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제 2 장

5

재빛으로 뿌옇게 흐려진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두만강반의 산과 들에 하얀 은세계를 펼치였다. 만주대륙과 조선을 갈라놓은 강의 얼음판에도 눈이 덮였다.

하염없이 흩날리는 눈발이 희뿌연 안개처럼 사람들의 시야를 덮어버리는 이런 궂은날에는 누구나 길에 나서기를 저어하건만 두만강기슭의 경비도로로는 한 기마종대가 달려가고있었다.

짤막한 대오였다.

눈발속을 헤쳐가는 기마종대는 제국군가의 단조로운 가락과도 같이 일매진 습보로 달려나가면서 군마들의 투레질소리로 국경의 고요를 흔들었다.

유표하게 몸매가 늘씬한 두번째 군마에 타고있는 사또 요시나리소좌는 들썩이는 안장우에서 궁둥이를 가볍게 오르내리며 앞에 거칠것이 무엇이냐는 기세로 달리였다.

귀전에서 바람이 울부짖고 눈송이들이 얼굴을 때렸다.

그는 때로는 얼굴을 도고하게 들어 탄상의 실눈으로 국경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사또는 새 부임지에 도착한지 열흘째 되는 날인 오늘 비로소 국경시찰을 떠난것이다.

앞에서는 기마척후병이 달리고 뒤에서는 다섯명의 기마순찰병들이 소좌에게 민감하게 보조를 맞추며 따라갔다. 그들은 두만강기슭의 구배가 심한 경비도로를 따라 계속 달리였다.

사또소좌는 정갈하게 흰 숫눈길에 찍힌 척후의 말발굽자리를 보자 앞에 대고 쾌활하게 소리쳤다.

《오-이, 척후! 내 뒤롯!》

근무의 첫길에 깔린 숫눈을 앞장에서 밟고싶었던것이다.

저 앞쪽에서 눈발에 가리워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던 기마척후병은 무슨 뜻인지 몰라 말을 세우고 머뭇거리는것 같더니 재차 소리치자 눈송이들을 날리며 뛰여왔다.

그는 말을 돌려 기마종대의 옆에 서며 옹위의 태세를 취하였다.

사또소좌는 흐뭇한 마음으로 말을 습보로 달리였다. 마주 날아드는 눈발이 선뜩선뜩 얼굴을 스치고 바람을 안은 만또자락이 환상의 날개처럼 펄럭이였다.

사또는 턱을 쳐들고 실눈을 지어 아득한 만주쪽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하늘밑에 공산구역이 있다지.… 그뒤에는 쏘베트로씨야라.… 호, 이것이 국경인가!)

기마종대는 한 산굽이를 돌다가 길가에 눈을 맞으며 서있는 5~6명의 촌유지풍의 사람들을 만났다.

기마척후병이 너희들은 누구냐고 소리치자 수염이 위엄스럽고 회색두루마기를 입은 키가 후리후리한자가 머리를 깊이 숙여 절하며 나리들은 면경계를 넘어 풍인면에 들어섰소이다라고 하며 자기를 면장이라고 아뢰였다. 그러자 곁에 서있던 대머리에 몸이 옆으로 퍼지고 검정외투를 입은자가 손에 벗어쥔 털벙거지를 주무르며 날씨도 찬데 저희들이 약소한 자리를 마련하였으니 잠간 몸이나 덥히고가면 어떻소이까라고 했다.

너는 누구냐고 묻자 그자는 이 고장의 지주인데 서완오라고 한다고 하며 얼굴에 비위좋은 웃음을 가득 담았다.

말우에서 그자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사또소좌는 역겨운것을 보기라도 한듯 머리를 외로 돌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배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벽지의 길에서 우연히 만난 식민지유지들의 촌스러운 알현에 배속이 흔들거리기도 했지만 가슴에 갈마드는 의혹이 더 컸다.

(저 촌뜨기들이 내가 통과한다는걸 어디서… 어떻게 알았을가?)

이 길에 좌관이 나타난 일이 처음일수는 없겠는데 저들이 길가까지 나와서 마중하는것을 보면 어느 누가 자기의 신분이며 배경을 알아내여 소문을 퍼뜨린것이 아닐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사또 요시나리는 직계장관인 쯔루하라대좌에게까지 자신의 정치적배경을 감추었다.

