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3 장
1
김진세로인이 토지개혁준비위원회로 들어가던 바로 그날이였는지도 모른다. 저녁어스름이 내리덮인 룡정시가의 음산한 거리로는 십여명의 기마병들에게 옹위된 한대의 포장마차가 무엇에 쫓기는듯 황급히 달려가고있었다.
기마병들은 보복의 총구가 숨어있는듯한 음침한 골목들이며 상점가의 불빛이 꺼진 유리창너머에 표독스러운 경계의 눈길을 던지며 말을 달리였다.
고관대작들이 타는 검은색가죽풍막의 마차는 들쑹날쑹한 길을 따라 가볍게 오르내리며 미끄러져갔다.
북쪽교외를 멀리 벗어난 마차는 갑자기 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좁은 길에 들어서서 조선쪽으로 달리였다.
달빛에 희푸스름한 눈벌판은 바다처럼 설레이는듯 하였다.
마차안에는 아래배쪽이 보기좋게 불거져나온 비만한 신사와 몸매가 날씬하고 군복차림이 단정한 젊은 장교가 앉아있었다.
두리두리한 얼굴에 중절모를 푹 눌러썼고 은테안경을 낀 50이 넘어보이는 이 신사는 흔들리는 마차에 아주 몸을 내맡겨버리고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는데 한잠 푹 자볼 심산인것 같다.
그러나 젊은 장교는 어지간히 흥분된 얼굴이다. 그는 차창에 언뜻거리는 기마병들의 그림자들이며 저 멀리에서 반짝이는 인가의 불빛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마차가 몹시 들출 때마다 옆의 신사를 여겨보기도 한다.
장교는 회령련대의 사또 요시나리 소좌였다.
사또는 오늘낮 룡정의 제국령사관에서 진행된 비밀회의에서 이 로인을 알게 되였다.
관동군사령부, 관동군헌병대, 조선주둔군의 간도림시파견대, 함경북도경찰부와 조선국경경찰대 및 만주경찰기관들의 고위인물들이 모인 련석회의는 1932년 하반기에 진행한 《토벌》작전들을 비롯한 제반 군사행동들을 총화짓고 금후 대책안을 토의하였었다.
창문들에 누런 휘장들을 내려놓고 극비밀리에 진행된 모의였으나 처음부터 신랄한 책임추궁과 그에 따르는 자기변호, 더 나가서는 뒤집어쓴 책임을 남에게 넘겨씌우려는 비렬한 행위로 말미암아 소리들이 높아지고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다.
이 늙은 신사는 회의실에 좀 늦어 들어와서 흑곤색중절모를 보기 좋게 들어 좌중에게 눈인사를 보내고는 구석쪽에 자리를 잡았다.
모두들 의자에서 궁둥이를 조금씩 들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에 사또는 어느 누구도 그 신사의 관등급이며 직함을 부르지 못하고 그저 《각하》라고만 부르는데 주의가 갔다.
책임추궁들이 끝난 다음 론의의 초점으로 된것은 간도지방에 새로 생긴 공산주의자들의 적색근거지에 대한 평가문제였다. 즉 그것이 전 만주땅을 휩쓴 황군의 맹렬한 《토벌》작전에서 살아남은 공산잔여분자들이 쫓기고쫓기던 끝에 산간오지에 모인 결과에 형성된 우연적인 산물인가 아니면 공산주의자들 특유의 조직력으로 꾸려진, 적색운동의 새 발전단계를 시사해주는 필연적인 산물인가 하는 문제였다.
전자일 경우에는 황군의 《토벌》공세가 적을 산간오지의 좁은 지역에 압축해놓고 일거에 소탕해버릴수 있는 유리성을 마련해놓았으니 성공적이였다고 말할수 있겠으나 후자일 경우에는 그리 락관할 문제가 못되였다.
