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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 회

북방의 려명

김 성 금


그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였다. 참혹한 자연재해로 불행을 당하고도 변함없는 믿음과 충정을 간직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애국의 피와 땀을 바쳐 황페해졌던 빈터를 선경으로 만든 이야기, 웃음을 잃었던 사람들이 터치던 환희와 격정… 래일의 행복을 굳게 믿고 북방의 그늘을 가셔내던 그 나날에 겪은 일들이 내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1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그 한밤이 참으로 벅찬 순간이였다.

날이 저물어 청진역에 내리고보니 각지에서 달려온 지원자들의 대오가 역구내를 메우고있었다. 사방에 흐르는 전투적인 분위기와 대뜸 느껴지는 북방의 선기가 랑만에 잠길번 했던 우리를 은근히 각성시켜주었다.

하지만 대오를 책임진 우리 부소장은 셈평좋게 누군가와 그냥 통화하고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그의 유쾌한 롱담이 그런대로 팽팽해지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주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는 그때 전선사령부와 통화하고있었다. 우리모두를 이밤으로 현지에 도착시키라는 내용의 통화였다.

《그렇다고 동무들을 지나치게 긴장시킬 필요는 없소. 도착하는 즉시로 설계에 착수해야 할 동무들인데 사업에 지장을 줄수 있거던. 동무가 예술적으로 처리하오.》

《그건 마음놓으십시오. 예술적으로 말이지요, 선녀처럼 곱게. 하지만 빨리 걸을수 있구말구요. 어떻겐가구요? 거야, 뻔하지 않습니까. 로라스케트를 신으면 되지요.》

이런 우스개로 통화를 끝낸 부소장은 단연 우리의 앞장에 섰다.

《그럼 다들 〈태백산병동〉을 찾아갑시다.》

간단치 않게 묵직한 짐을 나누어 들고도 우리는 부소장의 빠른 걸음에 뒤질세라 보폭을 맞춰갔다. 그리하여 30분내로 북부전선사령부 설계분과가 자리잡은 함경북도도시설계사업소에 당도하였다. 그곳에선 상급기관의 해당 부서에서 나온 면식있는 설계분과일군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 류경설계동무들, 이렇게 또 만나니 반갑소. 참, 회포를 나눌 새두 없구만. 지금 각곳에 전개된 건설현장들에선 설계력량이 도착하기를 고대하고있소. 동무네가 맡게 될 팔소리에서두 벌써 비준된 설계안을 수정해달라구 며칠째 성화요.

우린 이번 북부작전과정에 표준설계수정을 단순한 보수나 복구의 립장에서가 아니라 먼 후날에도 손색없을 멋쟁이건물로 되도록 책임성을 높여야겠소.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 한시바삐 불행당한 북방인민들에게 더 밝고 행복한 래일을 안겨주고싶어하신다는것을 한시도 잊지 맙시다.》

《알았습니다.》

우리 류경건설설계연구소의 설계가들에게는 함경북도 연사군 읍과 남작리, 팔소리의 살림집들과 공공건물들에 대한 설계와 시공지도임무가 맡겨졌다. 대상수나 작업량으로 보아 간단치 않은 임무였다.

《괜찮아. 이런 때엔 각개격파하기요.》

역시 우리 부소장은 주도세밀하고 빈틈이 없었다. 시간을 랑비할세라 설계분과청사를 내려서는 길로 력량편성부터 해치우는것이였다.

《그런즉 팔소리쪽이 복잡하구만. 아무래두 건축전문가인 영일실장이 그쪽을 맡아줘야겠소.》

2건축실장인 김영일에게 세명의 설계가들이 배속되였다. 그리고 가구실장 한광철과 김원일설계원네 조에는 구소탁아소와 유치원이, 살림집설계실장인 나와 나머지 인원들에게는 남작리일대의 일체 건설대상들이 맡겨졌다. 설계분과의 요구에 따라 황철남설계가만은 청진에 떨구어두기로 했다.

어둠속에서도 잠들줄 모르는 북방의 숨결에 우리도 호흡을 맞추었다. 그래서 청진에 도착한지 한시간 되나마나했지만 서둘러 이 전투적인 도시와 작별하기로 했다. 모두가 한시바삐 연사땅에 가닿을 마음에 급급해있었던것이다.