사또는 파쑈적인 청년장교들의 비밀단체인 《사꾸라까이》(앵회)의 중심인물들중의 하나였다. 그는 정치적민감성과 군사적음모에서의 타산깊은 과단성으로 하여 일찌기 동료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들, 청년장교들은 전향한 사회민주주의자 가메이의 리론적인 뒤받침으로 정당내각으로는 《데모크라씨》라는 혐오스러운 허울의 거치장스러움과 그 우유부단성때문에 대륙제패를 단행할수 없다는 확고한 론거를 세우고 거사를 은밀히 준비하였었다. 그들은 지난해 3월, 일거에 정당내각을 박멸하고 륙군대신 우가끼대장을 두목으로 하는 군부독재정권을 세우려는 목표밑에 쿠데타를 단행하였다가 준비미숙으로 실패하였다.

법정은 그들을 엄벌에 처한다고 소리쳤으나 군부의 유력자들은 뒤로 빼돌려 관동군사령부로 보냈다.

사또는 이때 능숙하게 몸을 빼여 대본영참모부서의 말석에 숨어있다가 올해 봄의 5월15일사건때 또 두각을 나타내였다. 해군장교들과 륙군사관학교 학생들로 무어진 파쑈일당이 대낮에 수상관저를 기습하여 수상 이누가이를 사살할 때 그는 경시청과 정우회본부로 밀려가는 륙군사관생들의 앞장에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그자들을 파괴와 살륙에로 불렀다.

도륙을 각오한 파쑈의 열광밑에 정당내각은 박멸되고 해군대장 사이또를 두목으로 하는 파쑈내각이 세워졌다. 그후 사또는 그자신의 청원과 륙군수뇌부의 밝히지 않는 의도에 따라 조선주둔군에 파견되였다.

서울 룡산은 조선주둔군의 본거지였다. 사또는 조선주둔군사령부에서 석달동안 미배치로 빈둥거렸다. 의아함을 금치 못한 그는 인사계의 장교들에게 미배치로 두는 원인을 밝히라고 소리쳤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벙글거리며 조선을 한껏 맛보라는 애매몽롱한 암시만을 던졌다. 리웅준이라는 조선인소좌가 접근해왔다.

자기를 도꾜 륙군사관학교 6기졸업생이라고 소개한 그는 십여년전에 대정대장의 예하에서 씨비리출정에 참가하여 무공을 떨치던 이야기를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리웅준 외에도 도꾜출신의 쟁쟁한 청년장교들이 그의 둘레에 모여들었다.

새 동료들은 식민지주둔군의 거드름 피우는 생활에 만족하고있었다. 그자들중에는 주색에 빠진자들도 있어 신정으로 유혹하며 화류계의 전성기라느니 지금 신정의 창기들중에는 백인창기들도 있다느니 하며 지껄여댔다. 사또는 자신의 황도정신에 대한 우롱으로 받아들여 하마트면 새 동료들에게 검을 뽑아들번 했다.

사또는 리웅준의 안내로 유람의 길을 떠났다. 경주와 동래와 진해, 금강산, 묘향산, 주을온포… 조선의 청신한 공기를 한껏 들여마시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뜻밖에도 총독 우가끼대장의 부름을 받았다.

서울의 하늘에 장미빛저녁노을이 비낀 9월의 서늘한 저녁녘이였다.

총독은 저택정원에서 그를 맞아주었다. 정원수의 그늘밑에 놓인 참대의자에 두사람은 오래동안 마주앉아있었다.

한때 베를린주재 제국대사관 무관으로 활약한 시절도 있었으며 도꾜의 청년장교들속에 파시즘을 고취하면서 군부내 신사조의 선각자로 자처하던 우가끼대장은 이미 로인이 되였다.

로대장은 희끗희끗하게 숱진 눈섭밑에서 번쩍이는 눈에 물기를 머금고 쓸쓸한 회억의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까지 대륙과 반도로 나오고보니 도꾜는 텅 비였어.》

《지난해 봄 저희들의 경거망동이 각하의 립장을 난처하게 했으리라고 믿습니다.》

《오, 사꾸라까이 말인가?… 자네들이 나를 정부수반으로 내세웠다거나… 내가 그 덕에 반도로 나오게 된것과는 관계없이 나는 군인의 량심으로 그 의거를 찬미하고있네.》

《각하!…》

《슬픔은 페하의 측근에 정치적감상주의자들이 있다는거네.… 아시아인들이 아시아적사고방법과 정서의 테두리안에 갇혀있으니 저 아리아인들처럼 랭철한 리성으로 대세를 보지 못하지. 파쑈체제를 세우지 않고는 공산주의침습을 막아내지 못해.… 군수뇌부가 자네를 여기로 파견한것은… 이제는 터놓고 말할수 있네만… 나와 가와시마사령관이 협의하고 요청한데 따른 조치야.》

사또는 머리를 깊이 숙여 사의를 표했다.

