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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회


제 4 장

6

매달 네번째 일요일은 녀교원합숙의 거주자들이 가정방문을 하는 날이다. 두 처녀가 다 가정방문이라면 극성을 부리였다.

아침설겆이를 끝낸 정애경은 식전산보를 나간 송금주를 기다리느라고 합숙방에서 서성거리였다. 무슨 산보가 그리도 긴지 8시에 합숙을 나선 처녀가 9시가 다되도록 돌아올줄 모른다. 식전산보건 식후산보건 30분을 초과한적 없는 송금주의 행보가 오늘은 첫시작부터 게으름을 부린다.

왜 이렇게 늦어질가. 식전에 합숙을 나설 때는 틀림없이 산보를 하겠다고 했는데 1시간이상 밖에 나가 흔들거릴 송금주가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송금주에게는 딴장이나 딴주머니라는게 있을수 없다. 그는 칼로 수박을 베여 속살까지 다 보이게 하듯이 자기를 다 드러내놓고 사는 투명한 처녀이다. 더군다나 우리 둘사이에는 비밀이라는것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늦어질가. 혹시 길가에서 동창생이나 학부형을 만나 대장편과 맞먹는 사설이라도 엮어대는게 아닐가. 거리에만 나서면 세사람건너 한명정도씩 친지나 친구와 맞다들리게 되는것이 영천땅이다. 왜 이렇게 늦어질가. 피치 못할 사정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있는것이 틀림없다.

가만, 산책을 하는셈치고 슬렁슬렁 마중이나 가볼가.

속구구로 시간을 보내느니보다는 오히려 그게 더 실리적이다.

정애경은 거울앞에서 앞머리를 비다듬은 다음 신장에서 신발을 꺼냈다.

바로 그때 부엌문이 덜커덕- 하고 열리였다.

《수태 기다렸겠구나.》

사람보다 목소리가 먼저 문설주밑으로 날아들어왔다. 손에 큼직한 책보따리를 든 송금주가 그 늘씬한 몸으로 문을 가득 채우며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합숙에 들어섰다. 온몸에서 여름날 아침의 청신하고 상쾌한 정기가 풍기였다.

《어랍쇼, 식전산보가 늦어지길래 이상하다 했더니 공작을 하댔구나.》

오랜 기다림에 지친 정애경은 이렇게 비양거리면서도 짝패의 손에서 책보따리를 받아들고 아래방으로 들어갔다. 그 보따리를 장판바닥에 쿵-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넌 그저 온통 우리 마을 도서실의 재산을 불굴 생각뿐이구나.》

《잘두 알아맞춘다. 이건 도서실에 비치할 책들이 아니라 사범대학강의록이야.》

송금주는 보자기의 매듭을 풀고 정애경의 앞으로 강의록틀을 와락 밀어놓았다. 그리고는 짝패가 차려놓은 조반상앞에 다가앉아 저가락으로 풋절이 한잎을 맛나게 집어먹었다.

《식전산보후의 밥맛은 정말 꿀맛이야.》

그는 볼이 미여지게 밥을 떠넣으면서 독백같은 말을 또 하였다.

하지만 정애경은 들은둥마는둥이였다. 그는 압도당한 심정으로 평양사범대학명판이 찍힌 책들을 한권한권 집어들고 그 과목명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조선문학사, 조선어문법, 철학, 정치경제학…교과서가 자그만치 수십개나 된다.