락관적인 견해와 비관적인 견해의 밖에 서있는 군부의 젊은 대표자들은 적색근거지들이 쏘베트로씨야와 겨울이면 두껍게 얼어붙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린접하여있다는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들은 그것이 우연적인 산물이건 필연적인 산물이건 관계없이 쏘만국경에 관동군의 일부 력량을 포진시켜 배후지원을 차단해버린다면 일거의 공세로써 소탕해버릴수 있다고 장담했다.
사또 요시나리도 그런 견해의 편에 서있었다.
아편쟁이처럼 얼굴이 누렇게 뜬 만주경찰의 한 대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신문의 한구절을 읽었다.
《…산림자원이 풍부하여 재계의 구미를 당겨오던 간훈일대, 화룡, 연길, 왕청, 훈춘의 산간오지들에 적색체계의 구역이 형성되다… 나라안에 새 나라가 생긴셈이다. 이것은 만주치안의 암이다. 나아가서는 동아평화의 암으로 자라리라는 설이 세론을 흔들고있으니 치안당국의 두통도 짐작할수 있다…》
구석쪽에 앉아 내내 눈을 내리뜨고 주로 듣기만 하던 신사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신문을 좀 보자고 했다.
그는 신문기사를 한눈에 훑어보고는 내팽개치듯 신문을 도로 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몇걸음 나와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적색구역이 당신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것처럼 우연하게 생긴것이 아니라고 찍어서 말하였다.
《조선공산주의운동에 새로 대두한 젊은 세대들은 명월구에 모여 모의를 가지였는데 거기서 그들의
그런데 그는 전무후무할 그 포위를 벗어나 오늘은 왕청근거지로 들어와 군세를 확장하고있다니 과연 신화적인 인물이 아닐수 없소.》
적에 대한 이런 과찬이 허용되는것으로 보아 그는 대단한 세력가인것이 분명했다.
그는 적에 대한 옳은 분석과 평가에 기초한 방략만이 승리를 담보해준다고 전제하고는 금후의 대책안토의를 더 심화시킬것을 제의하였다.
장시간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론의끝에 하나의 안이 세워졌다.
새로 창설된 적색근거지는 전조선과 만주의 공산주의자들을 끌어당길것이다. 황군은 도처에서 중소규모의 《토벌》작전을 계속 벌려 공산분자들의 근거지에로의 집결을 촉진시킨다.
황군은 우세한 무력과 치안경계조치로써 적색근거지를 봉쇄한 다음 그 세력이 팽창되지 못하도록 적당한 정도의 타격을 수시로 가하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적절한 시기에 봉쇄를 죄여 공산본거지를 질식시켜 그 내부에 분규가 야기되게 한 다음 대《토벌》전을 벌려 일거에 소탕해버린다.
이 안에 대하여 그 신사는 반신반의하는듯 하면서도 동의를 표하였다.
련석회의가 끝나고 모두 휴계실로 나왔을 때 그 신사는 두개의 차잔을 들고 사또에게로 마주 다가와서 그 하나를 권하며 뜻있는 미소를 보냈다.
사또는 기착을 하며 자기의 소속과 성명을 대는것으로써 답례하였다.
뜨끈한 차를 다 마시였을 때 신사는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명함장을 꺼내여 그에게 보였는데 흰눈같은 명함지에는 관동군사령부 특무부요원 구니모도 아무개라고 찍혀있었다.
사또는 작년가을 우가끼총독이 저택정원을 거닐며 하던 말이 뇌리를 때려 소스라쳐 놀란 나머지 하마트면 탄성까지 지를번 했다.
구니모도는 손등으로 그의 배를 툭툭 건드려보며 배포유하게 미소를 지었다.
《반갑네, 자네였댔구만. 음… 나도 조선쪽에 나갈 일이 있는데 동행할 의향은 없나? 모두 기차요 자동차에 타고 떠나겠지만 우리는 어디 한번 구식마차로 산책을 해볼가. 그편이 한결 흥겨울테니까.…》
소창으로 흘러드는 달빛이 마차안을 희미하게 밝혔다.
사또는 동행자가 졸고있는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가늠할수 없어 몇번인가 그에게 조심스러운 눈길을 돌렸다.
