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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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빛에 뾰족산 정수리가 은백색으로 번쩍이기 시작하자 눈에 묻힌 깊은 골안은 환하게 밝아졌다.
여러가지 모양새의 굴뚝들에서 피여오르는 김같이 하얀 연기들은 해돋이와 함께 점점 눈부시여지는 눈천지와 한데 어울려서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산등성이의 우중충한 상록수림만이 겨울추위를 이겨내며 싱싱하게 빛갈이 살아올라 눈속에서 시커먼 빛을 자랑하고있다.
마촌은 아이들의 칭얼대는 소리, 솥뚜껑소리, 웃음소리, 그릇들을 부시는 소리로 흥성거렸다. 이른아침부터 참새들은 야단스럽게 우짖으며 고삭은 초가지붕의 처마밑과 조낟가리와 산옆의 나무숲사이로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마다에서 정갈하게 흰 눈가루들이 소리없이 흩날려내렸다.
두마리의 까치가 높이 떠서 동림촌쪽으로 날아가며 떠들썩하게 우짖었다.
갸- 갸- 갸-
물동이를 이고 집을 나선 녀인들은 마을길에서 눈이 말끔하게 쓸어진데 어리둥절해서 두리번거리다가 우물터를 향하여 종종걸음을 쳤다. 멀리에서 보면 녀인들의 웃도리나 물동이만 눈우로 미끄러져가는것 같았다.
이 아침 우물터에 모여든 녀인들은 제일먼저 나온 무산집어머니를 둘러싸고 물길을념도 않고 수군수군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그때가 그러니까 초저녁이였소다? 깊은 밤중이였소다?》 하고 얼굴이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 색시가 눈이 동그래서 무산집어머니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산집어머니는 그 색시에게 눈을 흘기며 나무람부터 하였다.
《젊은것들이 잠귀가 그렇게 어두워서야 어디다 쓰겠나, 쯧쯧… 나는 까막눈이 돼서 세상물정은 모르지만 선참으로 달려나갔네. 눈발이 펄펄 날리는 속으로
남정들의 덧저고리를 입고 허리에 중동매끼를 질끈 동인 중년녀인이 한탄조의 말을 하였다.
《이 미물은 짚신을 거꾸로 신구 달려나갔어두 눈물이 자꾸 나와 찬찬히 보지두 못했다우.》
《저런! 눈물이야 씻구 보문 되지비?》
《어째 손두 말을 안듣습데.》
《에구, 그러니까 등신이지.… 나는 찬찬히 봤소.》
무산집은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
《꽃나이요?》
얼굴이 이쁘장한 녀인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런 나이들이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는 소리가 뜬소문은 아니겠소.…》
무산집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자 녀인들은 모두 자기들의 실책에 펄쩍 놀라며 한마디씩 했다.
《이걸 어찌오. 우린 그 생각두 못하구있었지비!》
《정말 앉아뭉개면서 어쩌지 못한다니까!》
《그 집에서두 소금이 없어 김치를 못담갔겠는데…》
이때 리재명의 처 현씨가 동이를 안고 다가왔다.
무산집어머니가 현씨에게 물었다.
《새벽에 임자네 내외가
《그 집 할아버지 말이 따뜻한 아래방에 모시려고 했는데
《원, 그랬구만!》
《웃방이야 차겠지비?》
《그 집 로인들이 너무 송구해서 밤새 엇바꾸어 부엌에 내려가 장작불을 지피였대요.》
《그래야지, 장작은 아껴서 어디다 쓰겠소!》 무산집어머니가 로인들의 처사를 칭찬했다.
《그래 아침에
《아이구 성님두, 난 찬거리가 될만한걸 들구 남편을 따라나서긴 했지만 이게 꿈이 아닌가싶으면서 가슴이 활랑거려 정지문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했다오.》
《저런 머저리! 쯧쯧…》
이때 여기에로 개털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 말을 성급히 몰아왔다.
홍병일이였다.
말의 배허벅과 다리는 눈투성이가 되였고 주둥이에는 성에가 허옇게 불리였다.
홍병일은 말안장우에서 리재명의 처를 내려다보며 거칠게 소리쳤다.