《금주, 너 혹시 사범대학에 다니고파 그러는게 아니야?》

정애경은 그 크고 광채가 넘치는 눈으로 송금주의 얼굴을 잡아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니고파.》

《응, 그러니 입학시험준비를 하자는거구나.》

송금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험준비는 무슨 시험준비, 너나 나나 교육간부학교를 졸업한지 이태밖에 안되는데 대학에 가겠다고 부시럭거릴 처지가 됐니.》

《그럼 이 책들은 뭣하려구 가져왔어?》

《둬두고 참고로 보자는거지.》

송금주는 무슨 큰 시름거리라도 안은 사람처럼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나서 정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난 말이야, 교단에 설 때마다 내 지식이 너무나도 빈약하다는걸 느끼군 해. 백이나 천을 알고 하나를 가르쳐야 할 우리들이 아니야. 그런데 나나 너의 지식은 교육간부학교시절에 배운 그 계선에 머물러있거던. 교원이 중학생들을 가르치자면 적어도 사범대학졸업생수준이야 돼야지. 그래서 난 이제부터 사범대학강의록을 가지고 독학을 하자는거야.》

송금주는 무슨 일이나 표가 나게 한다. 100년은 몰라도 10년은 앞을 내다보고 만사를 설계한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종심이 깊고 넓다.

조학문선생이 송금주를 가리켜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옳은 말이다. 내가 감히 엄두도 못내는 일을 그는 식은죽먹듯이 해치운다. 나하고는 사고방식부터가 다르다. 대학강의록이라! 그건 내가 상상도 못한것이다. 정말 멋있는데…

정애경은 자기자신이 별로 왜소해진것 같은감을 느끼며 책보따리 맨 밑바닥에 있는 학습장을 집어들었다. 표지에 《100가지 물리상식》이라고 쓴 학습장이였다.

《이것 보지, 우에서 다과목다과목하니까 이제는 물리과목까지 넘겨다보는구나, 욕심쟁이같은게.》

《이봐, 그런 험터구는 씌우지 말어. 남의 속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럼 그게 아니라는거냐? 아니라면 보기만 해도 골치아픈 물리상식이라는 책은 왜 가져왔어?》

《왜는 왜야, 공부해보자는거지. 너도 알다싶이 나야 중학시절부터 물리, 수학과목때문에 애를 먹지 않았니.》

《그렇다고 문학교원이 물리까지 감당할수야 없지 않아.》

《감당하자는건 아니지만 복습해두자는거지. 자동보총수가 기관총의 사격원리를 배우듯이 말이야. 요전날 상식공부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송금주는 마지막숟갈의 밥을 급히 삼키고나서 심각한 표정으로 정애경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느닷없이 물리상식 세가지를 묻지 않겠니. 그런데 난 세가지중 한가지만 대주고 두가지는 대주지 못했구나, 얼마나 얼굴이 뜨끈뜨끈해나던지. 나는 그 순간 내 지식이란 정말 얄팍한것이였구나 하는 자책을 했어. 그리구 전공과목과 함께 린접과목을 통달하지 않고서는 교원구실을 온전히 할수 없다는걸 뼈저리게 깨달았어. 그래 산보를 하고 돌아오다가 고중때 우리에게 문학을 배워준 동일선생을 찾아갔지 뭐. 그 선생에게 마음속 고충을 죄다 털어놓았더니 이 책들을 주는게 아니겠어.》

정애경은 가정방문을 가면서도 줄곧 송금주가 하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금주는 정말 겸손하고 허심하고 진취적이야, 그리고 자기에 대한 요구성이 엄청나게 높구. 사실은 금주의 고충이자 내 고충이지. 나도 금주처럼 자기자신을 랭철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정애경이 오늘 찾아간 가정은 새 학년도 첫 결석자들인 강영호와 김진남이네 집이였다. 이 두 학생은 어제 학교에 등교하지 않고 고덕탄광운동장에서 있은 고덕탄광축구팀과 김책제철소축구팀의 대항경기를 몰래 구경하였다. 그 두 소년때문에 2학년 2반의 토요일출석률은 96프로로 떨어지는 부끄러운 기록을 남기였다. 정애경은 학급반장과 두 학생이 속해있는 소년단반장을 호되게 닦아세웠다. 물론 지난밤에는 잠도 설치였다.