《지금 북부국경지대와 간도일대는 적색불온지대로서 그 소란이 극도에 이르고있네. 말하자면 공산주의자들의 세상이야. 로씨야를 모방한 쏘베트정부까지 섰네.… 부임지로 가면 관동군사령부에서 모 요원이 적절한 기회에 자네와 련계를 맺으려고 할거네. 차후지시는 그에게서 받게나.》

면담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 사또는 벌떡 일어나 기착을 했다.

로대장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75련대주둔지인 회령이라고 하는데는 인구가 1만 7천을 좀 넘는 소도시라는데 우리 야마도사람들에게는 의미깊은 고장일세. 그 옛날 가또 기요마사가 거기까지 북상하여갔댔으니까.… 회령이 부대주둔지로 된것은 그런 연고에도 관계되네.

그 혈기에 벽지생활이 갑갑하겠지만 젊음을 탕진말고 심신을 단련하여 무공을 떨치라구.》

사또가 인사를 차려 서둘러 돌아서려고 하자 로대장은 정원을 좀 거닐자고 했다.

말없이 정원을 한바퀴 돌고나서 총독은 무공을 세우게 한 다음 그를 도이췰란드에 파견할것이라는 군부의 계획을 넌지시 암시해주었다.

쯔루하라대좌는 신임관이 좌관으로서는 너무나도 젊은데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면서도 그를 애숭이취급은 하지 않고 관례에 따라 장교식당에서 간소한 주연을 베풀어 환영하였다. 그리고 군마보충부 웅기(당시)지부산하의 경흥, 경원양마장들을 돌아보고 마음에 드는 군마를 고르라고 했다.

경원양마장에서는 일로전쟁에 참전했다는 말라꽹이 늙다리군조가 크레졸냄새같은것을 풍기며 사또일행을 안내하였다.

그는 이 양마장이 방목지 1만헥터에 군마보관마리수 500마리, 년생산마리수 100마리라고 자랑하며 양마장시설을 참관시켰다. 그리고 조교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게 하여 여러종의 말들의 체질, 질주능력, 대담성과 영민성, 몸맵시 등을 보여주면서 마음에 드는 놈을 손수 골라 애마로 삼으라고 권했다.

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땅에 붙어 달리던 말들이 장애물차단봉우를 맵시있게 날아넘을 때마다 늙다리군조는 환희에 넘쳐 《저건 미찌꼬! 저건 하나꼬! 오- 에이꼬!》 하고 웨치면서 녀자이름으로 붙인 군마들의 별명까지 높은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사또는 일본도를 무릎사이에 짚고 앉아서 유쾌하게 웃어댔다.

그때의 만족스럽던 기분은 평생을 두고 잊을것 같지 않다.… 거기에서 끌어온 군마 《하나꼬》는 눈이 하얗게 깔린 경비도로를 경쾌하게 달리였다.

참모인 다나까중위가 말에 박차를 가하여 사또와 가지런히 서며 국경의 인상을 물었다.

《대체로 좋아, 한가지 불만은… 경비도로가 왜 이 모양인가? 기복이 심한데다가 필요이상 에돌았구만. 이따위 길은 한가한 유람객들에게나 좋겠다. 군들은 이 시골에서 전시체제에 맞게 도로 하나 닦아놓지 못했는가?… 이런 길로는 공산군과 못 싸워. 보라구, 여기서도 필요이상으로 저렇게 산을 에돌았거던.》

《농지때문입니다. 도청과 총독부의 유력자들을 낀 지주들의 매수공작에 이 모양이 된것 같습니다.》

《바보들… 군도를 뽑아 지도에 대고 직선을 그어버릴만 한 용사는 없었는가? 사단이상의 병력도 신속히 기동할수 있게 도로부터 고쳐야겠다. 그래야 저 공산구역도 일거에 공격소탕할수 있다. 미구에 저 강건너는 큰 전장이 될것이다.》


×


바로 이때 풍인동골안어귀앞을 지나간 경비도로에 붙여지은 경찰관 출장소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있었다.

벽에 붙인 나무의자에 앉아있는 한 녀자앞에서 하야시순사와 최순사, 황순사가 번갈아가며 구슬리는 말을 엮어대고있었다.

