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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회


제 2 장

8

온 세상에 웅-웅-거리는 바람소리만 가득차있는것 같았다. 그 광란적인 소음이 몸에서 더운 피가 소용돌이치는 소리인지 대기가 흐르는 소리인지조차 가늠할수 없었다. 길이며 마을이며 산이며 나무들이 모두 제 자리에 있는것 같으면서도 조화가 마구 헝클어지고 이지러져 보이며 그지없이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최형준은 자기만이 홀로 캄캄한 황야를 달리는것 같았다.

권일균은 림시로 든 집의 웃방에서 아래벽의 말코지에 외투를 벗어 걸다가 문을 차고 뛰여든 최형준을 놀라서 돌아보았다.

《최동무, 무슨 일이요?》

《모르겠습니다! 나는 동지를 리해할수… 리해할수 없습니다! 과연 홍병일의 총구멍이 무서워서 일이 그르쳐지는줄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했단 말입니까? 정말 그랬는가요? 그 말이 진실인가요? 쏘베트야 당신자신도 발기인이 아닌가요. 요전 모임에서 왜 론전에 나서지 않았습니까? 허위와 위선을 모르고 살아왔다던 당신이,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던 당신이 왜 그랬는가요? 말하시오. 왜 갑자기 국외자처럼 되여 홍동무를 조겼는가요? 쏘베트야 실천을 통하여 그 정당성이 확증된 정권형태가 아닙니까!》

최형준은 의분이 치밀어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고 권일균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방안을 돌아만갔다.

한동안 말이 끊어졌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권일균은 이윽고 벽에 이마를 박더니 주먹으로 벽을 동안이 뜨게 뚝뚝 두드렸다.

《최동무, 진정하오.… 우리는 자중해야 되오.… 나는 실천가지 론객은 아니요…》

최형준은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그길로 김일성동지께서 드신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 마당에서 솜옷을 입고 토끼털모자를 깊이 눌러쓴 서너명의 유격대지휘관들이 서성거리고있었다.

전령병 리성림이 최형준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장군님께서 지금 누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으시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정신이 있느냐는듯 한 언짢은 눈길로 흘겨봤다.

최형준은 돌아서 나오다가 마당에서 서성거리는 지휘관들이 주고받는 말을 통하여 망원초에서 적정이 보고되여왔다는것을 알았다.

이날 다행히도 전투는 없었다. 최형준은 낮에 세번이나 장군님을 찾아갔다가 매번 다른 리유로 하여 리성림에게 밀려났다.

저녁녘에는 현당위원 홍병일이 직책에서 떨어져 동림촌적위대 소대장으로 갔다는 소문이 쫙 퍼져 마촌골안을 들었다놓았다.

울타리밑에서 자치기를 놀던 아이들이 홍도깨비가 떨어졌다고 좋아라 웃어대며 여기저기로 뛰여다녔고 마을에 경사라도 난듯 젊은 아낙네들은 우물터에서 깔깔 웃어대며 이야기판을 벌리고 남정들은 소외양간앞이나 장작가리옆에서 담배들을 나누며 신중한 낯빛으로 소리들을 주고받았다.

《그래 말을 타고 내빼자는 작정이였는가?》

《아니라는데, 훈춘으로 가자구 했다니까.》

《훈춘에 제 하내비라두 있던가?》

《훈춘쏘베트에 국제당인가 하는데서 웬 어른이 나오기로 돼있은 모양인데 거기서 제편의 지지를 얻어보자는게였겠지.》

《허-》

《흠-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은 모른다더니.》

최형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홍병일에게 내려진 징계가 자기 운명에 대한 예고처럼 느껴지며 피가 서늘하게 식어들었다.

그는 모든것을 잊으려고 일찌기 자리에 눕고말았으나 잠들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몸을 뒤채기며 모대기던 그는 다시 벌떡 뛰여일어나 개천으로 달려나갔다. 얼음판우에서 왔다갔다하며 자신과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홍병일이처럼 돼도 좋다!)

최형준은 몸을 홱 돌려 한걸음, 한걸음에 비장한 마음을 다져넣으며 마을쪽으로 걸어갔다. 준엄한 운명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진해가는 사람처럼 그의 얼굴은 해쓱하게 굳어졌다.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마을에는 괴괴한 정적이 깃들었다.