요즈음 정애경의 기분상태는 저기압이였다. 총점 1위에서 3위로 학급의 종합적인 순위가 곤두박질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그는 웃음도 잃고 밥맛도 잃어버리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하바닥에서 벌벌기며 수모를 당하던 학급들이 새해에 들어와서는 앞선 학급들을 뒤에 떨구고 쾌속으로 전진하였다. 총점 8등에서 오래동안 문기적거리던 송금주네 학급도 총점 5위의 우수학급대렬에 들어섰다. 이 학급의 변화에서 두드러지는것은 학생들의 수업규률이 180도의 급전을 한것이다.

정애경은 온몸에서 기력이 죄다 빠져달아난것과 같은 허탈을 느끼며 6월 한달을 보냈다. 눈알이 쑥 빠지게 강영호와 김진남을 답새기고 부모들까지 만나고나니 그사이 옹칠대로 옹쳐진 마음속 어혈이 조금 풀리는듯 하였다. 출석률은 두말할것도 없이 100프로계선으로 다시금 올라갈것이다. 강영호와 김진남의 결석도 우발적인것이니 재탕할 념려는 없다. 그는 모범분단칭호쟁취운동에 궐기하는 방법으로 학급의 기세를 앙양시키려고 결심하였다. 시내를 한바퀴 돌고나니 무죽하던 마음도 한결 개운해졌다.

지금쯤은 송금주도 가정방문을 마치고 돌아왔을것이다. 그의 가정방문에는 늘 학생교양이라는 기본목적외에 도서구입이라는 추가적인 조항이 더 붙군 하였다. 그동안 학부형들에게 호소하여 수집한 도서가 자그만치 300권이나 되였다. 송금주가 책방에서 2년가까이 모은 도서들과 교원들이 희사한 책들까지 셈에 넣으면 600권정도는 마련된셈이였다.

가만, 송금주네 학급이 8위로부터 5위로 껑충 뛰여오르게 된 비결은 무엇일가. 그의 일과나 주간의 움직임을 보아서는 눈에 뜨이게 달라진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급의 면모는 시시각각으로 달라져가고있었다. 그것은 리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학급을 움직이는 송금주의 묘술은 무엇일가. 그는 바글바글 끓지도 않고 학생들에게 강행군을 시키지도 않는다. 그저 무사태평한 우차부처럼 생활의 길을 따라 슬렁슬렁 걸어간다. 그의 뒤로는 학생들이 늘 엄지닭을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따라다닌다. 송금주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아이들은 언제나 한모양, 한모습이다.

정애경은 자기가 총점 1, 2위로 올라선 학급들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도 총점 5위권내밖에 들지 못한 송금주네 학급에 왜 그다지나 신경을 쓰는지 스스로도 알수 없었다. 어쩐지 그가 조만간에 총점 1위나 2위로 솟구쳐오를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송금주는 승승장구할것이다. 그라고 왜 자기 학급을 총점 1위의 학급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겠는가. 그의 신념이나 열정, 투지, 헌신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섬뜩할 정도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오싹케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륙상으로 치면 송금주는 장거리선수의 계렬에 속한다. 그렇다면 정애경, 너는? 나는 단거리선수다. 무엇이 딸리는가? 호흡이 딸리고 지구력이 딸린다. 장거리를 달리자면 쉬염쉬염 가야 하는 선수다. 교육은 단거리선수가 아니라 송금주와 같은 장거리선수들을 요구한다.

상념의 개울물은 끝없이 조잘대며 흘러간다. 그 개울물에는 송금주라는 쪽배와 정애경이라는 쪽배가 늘 나란히 떠다닌다. 송금주가 없는 정애경을 생각할수 없듯이 정애경과 동떨어진 송금주를 상상할수 없는것이 그들이 엮어가고있는 우정이다.

군병원근처의 탄광사택마을을 떠난 정애경은 읍중심부의 십자로를 지나 체신소앞거리에 들어섰다. 혹시 가정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송금주의 모습이라도 보이지 않나 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였지만 허사였다. 원래 송금주는 네거리로 잘 다니지 않는다. 그는 네거리를 딱 지나야 할 경우에도 일부러 골목길로 몸을 사려 요리조리 에둘러서 합숙으로 돌아오군 한다. 과연 알다가도 모를게 사람의 성미다. 그래서 사람의 속통을 요지경같다고들 하는가.