밖에서는 눈이 펄펄 날리고있었으나 어둑한 방안은 난로가 잘 피여 후끈했다.

녀인은 앞으로 흘러내려 얼굴절반을 가리운 머리칼을 쓸어올릴념도 않고 눈을 내리뜬채 숨을 죽이고있었다.

류행에 따라 코밑에 나비수염을 붙인 최순사가 손가락끝으로 녀인의 머리를 꾹꾹 찌르며 은근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봐 윤보금이, 듣는가.… 우리를 믿게 하란 말이야. 네가 공산구역에서 살수 없어 뛰쳐나왔다는걸 믿게 하자면… 마을로 돌아다니며 순회강연을 하면 되는거다. 거기가 어떠어떠해서 나쁘다는걸 얘기하면 돼. 하겠는가? 못하겠는가?… 하지?… 알아들었는가?》

윤보금은 죽은듯이 대답이 없다. 내리감은 속눈섭밑에 눈물이 맺혀서 떨뿐이다.

순사들이 살기 나쁘다고 욕하라는 《공산구역》은 시집이 있는 고장인데 고향사람들앞에서 시집마을을 욕되게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더 나가서 리재명회장이나 림성실부녀회장을 생각해봐도 욕할만한것이 없다. 남편이 그처럼 하고싶어하는 혁명은 더욱 욕할수 없다. 설사 가슴에 맺힌 일이 있다 해도 뭇사람들앞에서 시집마을을 욕하는것과 같은 그런 악착한짓을 어찌 하랴! 보금이는 남편의 앞길을 열어주자는 한가지 생각으로 시집을 떠난것이 험악한 세상의 엄청난 일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허물어져내리는듯 하였다.

그래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화김에 하야시가 발을 탕 구르며 최순사에게 소리쳤다.

《질질 끌지 말구 내다가 쏴갈겻! 공산밀정이 분명하다!》

최순사의 주먹이 윤보금의 뺨으로 날아들었다. 윤보금은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석탄재가 거멓게 깔린 마루바닥에 쓰러졌다.

황순사가 달려들어 보금이를 안아일으키려는데 밖에서 다급한 말발굽소리가 울렸다. 출입문이 벌컥 열리며 만또차림의 기병 수명이 달려들어왔다.

그들은 두말없이 기병도의 칼집과 주먹으로 세 경관의 목이며 어깨, 잔등을 마구 후려쳤다.

《게으름뱅이자식들, 경비도로는 저 모양인데 아편장사 돈주머니나 뒤지고있는가?》

세 경관은 기병들의 왁작 고아대는 기갈소리에서 소좌의 군마가 발목을 상했다는 말을 가려듣고 눈알을 굴려 출입문옆에 서있는 새파랗게 젊은 소좌쪽을 바라보았다.

소좌는 이 자그마한 근무실의 탁한 공기와 벽지경관들의 밥곽반찬냄새때문인지 흰장갑 낀 손을 코앞에 대고 서있다가 만또자락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홱 돌아서 나가버렸다.

뒤따라나가던 중위가 안에 대고 소리쳤다.

《며칠안에 너희네 구역내 도로를 직선으로 펴놓아. 여기는 이제 전장이 돼. 알겠는가!》

자기들이 족치던 녀자앞에서 이런 벼락봉변을 당한것이 창피해서인지 세 경관은 얼굴들이 벌겋게 되여 서로 말없이 쳐다보다가 윤보금에게 냉큼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보금이 엉거주춤 일어서는데 최순사가 주먹으로 그의 턱을 툭툭 건드리며 오금을 박듯이 뇌까렸다.

《너같은 얼빠진 년들때문에 우리가 본분을 다하지 못한단 말이야. 가서 깊이 생각했다가 부르면 다시 와! 군대들을 봤지? 여기는 이제 전장이 돼. 고분거리지 않으면 땅해치우겠다.》

밖에는 눈발이 설피여졌다. 날씨는 푸근했다.

길가에 나와선 윤보금은 흐려진 눈으로 마을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하얗게 들쓴 집집의 굴뚝들에서 김같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며 평화로운 기운을 풍기였다.

저쪽길가의 집옆에 있는 우물에서 녀인이 물동이를 이고 일어나더니 동이밑굽에 맺히는 물방울들을 손으로 털어내리며 한가롭게 걸어서 사립문안으로 사라졌다.