장군님의 숙소에는 웃방에만 불빛이 환했다.

최형준은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마당가에서 머뭇거렸다.

눈서리가 반짝거리는 동기와지붕처마밑에서 자그마한 그림자가 우뚝 솟아오르더니 이쪽으로 사뿐사뿐 다가왔다.

전령병 리성림이다.

《야-참, 또 왔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바쁘십니다. 량해하여주십시오.》

《돌아가겠소. 김일성동지께 제의해주오. 나는 말씀올릴게 있소.》

이때 웃방문이 열리며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울려나왔다.

《그게 누구요?-》

최형준은 전령병을 따라 방문앞으로 다가갔다.

장군님께서 문지방을 짚고 앉으시여 그를 내다보시였다.

《강사동무가 아니요? 어떻게 이 밤중에?》

최형준은 자기가 온 목적을 솔직히 말씀드렸다.

《그러니까 보고도 그렇고 우리가 한 이야기가 모두 납득이 안 간다는 말이겠소?》

이렇게 말씀하신 그이께서는 갑자기 활기를 띠시며 어서 들어오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 거처하시는 방에는 호피자리도 닭털베개도 없었다. 모든것이 너무도 검소하였다. 솜을 얇게 둔 요와 털외투, 벽에 걸린 군모와 목갑총, 책상옆에 놓인 숭늉대접, 이것이 전부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요를 펴서 온기가 뜨뜻하게 내밴 아래자리에 그를 앉히며 호탕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긴긴 겨울밤인데 자, 띠를 풀어놓고 이야기해봅시다.》

그이앞에 마주앉은 최형준은 흥분과 긴장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는 처음에는 떠듬떠듬거리며, 다음에는 모든것을 단념한 사람의 비감에 젖은 목소리로, 그러나 이따금씩 반발하는듯 한 신경질적인 어투를 섞어가며 가슴에서 끓어번지던 생각을 다 털어놓았다.

《현당에 있는 우리들은… 조직책이나 저나… 우리들은 모두 확고한 신념에서 쏘베트를 세웠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저는 인정합니다. 여기서 더러 일이 잘못되고 무리가 생기고 혼란이 일어난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쏘베트자체를 부정하는건… 쏘베트야 실천에서 그 정당성이 검증된 정권형태가 아닙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시였다.

《정당성이 검증되였을뿐아니라 오늘은 그 위력이 세계를 진감시키고있습니다.》

그이께서는 신중하신 안색으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시며 조용한 음성으로 물으시였다.

《실천에서 검증됐다는데 그 실천이란 어디 실천이요?》

《네? 어디라니요? 로씨야에서지요.》

《그렇소. 로씨야혁명의 실천이요.… 그런데 동무는 어느 땅에 서있소? 어느 민족의 토양에 서서 어느 나라 혁명에 참가하고있소? 로씨야혁명이요? 조선혁명이요?》

장군님의 음성은 차차 떨리기 시작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진심으로 분격하시였다.

그이를 똑바로 우러러보는 최형준의 크게 뜬 눈에서 섬광과도 같은것이 빛발치였다. 그것은 공포도 절망도 의혹도 아닌 무엇인가 크게 혼란된 착잡한 눈빛이였다. 그의 이마와 코마루에서 식은땀이 번들거렸다.

《그래 동무는 남의 경험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단 말이요? 어째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내놓은 로선과 방침은 그렇듯 믿어지지 않는데 남의 경험은 그렇게 통채로 받아들여 신념으로까지 삼게 되였는가 말이요. 나는 그것이 제일 분하오. 동무는 조선사람으로서의 민족적자부심도 긍지도 없소? 우리 조선사람들은 독창적인 사고를 할 능력이 없거나 내내 남을 추종해야 될 운명을 지니고있단 말이요?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런 비굴한 사고방법과는 타협할수 없소!》

장군님의 열화와도 같은 분격앞에서 최형준은 주눅이 들기도 하고 소스라쳐 놀라기도 하면서 온몸에 퍼지는 뜨거운 전률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있었다.

《말씀해주십시오! 로씨야혁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최형준은 울음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를 빤히 보시다가 그의 솔직성이 마음에 드시여 눈가에 너그러운 미소를 그리시였다.

