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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회


제 4 장

5

5월의 밤이였다. 두 처녀는 여느날보다 저녁을 1시간정도 일찍 치르고 덤벼치면서 나들이차비를 하였다. 학교에서도 그날은 예정되였던 저녁일과를 다음날로 미루고 퇴근시간을 앞당기였다. 오늘 밤 영천공설운동장에 설치된 가설무대에서는 중앙교향악단의 순회공연이 진행된다.

열흘전에 함북땅에 도착한 악단은 청진지구에서 닷새가량 공연하다가 라남, 경성, 어랑, 명간을 거쳐 영천까지 흘러왔다. 낮에 고덕탄광구락부에서 탄부들을 위해 공연을 하고 길주, 김책방향으로 남하하려던 교향악단 배우들은 영천사람들의 절절한 요청에 따라 계획외의 로천공연을 하기로 하고 지급으로 공설운동장에 무대를 가설하였다. 영천땅이 생긴 이래 처음 선을 보게 되는 중앙예술단체의 출연이다.

이날은 온 군이 하루종일 격동상태에 있었다. 영천과 같은 산골군에 중앙의 예술단이 찾아왔다는것도 경사였지만 예술과는 거리가 좀 먼 자기네 고장사람들을 교향악감상능력을 가진 문명한 인간들로 보았다는 사실이 또한 사람들을 흥분시키였다. 송금주와 정애경도 내내 들뜬 기분에서 헤여나오지 못하였다.

두 처녀가 다 첫 생활비를 받아 해입은 도라지색조선치마저고리로 단장하였다. 정애경은 아까부터 거울앞에서 분첩으로 볼을 두드리며 송금주를 시까슬렀다.

《금주, 넌 그래 기어이 화장을 안하고 악단구경을 하겠다는거야?》

《그럼, 타고난 모습 그대로… 그게 얼마나 좋아.》

《내 보다보다 너같은 고집불통은 처음 본다. 처녀가 화장을 안하고다닌다는게 말이나 돼? 더구나 중앙에 있는 배우들이 평양바람을 안고 우리 고향을 찾았는데… 경사는 경사답게 맞이해야지.》

송금주는 아무 응대도 하지 않고 정애경의 어깨너머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비다듬어올리였다. 그들은 아까부터 화장을 하니 마니 하는 주제로 맹렬한 입씨름질을 하고있다.

《이것 보라구, 애경녀사. 내가 벌써 1년전에 교단에 서면서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나. 25살이 되기 전에는 화장을 안한다구.》

송금주는 자기가 한 말에 주해라도 달듯이 정애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였다. 정애경은 《흥.》하고 코바람을 불었다.

《무슨 외무성성명이라도 낸것처럼 그렇게 거들먹거리지 말어. 그래 아무런 구속력도 없는 그따위 성명때문에 스스로 화장의 자유마저 포기한다는게 말이나 돼?》

《이것 봐, 애경이, 난 네가 거울앞에서 화장을 하느라고 신고하는걸 볼 때마다 측은한 생각이 들군 해.》

《왜 측은하다는거야?》

《그런 중로동에서 시달리는게 가련하다는거지. 그리구 너무도 이른 나이에 소녀시절과 결별해버린게 애처로와보인다는거야. 이 송언니가 25살에 가서야 화장을 시작하겠다고 언명한건 두번다시 돌아올수 없는 소녀시절을 될수록 오래 끌어보려는 몸부림이라고 할가.》

화장을 끝낸 정애경은 크림통과 연지통, 분통을 마분지함에 쓸어넣고 나서 거울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는 무엇이 못마땅할 때마다 항용 하는 버릇대로 미간을 좁히고 눈살을 찌프리면서 송금주를 몰아댔다.

《금주, 슬프게도 넌 점점 완벽한 금욕주의자가 돼가는구나.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야. 왜냐하면 금욕주의자와 비금욕주의자가 공존하면 녀교원합숙이라는 우리 련맹이 해체될 위험이 있으니까.》

송금주는 상체를 뒤로 제끼고 멀리서 무슨 귀중품이라도 감상하는듯한 시늉을 해보이였다.

