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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회


제 1 장

2

왕청산골에 사는 조선사람토배기들은 험준한 산세와 산골물의 세찬 흐름을 닮아서인지 기상이 도도하고 성미가 드세였다. 여기에 언제 그네들의 생활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지 딱히 아는이가 없었다.

북망산을 눈앞에 바라보는 늙은이들의 옛말같은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집 조상들이나 조국강토를 휩쓴 무서운 수해와 왕가물뒤의 기근에 쫓겨,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거듭된 전란에 쫓겨 처자권속들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이 산간오지로 들어왔다는것이였다. 그중에서도 전란의 참혹한 재난은 로인들의 담배진이 밴 전설로 엮어져 후손들의 가슴에 외적에 대한 저주와 증오를 심어주었는데 그것은 족보의 성씨처럼 변함없이 자자손손에 물려졌었다. 어느 민족의 어느 강토가 이처럼 외래침략자들의 강탈을 당하였겠는가!

전란에 뒤따르는 기근과 사람의 기름을 짜내는 수탈에 못 견뎌 사람들은 류랑의 길을 떠나 북으로, 북으로 지친 걸음을 옮기다가 일망무제한 묵은땅이 있다는 대륙에 유혹되여 두만강을 건넜다.

류랑민들은 수수농사를 지으며 수수한이삭을 지게로 겨우 지고 일어선다는 비옥한 땅에서의 생활이 신기루처럼 눈앞에 어른거려 지칠줄 모르고 화룡땅으로, 룡정땅으로, 왕청땅으로, 훈춘땅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류랑민들은 화전을 일구려고 원시림을 찍어내고 산에 불을 질렀다. 산간오지 처처에서 피여오르는 시커먼 연기에 간도땅 하늘이 거멓게 흐려진 때가 있었다. 산령을 휩쓰는 불길에 자기들의 활무대를 잃고 로야령산줄기의 깊은 막치기로 쫓겨간 맹수들은 밤이면 먼 인촌의 불빛이 반디불같이 반짝이는것을 내려다보며 복수심에 느침을 흘리면서 하늘이 허물어져내리도록 울어댔다.

맹수들은 대낮에 버젓이 대왕청골짜기와 소왕청골짜기를 따라내려와서 강냉이밭, 무우밭, 감자밭을 짓이겼으며 가축들을 잡아갔다. 맹수중에서도 제일 영악한것은 만주범이였다. 멀리 우쑤리강류역까지 하루밤사이에 넘나든다는 만주범들은 대왕청골짜기와 소왕청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백바위와 뾰족산꼭대기에 올라 앞발을 벋딛고 앉아 망을 보다가는 휘파람같은 소리로 공기를 째며 날아내려와 집짐승이며 사람까지 물어갔다.

사람과 만주범과의 혈투는 몇대를 내려오며 계속되여 수백수천가지의 무서운 민화를 엮어내고 조선농가의 전통적인 건축양식마저 변경시켜 어느 집에서나 방문옆에 범이 오면 불화로를 내던질 뙤창까지 내게 했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에 사람들의 들썩한 생활이 굽이치고있다.

대두천에서 15리쯤 올라가면 상경리라는 마을이 있다. 거기에서 두 골짜기가 갈라지는데 왼쪽골짜기를 소왕청, 오른쪽골짜기를 대왕청이라고 부른다.

소왕청골짜기어귀의 뾰족산을 지나 인차 있는 20호정도의 마을이 동림촌이고 4~5리 더 들어가있는 마을이 마촌, 거기에서 6~7리 더 올라가서 있는 100여호의 마을이 두천평, 막치기에 있는 40여호의 마을이 황갈촌이다.

대왕청골짜기를 따라올라가면서는 첫 마을이 서대포, 둘째 마을이 대왕청, 다음에 100여호의 화전농가가 들어앉은 마을이 십리평이다. 대왕청골짜기의 막치기는 밋밋한 등판에 이르러 소왕청골짜기와 합치게 된다.

대왕청골짜기를 흐르는 물은 대왕청하, 그 지류로서 소왕청골짜기를 흐르는 물은 소왕청하라고 부른다.

형제중에서 흔히 형의 성미가 유하면 동생이 드센것처럼 대왕청하의 힌름은 유유하고 소왕청하의 흐름은 세차다. 그러나 성미가 서로 다른 이 두 물줄기를 끼고앉은 마을들중에서는 산세의 조화로 마촌이 제일 아늑하다.