《물론 두말할것없이 그것은 위대한 혁명이며 그 경험은 전세계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재보와도 같이 귀중한거요. 그러나 그 경험을 통채로 삼켜서 모방하고 답습했다가는 우리 혁명을 크게 그르치고마오. 왜 그렇겠소?》

장군님의 음성은 갑자기 부드러워지시며 한술, 두술 약을 떠먹여주는 육친의 정으로 친근하게 울리였다.

《로씨야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이며 우리 혁명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요. 이 차이뿐이 아니요. 계급적인 력량관계, 력사발전의 특수성, 민족적인 기호… 이러한것들을 무시하고 허궁 떠서 남의 경험을 그대로 휘두르며 뛰여다니였다가는 참혹한 패배를 면치 못하오. 동무들은 여기에서 산업프로레타리아대군이 없다고 한탄하였소. 로동계급과 함께 농촌의 빈농민대중이 우리 혁명의 강력한 주력군이 될수 있다는것을 깊이 통찰하지 못하였소. 그렇기때문에 농민문제, 토지문제를 그렇게 경솔하게 다루었소.

정권문제도 그렇소. 혁명의 성격과 임무에 따라 정권의 형태가 결정되는것이지 어느 한 개인이나 그루빠의 주관적욕망에 의하여 결정되는것은 아니요.

우리 혁명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기때문에 광범한 반일대중을 뭉치게 할수 있는, 로동계급이 령도하면서도 가장 민주주의적인 정권형태를 취하여야 하오. 그것이 곧 인민혁명정부요! 로씨야사람들도 프랑스혁명의 산아인 꼼뮨에서 프로독재의 알맹이만 따오고 그 형태는 자기들의 실정과 기호에 맞는 쏘베트를 택하였소.…》

장군님께서는 너그럽게 미소를 지으시며 뇌리에 인이 박인 감정이나 사상일수록 몇번의 충격으로는 고쳐질수 없는것이니 이제 인민혁명정부가 선 다음 체험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검토해보라고 여유를 주시였다.

이밤 최형준은 자정이 훨씬 지나서 장군님의 바래움을 받으며 마을길에 나섰다.

별들이 성기여진 동녘하늘가에 훤한 빛이 어리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팔굽을 가볍게 잡으시고 가지런히 걷다가 가슴을 펴며 큰숨을 들이키시였다.

《아, 참 좋은 밤이였소. 나는 동무의 솔직성이 정말 기쁘오.》

그이의 더운 입김이 최형준의 눈앞을 흰구름송이처럼 언뜻언뜻 지나갔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최형준은 날이 다 샐 때까지 문가에 앉아있었다.

지난날 사소한 론쟁이나 반대의사가 있어도 말이 거칠어지고 권총까지 빼들군 하던 조야한 사람들속에서 살아온 그로서는 장군님께서 밤중에 무엄하게 뛰여들어 불손한 질문까지 들이댄 자기를 그처럼 너그럽게 대하시고 친절한 가르치심까지 주신 일에 마냥 얼떠름해질뿐이였다.

그는 장군님께서 꾸중하시던 말씀들과 도량이 크신 그이의 인격에 대하여 거듭거듭 생각하게 되는것이였다.

(저런 포옹력을 지니신분은 처음이다.… 처음이야.…)


×


곳곳에서 쏘베트들이 인민혁명정부로 개편되기 시작하고 좌경적인 쏘베트시책으로 하여 빚어졌던 엄중한 사태들이 가셔지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아침 영림서마당에 정렬한 유격대의 대렬앞에서 장군님께서는 김창억이와 마동호의 유격대입대를 선포하시였다. 그리고 창억에게는 보총까지 수여하여주시였다.

바라지도 못하였던 영광에 접한 두 청년은 대렬앞에 서서 얼이 나간듯 한 눈으로 그이를 우러르며 까딱 움직일줄 몰랐다.

문득 마동호가 창억에게 기대여 머리를 떨구며 흐느껴울었다.

창억이는 총을 가슴에 꽉 붙안고 얼굴을 숙였다. 웬일인지 울음이 터져오를 대신 자기에게 매몰스럽게 굴던 홍병일의 얼굴이 떠오르며 가슴이 선뜩 얼어들었다.

이때 장군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다가오시여 그들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면서 입대를 축하하시였다.

《이제부터 정치학습도 잘하고 군사훈련도 열심히 해서 혁명위업에 충직한 투사가 되기를 바라오. 동무들, 오늘을 잊지 마오!》

그이의 말씀은 짤막하였으나 가슴을 쾅쾅 두드리는듯 하였다.

