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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 회

밝은 미래

김 철

2

순옥은 바람부는 둔덕우에 그린듯이 서있다.

갑자기 들이닥친 큰물에 의해 온 동네가 한지에 나앉은 엄혹한 현실…

가슴속에서는 크나큰 슬픔의 파도가 넘실거리여 좀처럼 마음을 다잡을수 없는것이다. 그는 눈물이 앞을 가리워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두꺼운 감탕만이 덧쌓인 물건너 학교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저녁이면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던 정다운 학교길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배움의 글소리가 랑랑히 울려퍼지던 학교도 큰물이 삼켜버렸다.

이 시각 둔덕밑에는 몇배로 불어난 성천수가 사나운 물갈기를 일으켰다. 물란리에 반나마 끊어져나간 다리를 보느라니 아이들 생각이 났다.

집채같은 흙탕물이 들이닥칠 때 제각기 집에 있었던 우리 학급애들은 어떻게 되였을가? 제발 무사해야겠는데… 언제면 내가 그 애들을 위해 다시 교단에 설수 있을가? 왜 이리도 마음이 종이장처럼 얇아졌을가?…

《선생님!》

문득 순옥의 귀전에 누군가의 음성이 아슴푸레 들려오는듯 했다.

누가 날 찾는것이 아닌가? 아니면 착각인가?

《선생님!》

더 크게 울려오는 귀익은 목소리.

순옥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은 착각도 허상도 아니였다.

바로 금성이가 어푸러지듯 그에게로 달려오는것이였다.

《금성아!》

《선생님!》

순옥은 울먹울먹이는 금성이를 부둥켜안았다.

《무사했구나, 무사했어. 헌데 어떻게 여기 나왔댔니?》

《우리 학교를 보려고… 그런데 다리가 끊어져…》

평시에는 느낄수 없었던 스승과 제자의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순옥은 금성의 가냘픈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던 그의 손바닥이 흠칫 떨었다. 금성이가 입은 겉옷의 잔등부위가 찢어져 맨살이 드러났던것이다.

옷을 기워줘야겠구나. 그런데…

다음순간 순옥은 자신의 생각이 너무도 비현실적인 사고라는데 머무르자 손맥이 풀싹 풀리였다. 온 동네가 가산도 집도 학교도 병원도 잃어버리고 남은것이란 입은 옷 한벌뿐이니 자그마한 바느실조차 없어 금성이의 옷 하나 기워주지 못하게 된 가혹한 환경이 가슴을 모질게 갉아내렸다. 순옥은 얼른 양복을 벗어 금성의 어깨에 씌워주었다.

《그럼 선생님은…》

《난 일없어요. 여벌옷이 또 있거던.》

큰물이 났던 그밤에 옷을 많이 껴입고 나온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새삼스레 느끼며 순옥은 양복의 팔소매를 쳐들어 금성의 팔을 꿰여주었다. 옷이 어방없이 크긴 해도 맨살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한결 놓이였다.

순옥은 의기소침해진 금성에게 무엇인가 힘이 되는 말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금성의 얼룩진 눈물자국을 닦아주며 또박또박 말했다.

《금성학생, 눈물만 흘려선 안돼. 금성인 앞으로 큰사람이 되겠다고 했지? 그러자면 공…부…》

한순간 순옥은 말문이 떡 막히여 손등으로 입을 가무리였다.

가슴속에 전류같은것이 찌르르 지나갔다. 무심결에 나온 《공부》라는 두글자가 마음 한귀를 아프게 썰었다.

학생과 공부! 이것은 학습장과 연필처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말이건만 재난이 모든것을 쓸어간 여기에서는 정녕 낯선 말로 되여버린것이 아닌가.

순옥이 피나게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리는데 금성은 스승의 아픈 맘을 모르는지 제속을 터놓았다.

《선생님, 몇밤 자면 공부를 다시 하게 됩니까? 한달? 아니면 석달?》

금성의 간절한 심정이 비낀 물음앞에서 순옥은 쉬이 대답할수 없는것이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명백했다. 당의 품에 안겨사는 우리에겐 일시적인 아픔이 있을지언정 영원한 아픔이란 없으며 희망넘친 래일이 기약되여있다는것은…

순옥은 정찬 눈매로 금성을 바라봤다.

《금성이, 우리에겐 아버지원수님께서 계시지 않니. 그러니 우리 학교가 더 멋있게 일떠설 날은 멀지 않아.》

《알겠습니다, 선생님.》

금성이 거처한 곳을 알아보고 그와 헤여진 순옥은 강잉한 의지를 가다듬으며 질척질척한 산길을 톺아갔다. 여느때는 집에서 15분이면 가던 학교길이 물에 막히여 어차피 산길을 에돌아가야 하는것이다.