보금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녀자가 무척 부러웠다. 아, 그도 이러한 아늑한 저녁이면 저렇게 동이로 물을 긷지 않았던가. 동이굽에 맺히는 물방울들을 한손으로 털어내리며 가볍게 걸을 때의 그 만족감… 온 식구가 저녁상에 둘러앉아 변변치 못한 음식이나마 맛스럽게 들어줄 때의 그 기쁨, 설겆이를 말끔히 해놓은 다음의 홀가분한 즐거움… 보금이는 시집에 두고온 그 모든것이 못내 그리워지며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 맺혔다. 어느 집에서나 가정적인 단락이 깃드는 이러한 시각에 모든것이 서먹서먹해진 친정집으로 들어가기가 죽도록 싫었다.

그는 마을우의 재빛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속을 태우며 기다리랴 하는 생각이 들어서야 하는수없이 싫은걸음을 떼였다.

그가 마촌 시집을 떠난지도 어언 두달이 지났다.

보금은 시집에 있을 때 남편이 혁명에 반하여 자기를 외면하고 나가 돌아치며 철없이 굴어도 웬일인지 그것이 밉지 않았다. 밉기는 고사하고 그럴수록 남편이 철부지어린애로 여겨지며 정이 더 가는것이였다.

보금은 창억의 안해라기보다도 누이이며 어머니였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맹목적인것처럼 남편에 대한 보금의 사랑 역시 그와 비슷했다.

혹시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자기는 입에 대보지도 않고 남편의 상에만 놓았다. 남편이 어디 나가 축에 빠진다든지 몰리우면 가슴에서 불같은것이 펄펄 타오르며 입맛도 없어지고 잠도 오지 않았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무던한 성미까지 버리고 어떤 모질고 악착스러운짓도 할것 같았다.

남편의 유격대참군이 부결된 까닭을 알게 되였을 때 그는 절망과 함께 자기만이 집에서 사라지는 날이면 모든 일이 다 펴이리라는 생각을 품게 되였다. 생각은 그러면서도 시부모들을 노엽히는것이 무서워 용단을 내리지 못했다.

시집에서의 마지막밤, 시아버지가 남편에게 웨친 소리는 망설이기만 하면서 내딛지 못한 그 무서운것에로 자기를 떠미는 호령이였다.

새벽에 집을 뛰쳐난 그는 대왕청하와 소왕청하의 합수점에 있는 소로 달려나갔다.

바위우에 올라앉은 보금은 사품치며 소용돌이치는 검은 물결을 들여다보다가는 뒤를 돌아보게 되였다. 누가 소리치며 달려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 더럽고 검질긴 미련이 소에 몸을 던지지 못하게 하였다.

보금은 자기의 꼬락서니를 친정집에는 물론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처없는 길을 떠나 발이 가는대로 걸어가다가는 류랑민들의 모닥불가에 자리를 얻어 쪽잠이 든 일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동정심 많고 속이 궁한 류랑민들은 삶은 감자알을 권하며 웬 녀인인데 무슨 팔자로 홀몸이 되여 이런 길을 헤매느냐고 물었으나 그때마다 보금은 입을 봉하거나 꾸며낸 말로 창억이와 잇닿은 자기 불행의 사연은 가슴에 깊이 묻어버렸다. 필요이상의 동정을 보이던 한 홀아비는 새벽녘에 무거운 한숨을 거듭 쉬고나서 기구한 자기 한생을 이야기하던 끝에 이 흉흉한 세상에서는 서로 마음을 의지해야 살아갈수 있다는 말을 비쳤다. 보금은 무섭게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는 꼿꼿이 일어나 길을 떠나버렸다.

그는 어느 부유한 농가에서 키질도 해주고 방아도 찧어주고는 밥을 얻어먹고 지내다가 다시 길을 떠나 석두촌에 이르러 지주집 부엌데기로 들어갔다.

악착스러운 구박과 극심한 천대에 참을수 없었던 보금은 다시 그 집을 나와 일자리를 찾아헤매다가 굶주림에 시달린 나머지 병이 들어 길가에 쓰러지고말았다. 보금이 임자없는 주검처럼 길가에 딩굴던 자기를 물건너에서 온 전장원이란 사람이 의원집에 업어왔다는것을 알게 된것은 다음날 저녁무렵이였다.

의원집아래목에서 눈을 뜬 그는 자기옆에 앉아있는 양복차림의 사나이가 예전에 풍인동에서 룡정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다니던 전장원이란것을 알아보았다.

