 운동복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학교에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네거리에서부터 녀교원합숙까지는 500메터안팎이다. 그 500메터를 얼마나 급하게 속보로 다우쳐왔던지 송금주의 이마에는 땀까지 송골송골 맺히였다. 합숙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아!》하는 탄성이 저도 모르게 튕겨나왔다.

회칠을 한 하얀 울타리, 뜨락에 깔린 정갈한 자갈, 난데없는 긴 의자들, 직사광을 막을수 있게 청색비닐박막을 댄 장방형의 채양, 월장석으로 된 대돌우에 놓인 천리마조각품, 어느것이나 할것없이 상상을 뛰여넘는 기발한 창조물들이였다.

저 울타리는 누가 둘렀을가? 차광막과 긴 의자들은 최창화채탄소대의 집체작인지도 모른다. 널판자와 각재들에 남아있는 대패날자리는 어딘가 낯이 익어보인다. 천리마조각품은 분명 장일남의 솜씨일것이다. 그가 아니고서는 저런 걸작품을 빚어낼수 없다.

송금주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두 긴 의자사이에 놓여있는 천리마조각품앞으로 다가갔다. 보면 볼수록 조화롭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이였다. 리신태선생한테 언질을 잡힌 전동기가 달린 마차를 볼 때에 받았던 그런 충격이 다시금 가슴을 뻐근하게 했다.

그는 합숙문을 열고 취사장에 들어섰다. 칼도마도 쌀함박도 국자도 다 제정된 자리에 놓여있다. 된장냄새인지 식초냄새인지 끓는 물에 데쳤다 꺼낸 남새냄새인지 분간할수 없는 쉬지근한 부뚜막냄새가 페부에 흘러들었다. 오래간만에 맡아보는 생활의 냄새여서 그런지 자극이 류달리 강했다.

이번에는 사이문을 열고 아래방에 들어섰다. 모든것이 다 예전그대로였다.

두 합숙생의 외출복들과 실내옷들이 걸려있는 말코지가 대뜸 서름서름한 인상을 풍긴다. 전에는 없었던 감색달린옷 두벌이 나란히 걸려있다. 정애경이 자기자신과 나를 위해 사들인 모양이다. 입직후 첫 생활비로 조선치마저고리를 한벌씩 해입은데 대한 답례인가.

송금주는 운동복을 조선치마저고리로 바꿔입었다. 오늘따라 별스레 그 옷을 입고 학교에 나타나고싶었다. 옷단장을 끝내고 거울앞에 마주서서 빗으로 머리를 빗고있을 때 우리 마을 도서실뜨락쪽에서 인기척소리가 나고 이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내가 오른쪽것을 맡을테니 당신은 왼쪽걸 맡으세요. 합격도장은 내가 찍겠어요.》

그것은 분명 리신태의 안해 임철옥의 목소리였다.

《내 걱정은 말고 당신거나 잘하오. 합격도장은 오히려 내가 찍어야 할가보오.》

리신태가 안해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빈정거리는 말이다. 서로 승벽을 부리는듯 한 입심에서도 차분한 애정이 풍긴다. 왼쪽것은 무엇이고 오른쪽것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또 합격도장이라는건 무엇이고. 오가는 말도 수수께끼처럼 알쏭달쏭하지만 대화장소자체가 수상쩍다.

하필이면 왜 도서실뜨락에 와서 왼쪽것이요 오른쪽것이요 하면서 합격도장까지 운운하는가.

송금주는 문설주너머로 상체만 내밀고 창유리를 통해 바깥동정을 살피였다. 그러다가 숨이 꺽 막히는 충격에 못이겨 장판바닥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리신태네 부부가 야외열람실 긴 의자에 뼁끼칠을 하고있는 놀라운 광경에 맞다들었던것이다. 그러고보면 리신태나 임철옥도 우리 마을 도서실의 주인으로 나타난셈이 아닌가. 목석처럼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인간이라고만 치부했던 리신태가 언제 저렇게 남을 도와주는 열의인으로 돌변하였는가. 몇달전까지만 해도 그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공명주의감투를 씌우면서 우리 마을 도서실도 가시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선과 악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지만 고정불변한것이 아니며 열정의 인간과 랭담한 인간을 구획짓는 장벽이나 절대적인 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던 김영찬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열정의 인간에게도 랭혹한 요소가 있고 랭담한 인간에게도 인자한 측면이 있을수 있다는것이 그의 지론이였다.

사람이 부정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긍정으로 접근하거나 긍정적인 인간으로 개조되는것은 매 개인의 노력에도 달려있지만 사회적교양이나 시대적풍조의 힘으로 촉진될수 있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군 했다.

그렇다면 무슨 힘이 리신태를 변모시켰는가. 잠들고있던 리성이 최대의 마력을 내기 시작한 덕일가, 아니면 시대의 열풍이 그의 넋속에서 리성을 좀먹던 불순물들을 날려보낸 결과일가.

송금주는 눈에서 뜨거운것이 흘러내리는것도 모르고 창가에 그린듯이 서있었다. 리신태한테서 모욕을 당하고 온당치 못한 비판을 받을 때조차 흘리지 않던 눈물이 이 순간에는 왜 그런지 불신과 경계의 보뚝을 넘어 걷잡을수 없게 흘러내리였다.

밖에서 또다시 리신태와 임철옥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날아왔다.

《금주선생이 이런 색갈을 좋아할가?》

리신태가 일손을 멈추고 하늘색뼁끼가 들어있는 양철통을 붓으로 두드리며 안해에게 묻는 말이였다.

《청색이면 어떻구 밤색이면 어떻다구 그래요. 그 선생이 뭐 색갈을 가지고 타발할 처년가요. 당신이 나와 함께 이 의자들에 뼁끼칠을 했다는걸 알게 되면 금주선생은 아마 당신보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자고 호소할지도 몰라요.》

《당신두 참, 평화조약이 따로 있소. 이 무상로동이야말로 훌륭한 평화조약이 아니고 뭐겠소.》

《래일쯤은 퇴원하려나. 금주선생이 없으니 교원사택마을이 텅 빈것 같아요.》

《학교도 같소. 그 선생이 없으니 큰 구멍이 평 뚫린것 같구만.》

격동된 송금주는 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그리고 뛰여나가기 바쁘게 목이 꺽 막힌 소리로 그들부부에게 인사를 하였다.

《신태선생님!… 철옥언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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