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제 1 장
5
최형준은 말했다.
《동무가 조혼했다는 그 리유 하나만으로도 참군이 보류되거나 아주 부결될수 있소. 왜 그런가? 조혼이란 락후한 봉건적생활인습의 집중적인 표현이요. 때문에… 알겠소? 때문에 동무는 본인이 원했거나 원치않았거나 관계없이 봉건에 한발이 깊이 빠져있소, 봉건에.… 그런데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혁명을 하고있소. 봉건에 한발이 깊이 빠져있는 사람이 아무리 다리를 넓게 벌린다 해도 다른 발을 사회주의혁명에까지 내디딜수 있겠소? 쉽게 말하면 리치는 이렇소. 무장을 들고 피와 목숨까지 바치며 사회주의혁명의 길을 진두에서 개척해가는 혁명군은 정수분자로… 계급적으로나 사회륜리적으로 흠할데 없는 정수분자로 꾸려야 하오.… 설사 참군했다고 치더라도 동무자신이 어떻겠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오. 봉건관계를 청산하는 투쟁에서 혁명적무자비성이 발동되겠소? 량심이 저리고 손이 떨리지 않겠는가?… 또 군중의 립장에서 보면 어떻겠소. 저 사람은 제코도 못 씻으면서 남의 코를 씻자고 날친다고 뒤에서 비웃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소?… 이편에서 보나 저편에서 보나 참군부결은 그럴만한 리유가 있단 말이요. 혁명투쟁에서 어찌 모든 사람들이 다 일선에 서겠소. 동무야 적위대원으로 있어도 되지.… 몇살에 장가들었소?》
창억이는 그 마지막물음에 단재를 들쓴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문곁에 서있는 녀자때문에 울분을 터뜨리지 못했다.
박현숙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창억이는 단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얼결에 그 녀자쪽을 돌아보았다. 박현숙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내리뜨며 얼른 문을 열고 나가주었다.
최형준은 문턱밑에 내던져진 가죽가방을 들어 책상에 올려놓고 검은 양복저고리를 벗어 그우에 던진 다음 벽에서 토목수건을 벗겨 얼굴이며 목의 먼지를 썩썩 씻어냈다. 얼굴이며 목이 대뜸 벌개졌다. 그는 수건을 또 양복저고리우에 휙 내던졌다. 그가 어찌나 세차게 움직여대는지 뙤창문곁에 걸려있는 등불이 꺼질듯이 파르르 떨었다.
그는 방바닥의 물사발을 들어 물을 꿀꺽꿀꺽 마시다가말고 창억이를 치떠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동무, 하여튼 마촌사람들은 유명하오. 사흘만에 강연에서 돌아왔는데 온돌에 앉아보지도 못하게 들이닥치니, 하하하.… 저 녀선생은 강연에서 교육사업을 쳤다고 그 대목을 당장 제강에서 빼라고 항의하오. 답답한 일이요. 사회주의혁명은 안하고 교육사업에 치중하니 투항주의라는 소리까지 듣지 않는가 말이요. 또 내가 빼고싶다고 빼지오? 강사가 뭐요. 나는 상급에서 시키는 말을 하는 사람이요. 동무도 그렇지.… 참군문제를 나한테 들고오면 어떻게 하오? 강연에서 내가 말했다고 다 나한테 찾아오는데 이거야 참… 동무, 내가 참군을 시켜주오?》
창억이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거의 위압적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꼭 알고싶은게 있어 왔습니다! 조혼한 사람은 앞으로도 영영 참군을 못합니까? 그것만 솔직히 말해주시오!》
최형준은 얼굴이 해쓱해졌다.
《원칙적으로는 안되오.…》
《됐소!》하고 창억이는 격하게 부르짖으며 홱 돌아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최형준이 한팔을 앞으로 내뻗치며 다급히 불렀다.
《동무!》
창억이는 분기에 펄펄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최형준은 그 분노에 놀라서 눈이 커졌다.
《동무… 동무… 왜 그러오?》
창억이는 그 말에 더 수모를 느낀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나는 형들을 다 잃었소! 왜놈들에게 다 잃었소! 이 가슴에 피멍이 들었소!》
최형준은 다가와서 그의 팔을 끌어 방바닥에 앉히고 자기도 마주앉아서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말아달라고 사과하였다.
