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 3 장
3
자연도 사람도 봄을 꿈꾸는 3월초였다. 대륙을 휩쓰는 눈보라의 갈기처럼 위장포를 날리며 두만강을 뛰여건너간 유격대의 무장소조들은 경원과 종성과 회령의 적기관들을 기습하였다. 국경의 밤을 뒤흔드는 총성과 폭음, 하늘을 시뻘겋게 불사르는 불기둥, 왜놈의 국경수비무력들은 모두 그쪽으로 몰려가 수색을 벌리며 왁작 끓어번졌다.
그 틈에
소나무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따라내려가니 두만강기슭에 잇닿아진 골짜기어귀에 자그마한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새벽어스름속에서 그 마을의 집들은 홍수에 밀려내려오다가 한데 몰켜서 되는대로 구겨박힌 희끗희끗한 바위돌처럼 보였다.
3월 11일 16시경
《동무들, 조국땅이요! 조국이요!》
감격의 선풍이 대오를 휩쓸었다.
《야- 조선이다-》
《여기부터 조선땅인가!》
어느덧 대원들의 눈에는 뜨거운것이 번쩍거렸다.
우중충한 산기슭의 나무숲도 그들을 반겨 솨- 솨- 부드럽게 설레였다.
대오의 선두에 서신
박달나무의 잔가지에서 작은 새 한마리가 포로록 날아올랐다. 나무가지는 회오리처럼 휘청거리고 이름모를 그 새는 파란 하늘에 높이 날아올라 은방울을 굴리는듯 한 소리를 내질렀다. 하늘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구슬알들이 줄줄이 떨어져 가슴을 야릇하게 두드리는듯 하였다.
리성림이를 비롯한 어린 대원들도 신기하고 아름다운 그 소리에 넋이 빠져 입을 하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마다에는 미소가 가득가득 담겼다. 한 대원은 벌써 어디서 주은것인지 장끼꼬리털 한개를 모자에 꽂았다.
대오는 울창한 숲에 덮인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골짜기와 그 량쪽산기슭에는 참나무, 박달나무, 물푸레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섰고 드문드문 피나무도 보였다. 락엽이 폭신폭신하게 깔린 시꺼먼 땅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기운이 뻗어오른듯 나무그루들은 굵직굵직하게 곧추 자라올랐는가 하면 힘이 꿈틀거리는 근육처럼 탈리기도 하고 우둘투둘한 매듭을 지으며 구불게 자라오르기도 하였다.
그 나무들의 잔가지들은 그루를 타고 올라온 기운을 하늘에 활짝 펼친듯 사방으로 뻗어올라 얼기설기 뒤엉켜 골짜기를 지붕처럼 덮었다.
나무가지들사이로 비쳐드는 오후의 따스한 해볕에 나무줄기들이 거뭇거뭇 젖어보이고 눈밑에서는 락엽 썩은 냄새가 풍겨올라 숲속에 진동하였다.
이역의 황막한 대륙에서와는 달리 보는것마다에서, 만져보는것마다에서 부드럽고 아늑한 그 무엇이 와락 매달리는듯 하였다. 그것은 피부로만 느껴지는것이 아니라 가슴속깊이에까지 뭉클하게 젖어들며 온 심혼을 뒤흔드는 힘차고 따뜻한 기운이였다.
까마득히 잊어버린 어머니의 젖비린내와 고향집의 흙벽냄새까지 목구멍에서 풍겨오르게 하는 이 거창한 감격은 대오의 전위에서부터 후위에 이르기까지 전대오에 굽이쳐흘렀다.
말없는 말, 소리없는 탄성이 대원들의 상기된 얼굴, 물기어린 눈, 격동에 벌려진 입에서 터져나와 골짜기에 서린 고요를 화락화락 휘저어놓는듯 했다.
이 골짜기에는 예로부터 숯구이막이 있었다. 숯구이막 즉 목탄을 구워내는 막이 있다고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탄막골이라고 불렀는데 내가의 막돌이 오랜 세월 물결에 다스러져 매끈한 조약돌로 되듯이 그 이름도 장구한 세월의 흐름속에서 준말로 다듬어져 타막골로 되였다.