《그동안 우리 정녀사가 몰라보게 발전했는걸, 련맹이 해체될 걱정까지 다 하구. 이것 보라구, 우리 련맹은 그 어떤 풍파에도 끄떡하지않을 공고한거야. 자네 그런걸로 날 위협하지 말게. 그렇지만 오늘만은 가벼운 분화장을 하고 공연을 구경하겠어.》

송금주는 정애경의 화장품들을 당겨다가 벼락같이 분화장을 하였다.

벽시계를 쳐다보던 정애경이 갑자기 손벽을 마주치며 비명을 질렀다.

《어마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10분밖에 안 남았구나. 금주, 빨리 가자. 좋은 자릴 다 놓치겠어.》

《정말 그렇게 됐구나. 아무튼 우리의 이 입이 야단이야. 하루종일 찧고까불어도 피곤을 모르는게 녀자의 입이니까.》

두 처녀는 이런 말을 나누며 녀교원합숙을 황황히 나섰다. 공설운동장에 꾸려진 로천극장에서 국립교향악단이 저녁 7시부터 공연을 하게된다는 광고를 보고 시내 골목골목에서 사람들이 떼를 지어 운동장으로 밀려들고있었다. 대부분은 청장년들과 학생들이였지만 개중에는 가정주부들과 로인들, 소학교 학생들도 있었다. 관람자의 인원수를 제한하지 않는 로천공연은 그래서 더 흥성거리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중시하는것은 교향악보다도 중앙에서 자기네 고장에 큰 악단을 보내왔다는 그 사실자체였다. 그래서 그들은 들떴고 흥분하였다. 시골사람들이 교향악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운명》을 연주하든 《비창》을 연주하든 그건 상관이 없다. 중앙에서 보낸 교향악단을 자기네도 본다는 그 자부심 하나면 다였다.

송금주와 정애경에게 있어서 교향악단의 공연은 생소한것이 아니였다. 두해전에 이미 그들은 청진교원대학에 온 이 악단의 공연을 관람했었다. 그날 음악에 심취될대로 심취된 그들은 합숙방에서 온밤 소감을 나누느라고 잠을 못 이루었다. 송금주는 베토벤의 《운명》에 반했고 정애경은 챠이꼽스끼의 《백조의 호수》에 완전히 매혹되였었다.

《허재복선생이 이번에도 왔겠지?》

송금주가 정애경에게 묻는 말이였다.

《응, 이번에도 지휘는 그 선생이 한대. 딴사람이 지휘하면 어찌나 했는데…》

《좋구나. 온 육신이 선률과 리듬으로 빚어진것 같은 자그마한 사나이!》

송금주는 무슨 서정시라도 읊듯이 한팔을 허공중에 쭉 내뻗쳤다가 걸음을 못박아세우고 방금 자기가 한 말을 음미라도 하는듯 한 표정으로 눈을 슴뻑슴뻑하며 하늘가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정애경은 송금주가 그렇게 시흥에 취해있을 때의 모습을 제일 좋아하였다. 그는 자기자신을 랭철한 실무주의자라고 치부하는 반면에 송금주는 비관을 모르는 락천가라고 생각하였다.

청년들의 한떼가 그들의 앞으로 바람을 일쿠며 지나갔다.

《영천중학교 교원들이야.》

청년들중 한사람이 짝패들에게 두 처녀의 신분을 넌지시 튕겨주었다.

그러자 다른 청년이 《고운데!》하고 큰소리로 말하였다. 속생각을 감출줄 모르는 통짜배기들이다.

《키가 큰 처녀는 멋있구 눈이 큰 처녀는 곱구나.》

세번째 청년은 두번째 청년의 평가에 형상의 옷을 입히였다. 고운 처녀들만 보면 혀바닥밑에서 바람개비가 저절로 돌아가는 20대의 청춘시절이다. 멋있다는 말이나 곱다는 말이나 저울에 달면 어느쪽에도 기울지 않는 열닷냥이다. 어디에 가나 뭇시선들의 성화에 시달리는 고달픔도 고달픔이라고 해야 할가.