이 인정에 분기가 누그러져 창억이는 자기 집에서 겪은 참사를 다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죄다 듣고나서 최형준은 두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잠자코있더니 이윽고 손을 내리고는 가볍게 질책하였다.
《그럼 그렇다고 말해야지.… 낮에 쏘베트마당에서도 그렇소. 현당조직책동지도 관심을 돌리고있었는데 그렇게 욱해서 뛰쳐나가면 되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찾아가보오. 쏘베트에서 회의중일게요. 나한테 한 이야기를 다 말하고 심정도 솔직히 말하오. 나도 뒤에서 힘쓰겠소. 내가 보냈다는 말은 말고… 어서 가보오. 어떤 엄한 법에도 인정이 비비고 들어설 틈이 있다는데… 용기를 내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했다.
창억이 마당을 지나 나오는데 사립문옆에서 박현숙이 그를 반기며 다가왔다.
《뭐라고 해요?》
《…》
창억이는 이 녀자가 울분을 터뜨리는 소리를 다 들었으리라고 생각하니 좀 면구스럽기도 하였지만 자기를 걱정하여 밖에서 기다려까지 준것이 여간 고맙지 않았다. 그는 두손을 앞에 모아쥐고 허리를 약간 구붓한채 녀자의 뒤를 따라 사립문을 나섰다. 그들은 울바자를 끼고 돌아나간 길로 가지런히 서서 걸었다.
박현숙은 스스럼없이 곁에서 걸으며 활달하게 말을 건네였으나 창억이는 도시녀자옆에서 난생처음으로 걷는지라 몸가짐이 굳어져 엉거주춤한 걸음을 옮겨갔다.
《현당간부동지한테 가보라고 하는데…》
《가보세요! 강사라는 저 사람은 자기가 한 말도 다 책임 못 지겠다고 해요.… 연단에서만 사자야요, 무슨 사람인지?》
《인정은 깊은 사람인것 같습니다.》
《가서 들이대세요. 왜 입대 못하겠어요.》
이때 그들의 앞으로 한 녀인이 다가왔다.
창억은 직감적으로 안해를 알아보았다. 그는 몸을 옹송그리고있는 녀선생에게 무엇이라고 변명하려다가말고 창황히 보금에게로 다가갔다.
창억은 우악스럽게 안해의 팔목을 거머쥐고 울바자모퉁이를 바람처럼 돌아지나 길가의 느티나무밑으로 끌고갔다.
보금이는 몸을 오돌오돌 떨었다. 남편을 쳐다보는 눈에는 눈물이 가랑거렸다.
《왜 쫓아다니며 망신만 시켜?》
《어떻게 됐어요? 속시원히 말해요!》
《님자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왜 제가?…》
보금이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였다.
《제때문이라면… 마을에 도는 소문처럼 제때문이라면… 그럼 그렇다구 말해줘요!》
보금의 목소리에는 흐느낌이 섞이였다.
《쟈- 이거…》
《아버님이 찾아요. 오늘 밤중으로 집에 끌어들이래요.》
《집에 무슨 일이 생겼어?》
보금이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 그저… 봉남이가 와서 말해 다 알아요. 마을에 소문두 자자하구 해서…》
《소문이?》
창억이는 숨을 거칠게 씨근거렸다.
《저 녀자는 누군데?…》
느티나무가지사이로 흘러내리는 어스름한 달빛에 보금의 눈에서 차거운 빛발이 번쩍하는것이 보였다.
《가자요!》
《먼저 가오. 내 들렸다 갈데 있소.》
《가자요. 아버님이 분해서 형편없어요. 가자요!》
《먼저 가라는데!》
창억이는 꿱 소리쳤다. 그러자 보금이는 말대답도 못하고 공손히 돌아섰다.
창억이는 느티나무밑에 우두커니 버티고서서 어스름속에 멀어지는 안해의 뒤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후- 내쉬였다.
(에익, 차라리 엇서기라도 했으면… 그저 양이라니까.…)
어디선가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피타는 울음소리였다.
×
이때 쏘베트사무실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였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방안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안에 리재명을 비롯한 구정부의 직원들이 책상둘레에 머리를 수굿하고 앉아있었다.
책상에 양초 두대, 서류장우와 창턱에 석유등과 양초 한대씩을 켜놓아 사람들은 마치 밝은 빛발에 둘러싸여있는것 같았다.
천장에서는 불그림자가 얼른거렸다.