폭이 400~500메터가량 되는 옴폭한 골안에 들어앉은 마촌에서는 30여호의 농가가 의좋게 살아가고있었다.

길주, 명천쪽에서 온 마씨네가 많이 산다고 마을이름을 마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제의 침략, 《한일합병》후에 두만강을 건너오는 류랑민들의 흐름은 갑자기 불어났다. 그 흐름속에는 성스러운 보복의 비수를 품고, 불덩이같이 이글거리는 우국충정과 조국광복의 뜻을 간직하고 건너오는 지사들과 열혈청년들이 태반이였으며 로씨야에서 불어오는 새 사조의 열풍을 가까이에서 맞기 위하여 오는이들도 있었다.

아득한 옛날에는 사람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며 살아보자고 대륙의 황야와 원시림속으로 흩어져갔다면 오늘에는 조국을 찾자고, 조국광복의 뜻을 벼리며 동지와 지도자를 만나 그 힘에 보탬을 주자고 간도의 산간오지로 숨어드는것이였다. 정의와 진리가 뒤골목에 구겨박혀 간신히 숨쉬고있는 그 세월에는 의로운 선각자들이 산간오지에 다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사회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하면 산간오지가 먼저 소리쳤다.

왕청오지도 같았다. 한때에는 홍범도의병이 화승총소리를 높여 산촌을 불러일으키더니 다음에는 독립군의 소문이 자자하게 났다. 십리평에는 북로군정서사관연성소라는것까지 생겨 구령소리가 산벼랑에 메아리치고 군자금을 모은다, 군량과 마량을 모아들인다 법석대다가 왜놈의 《토벌》에 갈가마귀떼처럼 쫓겨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런 돌개바람이 좀 뜸해지는것 같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맑스머리》에 눈이 시뻘건 패거리들이 뛰여들어와 사람들을 폭동에로 내몰아서 간도의 황야와 산간오지를 피로 물들였다.

대륙을 휩쓰는 거세찬 시대의 바람이 간도오지에 와서 회오리치며 온갖 사상과 야망과 공명과 영웅주의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으니 눈물과 땀과 피로 걸어진 이 땅은 여러가지 사조의 잡초가 무성하게 설레이는 황무지나 같았다.

몇달전부터 이 땅에 유격근거지들이 생겼다. 화룡에도 생기고 연길에도 훈춘에도 련이어 생겼다.

왕청현에도 소왕청골짜기와 대왕청골짜기를 중심으로 근거지가 꾸려졌다.


×


세월의 비바람에 빛이 거멓게 죽고 고삭은 동기와지붕에는 쑥대까지 여기저기에 자라올랐다. 그 지붕밑의 네칸방에 마촌쏘베트가 들었다.

쏘베트가 든 첫날부터 동기와집은 들썩거렸다.

언제나 마당에 한두필의 말이 매여있고 방안들에서는 밤이 깊도록 론쟁, 욕지거리, 호령, 웃음소리들이 그칠사이 없었다.

찾아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산골감자바위풍의 토스레옷차림, 수수한 로동복차림과 조선옷차림, 장작림의 륙군장교복차림, 로씨야풍의 양복차림들을 한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사람들은 활기에 넘쳐 방들로 들어갔다가는 혼자서 혹은 두서넛씩 짝을 지어나오며 껄껄 웃어대기도하고 얼굴이 벌개서 론쟁도 하고 일이 꼬이기만 하는지 화김에 건침을 땅바닥에 탁 뱉기도 했다. 어떤 젊은이는 궁둥이밑에서 데룽거리는 목갑총을 한손으로 쥐고 달려나와 널바자기둥에서 말을 풀어타고 어디론가 내뛰였다.

이렇듯 활기에 넘쳐 약동하던 쏘베트안에 오늘은 여느때없이 쥐죽은듯 한 고요가 깃들었다. 드나드는 사람들도 얼굴빛이 달라졌고 문도 조심스럽게 여닫았으며 말도 조용조용 건네였다.

현당조직책 권일균이 내려온것이다.

가을선기에 맥이 빠진 파리들만이 자유롭게 이 사람, 저 사람의 어깨며 잔등으로 날아다니며 야릇한 소음을 냈다.

동기와집마당에서는 권일균, 홍병일, 현당강사 최형준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리재명이 안내해온 녀교원 박현숙을 둘러싸고 즐거운 한담을 벌리고있었다.