저녁어스름이 스며드는 공설운동장바닥은 구경군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가설무대 량옆에는 가느다란 통나무로 전주대를 세우고 100촉짜리 전등을 매달았다. 무대좌우의 전주대들은 1. 5m폭의 면막으로 가리워졌다. 그 전주대들은 꺾쇠로 고정시키였다.

황혼이 깃든 때였지만 대기는 아직도 따스하고 훈훈하였다. 어데서인가 아카시아꽃향기가 은은하게 실려왔다. 달크무레하고 쌉쌀한 봄의 훈향이 대기에 가득 서리며 페장마저 가볍게 해준다. 개막을 기다리는 구경군들의 한담으로 공설운동장은 명절날의 광장처럼 흥성거리였다.

여기저기서 터져오르는 말소리와 웃음소리들에는 새시대를 개척해나가는 근로자들에게서만 느낄수 있는 랑만이 넘치고있었다.

정애경은 악사들의 움직임을 멀리서 광폭으로 바라볼수 있는 군중석 뒤쪽으로 송금주를 이끌고갔다.

《왜 이런 으슥한 구석으로 날 끌고오는거야?》

송금주는 짝패의 손에 순순히 끌려가면서도 일부러 두덜거리였다.

이런 정황에서는 언제나 정애경이 주역으로 길잡이가 되고 송금주는 두덜거리면서 따라가는 처지에 놓이군 한다.

《청진서 구경할 때 앞자리에서 봤으니 오늘은 멀리서 감상하는게 좋지 않을가?》

《응, 그건 그래.》

갑자기 박수소리가 일어나는 바람에 두 처녀는 입을 다물고 무대쪽에 눈길을 보냈다. 무대 한복판에 설치되여있는 마이크앞으로 하얀 조선치마저고리를 입은 녀자가 나와 소개를 하였다.

《제1차 5개년계획에서 제시된 석탄생산과제를 기한전에 넘쳐수행한 고덕탄광 탄부들과 알곡고지점령을 위해 혁신의 불길을 높이는 군안의 전체 협동농민들과 지방산업공장 로동자들, 사무원들, 청년학생들에게 우리 교향악단의 전체 창작가, 예술인들은 열렬한 축하를 보냅니다.》

소개자의 소개는 박수소리에 파묻히였다가 다시 이어졌다.

《오늘의 공연에는 중앙교향악단 연주가들과 국립예술극장의 연주가, 성악가들도 참가하였으며 공연종목에는 우리 나라의 음악작품들과 함께 외국의 이름난 작곡가들의 작품도 포함되여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맨처음으로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 여기 지휘에 허재복!》

정애경은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라는 제명을 듣자 흥분을 걷잡지 못하고 두손을 모아잡았다. 몇해전에 청진교원대학 강당에서 공연할 때에는 볼수 없었던 우리 나라 관현악작품이였다. 소문으로만 들어온 명곡을, 그것도 《녀성의 노래》와 《전호속의 나의 노래》, 《결전의 길로》로 우리 음악계를 들었다놓은 김옥성의 작품을 연주한다니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외국교향곡일변도로만 흐르던 교향악단의 활동이 우리의 교향악으로 서서히 방향전환을 한다는 느낌이 들면서 저도모르게 심신이 거뜬해졌다.

관현악은 첫시작부터 풍만한 정서를 안고 건드러지게 흘렀다. 고요히 흐르는 저 선률은 협동마을의 새벽정서인가, 새벽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리고 집집의 굴뚝에서 피여나는 아침연기도 보인다. 서도민요의 가락을 흥취나게 뽑아내는 청아하면서도 구성진 장새납소리에 풍년든 협동벌로 일하러 가는 농장원들의 씩씩한 모습이 실려온다. 설레는 황금나락도 안겨든다. 땅이 꺼지게 우거진 벼이삭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농사군들, 벼단을 물고 만부하로 쉴새없이 돌아가는 탈곡기들, 일터에 펼쳐지는 농악무와 상모의 재주, 분배장에 쌓이는 로적가리…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에는 이 모든것이 다 있었다. 사회주의농촌에 대한 긍정과 례찬이 악곡마다에 약동한다. 관현악은 어느덧 절정에로 치닫고있었다.