권일균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서서 창밖을 내다보며 감옥살이에서 얻은 류마치스때문인지 이따금 주먹으로 왼쪽어깨를 뚝뚝 두드리였다.
홍병일이 방가운데 서서 자그마한 목책을 펼쳐들고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있었다.
《어제밤과 오늘 저와 몇동무들이 동림촌, 황갈촌을 비롯한 몇개 마을에 내려가서 실태조사를 진행한데 의하더라도 현당의 지시는 잘 집행되지 않고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하는 사회주의혁명은 난관에 직면하고있습니다. 사태는 엄중합니다.》
홍병일이 목책에서 인용한 통계수자들과 개별적인물들의 료해자료와 그들이 쏘베트를 비난한 발언요지들을 생략하고 본질적내용만 보면 다음과 같다.
깊은 력사적뿌리를 가지고 집요하게 저항하고있는 농민의 소소유자적근성때문에 사회주의혁명의 새싹들이 활짝 피여나지 못하고있다.
《꼼무나》로 나가는 준비인 《공동생활》의 첫걸음-공동식당운영이 거의 모든 마을에서 흐지부지해졌다. 왜 이렇게 되였는가? 농민들이 공동창고에 량곡을 적게 바치고 대부분을 자기 집 움속에 감추어두었기때문이다. 어떤 농민들은 먹을것이 떨어졌다고 하여 창고장과 내통하고 바쳤던 량곡마저 도로 찾아갔다. 기회주의적인 일부 중농들은 세상이 달라지면 찾아올것을 망상하면서 적지 않은 량곡을 백색구역 친척들에게까지 빼돌림으로써 본질상 적을 돕고있다.
래년 봄의 공동경작을 위한 준비사업이 굼뜨게 진행되고있다. 제일 기초적인 사업인 토지, 역축, 농기구등록사업도 제대로 안되였다.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나누어가졌던 땅이 공동경작지로 등록되는데는 마지못해 응하지만 자기들이 일군 화전을 등록하자면 온갖 구실을 다 붙여 회피하려고 한다. 지금 대왕청과 소왕청골안에 수백, 수천개의 뙈기밭들이 숨어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농민적인 소소유자근성의 온상으로, 우리가 하자는 사회주의혁명에 도전하는 농민리기주의의 잠복처로 되고있다.
어떤자들은 래년 봄에 소를 내놓기 싫어 남에게 팔려고 거간군을 내세우고있으며 지어 어떤자는 토지를 밀매하고 백색구역으로 도주할 기미까지 보이고있다.
이미 백색구역으로 도주해나간 변절자들은 우리를 악랄하게 중상하며 쏘베트를 네것내것을 한데 섞어 반죽을 하는 쇠버치라고 비렬하게 야유하고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는 농민적소소유자근성의 검질긴 저항에 부딪쳤다.
홍병일은 열을 내여 말을 이었다.
《마촌쏘베트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사태를 상급에 보고도 하지 않았소. 무능해서 속수무책으로 있었는가, 농민들에게 편승하여 혁명의 퇴조를 노리며 딴꿈을 꾸었는가? 문제는 둘중의 하나요!》
리재명의 정수리를 노려보는 홍병일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꽃이 살아오른다.
《사업가에 언변가라는 리재명동무, 왜 말을 못하는가?… 말해보오!》
홍병일은 버럭 어성을 높여 말끝의 날카로운 갈구리로 그의 가슴을 쿡 찍어 쳐들어올리는것 같다.
엉거주춤 일어난 리재명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되여 목의 울대뼈만 오르내릴뿐 말은 못하였다. 그는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홍병일을 한동안 건너다보더니 신음소리를 가늘게 내며 무엇인가를 꿀꺽 삼키였다.
홍병일이 앉자 리재명은 좌중을 둘러보며 생활세태적인 항다반사를 이야기하듯 느릿느릿 말했다.
《좌우간 허- 일은 꾀여만 간단말입니다. 〈공동생활〉로 들어가려고 공동식당이란걸 처음 차려놓았는데 일은 우습게 돼갔지요. 사람들의 구미라는게 제마끔인데 공동식당에서는 늘 같은 밥에 같은 찬이라… 투정질이 나오기 시작했지요. 집에서들은 애들이 투정질인데 허- 이건 수염이 석자세치나 되는 로인님들로부터 투정질이란 말입니다. 집에서 끓여먹으며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지요. 속이 상해서 한 로인을 찾아가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는 사회주의를 하자는건데 마을이 존대하는 로인장어른부터 섭섭한 맘을 털고 나와주셔야지 이러면 되겠소이까 하고 빌었지요.