문득 웃쪽에서 산토끼가 버스럭거리며 달아나는 소리가 나더니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무가지들사이로 의아해하는듯이 이쪽을 내려다보는 김중권과 박태화의 얼굴들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나무군차림에 꼴망태까지 멘 그들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여 숨을 헐떡거리였다.
《다 모였소?》
《예, 다 모였습니다. 왕재산마루에 회의터도 잡아놓았습니다.》
《수고했소!》
《원호물자는 말씀대로 타막골어귀로 날라가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올리는 김중권은 조국땅에
그는 물기가 번쩍거리는 눈으로 대원들을 둘러보며 반갑게 웃어보였다.
활기에 넘친 대오는 골짜기바닥으로부터 오른쪽산경사면에 붙어 엇비스듬히 치달아올랐다.
김중권은 앞을 가로막는 마른나무가지들을 꺾어버리는가 하면 눈이 미끄러운데서는 발로 다져
대오가 아까 지나온 골짜기가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올라 소나무와 참나무가 듬성듬성하게 선 민틋한 릉선을 옆에 끼고 서남방향으로 한동안 전진해나가니 시야가 시원히 틔였다.
이때 땅밑에서 솟아오른듯 저 앞쪽에서 여러명의 사람들이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로동복차림, 농민복차림의 청년들이다. 그들은 달려오다 말고 뚝 멈춰선다.
(저들이… 저 동무들이 그들인가! 아, 1년 남짓한 기간에 저리도 달라졌는가!)
《동무들! 왜 그러고 섰소?》
그들은 목청을 합쳐 부르짖으며
울음판이 터졌다. 얼마나 그립던
《이게 꿈이 아닙니까?》
로동복차림의 키작은 공작원은
어딘가 가까이에서 새들이 야단스럽게 우짖어대고 숲이 설레였다.
전장원이였다.
그의 보일듯말듯 이그러진 부석한 얼굴에는 참혹한 재난과 심각한 번뇌의 흔적이 어려있었다.
전장원은 안겨드는 감격을 감당하기 어려운듯 주춤 반걸음 물러섰다.
《전장원동무!》
감격이
《보고싶었소!》
《다 들었소. 동무가 겪은 일을 다 들었소.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소? 게다가 상처까지 하고…》
전장원은 머리를 떨구고 어깨를 떨며 흐느껴울었다.
×
김중권은 자기가 마련한 회의터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는
통나무로나마 연탁이 세워지지 않으면 붉은 상보가 덮인 책상이 앞에 놓이고 연사들을 위하여서는 구리주전자에 더운물도 끓여놓았으며 붉은기발이나 구호 한폭이라도 걸어놓고 회의를 하였다.
그러나 왕재산마루에 마련된 이 회의장소에는 눈에 덮인 땅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좁은 공지둘레에는 이렇다할 특징도 없는 참나무, 소나무들과 매우 설피게 자란 잡관목들이 서있으며 이끼가 덮인 두세개의 자연바위와 갓 잘라놓은 나무토막들이 누워있을뿐이다.
그러나
온성지구 지하혁명조직책임자들과 정치공작원들은
회의참가자들은 눈물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김중권과 최춘국, 박태화를 비롯한 유격대지휘관들은 지하혁명조직책임자들을 될수록
그는 자기들이 지하막장에서 지하혁명조직결성모임을 가지고 혈서로써 투쟁결의를 다지였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것을 말씀드리고 혁명적출판물이 없는것이 제일 애로라는것 등에 대하여 말하였다.
가슴에서 터져오르는 혁명적열정을 자기로서도 막을수 없는듯 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주위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도끼와 톱을 찔러넣은 나무군배낭을 메고있는 농민청년이 자기네 고장에서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하며 슬그머니 이야기에 끼여들어 자기 판을 벌려놓았다.