순옥은 든든한 나무가지를 지팽이용으로 의지하면서 비물을 먹어 미끈미끈한 산길을 힘겨웁게 올라갔다. 내리막길은 더 힘들었다. 잦은발을 더듬하며 내려가다가 그만에야 한발이 미끄러져 제동이 풀린 자동차모양이 되여 진탕에 딩굴기도 했다. 나무등걸에 긁히여 팔굽에서는 피가 나왔어도 순옥은 겉의 상처보다 속의 상처가 더 아프게 느껴졌다.

순옥의 뇌리에는 몇밤 자면 공부를 할수 있는가고 하던 금성의 안타까운 말마디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수십번이나 자문자답해보았다.

때이르게 상처입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희망을 안겨줄것인가? 아마도 아이들은 배움이라는 푸른 하늘에 희망의 비둘기를 계속 날리고싶을것이다.

그런데 학교는 감탕산에 묻혀버렸고 학생들은 흩어졌으며 교수안과 교과서, 학습장, 입을 옷조차 없는 빈터우에서 무엇을 어떻게?…

무려 1시간 30분나마 산길을 걸어 학교에 도착한 순옥은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게 되였다. 배움의 보금자리가 하루밤새 이렇게 본래의 모습을 산산이 잃고 아픈 모습을 남겼단 말인가.

2층으로 된 아담한 교사의 1층까지 감탕이 장벽처럼 쌓아졌고 운동장에도 감탕이 두껍게 쌓이여 울타리들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학교 웃쪽에 뻗어있던 철길은 형체없이 파괴되고 고급중학교와 나란히 이웃했던 소학교는 큰물이 남김없이 쓸어간것이다. 그래도 고급중학교는 철길뚝밑에 자리잡고있고 1차타격을 받은 소학교가 방패막이격으로 되여서 피해가 덜한 편이다.

《순옥선생 아니요?》

옆에서 울리는 귀익은 목소리에 순옥은 고개를 돌렸다.

《교장선생님!…》

《집에선 다 무고하겠지?》

《예. 교장선생님은?》

《우리도 별일없소. 어서 갑시다. 다른 선생들도 나왔으니 격식없는 모임을 좀 가지자고 하오.》

순옥은 교장의 뒤를 따랐다. 제대군인인 그의 억실억실한 눈가에 짙게 어린 신심과 용기를 대하니 절로 마음이 든든해짐을 느꼈다.

순옥은 운동장의 한귀퉁이에 세워진 천막안에 들어갔다.

밤새 수척해진듯 한 여러 교원들과 눈인사를 나는 그는 뒤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한분과에 있는 정철이 얼른 납작한 돌을 의자삼아 권했다.

《괜찮습니다.》

《여기 또 예비 〈의자〉 있으니 걱정말고 앉으시오.》

몸이 다부진 그는 안심하라는듯 다른 돌을 들어보이였다.

순옥은 빙그레 웃으며 돌의자에 앉았다.

천막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전에는 회의때마다 두툼한 수첩을 꺼내들고 일사천리로 말을 잇던 교장이 오늘에는 빈손으로 일어나 쉬이 말꼭지를 떼지 못했다.

창남교장은 두어번 헛기침을 한 다음에야 말문을 열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현실의 엄혹성과 가혹성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눈으로 보고 페부로 느낀바이기에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모임에서 시급히 토의할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학생들의 수업문제입니다. 학교는 감탕에 묻히고 모든것이 불리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나 수업을 계속해야 합니다. 수업을!…》

교장은 잠시 말을 끊고 교원들의 얼굴을 두루 살폈다.

이 시각 순옥도 (수업?) 하고 반문했다. 그것은 둔덕에서 금성을 만나고 학교로 오면서 줄곧 생각한바이지만 정작 교장에게서 수업소리를 듣게 되자 다시금 생각이 우물속같이 깊어졌다.

될수만 있다면, 이제라도 학생들을 모아놓고 수업을 계속하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그러나… 욕망과 실천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것인가.…

순옥이 심란해지는 마음을 다잡을길 없어 손가락으로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있는데 《순옥선생.》하는 교장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예.》

순옥은 그가 자신의 속마음을 렌트겐선마냥 꿰뚫어본것 같아 귀부리가 확- 달아올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있는 때 나에게 수업문제를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것인가? 현재 나에게는 이 문제를 풀수 있는 아무런 묘안도 없지 않은가? 속수무책…

그런데 교장은 순옥의 예상을 뒤집고 시를 읊어보라고 하는것이였다.

《예? 시라니요?》

놀라운 일이여서 순옥의 두눈이 화등잔같이 휘둥그래졌다.

