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제 2 장
1
희붐한 어스름속에 굳은 물체를 내리치는듯 한 야무지고 날카로운 음향이 메아리쳤다.
쩡… 쩡… 쩡… 소왕청하의 얼음판우에 세 그림자가 몰켜서서 얼음구멍을 뚫고있었다. 그들은 지난밤
세사람중에서 키가 후리후리하고 성미가 시원시원하며 우스개소리도 곧잘할것 같은 사람은 한흥권중대장이다.
키가 그의 귀아래에 오고 몸매가 다부진 사람은 박훈중대장인데 그는 과묵하게 생겨 어느 누구보다도 무게가 나보인다.
그리고 보통키에 모색이 준수한 사람은 전광식이다.
그들은
세사람은 근거지에 도착한 기쁨과 흥분때문에 얼마 자지 못하고 일찍 일어나 소왕청하로 뛰여나왔다.
한흥권이와 전광식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서서 옴폭한 골안이며 병풍처럼 둘러선 산발들을 둘러보고 박훈은 도끼로 얼음판을 내리까고있었다.
그는 제 성미대로 도끼를 성급하게 휘둘러댔다.
얼음쪼각들이 윙- 윙- 울부짖으며 사방으로 날아났다.
그는 자리가 마뜩지 않아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듯 발을 자꾸 옮겨디디는가 하면 잠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얼음판에 욕설을 퍼부어댔다.
《에익, 두껍게는 얼었다! 하, 요거… 요거… 맞선다? 나한테 맞서? 감히… 나한테?…》
도끼날은 곧추 내리박히다가도 때로는 빗나가서 얼음쪼각들을 옆으로 윙- 윙- 날렸다.
한흥권은 그의 일솜씨가 못마땅하여 도끼를 앗아쥐려고 손을 내밀었다.
《자, 이리 주게, 내가 하지!》
그러나 박훈은 이런 일에는 자기만이 제격이라는듯 아랑곳없이 도끼질을 계속하였다.
전광식은 그 일에 비치지 않았다. 그는 두어걸음 뒤에 물러서서 늘씬한 허리에 두손을 올리고는 얼음판과 씨름하는 박훈을 보며 벙글벙글 웃기만 하였다. 그는 안깐힘을 쓰는 그의 부아를 돋구어주려는듯 이따금씩 익살스러운 소리를 텅텅 던지였다.
《이 사람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왜놈들을 칠 때에는 펄펄 날더니 얼음판하고는 옴짝을 못하는군. 얼음이란건 물이 얼어붙은겐데… 맹물이… 한흥권동무, 가만 둬두오. 맹물이 이기는가 누가 이기는가 보기요, 허허허…》
그 말에 약이 오른듯 박훈은 군모를 벗어 옆에 내던지고 손바닥에 침을 뱉어 누기를 주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왕청사람들은 원래 고집이 세다더니, 엑- 얼음장두 튼튼하게는 얼어붙었군.…》
그는 다시 팔뚝에 힘을 주며 도끼자루를 틀어잡았다.
《자- 자- 인주게!》
한흥권이 성큼성큼 다가서서 그의 손에서 도끼를 앗아냈다.
《왕청얼음이라구 바위벼랑처럼 굳겠는가? 어디 맛을 좀 봅세.》
그는 도끼를 머리우에 번쩍 쳐들어올렸다. 그 바람에 언제나 몸에 작아보이던 군복저고리 앞자락이 들리며 안에 입은 흰 내의가 드러났다.
허공에서 도끼날이 몇번 번뜩거리고 얼음쪼각들이 앙칼진 비명을 지르며 튀여오르더니 얼음판에 구멍이 펑 뚫렸다. 한흥권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능숙한 잔도끼질로 그 구멍을 넓혀나갔다. 얼음구멍에서는 물이 출렁거리고 얼음쪼각들이 서걱거렸다.
그는 불어오르는 물우에 떠있는 얼음쪼각들을 손으로 대충 걷어내고는 허리를 쭉 펴며 벙글벙글 웃었다.
《이만하면 세면장이 되지 않았소, 엉?》
박훈이와 전광식은 대답대신 허리를 굽히고 얼음구멍에 차오르는 물을 들여다보며 환성을 터뜨리였다.
《히야- 맑은데!》
《샘줄기를 면바로 뚫렀구만!》
물에서는 흰김이 문문 피여올랐다. 마치 물줄기가 거대한 생명력으로 더운 숨을 몰아쉬는듯 하였다.
문득 박훈이 무릎을 꿇고앉으며 두손으로 물을 퍼올려 얼굴을 씻었다. 그는 얼굴에 물이 아니라 허연 김을 끼얹는것 같았다.
《어허- 시원하다!》
이때 그들의 뒤쪽에서 우렁우렁한 음성이 울렸다.