좌석등받이에 몸을 기댄 구니모도는 마차가 요동하는대로 머리를 흔들리우며 태평스럽게 자고있는 사람처럼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있다.
사또는 이 사람이 무슨 용건으로 이렇게 밤길을 타서 급히 조선으로 나가야 하는지 그 까닭을 짐작할수 없었다.
지나가는 말로 슬쩍 물어보고싶어도 상급의 행동에 대하여 의혹이나 호기심을 품는것은 군률이 엄금하는바이다.
그가 산책이요 뭐요 하면서 가볍게 스치던 말들을 되새겨볼수록 의혹은 가슴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구니모도는 사또의 손을 잡아 자기의 뭉실뭉실한 무릎우에 갖다놓고 꾹 누르며 조용히 말을 건네였다. 그는 앞으로의 싸움은 공산주의와의 전쟁인데 황군지도층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지난 세계대전의 공로자들로서는 로둔해진데다가 자만에 빠져 이 전쟁에서 이길수 없다고 하였다. 시대발전의 추세를 타고 군대안에 새로 대두한 혁신계장교들이 빨리 자라나서 군의 통수권을 쥐고 흔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군수뇌부는 일찍부터 도꾜의 정계를 여러차례에 걸쳐 뒤엎어놓은 청년장교들의 의거를 깊은 관심으로 주시했노라고 하며 지금 그 용사들이 관동군의 여러 부대들에 배치되여 대륙공략의 진두에 서있다고 말하였다.
《군들의 전도는 양양하네.… 앞으로 나와 련계를 긴밀히 가지세. 군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나에게 상세하고 솔직한 보고를 보낼것이며 나는 그것을 깊이 참작하여 해당한 조치들을 취하도록 사령부에 건의할것이네.》
구니모도는 자기의 비밀우편함번호를 대주었다.
마차는 무인지경을 달리는 모양이다. 멀리에서 개가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마차용수철의 삐걱소리 사이사이로 기마호위병들의 말발굽소리만이 가락맞게 들린다.
마차가 세차게 흔들리였다.
구니모도는 배에 손을 가져가며 이마살을 찌프렸다. 그는 양복바지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병을 꺼내더니 알약 몇알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각하,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음… 나한테는 위장병이 있네. 고약한 병이야. 떨어지지 않거던. 의사들 말이 저산이라나?》
사또는 응대를 안했다. 그는 저산에 대하여 무시무시한 추억을 간직하고있었다.
사관학교시절에 그를 총애한 체육교관이 저산으로 신고했었다. 그러다가 암으로 번지였다. 사또는 그를 구원하려고 도꾜의 큰 병원들과 의학박사들과 종양연구소들을 찾아 뛰여다닌 일이 있다. 어디를 가나 속수무책이였다. 두달후 환자는 자기 집 넓은 방에서 단말마의 함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다가 숨지고말았다. 그것은 하늘에서 우뢰질을 하고 번개가 불채찍으로 대지를 내리치는 시커먼 저녁녘에 있은 일이였다. 은사를 장례지낸 다음 사또는 암에 대한 저서를 몇권 얻어 읽어보다가 불쾌하여 내던지고말았었다.
그를 뚫어지게 보고있는 구니모도의 눈에 이상야릇한 미소가 어린다.
《자네는 무언가 불길한 생각을 하는게 아닌가?》
《예?… 사관학교시절에 저의 교관이…》
사또는 자기가 생각했던바를 다 이야기했다.
《그래 그건 어떤 병인데 아직도 근원을 모른다는건가?》
《그 원인에 대해서는 비루스설도 있고 유전설도 있고 신경설도 있다는데… 진원인자체를 모르는것 같습니다. 처음에 발생한 암세포가 암조직으로 자라고 그 조직이 전신에 퍼지면서 모든 장기들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파괴하면 사람은 죽고맙니다.》
마차안이 으시시해졌다. 죽음의 마귀가 깜장메고양이같이 마차의 지붕이나 소창옆 어디엔가 붙어서 안을 들여다보는듯싶었다.