《동무는 유럽사람들의 녀성숭배사상을 우리 유격구에 퍼뜨리자는게 아니요?》

이렇게 말하는 권일균의 육중한 몸에서는 반석같은 신념이 느껴졌으며 넌지시 건네는 말에서도 사람들을 누르는 압이 풍겼다.

남달리 큰 두개골뒤로 길게 덮은 머리칼, 맑지 못하고 검스레한 얼굴색, 곧게 내리뻗은 코마루의 보기 좋은 끝마무리, 그밑의 밤빛이 섞인 탐스러운 수염, 충혈된 눈의 열광적인 광채… 이 모든것들이 로숙한 정력가의 인상으로 조화되여 누구나 그앞에 서면 은연중에 마음이 눌리게 되는것이였다.

권일균이 던진 스스럼없는 롱말에 리재명은 귀까지 벌개졌으나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변명조로 대꾸했다.

《허허… 원, 무슨 말씀을…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학교를 열고 지난 시기 가난탓에 공부를 못한 아이들을 다 모아놓고 글부터 가르치려고 합니다. 유격구에 아이들의 글읽는 소리가 왕왕 울리면 인민들은 기세가 부쩍 오르고 적은 전률할게 아닙니까?》

《허허… 과연 리재명동무다운 공상이요. 교육사업으로 인민들의 기세를 올리고 적을 전률케 한다.…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요?》

《우선 학교를 하나 번듯하게 짓겠습니다. 인민들에게 지원을 호소하면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일이니까 모두 호응해나설겝니다.》

《그다음은?》

《그다음에는… 교재를 편찬하겠습니다. 우리 말로 된 책이 있어야 합니다.》

《흠… 굉장하군. 그런데 이 말쑥한 선생님이 된장에 감자밥을 씹으며 성미가 갈범같은 애녀석들을 다뤄낼가?… 산골생활의 고초를 이겨내겠소? 우리 쏘베트회장의 청춘시절을 과히 짐작할수 있거던. 환상가고 반하기를 잘했겠지, 음?… 허허허.》

권일균은 배심이 좋게 껄껄 웃어대고 리재명은 녀자앞에서 이런 무안을 당하는지라 얼굴이 벌개졌다. 그리고는 얼결에 옆에 선 박현숙을 훔쳐보고는 변명조로 설명하였다.

《본인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해서 안됐지만… 이 동무는 룡정에서부터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며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단련된 동무입니다. 이번에도 김일성장군님께서 이쪽으로 오리라는 말을 듣고 자진하여 여기로 들어왔습니다.》

권일균은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좋고…》

화제의 주인공 박현숙은 얼굴이 발갛게 되여 입이 건 권일균을 흘깃 흘겨보고는 다소 실망의 빛이 어린 얼굴을 공손히 숙였다.

권일균의 그림자를 밟고 뒤에 서있는 홍병일은 웬일인지 수모를 참는 사람처럼 표표한 얼굴로 리재명이를 쏘아보고있었다. 그의 눈에 차거운 빛이 번뜩이였다.

홍병일의 옆에 서있는 혁명적자유시의 제창자인 최형준은 타고난 감수성으로 두사람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느끼고있는지라 무슨 까닭일가 하고 눈치를 살폈다.

팩하면 브라우닝을 꺼내는 홍병일의 칼날같은 성미를 잘 아는 최형준은 한동안 마음이 긴장되였으나 인차 무슨 사업상 불만이겠지 하고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리고는 박현숙에게서 내내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고아들을 말에 태워가지고 소왕청하를 건너왔다는 녀선생! 그의 영채도는 눈, 해빛에 윤이 흐르는 칠흑같은 머리칼, 열정이 팽팽하게 충만된 풍만하고도 날씬한 몸매… 그것은 시대의 첨단에 선 녀성의 미, 투쟁의 불길속으로 날아든 자유로운 새! 이러한 녀성이 여기로 찾아든다는 리유 하나만으로도 혁명은 찬미할 가치가 있으며 그 진리성이 의심할바 없는것이다.… 그의 눈은 이런 명상에 그윽하게 빛났다.

최형준은 목책을 얼른 꺼내 펼쳐들고 꽁다리연필을 달려 령감의 섬광들을 사라지기 전에 적어두었다.

그리고는 권일균이와 홍병일, 이 두사람은 무슨 일로 마뜩지 않은 기색인가 하고 다시 생각했다.

마당에 서있는 사람들중에서 제일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있는것은 유격대중대장 장룡산인듯 했다.

고삭은 동기와지붕의 처마밑에 뒤짐을 지고 서있는 그는 능청스러운 미소가 흐르는 눈으로 녀선생을 넌지시 건너다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있었다.