《어- 모두 벌써 일어났는가!》
사람들의 가슴을 들썩하게 흔들어놓는 그 소리에 지휘관들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얼음판에 내려서신
《밤새 안녕들하오?》
문득 얼음판우에 따뜻한 화기가 넘치는듯 하였다.
《옛…》
지휘관들은
로흑산의 혹한과 왜놈들의 포위를 뚫고나오며 겪으신 시련으로 하여 수척해지셨던
김이 문문 피여오르는 얼음구멍을 내려다보시는
《오, 샘물이군! 세면물을 퍼내자고 이렇게 뚫렀소? 어서 시원하게 세면들을 하오.》
《자, 물을 끼얹어주게, 잔등에 쫙쫙.》
한흥권은 바가지에 철철 넘치게 물을 퍼올려서는 장난 절반으로 그의 머리와 목덜미에 마구 쏟아부었다.
박훈은 으흑 하고 느끼다가 웃음섞인 환성을 터뜨렸다.
《으흐흑… 어허헉… 좋다. 잔등에… 잔등에, 어- 씨원해.… 어… 후끈해!》
그의 잔등에서는 더운김이 문문 피여올랐다.
전광식이도 싱글벙글거리며 천천히 웃도리를 벗다가 박훈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동문 어디가나 랭수마찰부터 시작하는데 그건 황포군관학교에서 배운겐가?》
《아니, 아니요.… 조선에 있을 때부터… 어렸을 때부터 했소. 나라를 찾자면 우선 체력이 튼튼해야 하는데 이게 제일 보약이라나.》
《누가?…》
《의병을 하던 그런 령감이 있었어.》
한흥권이와 전광식이 서로 물을 부어주며 손이며 얼굴을 씻었다.
《요영구를 떠나서 여기에 와 하루밤 자보니 어떻소?》
박훈이 수건으로 목을 썩썩 문지르며 말하였다.
《뜨뜻한 온돌에 잔등을 척 붙이니 몸이 스르르 녹아내리는것 같았습니다. 하하하… 댓시간 자고났는데 십년을 자고난것처럼 몸이 쭉 풀렸습니다. 눈을 뜨니 야, 여기는 조선이나 같은데로구나 이런 생각이 들며 오만가지 생각에 잠이 와야지요.》
《나도 그랬소. 온돌에 누우니 뜨뜻해오르면서 고향에 온것 같은게 어느새 잠이 드는지 몰랐다니까, 허허허…》
한흥권이는 목단추를 채우며 벙글거렸다.
《정말 그렇습니다. 지난밤에 마을로 들어올 때 여기 부녀회장동무가 떠주는 더운물을 마셔보니 숭늉이 아니겠습니까. 조선숭늉이… 고향집에 온것 같으면서 마음이 정말 별내졌습니다. 박훈동무는 꿈까지 꾸었습니다.》
《꿈? 꿈이라, 어떤 꿈이요?》
모두 싱글벙글거렸으나 박훈은 수집은듯 어줍게 웃었다.
한흥권이 팔굽으로 툭툭 건드리자 그는 시꺼먼 눈을 껌뻑거리였다.
《참 어처구니없는 꿈입니다. 제가 여기 와서 고향에 전보를 쳤는데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두만강기슭에까지 와서 배가 없어 건너오지는 못하고 저를 부르며 손을 흔드는게 아니겠습니까. 이 마촌이란게 두만강 대안마을이더군요. 두만강물에 첨벙 뛰여들어 헤염을 쳤는데 아무리 헤염쳐야 저쪽기슭에 가닿아야지요. 물속에서 계속 허우적거리다가 잠을 깼습니다. 허참…》
《잠을 깬 눈을 보고 내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요.》하고 전광식이 끼여들었다.
박훈이 그윽한 눈길로
《여기 이 물은 어디로 흘러갑니까?》
《어디라니? 두만강으로 흘러들지.…》
《그렇습니까?》
《그렇소, 처음에는 대왕청하와 합쳐져서 서북방향으로 치달아오르다가 갑자기 서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가야하와 합쳐져 큰 흐름이 되여 쭉- 남쪽으로 내달려 도문쪽에서 두만강에 떨어지오!》
《아하, 그렇군요! 여기서 온성까지 60~70리라니까 하루밤 걸어나가면 조국땅이겠지요?》
《조국이요!… 적통치구역에 나간 김중권동무랑 최춘국동무랑 우리가 여기 온걸 알면 당장 달려올거요!》
《그 동무들을 만나자고 그런 꿈을 꿨는 모양입니다.》하고 한흥권이 벙글거렸다.
이때 저 마을길쪽에서 웬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거렸다. 그는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으로 정신없이 달려왔다.