《옛!》

창억이는 힘차게 대답하였다.

그는 다음순간 자기때문에 속을 썩여온 아버지와 어머니, 자기때문에 동네아이들속에서 주눅이 들었던 조카 생각이 가슴을 쳐 눈앞이 탁 흐려졌다. 저도 모르게 흐느끼게 되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심중을 환히 꿰뚫어보신듯 어깨에 손을 부드럽게 얹으시였다.

《어서 집으로 가서 부모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오오.》

창억이는 대렬이 흩어진 다음 지휘관들과 대원들이 퍼붓는 축하의 홍수속에 묻히였다. 장룡산이 제일선참으로 달려와서 주먹으로 창억의 가슴을 툭 치고는 번쩍 안아들고 한바퀴 돌다가 내려놓았다.

《야- 이제는 내 속에 맺혔던 어혈도 다 풀렸다- 허허허…》

모두 유쾌하게 웃어대였다. 한쪽에서는 다른 대원들이 마동호를 하늘에 뿌려올렸다.

창억이는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였다. 어리벙벙해진 그는 이윽고 장룡산이와 대원들이 등을 떠밀어주어서야 집으로 향할수 있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길가의 나무들이 모두 자기를 향하여 달려오고 집들도 모두 눈을 털며 자기를 향하여 돌아앉는듯 하였다. 사람은 기쁨에 넘치고 행복에 겨우면 동심으로 돌아가기 쉬운 모양이다.

창억이는 자기 집모퉁이를 돌아서자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다가 사립문쪽을 향하여 고양이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식솔들을 깜짝 놀래워주고싶어서였다. 그는 울바자너머로 슬금슬금 뜨락을 들여다보았다. 뜨락에서 늘 자치기를 놀던 조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퇴마루에 아버지의 신발도 없었다. 집안에서도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집은 아늑한 고요속에서 깊은 잠에 든듯 하였다.

(젠장, 이런 날에 다 어디로 갔나?… 혹시 어머니는?…)

창억이는 눈을 슴벅이며 어느 문으로 해서 집안으로 뛰여들가 하고 궁리했다. 집에 있는 세개의 문중에서 정지문이 제일 고생을 많이 한것 같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문이였다. 지난날 갖가지 재난과 형들이 죽었다는 소식, 기막힌 기별들이 그 문으로 날아들어왔으며 식구들의 입에 풀칠할 량식, 입을 옷, 마실 물, 땔나무들이 모두 그 문으로 들어왔다. 벼락처럼 내리치는 재난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기절하여 쓰러지지 않고 집안살림살이를 도맡아해온 어머니의 한숨이 서려서 저 문널이며 문설주가 저렇듯 시꺼멓게 그슬린것이 아닌가. 이제는 저 문에 좋은 소식만 날아들고 웃음이 넘칠것이다.

《어머니!》

창억이는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들어가서 정지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그리고 총을 먼저 들이밀며 안으로 뛰여들었다.

가마목을 쓸던 어머니 허씨는 기겁을 하여 그 자리에 펑덩 물앉으며 비자루를 떨구었다.

《흐아 흐아 흐아…》

룡마루를 들었다놓는 웃음소리와 함께 다가오는것은 왜군도 구국군도 토비도 아닌 새 군복을 름름하게 차려입은 유격대원이다.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빤히 쳐다보다가 두손을 번쩍 쳐들며 매달렸다.

《에그- 이게 내 아들이구나!》

《어머니, 방금전에 김일성장군님께서 저를 유격대에 받아주시였어요!》

《이런 고마운 일이라구야! 어디 보자.… 어디 좀 보자.》

어머니는 군복을 입은 아들의 모습이 너무 대견스러워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며 가슴팍을 만져보고 돌려세우고 잔등이며 군복바지가랭이를 쓸어만져보았다.

《어째 나는 잘 안 보이는구나.…》

《우니까 그렇지요!》

아들은 손바닥으로 어머니의 눈물을 훔쳐주었다.

《봉남이는 어디 갔어요?》

《학교에 갔다.》

이때 밖에서 콩당콩당 뛰여오는 소리가 나더니 봉남의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할마- 할마니-》

역시 정지문이 활짝 열리며 봉남이가 뛰여들어와 삼촌은 보지 못하고 할머니의 품에 날아들었다.