전장원은 반가와도 하고 놀라기도 하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보금은 좀 다녀오려고 친정으로 나가다가 앓게 되였노라고 하고는 눈을 내리떴다.

전장원은 보금의 친정집래력이며 보금이에 대하여 잘 알고있었다. 그는 옛날 지주 서완오의 집에서 생겼던 돈궤도난사건은 셋째첩년이 앙큼한 질투심으로 감춘것이 판명이 되였노라고 하며 안심하고 집으로 고향으로 가자고 이끌었다.

보금은 전장원이 자기에 대하여 그처럼 잘 알고있는것이 놀라왔으며 그의 호의가 고마왔다. 보금이는 그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장원은 어디로인가 달려나가더니 온성에서 들어왔다는 어느 운송점의 마차를 끌고와서 보금이를 그우에 눕혔다.

전장원과 운송점주인인 주영백이라는 사람이 내내 마차곁에 붙어서서 걸어왔다. 두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인것 같았다. 그들은 마부에게 마차를 조심조심 몰라고 자주 주의를 주는것이였다.

보금이는 보잘것없는 자기를 애지중지 보살펴주는 그들의 호의에 대하여 처음에는 같은 고향사람이기때문이려니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자꾸 캐여물을가봐 눈을 꼭 내리감고 잠에 노그라떨어진척 하였다.

두사람도 그가 잠든줄로 알고 마차뒤에서 따라오며 수군수군 말을 주고받았다.

《확실하오?》

《내가 한마을에 살았는데 그걸 모르겠소? 왕청 산골 마촌이라는데 시집갔댔소.…》

《거기도 공산근거지안이겠지?… 거기 사정을 잘 알게 아니요?》

《글쎄말이요. 차차… 몸이 추선 다음 차차 알아보지.》

이런 이야기를 숨을 죽이고 들은 보금이는 그들의 호의밑에 다른 속심이 깔려있다는것을 비로소 알게 되여 의심스러운 생각과 함께 더럭 겁이 났다. 무슨 사람들인가. 내가 어떤 꾀임수에 든게 아닌가? 보금이는 마차에서 뛰여내려 어디론가 도망치고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그러나 그들이 왜놈의 밀정이라면 친절을 베풀지 않고 당장 손목부터 묶고 마차에 내동댕이쳤으리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안도의 한숨을 호- 내쉬였다.

집에는 어슬막에 도착하였다. 온 집안이 벌컥 뒤집혀졌다. 전장원으로부터 사연을 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 캐여묻지 않고 그를 아래목에 눕혀놓고는 부엌에 불을 지핀다 미음을 쑨다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튿날 보금이는 어머니에게 마촌에서는 흉년도 들고 살기 어려워 집에 좀 다녀가자고 길을 떠났었다고 또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는 포대기를 쓰고 아래목에 내내 누워있었다.

어머니는 가슴이 아파 한숨을 쉬며 이 애가 쌀꾸러 떠났다고 하면서 어디 가서 좁쌀이나 피쌀말을 구해들일가 하고 끝없는 걱정을 이어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이 찾아온데서 불길한 기미라도 눈치챈듯 어머니의 눈물과 푸념질에는 아랑곳없이 방문앞에 바위처럼 웅크리고앉아 담배만 태웠다.

마을사람들과 먼곳에 있는 친척들까지 어떻게 알고 감자알이나 쌀되박 같은것을 꿍져안고 병문안을 왔다. 보금이는 그들에게 겨우 인사를 하고는 도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손님들은 어서 몸을 추세우라고 이르기도 하고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혀를 차기도 하였다.

몸이 추선 보금이는 매일저녁 마을에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듣게 되였다.

그 종소리가 울려올 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도 얼굴이 한결 밝아져 일손을 놓고 귀를 기울였다.

보금이 어머니에게 저게 무슨 종소리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야학종소리라고 대답하였다.

《너를 구해준 전선생이 종을 치는게다. 참 별사람이지. 면장을 하는 사촌형이 읍소학교 선생자리에 붙여주겠다는것도 마다하고 여기서 야학선생을 하는구나.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애들을 다 걷어안구 공부를 시켜주느라구 별별 고생을 다하구 수고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쩍하면 의심을 사서 경찰에 불리워가구 야학벽도 제손으로 바르구 난로에 땔나무도 제손으로 팬다. 훈도가 그런 궂은일에 손을 적시는 일이 어디 있니. 어떤 사람들은 부실한데가 있다고 뒤소리를 하지마는 에그, 실상은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어머니의 이야기와 자기가 마차를 타고오며 엿들은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전장원이라는 사람이 저 근거지에서 하는 일과 뜻을 같이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웬일인지 반갑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다.