《좋지?》

정애경은 송금주의 어깨우에 턱을 얹고 귀속말로 물었다. 송금주는 무대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몹시 감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였다.

《좋아!》

그 대답에 화답이라도 하듯 박수소리가 인차 터져오르고 뒤이어 새 종목을 알리는 소개자의 랑랑한 목소리가 울리였다.

《다음은 슈트라우스의 관현악곡 〈아름답고 푸른 두나이강〉 입니다.》

무대우에서는 발랄하면서도 은은한 음악이 물결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정애경과 송금주에게는 이 작품도 구면이였다. 정수일은 피아노훈련을 지도할 때 그들에게 축음기로 명곡이란 명곡은 다 감상시키였다.

그 밑천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무대우에서 갑자기 소요가 일어났다. 무대 오른쪽에 가설한 전주대가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전기줄에 매달린 전등알이 흔들흔들 그네를 뛰였던것이다. 전주대아래도리를 고정시키느라고 박았던 꺾쇠가 빠져나와 사달을 일으킨 모양이였다. 장치사들이 무대에 뛰여올라가 사태를 수습하였다하지만 전주는 인차 다시 옆으로 위태롭게 기울어졌다.

《저거 야단났구나!》

송금주가 입안의 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이였다. 정애경도 결이 나서 《그 전주대가 영천군망신을 다 시키네.》하고 토달거리였다. 그러나 소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악사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듯이 연주를 계속하였다. 음악의 오묘한 세계에 푹 빠져버린 정애경은 언제 《아름답고 푸른 두나이강》이 지나갔고 김원균의 교향시 《향토》가 언제 끝났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그는 교향곡을 감상할 때면 늘 그러듯이 두손으로 턱을 고이고 무아경에 잠겨있었다. 음악을 감상하는 순간에는 악당도 천사가 된다는것이 그의 지론이다. 교향곡과 관현악은 선률로 엮어지는 서사시이며 장편소설이다.

무대에는 몸집이 뚱뚱한 저음가수가 나와 《법성포배노래》를 불렀다. 가수의 저력있는 목청에 무대와 운동장은 물론 온 영천땅이 드릉드릉 울리는것 같았다. 가수는 재청까지 받고서야 무대에서 퇴장하였다. 개인종목들이 몇차례 꼬리를 이으며 관객들에게 선을 보였지만 악사들은 등퇴장이 없이 무대에 그냥 남아있었다.

공연은 다시 개별프로로부터 교향악으로 넘어왔다.

《다음은 챠이꼽스끼의 발레곡 〈백조의 호수〉입니다.》

녀성고음가수의 노래 《산으로 바다로 가자》를 듣고 끝없는 자감상태에 빠져있던 정애경은 소개자의 이 말을 듣고 몸자세를 바꾸었다.

《백조의 호수》는 그가 사랑하는 교향곡들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는 작품이다.

《금주, 〈백조의 호수〉야, 〈백조의 호수〉!》

정애경은 주위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입속말로 조용히 속살거리였다. 그는 이 곡을 감상할 때면 노상 송금주가 자기의 격앙된 감정에 합세하고 동조해줄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송금주한테서는 들었는지 먹었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상해서 옆을 돌아보았다.

《법성포배노래》가 울릴 때까지만 해도 정애경의 곁에 그린듯이 앉아있던 송금주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 위생실에 갔을가, 누굴 만나려고 자리를 떴을가. 아니면 안면있는 연주가나 성악가에게?…

《백조의 호수》를 송금주와 같은 아마츄어음악가가 없이 나 홀로 듣는다는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제 곧 나타나겠지.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이 시작될 때까지도 송금주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몸이 불편하다고 하더라도 숙소로 돌아갈리는 만무하다.