《할마니, 아동단에 들었다. 나 아동단원이다!》

허씨는 손자의 머리칼이며 볼을 쓰다듬고 치마자락으로 코밑을 닦아주었다.

《에그, 아동단원이 코가 한발이나 나오다니?》

봉남이는 바지괴춤을 올리며 코물을 후룩 들이켰다.

허씨는 손자를 창억에게 돌려세웠다.

《이녀석아, 삼촌을 좀 봐라!》

유격대군복을 입은 삼촌을 알아보자 봉남이는 할머니의 품에서 깡충 뛰여올랐다.

《삼촌!》

《봉남아!》

창억이는 조카를 덥석 안아 머리우에 높이 쳐들었다.

《자, 너는 아동단원이구 나는 유격대원이다!》

《아, 총!… 총!… 삼촌이 총도 멨구나!》

《멨-다-》

창억이 봉남이를 방바닥에 내려놓으니 그 아이는 대뜸 총탁을 가슴에 걷어안으며 한번 메보자고 졸라댔다.

그러자 할머니가 손자의 편역을 들었다.

《한번 메보게 하렴, 아무렴 사내대장부가 총에 깔리겠니? 삼촌이 유격대에 들 날을 얼마나 기다렸다구.…》

창억이는 벙글거리며 봉남의 어깨에 총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아주었다.

총의 무게가 실리자 봉남이는 흠칫 뒤걸음질쳤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익으며 똑바로 서서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리고는 발을 기운차게 구르며 정지간을 돌아갔다.

《야-야- 만세- 만세-》

허씨는 그 모습이 장하여 손벽을 치며 웃어댔다.

봉남이는 창억의 앞에 와 멈춰서서 그를 쳐다보며 챙챙한 목소리로 물었다.

《삼촌, 유격대가 되면 왜놈 〈천황〉을 잡아온다구 했지?》

《허허허, 그래…》

《이 총을 가지구 잡아올수 있니?》

《있다, 있구말구. 이제 〈천황〉놈을 이 소왕청골안에 끌어오면 재판을 열게 될테니 그때 너두 한마디 해라.》

《야-》

봉남이는 기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맴돌이치다가 문을 차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동네아이들에게 자랑하러 나가는 모양이다. 울바자 저쪽에서 달려가는 봉남의 부르짖음소리가 들려왔다.

《차돌아- 우리 삼촌 유격대가 됐다- 총을 탔어-》

아이의 목소리는 멀어져갔다.

허씨는 방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여보 령감-! 아직도 뭘하시오?》

창억이는 저으기 놀라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니, 방에 아버지가 계셔요?》

《음…》

허씨는 갑자기 목소리를 죽여 큰 비밀을 귀뜀해주듯 손시늉을 써가며 속삭였다.

《너는 아무것두 아니다. 간밤에 장군님을 모시고 토지개혁준비위원회라는걸 내오는 모임을 가졌는데… 나는 아직두 꿈같다.… 위원장에 리재명회장을 앉히구 위원 여섯명을 내왔는데 글쎄 장군님께서 너의 아버지를 위원에 선거하시구 가결을 물을 때 제일선참으로 손을 들어주시였단다.》

《예?》

《위원이다!》

《일자무식인데 위원을 어떻게 지내요?》

《그래서 밤새 끙끙 앓으셨다. 밭들에 등급을 매기는 일을 맡았다누나. 여기 어느 밭이 좋구 나쁜거야 저 령감한테 훤하지 않겠니. 목책에다 사람들 이름자만 써주면 전에 편지랑 좀 뜯어봤으니까 몇등급이라구 표를 하는게야 하겠지. 걱정할건 없을것 같다.… 이제 목책을 들구 위원회에 나간다누나.》

《목책이요? 아버지가 목책이요? 히야-》

창억이는 어머니의 두손을 덥석 잡았다.

《어머니, 우리 집이 이게 어떻게 된게요?》

허씨는 곧추 세운 무릎을 두손으로 쓸어만지며 생각깊은 눈으로 문쪽을 바라보았다. 밝은 미소가 어린 어머니의 얼굴은 한결 젊어보였다.