그는 자기네 혁명조직 로농동맹에는 철도로동자 두명과 목공로동자 한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다 다른데로 이사를 가서 큰 문제거리가 생겼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로동계급의 령도가 없는 조직은 존재할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로동자가 없으니 조직의 명칭만 《농민동맹》으로 고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두패로 갈리여 큰 론쟁이 벌어졌다는것이다.
군모를 바위우에 벗어놓으시고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계시는
《전장원동무!》 하고
《아니, 왜 그렇게 뒤에 앉았소. 여기로… 좀 앞으로 나오시오.》
누구인가 그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전장원은 움쭉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서 앞으로 나와
《장원동무, 중권동무의 보고에 의하면 동무가 얼마전에 우리 유격근거지와 련계를 맺으려고 들어왔다가 면장을 하는 사촌형때문에 욕을 봤다는데 그게 사실이요?…
지난날 일부 사람들이 쏘베트좌경로선을 휘두르는 바람에 그런 일이 다 생겼소. 지금은 시정되여가지만. 일부 사람들은 동무의 형이 면장이라고 해서 그 친척관계를 타고 적의 마수가 우리 혁명대렬속으로 뻗쳐올가봐 겁을 먹는 모양인데 그렇게 생각하는건 처음부터 지고들어가는 립장이요. 전에도 말했지만 반대로 우리가 그 친척관계를 타고 들어가서 면장을 틀어쥐면 어떻소. 그러면 왜놈들의 말단통치기구를 마비시키고 우리가 여기서 마음대로 크게 판을 벌릴수 있지 않겠소?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닙니까?》
《혁명에 나선 전동무가 면장인 형에게 먹히울것 같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형을 휘여쥘수 있을것 같습니까? 나는 면장보다도
전장원은 무릎을 움켜잡고 머리를 뚝 떨구고 앉아 눈만 슴벅이였다.
《그새 련계가 끊어져 얼마나 안타까왔겠소.》
《저는 며칠전까지도
《그랬소?》
《예, 우리 마을에 마촌에서 살다가 나온 녀자가 있는데 그 녀자 말도 그렇고 해서 계시지 않는줄로 알았습니다.》
《마촌에서 나왔다는건 어떤 녀성이요?》
《윤치석이라는 농민의 딸입니다. 남편과 의가 틀려서 나온것 같습니다.》
《가만… 그 녀성의 이름이 보금이 아니요?》
《예!》
전장원은 몹시 놀라 눈을 번쩍이며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 녀성이 여기 와서 어떻게 지내오?》
《친정에서 농사일이랑 도우면서 야학에도 좀 다녔습니다. 총기가 밝아서 아주 공부를 잘했습니다. 한때 왜놈들이 근거지를 헐뜯는 순회강연에 끌고다니려고 했는데 제가 형을 내세워 그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건 아주 잘했소. 전장원동무, 그 녀성을 앞으로도 잘 돌봐주오. 남편과 의가 틀려서 여기로 나온게 아니요, 쏘베트좌경로선을 주장한 사람들이 조혼했다고 남편을 유격대에 받아주지 않게 되자 그 녀성은 남편을 유격대에 넣자고, 남편을 혁명에 참가시키자고 시집을 떠났소. 녀자가 시집을 떠나가면 항간에 별의별 악평이 다 도는데 험한 루를 쓰면서도 남편을 위해서 그렇게 했으니 의식수준이 낮은 녀성으로서는 갸륵한 소행이 아니요? 나는 윤보금이라는 그 녀성을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지만 어쩐지 남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그 마음을 바로 돌려세워 옳게 키우면 혁명에 대한 무한한 헌신성으로 자랄것 같소. 잘 돌봐주오. 한사람을 품에 안으면 열사람, 백사람이 따라오오. 사람타발을 말고 이렇게 하나하나씩 바로잡아 걷어안아야 우리는 전체 인민대중을 하나의 혁명력량으로 묶어세울수 있소!》
전장원은
김중권은 최춘국이 옆구리를 건드리는 바람에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최춘국은 회의터아래의 소나무숲쪽을 눈길로 가리켰다. 그 소나무숲속에서 키가 작달막한 유격대원이 달려나오고있었다. 오판단이였다.