《아주머니, 쏘베트회장이 어데 있소? 얼른 나 좀 보자고 하시오!》
《아유, 어쩌면 좋을가요? 지금
현씨는 기여들어가는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녀인들은 얼굴들이 굳어졌다.
홍병일은 눈을 내리뜨고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어성을 높였다.
《겸상이요? 아주머니! 아침 새벽부터
《그런게 아니야요.…
홍병일은 갈개는 말을 돌려세우더니 유격대병실쪽으로 뛰여갔다. 말꼬리뒤에서 눈가루가 뽀얗게 날리였다.
녀인들은 묵묵히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산집이 한숨을 내쉬였다.
《에그,
얼굴이 해사한 녀인이 그의 모진 말에 겁을 먹고 나직이 타일렀다.
《성님두… 다 혁명군편에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말을 탕탕 하다가 욕을 보겠어요.》
《나는 혁명군편이 아니요? 그저 얕보구 꿱꿱댄다니까.》
뒤따라 다른 녀인들도 입을 열었다.
《어째 오늘은 저렇게 꼭두새벽부터 뛰여다닌다우?》
《정말 천하에 무서운게 없는것 같더니.》
《어휴- 이거 이런 말들을 싹 거두오.》
《어이구 성님, 마촌에
현씨부인은 눈을 내리깔고 드레박을 쥐였다. 그 말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쏘베트회장인 자기 남편에 대한 비난이였다.
현씨는 지난밤에 남편이 한 일에 대하여 녀인들앞에 속시원히 터놓고싶었으나 입을 고집스럽게 다물고 우물속에 드레박을 던져넣었다.
남편은 간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는 부엌아궁에 마른 장작을 지피고는 그앞에 앉아 장부책들을 뒤지고 목책에다 글들을 적어넣었다. 현씨가 여러번 눈을 붙이라고 권했으나 듣는둥마는둥 자기 일에만 골몰하였다.
새벽녘에 리재명은 기쁨에 번쩍이는 눈으로 안해를 쳐다보며 이렇게 속삭였다.
《여보, 자다니 정신이 있소?
《당신두… 천가지를 물으실지 만가지를 물으실지 모르면서 그 대답을 어떻게 미리 마련해둔다구 그래요. 차라리 정신이나 맑아지게 좀 눈을 붙여요.》
《쳇, 리재명이가 숙맥인줄 아우? 여기서 벌어졌던 일이랑 그리구 내가 총구멍앞에 섰던 일이랑 다 말씀올리겠소. 결판을 내고야말겠소!》
《여보!…》
현씨부인은 남편이 무슨 일을 저지를것만 같아 가슴이 화들화들 떨렸다.
현씨는 그래서 이 아침에도 말없이 물만 길었다.
×
방안에는 고요가 흘렀다. 수저가 그릇들에 조용조용히 닿는 소리가 이따금 울리였는데 그것은 고요를 더 짙게 하는듯싶었다.
아래벽에 걸린
《오래간만에 토장국에 밥을 말아먹으니 정신이 번쩍 드는것 같습니다. 아-참, 잠도 푹 잤고 아침도 잘 먹었습니다!》
찬거리가 없어 너무나도 간소하게 차린 아침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아있자니 명색이 쏘베트회장인 리재명으로서는 등골에서 식은땀이 다 흘러내렸다. 그런데
왜적을 달고다니며 내내 산에서 싸우신
《요새는 흔하던 노루고기도 손에 넣기 힘듭니다.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울리고 화약내가 풍기니 그것들도 어디로 다 도망간 모양입니다.》
리재명은 이렇게 말하며 무릎밑의 목책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거기에는
《전쟁이니까요.… 전쟁도 큰 전쟁이 시작되였으니까 산짐승들도 피난을 하겠지요. 허허허…》
강철의 떨림소리가 배여있는듯 한 그 힘찬 웃음소리는 리재명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그래서 그의 목구멍에서도 저절로 대가 실한 소리가 튀여나왔다.
《글쎄말입니다. 그놈들이 피난가는통에 손님대접도 이렇게 됐습니다.》
《제가 무슨 손님이겠습니까? 아주 살려고 왔는데요.》
《아니, 그게 정말이십니까?》
《여기에 아주 자리를 잡을 작정입니다. 사령부를 여기에 두겠습니다.》
《예?…》
리재명은 무릎을 탁 쳤다.