하니까 로인이 하는 말이… 자기는 이맘때면 명란장을 끓여먹어야 겨우내 해소가 나지 않는데 거기 나가면야 그런게 있겠는가고 묻는게 아니겠소. 백색구역과의 거래도 없지, 우리 근거지가 바다를 끼고있는것도 아니지 어디서 명란을 구하겠습니까.…》
《그따위 시시펑덩한 사말사는 줴버리오! 본질을 말하오!》 하고 홍병일이 그를 치떠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리재명이도 승기가 살아올라 눈을 부릅뜨며 그를 흡떠봤다.
《뭐요? 이게 본질이요!》
《명란이 본질이란 말이요?》
《본질이 아니구요! 정확히 말하면 본질이 집약된 현상이요. 하루 세끼를 공동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사람들한테는 제 구미에 맞는 음식을 먹고싶은것이 본질적요구요. 그들의 립장에서는 그렇소!》
《그러니 공동식사에 습관시켜 구미를 통일시키란 말이요!》
《여보시오, 맑스나 엥겔스의 어느 저서에 사람들의 구미를 통일시켜야 사회주의를 건설할수 있다는 대목이 있소? 그걸 대주면 나도 그렇게 하겠소!》
《사회를 개조하겠다면서 사람들의 입맛 하나 뜯어고치지 못하는가?》
《이 리재명이 시라소니 돼서 그렇겠지만… 나는 그것만은 못하겠소.》
《음- 알…겠…소!》
《공동경작준비에 대해서 말한다면…》
홍병일이 그의 말을 가로채며 내쏘았다.
《또 시시펑덩한 이야기요?… 왜 토지등록사업을 떨떨하게 했는가 그것부터 밝히오.》
《?…》
《왜 농민들한테…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많은 뙈기밭을 남겨줬는가?…》
《누가 선심을 쓴건 아니요.… 그들이 감춘게지!》
《밭이 바늘이라구 감추겠는가?》
《그건 뙈기밭을 감춘 당사자들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요》
《여보, 물어보나마나요. 눈을 감아주니 그 지랄이지! 경제부의 한동무가 말하는데 마점산인가 뭔가 하는 농사군은 뙈기밭을 등록하자니까 콩대를 막 뽑아내던졌다우. 이게 반항이 아닌가? 그따위들을 놔두는 당신의 정체를 밝히오!》
《뭐요?… 당신이 내려와 해보오. 여보, 농민들하구 한우물의 물을 퍼먹으며 해보란 말이요!》
홍병일이 뛰여일어나며 한손을 옆구리의 브라우닝권총집에 가져갔다. 옆에 앉은 직원이 그에게 달려들어 팔을 붙잡았다. 사람들이 우당탕거리며 뛰여오르고 방공기는 살벌해졌다.
홍병일은 불같은 눈으로 리재명을 쏘아보며 몸부림치다가 털썩 주저앉아 이마를 책상에 떨구었다. 그는 분을 참느라고 씨근거렸다.
《농사군들 물이 들었다.… 투항분자!…》
한걸음 뒤로 물러선 리재명은 숨을 헐떡거리며 황소눈이 되여 그를 내려다보았다.
창곁의 권일균이 방가운데로 무겁게 걸어나오며 홍병일에게로 언짢은 눈길을 흘깃 던졌다.
《오손도손해도 얼마든지 될 일을 가지고 공산주의자들이란 사람들이 이게 무슨 말본새들이고 추태요? 동무는 언제봐야 문제를 극단으로 몰아간단말이요. 자기 주관이 관철 안된다고 동지를 사살할텐가?… 나는 현당집행위원회에 동무의 사업상권리를 당분간 정지시킬것을 제기하겠소!》
홍병일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번쩍들더니 맞은편 벽의 한점을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권일균은 모든 고충을 감수하는 시름겨운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 근대적문명을 체득한 산업프로레타리아대군이 없어 농민들에게 의거하고있는것자체가 우리들의 타고난 불행이지만… 이 불행을 숙명으로 감수하고 소화, 체념해야지 그걸 시시각각으로 상기한다면 걸음마다 신경이 곤두서고 피가 뛰여오를수밖에… 이 소화, 체념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어느 단위에서도
권일균은 천천히 걸어서 방구석쪽으로 갔다. 그는 돌아서지 않고 남달리 큰 머리를 무겁게 숙이고 한동안 묵묵히 서있더니 서류장우의 등잔에서 심지를 돋구며 무심결에 하는 소리처럼 물었다.