영화관모서리를 직각으로 돌아 유치원앞거리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비가 내린지 이틀밖에 안되는 때여서 발에 와닿는 눅눅한 땅의 감촉이 무척 감미롭다. 창을 댄 구두밑에서 도시의 포도우를 걸을 때와 같은 딸가닥소리가 안 나는게 유감스럽지만 토사도로를 밟는 멋은 그것대로 제나름의 정서를 자아낸다.

체신소앞거리를 지날 때부터 목덜미를 물고 검질기게 따라오는 달구지바퀴소리에 정애경의 상념은 부서졌다가는 모여들고 모여들었다가는 다시 부서지군 하였다. 그는 달구지옆에 잠간 비켜서서 나무꼬챙이로 구두창에 발린 흙밥들을 긁어냈다. 그러는 사이에 달구지는 삐걱거리는 굴대소리를 내며 저만치 앞으로 굴러갔다.

정애경은 흙밥이 게발린 나무꼬챙이를 풀숲에 던지고나서 무심결에 앞서가는 달구지를 바라보았다. 백로지로 정성껏 포장한 책퉁구리들도 좀 이채로운것이였지만 그보다 더 유표한것은 하얀 모시적삼을 입은 우차부처녀의 모습이였다. 차부석에는 격자직남방샤쯔를 입은 사나이가 앉아있었는데 그 사나이를 보는 행인들의 눈길은 하나같이 곱지 못하였다. 《고약한 사람같으니, 녀자에게 고삐를 쥐우고 자기는 호강스럽게 달구지에 앉아가다니. 저런 인사불성도 있나.》하고 그 눈들은 호되게 질책하는것 같았다. 정애경도 그런 눈으로 그 사나이를 쏘아보았다. 저것 보지, 인력거라도 탄것처럼 희색이 만면해서… 어쩜 저렇게도 고약할수가 있을가.

덜커덩거리며 굴러가던 달구지가 돌연 갈림길앞에서 정지하였다. 우차부처녀는 고삐를 잡은채 달구지가까이로 다가오는 정애경을 정면으로 바라보고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걸려는 눈치였다.

《동무, 말 좀 묻자요. 이 근방에 영천중학교 교원사택이 어디 있나요?》

《저하구 같이 가면 돼요.》

정애경은 짤막하게 실무적인 대답을 하고나서 달구지를 앞질러나가 우차부처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기였다. 고삐를 잡고 걸어가는 처녀의 거동은 어딘가 모르게 서투르고 어색해보이였다. 차림새를 보든지 하얀 피부색갈로 보든지 농촌물을 먹고 사는 처녀같지는 않았다.

《교원사택에 누굴 만나러 가나요?》

정애경이 지나가는 말로 건성 물었다.

《녀교원합숙에… 송금주라구…》

우차부처녀도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송금주라는 그 한마디에 정애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어떤 예감이 번개같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전쟁때 매를 맞고 다리를 못 쓴다는 그 정문호오누이로구나, 송금주가 그토록 경의를 품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사람, 정문호가 아니고서야 어찌 남자가 녀자에게 소고삐를 쥐우고 자기는 달구지에 앉아갈수 있겠는가. 저 사람은 장서가로 소문난 정문호 그리고 이 처녀는 그의 손발이 되여 한주일에 한번씩 책방출입을 한다는 누이동생 정채순일것이다. 오늘이 바로 책방에 오는 날인지도 모른다. 그래, 틀림없어. 저 책통구리들이 그걸 말해주고있지 않는가. 읍에 왔던김에 송금주를 만나고싶었을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이 저렇게 불편한 몸으로 왜 송금주를 찾아올가. 우리마을 도서실을 구경하려고…경쟁심이 생긴게지, 아니면 호기심이? 정애경은 달구지에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려고 슬그머니 뒤로 고개를 돌리였다. 송금주가 그려보이던 정문호의 초상과 실물을 대조해보고픈 얄궂은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좀 뻔뻔스럽다고 할만치 그 사나이의 얼굴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표상과 실물은 일치하였다.