《됐습니다!
《김중권동무를 만났댔습니까? 우리가 량강구에서 파견한 동무인데…》
《예… 몇번 만나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줄창 온성쪽에 나가있었는데 요새는 도무지 소식을 알길없습니다.》
《온성쪽에… 그쪽에… 음…》
《회장동무, 여기서는 소금값이 얼마입니까?》
《예?…
《나도 짠것을 즐기지는 않습니다. 짠 음식은 사람에게 해롭다고 합니다. 그런게 아니라… 여기서 소금 한말에 값이 얼마입니까?》
리재명은
너무나도 범상하고 세속적인것 같은 질문에 리재명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소금값 말입니까?》
《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시는
리재명은 손에 쥐였던 목책을 무릎옆에 맥없이 놓아버렸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근년에 와서는 보름이 멀다하게 껑충 뛰여오르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니 도무지 그 값을 짐작할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두만강물이 언 다음 밀수입장사들이 소금섬을 지고 들어와 값이 좀 낮아지면 숨이 나갔습니다. 왜놈들이 9. 18사변후에는… 국경경계를 삼엄하게 펴고 도강지점마다에 세관을 내오고 도처에 염치관이란것을 두어 사염을 엄중단속하고는 제놈들이 소금을 전매하는 법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사염값에 비하여 관염값은 열배나 됩니다. 그뿐아니라 놈들은 심사가 뒤틀리면 제멋대로 소금값을 바싹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사람들의 숨통을 비틀었다 풀었다 롱간질입니다.》
《통분한 일입니다! 가슴이 터지는노릇입니다! 세상에는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노가 된 민족이 한둘이 아니지만 우리 조선사람들과 같은 그런 망국노가 어디 있겠습니까. 조선은 세면이 바다여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어떤 학정밑에서도 소금 그리운줄은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오늘은 나라를 빼앗기고 간도땅에 건너와서 사는것만도 분한 일인데 그 흔하던 소금까지 왜놈들한테 빼앗겨 제마음대로 쓰지 못하니 이런 망국노의 처지를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수 있겠습니까!》
《염치관… 염치관이라!… 왜놈들이 아니고는 그런걸 생각해낼수 있겠습니까? 좀스럽고 악착한 놈들!… 소금을 먹지 못하면 사람은 죽고 맙니다. 놈들은 소금을 다스리는 염치관이란 기구까지 내와서 생명보존의 기본요소까지 틀어쥐고 우리 겨레의 명줄을 마음내키는대로 흔들어대려고 합니다. 왜놈들 식민지통치가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리재명은
《그래 쏘베트에서는 소금을 어떻게 구입해들이고있습니까?》
리재명은 여태까지 많은 사회운동자들과
《련계가 끊어지다니요?》
《거기는 백색구역이 아닙니까? 현당에서는 주구촌과 련계를 맺는다는것은 이렇게나 저렇게나 적의 침습을 용이케 하는 틈을 주는것이므로 엄중히 단속했습니다.》
《백색구역… 주구촌이라니요? 거기에는 우리 인민들이 살고있지 않습니까! 그럼 유격구안에서는 무엇을 하고있었습니까?》
《예?… 사회주의혁명을 진척시키고있었습니다.》
《어떻게요?》
리재명은 목책을 펼쳐들었다.
《당장 먹을 소금도 없는데 사회주의혁명이라니요? 현당조직책이 마을에 와있다지요?》
《예… 엠엘파의 중심인물로서 오랜 공산주의자입니다.》
밖에서 전령병의 말소리와 누군가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전령병 리성림이 들어왔다.
《박훈중대장이 오늘일과를 지시받으러 왔습니다. 들여보내도 좋습니까?》
《들여보내오!》
방에 들어선 박훈은 경계의 눈빛으로 리재명을 흘깃 돌아보고는 키를 낮추며
《오늘 하루일과는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습니까?》
《모두 식사는 끝났소?》
《예.》
《오늘 하루는 푹 쉬도록 하오. 나도 나가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