《어머니, 저를 구해준 그 선생에게 무슨 인사를 차려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야학에 나무를 한발구 실어다주긴 했다만 내 아무게나 좀 꿍져줄게 너도 한번 찾아가봐라. 사람이 아무리 구차해도 인사법은 밝아야 하느니라.》

보금이는 전선생을 찾아가려고 했으나 수집고 어려워서 망설이기만 해왔는데 오늘 아침 순사들이 달려들었다.

어머니는 기겁하여 방바닥에 펄쩍 주저앉고 아버지는 뜨락에까지 따라나왔다가 순사의 독기를 품은 눈총에 그 자리에 얼어붙고말았다.…

보금이는 집에서 속을 태을 부모들이 걱정되여 걸음을 다그쳤다.

집마당에 들어선 그는 굴뚝이 터지게 연기가 피여오르는것을 보고 의아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정지문을 여니 뽀얗게 서린 뜬김속에서 어머니가 허둥지둥 달려와 그의 두손을 덥석 잡았다.

《에그, 살아왔구나!》

어머니는 딸을 안아옮기다싶이 구들에 끌어올려앉히고는 어깨며 잔등을 쓸어만져보았다.

《그래 저것들이 뭐라고 하더냐?》

《아무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왜 그 지랄이냐? 친정에 다니러 온게 무슨 법에 걸리는 일이라구 저것들은 그저 사람을 못살게 굴지 못해 생지랄이라니까.》

《제가 근거지에서 나왔으니까 무슨 임무를 받고 나오지 않았는가 해서 그래요.》

《엉?… 그래 똑똑히 말해줬느냐?》

보금이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저놈들이 저보구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며 근거지가 나쁘다는 연설을 하라고 하는데 시집마을을 욕하고 돌아가면 뭘로 되겠어요. 또 부르겠다 해요. 어디 숨을수도 없고…》

어머니는 피씩 웃으며 한손으로 딸의 무릎을 툭 건드렸다.

《일없다. 걱정말아.…》 그러고는 그의 귀에 더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아버지가 강형편을 보러 나갔다.》

그 말에 보금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예?…》

《그사이 쌀말이나 마련했으니 아버지는 너를 데리고 마촌 사돈집으로 들어가시겠단다. 새벽에 슬쩍 강을 건느면 된다. 저 령감이 산길에 귀신이 돼서 왜놈들 눈을 피해 얼마든지 갔다올수 있다. 걱정말아라. 시부모님앞에 어떻게 빈손으로 들어가겠니. 기장떡도 좀 만들고 간짐고등어도 댓손 구했다. 다 갖춰줄테니 훌 떠나거라. 아뿔싸, 저 가마를…》

들썩거리는 솥뚜껑밑에서 물거품이 넘쳐났다.

《불이 너무 과하구나!》

어머니는 얼른 돌아앉아 솥뚜껑을 비스듬히 열어놓고 부엌으로 내려가 아궁안에서 불이 활활 붙는 장작개비들을 꺼내여 뒤문으로 내던졌다. 뒤뜨락에서 피식피식 소리가 나며 흰김이 문문 피여올랐다. 어머니는 가마목으로 다시 올라와서 떡가루함지에 물을 부으려고 바가지를 들었다.

보금이는 더 참을수 없어 와락 덮쳐들어 어머니의 두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 그만둬요!》

조씨는 딸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에그, 별 걱정두.… 쌀이 모자랄가봐 그러니?… 일없다!》

보금이는 흐느낌소리를 삼키며 부르짖었다.

《어머니! 전… 전 못가요! 집으로 못가요, 아주 나왔어요.》

어머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듯 눈이 어리둥절해졌다. 그저 손에 들었던 바가지가 떡가루함지에 맥없이 떨어졌다. 떡가루가 함지밖으로 날리였다. 그닥지 않는 일에도 호들갑스럽게 굴고 푸념질이 잦아 령감에게 노상 꾸중을 듣는 조씨였건만 그 말을 듣자 앉음새를 방정하게 하고는 딸의 얼굴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너 그게 무슨 소리냐?》 어머니는 쌀쌀하게 물었다.