《실례지만 정문호아저씨가 아닙니까?》

정애경은 그 사람의 눈과 자기 눈이 맞부딪치려는 순간 용기를 내여 물었다. 사나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렇소.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처녀동문 정애경선생일게구…》

정애경은 눈이 뗑그래졌다.

《어마나, 제가 정애경이라는걸 어떻게?…》

《내가 눈치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라는걸 선생이 알리가 없지.》

《눈치대학이라니요?!》

정문호의 수수께끼같은 말에 정애경은 혼란에 빠지였다. 정채순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하고 소리내여 웃었다. 정문호도 그가 갈팡질팡하는 꼴을 보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였다. 잠시후 그는 웃음을 거두고 정색해서 말했다.

《내 독자들중에 우리 마을 도서실내막을 잘 아는 친구들이 있더구만. 그 친구들이 송금주선생과 정애경선생 애기를 자주 하댔소. 초상묘사를 어찌나 방불히 하던지… 가만 보니 두 선생한테 홀딱 반한 눈치야.》

《최창화, 엄호철동지들도 아저씨의 독자들인가요?》

《하하, 애경선생눈치도 이만저만이 아니구만. 우리 마을 도서실내막을 나한테 소개한건 바로 그 사람들이요. 내 그 사람들 말을 듣고 두 선생한테 감탄했더랬소.》

정애경은 《두 선생》이란 말을 얼른 부정하였다.

《우리 마을 도서실주인공은 송금주선생입니다. 전 그의 조수역할만 했을뿐입니다.》

《글쎄 다들 저렇다니까. 공로는 혁명동지들에게 돌리고 자기자신은 뒤전으로 물러서고… 그래서 천리마시대 인간들이 아름답다는게 아니겠소. 내 다 들었소. 정애경선생이 송금주선생을 어떻게 도와주었는지.》

그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달구지는 녀교원합숙 앞마당에 당도하였다. 정애경은 합숙문을 열고 《금주선생!》, 《금주선생!》하고 송금주를 찾았다. 대답이 없었다.

《가정방문을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군요. 정말 일이 공교롭게는 됐네.》

《그럼 금주선생이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소.》

정애경은 펄쩍 뛰였다.

《우리 합숙을 코앞에 두고 밖에서 기다린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그러면 우리가 섭섭하지 않습니까.》

《내 몸에서 나는 니코틴냄새가 합숙공기를 오염시키면 어찌겠소. 여기도 좋으니 달리 생각지 마시오.》

정문호는 그 니코틴냄새가 얼마나 지독한것인가를 시험이라도 해보이려는듯 바지주머니에서 쌈지를 꺼내여 눈깜짝할 사이에 마라초를 한대 말아 물었다. 그리고는 불을 붙여 한모금 맛나게 연기를 삼켰다가 삼단처럼 뿜어내치였다.

합숙앞마당에는 담배내와 함께 성냥 탄 냄새가 가볍게 떠돌았다.

《그러면 도서실에라도 들어가십시다. 송금주선생이 그동안 어떤 일을 얼마만큼 해놓았는지 궁금하실텐데… 금주선생이야 아저씨의 오랜 독자가 아닙니까. 사실 금주선생이 우리 마을 도서실을 꾸리게 된것도 아저씨의 서재에 드나든게 동기로 되였다고 했어요. 결국은 아저씨네집 서재가 새끼치기를 한셈이지요.》

《애경선생이 그렇게 말하니 내 어깨가 으쓱해지는구만. 이 합숙에 도서실이 일어선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 나 혼자 속으로 왼심을 쓴건 사실이요. 몸이 온전치 못하니 힘으로 도와줄수는 없구…그래서 생각해낸게 책을 기증하자는거였소. 이게 바로 그 책들이요.》

정문호는 등뒤의 책퉁구리 하나를 손으로 툭 건드려보이였다. 정애경은 입을 딱 벌리며 손벽을 마주쳤다.