(그까짓 학교쯤 짓는게야 걱정할게 있나. 뒤산에 가면 맨 나무겠다, 도끼가 없나, 자귀가 없나, 끌이 없나. 나무를 찍어다가 다듬어서 척척 세우면 학교가 제꺽 서겠는데… 번듯한 학교안에 선생을 세워놓으면 어떨가! 저걸 보지, 눈이 새별이라니까. 저앞에 우리 아이들을 세면이랑 잘 시켜 주런이 앉혀놓으면 허- 얼마나 보기 좋겠나! 좌우간 혁명이란게 좋긴 좋구나.… 쯧쯧, 저녀석들은 창피한줄두 모르구…)

널바자에 턱을 올려놓은 더벅머리 산골아이들과 몇명의 남정들과 녀인들이 마당안을 넘겨다보고있었다. 그들은 도시에서 온 희한한 녀자를 문명에 대한 선망의 눈빛으로만 보지 않았다. 호기심과 경탄, 의혹과 시기에 가까운 착잡한 눈빛으로 묵묵히 바라보고있었다.

장룡산은 그것들의 얼굴주제며 옷모양새를 녀선생에게 보이는것이 창피해서 다리밑으로 드리운 일본제 기병도끝을 땅바닥에 끌며 널바자 곁으로 걸어가서 세면이나 하고 와서 보라고 손짓하며 눈을 부릅떠보이기도 했다.

이때 권일균이 최형준을 돌아보며 위엄스럽게 물었다.

《내가 지시한 강연은 준비가 됐는가?》

최형준은 비로소 정신이 펀뜩 드는듯 눈을 빛내이며 몸가짐을 바로 가지였다.

《옛… 준비됐습니다!》

《제목은 무얼로 달았나?》

《우리는 왜 즉시 사회주의혁명을 해야 하는가?…》

《내용 그대로군.… 강연을 본때있게 하오. 마촌사람들이 좀 정신이 번쩍들게 해야 되겠소. 내 대충 알아보니 여기는 아직 밤중이요. 쏘베트회장과 부녀회장이 강연장소준비와 인원동원을 책임지오.… 부녀회장 림성실동무는 왜 뵈지 않소?》

권일균은 자리에 없는 부녀회장을 찾는듯 두리번거리다가 박현숙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동무가 우리한테로 온건 참 고마운 일이요. 앞으로 이 강사동무를 도와 현당의 선전사업에 전력하는게 좋을것 같소. 할일이 많소!》

박현숙은 그 말에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보다 당황해진것은 리재명이였다. 그는 울대뼈가 불거져나온 목이 시뻘개지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박현숙이며 권일균을 번갈아 둘러보다가 억이 막힌 목소리로 말하였다.

《선전사업은 당장은… 당장은 힘들것 같습니다. 학교사업이 자리를 잡은 다음에는 짬짬이 할수 있겠지만…》

이때 뒤에서 내내 그를 쏘아보던 홍병일이 발끈해서 내쏘았다.

《그럼 현당이 동무를 따라야 옳소? 현당지시는 하나도 집행안하면서 교육사업으로 적을 전률케 한다?… 계몽주의자들의 케케묵은 넉두리까지 하면서… 교육사업이 문제가 아니란 말이요!》

그는 분을 참을수 없는듯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씨근거렸다.

권일균이 손짓으로 그를 달래며 웅글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 동무와 마촌쏘베트사업은 따로 료해하겠소.》

그 한마디에 마당의 공기가 쩡 얼어드는듯 하였다.

리재명은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손부터 내흔들며 얼버무렸다.

《아… 아… 그런게 아니라…》

이때 여기로 김창억이 말을 끌고 들이닥쳤다.

말과 사람의 몸에서는 땀내가 물씬 풍겼다.

창억의 이마와 귀밑에서는 땀줄기가 번들거렸다. 그는 타는듯 한 눈으로 현당조직책을 쳐다보며 동림촌 대장간이 아니라 오목동의 마제사한테로 가게 된 심정을 터놓았다. 그리고 애꾸눈인 마제사가 너스레를 피우며 하던 말까지 신이 나서 이야기하면서 좋아라 웃어댔다.

권일균은 청년의 말을 들으며 수염언저리에 미소같은것을 약간 내비쳤다.

리재명이 그의 마음을 달래려는듯 얼른 고삐를 넘겨받아 말을 끌고 마당을 천천히 돌며 모두 말발굽소리를 듣도록 하였다.