보금이는 갑자기 가슴이 허물어지면서 스스로도 전후사연이 악몽속의 일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이 저때문에 축에 빠지게 됐어요.… 장가든 사람은 거기 군대에 안 받아서 앞길을 열어주자구 떠난게 이렇게 됐어요. 어머니!》

보금이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어머니의 무릎우에 엎어져서 흐느껴 울었다.

조씨는 손으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에이구, 이 집에 이게 무슨 벼락이냐? 내 어쩐지 수상하다 했다! 남편이 잘되라구 생리별을 했다? 그러지 않아도 동네에 뒤숭숭한 소문이 도는 판에 어느 귀신이문 그 소리를 믿겠니. 저쪽에서 정이 없었겠지.… 정이 없었겠지.… 이 못난것아!》

보금이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고 몸부림쳤다.

《엄마, 그런게 아니야요! 그런게…》

《싹 그만둬라, 왜 죽지 않구 살아왔냐?… 에이구, 저 령감이 알면 어찌겠니?》

이때 밖에서 발자욱소리가 들이닥치고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울렸다.

조씨는 딸을 구석쪽으로 끌고가서 눕혀놓고 머리우에까지 포대기를 덮었다. 그리고는 화들화들 떨리는 손으로 어깨며 팔을 쓸어만졌다.

《가만 누워있거라, 에그… 가슴이야!》

어머니는 밖으로 뛰여나가 아버지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사이문으로 어머니가 무엇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아버지의 노성이 터져올랐다.

《무엇이 어째?》

사이문이 왈칵 열려졌다.

《여보!》

《저리 비켜!》

윤치석은 팔에 매달리는 로친을 뿌려던지고 정지간으로 내려와서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쪽의 보금이에게로 달려들어 포대기를 와락 열어제꼈다.

보금이는 기겁을 하여 일어나앉아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이년!》

그 소리에 룡마루가 즈르릉 울렸다.

《보자! 어디 상판이나 보자! 맘을 어떻게 쓰구 시부모를 어떻게 공대했으면 쫓겨나게 됐느냐? 내 오래 지내봐서 사돈님성품은 잘 안다. 에익, 고약한 년! 남편이 잘되라구 나왔다구? 친부모 속이구 기여들어 밥이나 축내자는 수작이냐? 이년!》

윤치석은 발을 탕 구르고 몸부림쳤다.

《어허, 세상이 부끄러워 어떻게 살라느냐? 동네사람들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라느냐?》

보금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웬일인지 세상일이 모두 꿈만해져 도무지 두려운것이란 없게 되였다.

그는 포대기를 차곡차곡 접어서 옆으로 밀어놓고 머리칼을 쓸어만져 바로잡은 다음 움쭉 일어나 정지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침착한 행동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연실색해졌다.

보금이는 정지문을 조용히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서는 은회색의 설핀 구름짬으로 여러갈래의 달빛이 희푸르스름하게 쏟아져내리고있었다.

그가 집모퉁이를 허둥지둥 돌아가는데 웬 남자의 그림자가 앞을 막아섰다.

전장원이였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보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놈들이 뭐라고… 뭐라고 했소? 나는 읍에 갔다오느라고… 방금전에야 들었소.》

《…》

《문초를 당했소?》

《선생님!…》

보금이는 설음이 북받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푹 숙이며 달려지나갔다.

그는 길아닌 길을 따라 눈에 빠지고 미끄러지면서 두만강가로 달려나가 쑥대들이 설피게 자란 강기슭에 오도카니 앉았다.

어디에선가 얼음판이 갈라터지는 소리가 쿵쿵… 쩡… 하고 하늘에 메아리쳐올랐다.

그는 강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강건너의 우중충한 산발들을 바라보았다. 눈에 덮여 희끗희끗한 그 산발들 저쪽에는 그가 두고온 생활이 숨쉬고있을것이다.

(아, 왜 죽지 못했던가? 왜 왔던가?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이 세상엔 내 맘을 알아줄이는 하나도 없어!)

아버지가 밥이나 축내자고 기여들었느냐고 하던 소리가 서러워 보금이는 그 자리에 엎어져 쑥대를 그러쥐며 가슴을 찢는듯 한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죽은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쑥대들이 바람에 휘-휘-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설렁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지 보금이는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욱소리를 듣고 머리를 쳐들었다.

목도리를 두른 중키의 녀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그 녀자는 보금이를 안아일으켰다.

《가자요. 우리 집으로 들어가자요.》

전장원의 안해였다. 아마 남편의 말을 듣고 뒤쫓아 달려나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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