《어마나, 이 많은 책을요?》

《모두 300권이요. 힘들게 구한 책들이지만 송금주선생을 위해서는 아까울것이 없소. 더 많은 사람들에게 광명을 주려는 그 선생의 지향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거요.》

정문호는 동생을 옆으로 불렀다.

《채순아, 이 책들을 도서실로 날라들여라.》

정채순은 오빠의 분부가 떨어지기 바쁘게 달구지우에서 책퉁구리들을 끌어내리였다. 책은 자그만치 15퉁구리나 되였다. 정애경이 도서실 나들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그 책보따리들을 받아 서가들사이에 쌓아놓았다. 그는 도서실내부를 구경하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정문호를 보자 살뜰하게 말했다.

《문호아저씨, 오셨던김에 서재구경을 하셔야지요.》

《고맙소. 그럼 한번 구경할가…》

《보고 조언도 주셔야지요.》

정애경은 정채순과 함께 정문호를 량옆에서 부축해가지고 도서실로 들어갔다. 정문호는 방안에 떠도는 송진향기에 코를 벌름거리며 무슨 흠집이라도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서재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는 해방직후 문맹퇴치운동을 할 때 가두에서 널리 불리우던 《글장님된 애달픔을 한탄만 하지 말고》하는 노래를 입속으로 연송 흥얼거리며 매 서가들을 일일이 다 돌아보았다.

《처녀선생들의 통장머리가 보통이 아니구만. 도서실을 아주 잘 꾸렸소. 방도 아늑하고 서가도 깨끗하고 책분류도 잘해놓았소. 이런 도서실에 책을 기증하는거야 아깝지 않지.》

정문호는 도서실에서 나와 달구지에 오른 다음에도 그냥 송금주에 대한 찬사를 련발하였다. 정애경은 송금주가 자기 귀로 그 찬사를 직접 듣지 못하는것이 안타까왔다. 기증받은 책 300권은 인차 제 눈으로 보게 되겠지만 정문호아저씨의 얼굴에 떠도는 저 미소, 저 찬탄의 눈길이야 두번다시 재현시킬수 없지 않는가.

《문호아저씨, 도서실공사에서 큰몫은 탄광에서 오신분들이 제꼈습니다. 만삼아저씨, 창화동지랑 호철동지랑 수고가 많았지요. 정말 쉽지 않은분들이예요.》

정애경은 송금주의 마음까지 합쳐 그 세사람이 한달동안 도서실을 일떠세우기 위해 얼마나 성실하게 일해왔는가를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정문호는 송금주를 기다리느라고 도서실앞에서 한시간쯤 지체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정애경은 정문호가 떠나간 다음에도 그가 남기고간 여운속에서 오래도록 헤여나오지 못하였다. 그는 합숙에 들어가 점심차비를 할 생각도 잊고 도서실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소고삐를 잡은 누이동생을 앞세우고 책퉁구리들이 가득 실린 달구지에 앉아 우리 마을 도서실로 찾아오던 정문호의 준수한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서 사물거리였다. 그 어떤 명화도 그 순간의 그 화폭보다는 더 훌륭하고 아름다울수 없을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이처럼 아름다울수 있을가. 정문호의 지성에 비하면 내 접대가 너무나 소흘했어. 송금주가 있었더라면 인상깊은 장면을 또 보여주었을것이다.

송금주, 그는 인정의 소나기속에 파묻히였다. 송금주는 보기 드문 행운아이다. 사람마다 그를 돕지 못해 안달이다. 어쩌면 2년도 못되는 사이에 그는 그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였을가. 어쩌면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벗으로 만들수 있었을가?

정애경은 방금전에 정문호가 기증하고간 책퉁구리속에서 손에 잡히는대로 얄팍한 책 한권을 뽑아들었다. 언제인가 책방의 매장에서 얼핏 본적이 있는 《자석의 원리》라는 소책자였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후루룩 책갈피들을 넘기다가 여러가지 형태의 자석들을 그린 삽화에 눈길을 박았다.