《재명동무, 김중권동무가 여기 와서 묵어갔다는데… 동무네 집에 며칠이나 있었소?》
리재명이 얼굴을 들어 그의 뒤더수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등잔불빛을 받아서인지 빛발을 번쩍 발산하였다.
《댓새 묵어갔습니다.》
다른쪽구석에 앉은 사람들속에서 김중권이 누구냐고 귀속말로 수군수군 묻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가
권일균이 김중권에 대하여 더 묻지 않는것으로 보아 그야말로 무심결에 한 말인듯 했다.
그는 다시 방가운데로 돌아와서 홍병일과 리재명을 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자면서 가슴에 손들을 얹어보오. 혁명경력도 그만하면 찬란한 사람들이 무슨 꼴들인가 말이요.》
그는 묵상하듯 눈을 내리뜨고 잠시 말이 없다가 쏘베트직원들쪽에 눈길을 돌렸다.
《우리가 오늘 밤에 쏘베트회장을 비판하며 답새긴건 다 믿구 든든하게 여기기때문이요. 사실은 분담된 업무에 따라 군중과 직접 접촉하는 동무들에게 큰 책임이 있단말이요.
그런데 쏘베트회장에게 내려지는 매를 막아 잔등을 들이미는 직원이 오늘 밤에 한사람이나 있었는가?…》
이때 문이 벌컥 열리며 웬 청년이 뛰여들어왔다. 김창억이였다. 그는 울기가 올라 시뻘개진 얼굴로 누구인가를 찾는듯 방안사람들을 두릿두릿 둘러보았다.
쏘베트직원들중의 몇은 그의 이런 충격적인 돌입이 자기들의 머리우에 내려지려던 채찍을 멈춰세웠다는것으로 하여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였다.
창억은 먼길을 달려온 사람처럼 단숨을 헉헉 몰아쉬다가 홍병일을 알아보고 그에게 울분을 터뜨렸다.
《제 참군이… 부결된건… 억울합니다. 나한텐 봉건이 없습니다. 왜놈칠 생각밖에… 봉건이 없습니다. 형님 둘이 으흐흑…》
창억은 머리를 숙이며 울음을 삼켰다.
홍병일이 야릇한 미소가 어린 차거운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정신이 들게 깨우쳐주려는듯 주먹으로 책상모서리를 뚝뚝 두드려보였다.
《이봐, 나는 그 형들두 알아. 미물같이 쥐여짜지만 말구 봉건이 없으면 없다는걸 보이란 말이야! 알겠어? 내 말을 알겠는가?》
방안은 고요해졌다.
얼이 빠진 사람처럼 홍병일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창억의 눈에 차거운 빛발이 펀뜩 스쳐지나갔다.
그는 더 울분을 터뜨리거나 무엇을 캐묻지도 않고 황황히 돌아서서 밖으로 뛰여나갔다.
바깥공기는 차겁고 눅눅했다. 안에서 몇사람이 껄껄 웃는소리가 들려왔다.
창억이는 쓰러지듯이 벽에 기대여섰다. 눈앞으로 동그스름한 그림자 들이 후륵… 후륵… 날아내렸다. 한잎두잎 떨어져내리는 마가을의 마지막락엽들이였다.
그는 처마끝을 쳐다보다가 밤하늘이 한옆으로 기울어지는듯 하여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차거운 달빛에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보였다.
(봉건이 없다는걸 보이라?! 보금이를 버리라는 그 소리 아닌가?… 아, 그 소리구나! 그런데 저 사람들은 무엇이 좋아 저렇게 웃어대는가?)
이날 밤 창억이는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마을길을 끝없이 헤매다가 개천가로 나가 돌베개를 베고 오래동안 누워있었다.
하늘에 한벌 깔려서 찬란하게 반짝이고있는 별들이 모두 눈을 밝혀 그를 내려다보는것 같았다.
창억이는 웬일인지 그 별들이 두려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