말은 코김을 불기도 하고 탐스러운 밤빛꼬리를 흔들기도 하면서 마당가를 유유히 걸어돌았다. 발굽이 가락맞게 옮겨질 때마다 늘씬한 말잔등이 률동적으로 흐느적이고 피줄이 살아오른 팽팽한 허벅다리근육이 부르르 떨었다.

권일균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침묵속에 말편자가 땅에 닿는 소리만이 가락맞게 울렸다.

문득 권일균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저 소리가 무희들의 춤가락에 제격이라?- 허허허, 소시민들이란…》

《그것들의 속심이야 뻔하지요.》하고 홍병일이 그의 말을 받았다.

《손재간은 써먹되 그따위들을 무산혁명의 동맹자로 믿었다간 한지에 방아를 걸겠소.…》

《손재간이야 써먹어야지요.》

말고삐를 잡은 리재명이 벌쭉 웃으며 말하였다.

이때 창억이 불쑥 끼여들었다.

《손재간이구 뭐구 령감이 아주 흉물입디다. 이게 구국군 동두령의 말이라는게 아닙니까. 품삯을 높이 부르자는 수작인데 내 그저…》

그는 말을 더 하려다가 사람들의 얼굴빛이 갑자기 달라지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두리번거렸다.

리재명이 해쓱한 얼굴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니, 제깟령감두상이 뭘보구 동두령의 말이라는겐가, 엉?》

《그 패찰을 보더니…》

《패찰을?…》

리재명이 말이마에 붙어있는 패찰을 들여다보더니 좀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니, 이게… 〈동〉자가 새겨졌군요.》

권일균은 입안에 열물이 도는듯 멋적게 입을 쩝쩝 다시였다. 그 말은 한달전에 룡천쪽에 식량공작을 나갔던 동림촌 적위대원들이 산속에서 얻어서 끌어온것이였다.

홍병일이 그의 옆에 다가서서 귀뜀하였다.

《동두령이란자는 표범처럼 사납고 앞뒤분별이 없는데 이제 무슨 시끄러운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저 패찰부터 떼버립시다.》

권일균은 버럭 역증을 터뜨렸다.

《둬두오!》

그리고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홍병일을 돌아봤다.

《리광동무한테서는 무슨 소식이 있소?》

《없습니다.》

《대원 십여명을 데리고가서 구국군공작을 한다는게 뭘 꾸물거리는지 모르겠거던.… 구국군상층부는 지주나 토호출신이고 하층은 빈고농이나 도시빈민출신이기때문에 계급적대립과 불화가 악화일로를 걸어왔소. 하층의 병사대중을 선동하면 일거에 들구일어나 상층부를 제끼구 우리한테로 기울어질수 있는건데… 참, 리광이 그 사람은 리론도 있고 똑똑하지만 담이 약해.… 약해.…》

그리고는 무엇을 궁리하는지 허공의 한점을 응시하며 말이 없었다.

창억은 장룡산의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가서 나직이 물었다.

《형님, 내 참군은?…》

장룡산은 그따위 마제사령감의 말을 옮겨놓아 사람들의 기분을 흐려놓게 한것이 못마땅해서인지 그를 언짢게 돌아봤다.

《내 참군은 결정이 됐소?》 하고 창억은 다시 물었다.

장룡산은 말없이 머리를 가로저어보였다.

《예?》

《안됐네.》

《뭐요?》

창억은 울컥해져서 권일균의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홍병일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권일균이 그들쪽을 돌아보았다.

《제 참군은 왜… 부결이 됐습니까?》

창억은 억이 막혀 부르짖었다.

《부결이라?… 이 동무 이름이 뭐드라?》

권일균은 자기 말에 편자를 신겨온 청년에게 분명히 선심을 쓰려는 기색이였다.

리재명은 화제가 다른것에로 옮겨지고 현당간부의 기분이 개여진것에 저으기 마음이 놓여 얼른 이름자를 튕겨주었다.

《김창억입니다. 빈고농의 아들로…》

홍병일이 날카로운 목소리의 일격으로 그 말을 잘라버렸다.

《미혼자들만 받지 않았습니까?》

《음… 혁명적열의는 좋은 동무같은데… 장가는 몇살에 들었나?》 하고 권일균은 물었다.

창억은 대답을 못하고 얼굴이 흙빛이 되고말았다.

내내 눈을 내리뜨고있던 박현숙이 동정에 타는 눈으로 청년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창억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질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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