어딘가 멀리에서 우구구- 하는 괴이한 비명이 들려왔다. 무인지경을 헤매는 무리승냥이들의 울음소리인것 같다.
구니모도는 좌석등받이에 등을 붙이며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그의 눈앞에서도 불길한 환영들이 어른거리는 모양이다.
이윽고 그는 불평조의 퉁명스러운 소리를 한마디 내뱉었다.
《흠! 요새
사또는 그 말의 뜻을 몰라 의아한 눈으로 구니모도쪽을 돌아봤다.
《간도의 적색근거지는 만주치안의 암이다.… 동아평화의 암이다. 문필가라는 작자들은 다 감상주의자들이고 어느 정도는 신경병환자들이야. 그따위 문장을 회의장에 와서까지 읽는자는 더한 놈이구. 아편중독자같은 그런 얼간이에게 경찰제복을 입히다니 눈들이 멀었어.…》
사또는 그 만주경찰이 만민이 전률하는 병을 상기시킨것으로 하여 이제 된욕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동정이 갔다. 그리고 구니모도의 이런 분격의 일부는 비위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한 자기에게도 쏠리고있다는것을 느끼며 숨을 죽이고 꼿꼿이 앉아있었다.
구니모도는 다시 좌석등받이에 머리를 편안히 기대며 흔들거리는 천반을 쳐다보았다.
《암은 무슨 암?… 이제 적색구역에서는 저절로 분규가 일어나고 혈투가 벌어질거네.》
《?…》
《그 지대엔 소위 구국군이라고 하는 구동북군의 대무력이 산재해있는데 그들속에서는 반공감정이 날로 높아지고있네.》
《저도 왕덕림군단이 동녕과 라자구사이의 산악지대에 포진해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어느때에 가서는 공산군과 그들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네. 그들은 서로 적대적인 사상을 가지고있는데다가
《우리 뜻대로 구국군이 움직여주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친구들이 들어가있네.》
《그 되놈들이… 일본인을 믿어주겠습니까?》
젊은이를 흘깃 곁눈질해보는 구니모도의 입가에 비양조의 미소가 어리였다.
《전향한 조선독립군지휘관들속에서 반공분자들을 골라내여 라자구, 안도, 연길방면의 구국군부대들에 첩자로 들이밀었는데 그들의 모략이 성과가 크네. 조선공산당이 간도농민들속에서 쟁의를 선동하여 중국인지주들을 수탈한 관계로 구국군의 두령들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자기네 원쑤처럼 여기고있네. 이제 조금만 자극해도 터지네… 불이 터지네.》
마차가 두만강다리를 건너서 서남방향으로 얼마 달리지 않아서였다. 밖에서 꿱꿱거리는 야성이 들려왔다.
소창으로 밖을 내다보던 구니모도가 마차를 세우라고 소리쳤다.
사또는 구니모도를 따라서 마차에서 내렸다. 살을 저며내는듯 한 칼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달빛에 유리판처럼 번쩍거리는 두만강얼음판우에 20여명의 졸병들이 반라체로 서있고 4명의 사관들이 그들에게 얼음구뎅이에서 바께쯔로 퍼낸 찬물을 뿌려던지고있었다.
대렬앞에 군도를 짚고 서있는 키가 구척같은 장교가 사관들이 졸병들의 얼굴이며 가슴팍에 찬물을 뿌릴 때마다 《추운가-》하고 소리친다. 그러면 졸병들은 헉- 느끼면서 《덥습니다》하고 야성을 내지르는것이였다.
《추운가?》
《덥습니다!》
군도를 짚고 서있는 장교는 련대장 쯔루하라대좌였다.
귀밑에서부터 턱밑에까지 구레나릇이 시꺼멓게 덮인 쯔루하라대좌는 사또가 소개하는 말을 듣고 구니모도앞으로 걸어와서 거수경례를 붙였다.