그는 뒤에서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듯 자주 뒤를 돌아보며 이쪽으로 뛰여올라왔다.
김중권은 슬그머니 회의장에서 물러나 그를 향하여 마주 달려내려갔다.
오판단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숨을 헐떡거리였다.
《이거 야단났습니다. 》
《무슨 일이요?》 하고 김중권은 다급하게 물었다.
《원호물자를 지고왔던 사람들이 생떼를 씁니다.
《동무는 좌우간, 이게 비밀회의인줄 모르오? 왜 접근시켰소, 적에게 발견되면 어떻게 하오?》
《젠들 어떻게 합니까? 막무가낸데…》
《동무는 언제봐야 인정에 너무 무르단 말이요.》
김중권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소나무숲속으로 내려갔다. 오판단은 뿌루퉁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소나무숲속에서는 숱한 사람들이 서로 밀고닥치며 옥신각신하고있었다.
등짐을 지고왔던 바줄을 어깨에 걸친 검정로동복차림의 장정이 세사람만 옆에 골라내세우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돌아가라고 요구하고있었다.
구레나릇이 시꺼먼 그 장정은 밀려나서 눈에 불이 이는 사람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이러지들 마시오, 대표로 뵙고 가서 잘 이야기하면 되지 않소. 모두 하나같이 이러다간 다 밀려나고마오.》
그러자 지게를 지고 목에 수건을 동인 얼굴이 동그스름한 애된 청년이 울상이 되여 대들었다.
《전… 전… 못 가요. 마을에서
그의 뒤에서 털벙거지를 쓴 수염발이 허연 로인이 그를 뒤로 잡아끌었다.
《아니, 젊은이야 앞길이 구만리같지 않나. 이 늙은것을 앞에 내세워주면 못쓰나. 나는
로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끓었다.
김중권도 눈시울이 뜨거워져 눈을 슴벅이며 어찌할바를 몰라하다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자기앞으로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모진 소리 한마디 못하고 그들을 모두 솔밭가장자리까지 데리고나가서 밑에서 보이지 않도록 앉혔다.
그 사람들은 잡관목덤불속에 자리를 잡고는 회의터를 우러러 쳐다보았다.
때마침
《동무들!
조국땅에서 이처럼 지하혁명조직책임자들과 정치공작원들이 모여 조국광복의 력사적위업을 하루빨리 앞당기기 위한 대책을 토의하는것은 매우 의의깊은 일입니다!》
해빛이 찬란한 푸른 하늘밑에 거연히 서시여 백포자락을 날리며 만리대공을 향하여 팔을 내뻗치시는
대기속에서 보이지 않는 파도가 일며 소나무숲이 솨- 솨- 설레였다.
털벙거지를 쓴 수염발이 허연 로인이 벌떡 일어나 김중권의 두손을 덥석 잡았다.
《젊은이, 저분이
얼굴을 덜덜 떨며 이렇게 부르짖는 로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끓었다.
김중권도 가슴을 치는 감격에 눈앞이 흐려지고 목이 메였다.
《할아버지, 진정을 하십시오, 진정을… 앉으십시오!》
그는 로인을 가까스로 주저앉혔다.
로인은 앉아서도 손등으로 눈을 자꾸 비비며
김중권은 오판단에게 그 사람들을 잘 지키고있도록 이르고는 다른데서 또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가 하여 회의터둘레의 숲속을 돌아보았다.
그는 앞을 막는 나무가지들을 조용조용히 헤치기도 하고 다리에 걸리는 삭정이들이나 마른 넝쿨들을 치워놓기도 하며 천천히 걸어나가면서 숲속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김중권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숲속에 숨어서
하늘에서는 해빛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려 숲속이며 온 대지가 환해졌다. 어디선가 새들이 벌써 봄기운이 젖어든 고운 목청으로 짝자그르르 지저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