막대자석 , 말발굽자석, 원형자석…


중학교때 남학생들한테서 원형자석을 빌려다가 송금주와 함께 줄칼로 쓸어서 얻은 쇠가루를 종이장에 널어놓고 장난삼아 자석의 원리를 시험해보던 때의 일이 문득 기억속에 떠올랐다. 자석을 종이장에 올려놓자 그 쇠가루들은 자석의 변두리를 따라가며 한 알갱이의 락오자도 없이 꽃모양으로 달라붙었다. 그 광경이야말로 참으로 신묘한것이였다.

원형자석을 그린 삽화를 보는 순간에 송금주의 얼굴이 느닷없이 떠올라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그래, 송금주는 이 자석과 같은 흡인력과 친화력을 가지고있는 처녀야. 아무리 랭담한 심정을 가진 사람도 송금주라는 자석앞에서는 영낙없이 끌려들어 가거던. 리신태선생이 어쩌구저쩌구하면서 송금주에게 공연히 트집을 걸었지만 그런 인물들은 극소수이지.

그는 군당과 군인민위원회, 군민청이 알고 탄광이 아는 인물로 되였다. 아니, 총애하는 교원으로 되였다.

정애경, 너는 아는가? 그 시작점이 도대체 어디에 있고 그 비결이 무엇인지? 시작점은 갱견학이고 그 비결은 자기 몸을 서슴없이 내대는 헌신성, 창조성이다. 그렇다, 갱견학을 떠난 그날 아침부터 그와 나는 서로 다른 인생의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송금주가 그려가는 악보는 내가 쉽사리 모방할수도 없고 복사할수도 없는 성질의것이다. 송금주는 무슨 일에서나 터를 넓게 잡고 씨앗을 깊이 묻군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꾸는데 온갖 정력과 진심을 다 바친다. 목전의 리익이나 열매 같은것은 그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금주야, 만사람의 사랑속에 사는 너야말로 행복한 처녀다. 네가 부럽구나. 이건 진정이야.

정문호가 떠난지 5분도 못되여 송금주가 가정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정애경의 설명을 들은 송금주는 도서실문을 열고 아직 포장을 헤치지 않은 책퉁구리들을 들여다보다가 나직이 《애경이!》하고 뇌이였다. 그리고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눈물을 뚤렁 떨구었다.

《애경이, 내 얼른 문호아저씨한테 인사하고 돌아올게.》

송금주는 이런 말을 남기고나서 벼락같이 사라졌다. 10분이 지난 후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이 턱에 닿아서 다시 도서실로 돌아왔다. 온몸에서 단내가 확확 풍기였다.

《그래 만났니?》

정애경이 《쯧쯧.》하고 혀를 차다가 말했다.

《응, 읍공업품상점앞에서 따라잡았어. 애경이,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아름다와질수가 있을가!》

송금주는 숨을 가라앉히느라고 어깨를 한뽐씩이나 올렸다내렸다하면서도 북받쳐오르는 감흥을 들뜬 목소리로 토로하였다.

《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로 사는게 우리시대 인간들의 투쟁방식이 아니니.》

정애경은 합숙에서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나와 짝패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홍조가 물들어 더더욱 싱싱하고 씩씩해보이는 송금주의 얼굴에서는 시종 미소가 떠날줄 몰랐다.

《애경이, 지금 내 심장에서 일어나고있는 박동을 전기에네르기로 전환시키면 공장 한개를 돌리고도 남을만 한 전기가 나올거야.》

그는 이렇게 떠들어대며 도서실에 들어가 정문호가 기증해온 책퉁구리들을 터쳐 서가에 꽂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꽝- 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서가들이 넘어지고 책들이 와르르 쏟아져내리며 도서실안을 란장판으로 만들었지만 부뚜막에서 점심차비를 하던 정애경은 졸지에 일어난 이 불상사를 전혀 감촉하지 못하고 칼도마장단만 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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