교장의 침착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순옥선생이 애송하는 시 말이요. 제목이 〈전승의 서곡〉 이던가? 언젠가 선생이 시랑송모임때 전교앞에서 읊어서 깊은 감명을 자아냈었지. 아마도 이 모임의 보고는 그 시로 해야 할것 같소.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의 힘이 될 그 시를 읊어보오. 이건 나의 부탁이기도 하오.》

《…》

순옥의 가슴속에서는 쿵 바위돌이 굴러내린듯 했다.

평범한 날에는 그리도 즐겨 읊었던 시를 어려운 오늘날에는 왜 한번도 되새겨볼 여유조차 없었으며 지금 이 시각에도 좀처럼 글귀가 떠오르지 않는것인가.

순옥은 손아귀에 힘을 주어 주먹을 꽉 움켜쥐였다.

그는 교장의 믿음어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교장은 깨우쳐주고있다.

시란, 심장의 웨침은 가장 어려울 때 생의 불길로 활화산처럼 터쳐야 함을!…

《순옥선생, 장편서사시에서 나오는 내각전원회의장면을 읊는게 어떻겠소?》

《예. 제 잘하진 못해도 그 대목을 읊어보겠습니다.》

순옥이 눈을 가느스름히 쪼프리고 한자두자 읊어가는 시구절들이 교원들의 마음속에 이름할수 없는 격정의 파도를 세차게 일으켰다.


숨소리 들리지 않누나

물을 뿌린듯 조용한 내각전원회의

장군님의 음성이 가슴을 울린다

물론 지금은 전쟁이다

모든것을 전쟁승리에 복종시켜야 하는

가렬처절한 전쟁

허지만 교육은 멈출수 없다

학교문이 하루 닫기면

민족이 1년 뒤떨어지고

교육이 1년 뒤떨어지면

나라는 10년 뒤떨어지는 법

지금은 어디 가나 재더미뿐

흑판도 분필 한토막도 없고

책걸상도 교과서와 연필도…


흑흑- 천막안에 흐느낌소리가 새여나왔다. 서정의 분화구를 터치던 순옥이 이 대목에서 북받치는 감정을 누를길 없는듯 두손바닥으로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비비였다.

교장도, 교원들도 눈물이 글썽하여 순옥을 올려봤다.

순옥은 떨리는 음조로 다시 시를 엮어갔다.


학교는 애국자들을 키우는 전당이다

그 어떤 명인도 명장도 영웅호걸도

학교에서 첫걸음을 뗀다

영웅들의 가슴에 불사조의 넋

용맹과 슬기를 키워준 곳은

학교의 교실

장군님의 음성 뜨겁게 울린다


시랑송은 끝났어도 순옥은 앉을념을 못했다. 무엇인가 자신의 불같은 심정을 한껏 이야기하고싶었다. 그는 모래알처럼 작아졌던 가슴속에 산악같은 큰것이 자리잡고 높뛰는 심장의 박동을 진정할수 없어 숨을 크게 들이그었다.

《순옥선생, 할말이 있으면 더 하시오.》

교장의 미더운 눈길을 받고 힘을 낸 순옥은 심중의 고백을 터놓았다.

《동지들, 사실말이지 저는 이 시를 읊을 자격이 없는 교원입니다.

평범한 날에는 너무도 쉽게 이 시를 외웠던 제가 이 시각에는 정말이지 부끄러움을 금할수 없습니다. 서사시에 깃든 깊은 뜻을 마음의 겉층에만 얄팍히 새기고 살았기에 저는 엄청난 시련앞에서 주저하고 동요하고… 저는 알았습니다. 교원생활의 첫 기슭에서부터 매일매일 들어온 수업종소리는 때에 따라 울리지만 조국의 미래를 위한 마음의 종소리는 언제나 울려야 함을…》

순옥은 눈가에 핑그르 맺힌 눈물방울을 닦고 고개를 오연히 쳐들었다.

《긴 변명이 더이상 필요없다고 봅니다. 전화의 교육전사들처럼 우리 힘으로 학교에 덮인 감탕을 쳐내야 하고 림시천막을 치고라도 수업을 중단없이 꼭 해야 한다고 전 생각합니다.》

흥분된 열기를 안고 두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쥔 순옥이 말을 마쳤을 때 여기저기서 《순옥선생, 말 잘했소.》, 《수업을 계속합시다.》하는 열렬한 호응이 터져올랐다.

옆자리에 앉은 정철은 《순옥선생, 이거야.》하고 엄지손가락을 흔들었다.

고요하던 천막안은 불도가니로 끓는듯 했다.

잠시후 교원모임에서는 철야전투를 벌리여 감탕에 묻힌 교사를 복구하고 동시에 수업을 계속한다는 결정이 채택되였다.

엄숙한 결정을 찬성하는 주먹들이 높이 들리였다.

주먹… 그것은 무산땅의 교육전사들이 높이 든 애국의 기발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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