장룡산이였다. 푹 눌러쓴 개털모자의 귀덮개가 수리의 날개처럼 펄럭이였다. 그의 눈섭이며 입가의 수염털에 성에가 하얗게 불리였고 옆구리에서는 살이 푸드러진 장끼 두마리가 묵직하게 드리워 데룽거렸다.
장룡산은 얼음구멍이며 그 둘레에서 번들거리는 물을 보자 크게 랑패를 한 사람처럼 팔을 벌렸다가 내렸다.
《허 이거, 제가 옹노에 정신이 팔려 그만.… 대접을 잘하자던노릇이 찬물에 세면을 하게 했습니다.》
한흥권이와 박훈은 군대의 지휘관이라기보다 산골포수에 더 가까운 그의 용모며 체취에서 고향의 흙냄새같은 친근한 그 무엇을 느껴 빙그레 웃었다.
《찬물에 세면을 하니 정신이 번쩍드는게 더 좋소. 이 동무들은 랭수마찰까지 했소!》
《그렇습니까!》
《그건 웬 꿩이요?》
《며칠전에 옹노를 놓았는데 걸렸습니다.》
장룡산은
《살이 졌는데. 여기에 이런 꿩이 많이 내리오?》
《예.… 저 십리평이나 셋째섬쪽에는 더 많이 내립니다. 동지가 지나면 예전에는 노루와 메돼지들이 줄을 지어 내렸습니다. 옛날 포수들은 그걸 짐승들의 대왕인 범이 설을 쇠라고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옛날에는 여기가 다 범이 주관하는 세상이였는데 장씨 성을 가진 젊은 장수가 범을 물리친 다음에는
《아- 지난밤 리재명회장이 그러더군. 리재명회장은 범을 물리친 그 청년이 장씨가 아니라 마씨라고 하던데? 여기에 마씨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소?》
《허, 이거… 그렇습니까?》
그리고는 리재명회장에게 화를 냈다.
《호적부에 올리는것두 아닌데 그 량반은 이 얘기만 나오면 별스럽게 성을 따집니다. 어쨌든 포수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나는 장동무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이요. 어쨌든 포수일게고 그 포수는 또 사람이겠지요? 사람이! 허허허.…》
지휘관들도 웃었다. 장룡산의 얼굴에도 반죽이 좋은 웃음이 가득 어리였다.
얼마후
산등성이에 오르신
아득히 먼 서북쪽하늘가에는 로야령산줄기의 험준한 산발들이 아아하게 솟아있고 동남쪽에는 고려령, 서남쪽에는 길철령이 둘러싼 가운데 왕청오지가 희푸르스름한 연무속에 잠겨있다. 어디를 바라보나 줄줄이 뻗어내린 산발들이고 꿈틀꿈틀 굽이쳐나간 깊은 골짜기들뿐이다. 가파로운 산들과 깎아지른듯 한 벼랑들로 둘러싸인 소왕청골짜기와 대왕청골짜기의 지세는 특히 기묘하다.
《저 산들을 보오. 우리가 여기에 유격근거지들을 꾸리자고 결정할 때 예상한대로요. 말그대로 천험의 요새요. 왜놈들은 이런 험악한 산악지형에서는 절대로 대무력으로 전선을 펼수 없소. 놈들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고 우리가 방어하기에는 아주 유리한 지형이요. 왜놈들이 〈토벌〉을 들어왔다가는 백번이면 백번 다 녹아나겠소. 허허허…》
그 호탕한 웃음소리에 잠을 깨듯 눈에 덮여 고즈넉이 휘여졌던 나무가지들이 보일듯말듯 설레이면서 정갈한 눈가루들이 날아내렸다. 눈가루들은 지휘관들의 볼을 스쳐 그들의 어깨며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동무들, 저걸 보오. 격랑을 일으키며 파도치는 산악들의 바다고 대양이요! 아, 얼마나 장쾌하오. 큰 산발들은 모두 앞을 다투어 조국땅쪽으로 달려나갔소. 저 산발들을 타면 백만대군도 큰소리를 치며 조국으로 드나들수 있겠소. 우리가 여기에 근거지를 잡자고 결정한게 얼마나 잘한 일이요. 조국땅이 눈앞인 여기에 유격근거지를 잘 꾸려놓고 혁명을 힘차게, 크게 벌려야 하겠소! 아, 정말 마음에 드오!》
《소리치고싶소. 세상이 다 듣게 나팔이라도 불었으면 좋겠소,
그 소리에 한흥권은 대자연의 태고연한 고요가 뭉클하게 느껴져 웃지도 못하고 그저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조국땅쪽 하늘가에 불그무레한 노을이 타오르고 천만산악들의 메부리가 연보라빛으로 물들여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