웬일이냐는 구니모도의 물음에 대좌는 저자들은 빙설훈련에 나왔다가 춥다고 불만 쬐면서 제 밥통도 닦지 않았기때문에 자기가 직접 단련시키는중이라고 했다.
《모두 시고꾸와 규슈 등지에서 징모된 신병들입니다. 혹한이 계속되는 간도토벌에 준비시키자면 별수가 없습니다.》
《대좌, 장하오.》
×
구니모도의 조선출장에 대한 사또의 의혹은 이틀뒤에야 완전히 풀렸다.
이튿날 밤중 사단으로부터 전 련대에 비상소집명령이 하달되였다.
련대는 중무장들은 본영에 둬두고 경무장만 갖추고 달려나와 대대와 중대별로 산개하여 회령으로부터 남양에 이르기까지의 철도연선의 산들과 마을들에 대한 일대 수색작전을 벌리였다. 수색이 지나간 모든 마을들이 황페화되였다. 산에서는 하나의 봉우리, 하나의 골짜기를 산개대형으로 둘러싸고는 올가미처럼 죄여들면서 그안에 든 모든것을 박멸해버릴 기세로 샅샅이 뒤지였다.
처처에서 수많은 나무군들이 도끼와 지게를 산에 버린채 헌병대로 끌려갔으며 허가를 받은 사냥군들과 그 몰이군들도 가차없이 취급되여 렵총들을 회수당하고 일단 헌병대에 끌려갔다.
회령이남에서는 다른 부대가 이런 수색작전을 벌리였다.
이틀후에는 전 련대가 아침부터 철길을 따라 두줄로 늘어서서 위병을 섰다.
이제 와서는 도꾜나 경성에서 수뇌급의 인물이 오는것이 분명해졌다. 장교들은 동료들끼리 모여서기만하면 누가 오느냐고 수군거리며 라남의 19사단장이나 룡산의 조선군사령관이 래방할 때에도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영접차비를 하지는 않았다고들 말했다.
정각 12시, 개미 한마리 얼씬못하게 엄중단속한 역의 좁은 홈에는 의장병대렬이 서있었다. 살아숨쉬는 모든것이 숨을 끊은듯 한 적막속에서 례복차림에 번쩍거리는 식도를 찬 쯔루하라대좌가 의장병대렬의 좌익에 부동의 자세로 서서 저 멀리 산굽이에 사라진 철길쪽만 바라보고있었다. 그의 옆에는 어디서 언제 나타났는지 조선과 만주의 관리들 십여명이 초긴장의 얼굴로 서있었다.
구니모도각하만이 의장병대렬앞에서 뒤짐을 지고 왔다갔다하다가는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구니모도는 쯔루하라의 다음자리에 서있는 사또옆을 여러번 지나갔으나 한번도 그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저쪽 산굽이에서 짤막한 기적소리가 울려오고 먼 차바퀴소리에 선로가 울리기 시작하자 역의 공기는 순식간에 흥분의 도가니로 끓어번졌다.
산굽이에 시커먼 기관차대가리가 불쑥 나타나는것 같더니 어느사이에 벌써 특별차는 홈에 들어서며 흰김을 의장병들에게 들씌웠다.
쯔루하라대좌의 멱따는듯 한 구령소리가 모든 소음들을 누르며 하늘을 찔렀다. 대좌는 무릎을 높이 들며 승강대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손에 받들리운 군도가 해빛에 번쩍번쩍 빛났다.
승강대에서 얼굴이 해말쑥한 안경쟁이중좌가 뛰여내려 대좌에게 손을 홰홰 저어보이면서 의식을 중단하라고 일렀다. 중좌가 승강대앞으로 놀라서 달려간 구니모도며 고위관리들에게 무엇이라고 짤막하게 이르는것 같더니 모두 옷매무시를 바로잡으며 렬차칸으로 밀려들어갔다. 군도를 끌러 사또에게 맡기고 맨나중에 렬차칸에 들어갔던 쯔루하라대좌가 이윽고 밖으로 나왔다. 승강대에 내려선 대좌는 손수건을 꺼내여 눈에 가져가며 허리를 구붓하고 소리없이 흐느꼈다.