《저 문이 열릴 때면 늘 가슴이 덜컹덜컹했는데 이제는 기쁜 소식만 날아드는구나. 우리 어떻게 일하문 장군님은덕을 갚을수 있겠니, 그저… 그저… 나는 그 생각뿐이다.》

이때 사이문이 열리며 웃방으로부터 두루마기를 입고 검정보자기에 네모반듯하게 싼것을 한손에 쥔 김진세가 정지간으로 내려왔다.

그는 엄엄한 얼굴로 아들을 흘깃 돌아보고는 문쪽으로 향하였다.

《너는 군대가 됐다면서 집에는 왜 드나들며 이 야단이냐?》

《아버지, 그런게 아니라…》

창억이는 무엇이라고 딱히 짚어 말할수는 없으나 크게 달라진 아버지의 위세에 어리벙벙해져 다음말을 잇지 못하였다.

《총을 잡은 병정이 에미품이 그립던가?》

김진세는 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창억은 어머니를 돌아보며 놀랍다는듯 눈웃음짓고는 제법 유격대원다운 말투로 대답했다.

《사령관동지께서 집에 가서 인사하고 오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음… 장군님께서…》

김진세는 신발을 서둘러 신으며 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회의가 있어 너하구 긴 얘기를 못한다.》

창억이는 아버지의 입에서 처음으로 듣게 되는 그런 말이 또다시 놀라와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허씨도 사립문까지 따라나와 그들을 바래웠다.

사립문밖에까지 나가 바람결에 귀밑머리를 날리며 그들의 뒤모습을 지켜보는 허씨는 문득 가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였다. 이 기쁜날에 며느리까지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싶은 생각이 가슴을 허비여서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랑가랑 피여올랐다.

(저희들만 잘되였다구 기뻐 우쭐대면서 그 애 말은 한마디두 없지… 애비나 자식이나 다 같아. 에그, 남정들 마음이란 어째 저리 모질가…)

허씨는 원망의 눈으로 멀어져가는 령감과 아들의 뒤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마을길에 나선 김진세와 김창억은 뒤에서 어떤 눈이 자기네를 지켜보고있는지 모르고 활개를 저으며 걸어갔다.

김진세는 아들더러 자꾸 앞에 서라고 했다.

창억이는 아버지의 심정이 짐작되여 앞에 나서서 몸을 더 억척스럽게 놀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늘은 전에없이 더 파랗게 높아지고 시원하게 틔여보였다. 여러 마리의 새들이 고운 목청으로 지저귀며 서로 쫓거니 쫓기거니 하면서 머리우에서 날아돌았다.

창억이 눈살을 찌프릴사하고 그 새들을 쳐다보며 벙글거리는데 뒤에서 아버지의 엄한 음성이 들렸다.

《네가 어떻게 하고 유격대에 들었느냐. 남이 한번 훈련하면 너는 백번 하구… 남들이 자도 너는 자지 말고 배워야 한다.》

《아버지, 걱정말아요. 내가 힘이 모자라요 총쏠줄 몰라요? 그전에 장포리도 총쏘는걸 보구 내 눈은 매눈이라고 했는데 걱정말아요.》

《글쎄 장군님한테 너를 맡겼으니 걱정이야 무슨 걱정이겠니.》

창억이는 아버지를 안심시키느라고 총을 추슬러 바로메고는 몸을 의젓하게 펴고 걸음을 척척 옮겨보였다. 그는 이렇게 한동안 걸어가노라니 위원이 된 아버지를 앞에 세우고 걷고싶어져 로인더러 앞서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김진세가 아들의 심중이 가늠이 되여 수염밑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원… 누가 볼라…》

《챠, 앞서라는데!》

김진세는 아들에게 떠밀리워 지는척 하고 앞에 섰다.

그는 두루마기는 걸치였으나 등이 구붓한데다가 걸음걸이며 활개를 젓는것이 볼품이 없었다.

창억이는 댓걸음뒤에 따라가며 머리를 기웃거리다가 나무라는 소리를 했다.

《허리를 꿋꿋이 펴라요, 쟈, 이거야 등짐을 지고가는 걸음이지 어디… 이젠 위원이 됐는데 활개랑 좀 크게 젓지 않구.》

《그만둬라, 생긴대로 걸으면 되지 허리가 굽었다구 체면이 깎이겠니?》

김진세는 이윽고 아들과 헤여져 토지개혁준비위원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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