《백조의 호수》가 끝나고 련이어 조길석의 교향시곡 《조국을 위하여》의 연주가 시작되였다. 우리의 교향곡을 듣고싶어 그렇게도 안달아하던 송금주.

교향곡을 들을 때에는 만사를 젖혀놓고 거기에 미친듯이 빠져버리는 음악처녀, 격정이 고조에 달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마음껏 터치지 못해 손바닥을 폈다모았다하며 박자를 치면서 입속으로 선률을 웅얼거리는 즉흥파… 저 무대우에서 지금 우리 나라 교향곡이 도도하게 흐르고있는데 금주는 어디 가서 뭘하게 지금껏 나타나지 않을가. 정말 참…

녀성중창으로 형상한 리면상 작곡의 가요 《봄노래》의 화려한 선률도 이미 저쪽기슭으로 밀려가고 《비창》의 슬픔도 5월의 야공으로 잦아들었다. 무대에는 손에 바이올린을 든 백고산의 낯익은 자태가 나타났다. 관중석에서는 폭풍같은 박수갈채가 일어났다. 온 나라가 다 아는 연주가를 대하는 영천사람들의 감정은 사뭇 열광적이였다.

《용광로가 보이는 바다가에서》의 연주를 한번만 더 보면 바이올린 기갈이 좀 덜어질것 같다고 하던 송금주는 어데 가서 뭘하게 상기도 나타나지 않는가. 백고산의 활끝에서 일어나는 바이올린의 그 매혹적인 음향은 벌써 콘베아에 실려 훨훨 날아간다.

정애경은 그 음향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조바심을 치며 주위를 연방 둘러보았다. 하나 그 어디에서도 송금주의 모습은 볼수 없었다. 음악감상마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비상한 정황이 그를 옴짝달싹 할수 없게 비끄러매두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정애경은 자리에서 불쑥 일어났다. 백고산의 음악을 감상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송금주를 빨리 찾아내야 한다는 충동이 용수철이 되여 그를 일으켜세웠다. 최악의 경우까지 예상하며 작별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독주가의 모습을 얼핏 돌아보고있을 때 면막뒤에서 또다시 가설전주가 한쪽으로 기우뚱거리는 모양이 바라보이였다. 그러나 위기는 인차 조용히 수습되였다. 바로 그때 수천개의 자갈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내리는것 같은 박수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백고산은 허리를 깊숙이 접어 답례를 표시한 다음 소개자가 다음곡목을 소개할 사이도 없이 마이크앞에 바싹 다가가 관중들을 쭈욱 둘러본 다음 차분하면서도 소박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한 처녀동무의 아름다운 소행을 소개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 처녀동무는 우리 연주가들이 베토벤의 〈운명〉 을 연주할 때부터 자진해서 이 무대에 올라와 꺾쇠가 빠져 넘어질번한 가설전주를 두팔로 붙안고 지금까지 서있었습니다. 제가 〈용광로가 바라보이는 바다가에서〉를 마지막까지 연주할수 있은것은 그 동무의 덕이라고도 볼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그 처녀를 소개하고 그를 위해 특별연주를 해드리겠습니다.》

백고산은 면막뒤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면막뒤에서 몇초동안 가벼운 싱갱이같은것이 벌어졌다. 소개하려는 처녀가 무대에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모양이였다. 온 장내가 숨을 죽이고 미지의 그 주인공을 기다리였다. 정애경도 목을 빼들고 눈정기를 모아 무대쪽을 응시하였다. 어떤 처녀일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처녀일가. 우리 영천땅에도 그런 훌륭한 처녀가 있단 말인가. 그가 이런 생각을 굴리고있을 때 마침내 백고산이 처녀를 앞세우고 마이크앞으로 걸어나왔다. 장내에서는 우렁찬 박수소리가 일어났다. 모두가 열정적으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처녀에게 열렬한 축하와 격려를 보냈다.

그러나 단 한사람 정애경만은 박수도 못 치고 혼백이 다 빠져달아난듯 한 시선으로 무대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만사람의 관심과 사랑속에 서서 미소를 머금고있는 그 처녀는 바로 송금주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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