뒤따라 구니모도를 제외한 모든 관리들이 승강대로 밀려나왔다.
번쩍거리는 특별렬차는 인차 역을 떠나 만주쪽으로 넘어갔다.
사또는 이름할수 없는 감동에 사로잡혀 아직도 홈에 서있는 쯔루하라대좌에게로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불렀다.
《대좌님!…》
쯔루하라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 누구를 원망하고 비난하는듯 한 어조로 말했다.
《페하께서… 페하께서는 시종무관 가와기시륙군소장을 이쪽에 특사로 파견하시였네. 알았는가? 페하께서는 간도와 두만강연안에 조성된 형세를 깊이 우려하고계시네. 알았는가?》
한달후 회령과 라남, 함흥과 평양, 경성의 룡산사이에 의미심장한 병력이동들이 있었다. 그에 따라 인사이동도 벌어져 일본과 조선군사령부들에서 내려온 끌끌한 장교들로 결원이던 자리들이 메꾸어지고 자기 편제상의 군사관등급을 받지 못했던 위관이나 좌관들이 별들을 받게 되였다. 후방보급이 급격히 개선되여 일선부대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였다.
간도림시파견대들이 새로 편성되여 행동을 개시하였다. 매일밤 파견대의 지대들이 박격포와 곡사포, 치중마차들을 덜커덩거리며 두만강다리를 건너갔다. 낮이면 쌍엽정찰기들이 저공비행으로 두만강연안의 산발들을 샅샅이 뒤지다가는 멀리 훈춘과 왕청쪽하늘로 날아가서 선회하는것이였다.
군대안에서 제일 영민한 참모장교들로부터 제일 우매한 치중대의 사마병에 이르기까지 누구나가 다 이 급변을 《천황》특사의 시찰과 결부하여 생각하였다.
2월도 다 지난 어느날 저녁무렵, 길철령을 강행군하여 넘어가는 파견대의 긴 행렬속에서는 말을 타고가는 사또소좌의 긴장된 얼굴도 보였다.
그들은 《적색구역봉쇄》를 위하여 백초구일대에 포진하게 된것이다.
우불구불한 령길을 따라 기마병들이 기세좋게 달려내려왔다. 먼저 령을 넘어간 부대의 기마병인것 같았다.
사또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오이, 저쪽은 어떤가?》
성에가 허옇게 불린 털모자를 푹 눌러쓴 기마병들은 그의 직급을 알아보고 말을 멈추었다.
사또는 다시 물었다.
《저쪽은 어떤가?》
기마병들은 무엇을 알고싶어하는지 몰라 빤히 쳐다봤다.
《교전은 없었는가?》
앞에 선자가 허리를 쭉 펴며 소리쳤다.
《없었습니다. 우리가 포진을 끝냈는데도 공산군은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습니다.》
《그런가?》
《눈속에서 동면을 하는지 공산구역은 고요합니다.》
《예… 화목이 많아 뜨뜻하게 지냅니다. 술도 있고 없는게 없습니다.》
뒤에 선자가 신이 나서 말했다.
《노루고기를 먹어봤습니다!》
사또는 그들을 지나보내고는 군마를 내몰아 길철령마루로 뛰여올라갔다.
그는 고삐를 힘껏 잡아당겨 사납게 갈개는 말을 멈춰세우고는 흩날려내리는 희뿌연 눈발속에 아득히 바라보이는 왕청오지쪽에 눈길을 던지였다. 페하가 우려하던 끝에 시종무관까지 특사로 파한 전선, 《공산구역소탕전》의 제일선에 서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그는 군도자루를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이제 저 산악들을 휩쓸 결사전에서 무공을 떨치리라. 그리고 도이췰란드로 가리라!)
군마는 머리를 쳐들며 투레질을 하고 선뜩선뜩한 눈은 기분좋게 얼굴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