그런대로 우리는 그날 밤 운수가 좋았다. 하마트면 짐을 진채로 온밤 강행군을 할번 했는데 마침 연사쪽으로 가는 뻐스를 만나 바란적도 없는 호사를 누리게 되였다. 헌데 깜깜밤중이다보니 그렇게 몇시간을 달리도록 주변경치는 전혀 볼수 없었다. 전원이 꺼진 콤퓨터화면처럼 새까만 차창만 하염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우리는 그때 덜커덩거리는 밤길을 달리면서 이 길로 다시 돌아갈 때에는 희한한 선경을 바라보게 되기를 바라마지않았다.

연사읍에 도착한 우리는 믿음직한 근거지부터 정해야겠다는 심산으로 어둠속을 더듬기 시작했다. 다들 흩어져 온전한 집형태를 찾아 설레발을 치려댔는데 몇집 두드려볼새 없었다. 한집 겨냥하고 두드렸더니 두말않고 받아주었기때문이다.

문을 열어준것은 쉰쯤 될가말가한 다부진 사나이였다. 그는 문간에 떡 버티고 서서 우리를 아래우로 훑어보았다.

《이거 밤중에 안됐습니다. 실은 저…》

《지원들 왔겠지요?》

《예, 평양에서 오는 길입니다.》

《보다싶이 집이 작으니 좀 비좁을겁니다. 하지만 지금 그걸 타발할 사람이야 있을라구요. 어서들 들어오시우.》

그 사람은 우리가 어리둥절해질 지경으로 선선하게 굴었다. 헌데 가만보니 집주인도 아닌것 같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수다.》 하고 인사말을 남기는것이 아닌가.

《아니, 이거…》

짐을 끌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우리는 순간 몸둘바를 알수 없었다.

《일없소. 우리 외삼촌이예요. 들어들 오시오. 얘, 송연아, 아저씨들을 데리고 들어가렴.》

집주인인듯 한 녀인이 그 사람 뒤로 따라나오며 헤픈 미소를 지어보이였다. 그리고는 외삼촌이라는 사람을 바래주려는지 마당을 넘어섰다.

(송연이, 거 참.)

우연히 내 딸과 이름이 같은 처녀가 나타나는 바람에 나는 마음이 다 야릇해졌다. 그렇다고 야릇한 감정에 푹 잠길새도 없었다.

일단 근거지가 해결되자 동무들모두가 짐을 들여놓기 바쁘게 문간을 나서기때문이였다.

손님을 바래우고 집안으로 들어오던 주인녀인은 우리의 이런 거동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어데들 가시우?》

《저, 작업장에 가보렵니다. 이거 당분간은 우리때문에 좀 분주할수 있는데 량해해주십시오.》

《아니할 말씀이요. 아무 생각들 마시구 그저 〈우리 집〉으루들 여기시오.》

녀인은 짐도 풀기 전부터 일걱정을 하는 우리가 마음에 드는지 특유한 북쪽억양으로 말을 한마디 해도 후더분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모녀의 보금자리를 들썩하게 만들어놓은 우리는 그길로 미래원이라는데로 찾아갔다. 거기서는 이미 전력을 공급받기 위한 배선작업이 마감지어지는 참이였다.

전력망이 당장 살아나게 되리라는 소리에 한결 힘을 얻은 우리는 방을 배정받자마자 기재까지 전부 전개해놓았다.

《이왕이면 접속되는지 확인해봤으면 좋으련만.》

성미 급한 부소장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나는 미타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깊은 밤중에 망이 살아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아쉬운대로 우리는 아직 전력공급이 회복되지 못한 정황을 고려하여 두명의 근무인원만 남겨두고 모두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열여덟평방메터밖에 안되는 방안에 그 집 식구 셋까지 빼곡이 누워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자리가 불편해서인지, 북방에서 보내게 된 첫날밤이라는 류다른 감정때문인지 나는 도저히 잠들수 없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이 겹쳐들며 갈마드는 속에 가상세계며 현실세계가 방불하게 떠올랐다.

우리 설계가들은 늘 프로그람적인 가상공간에서 설계작업을 하다나니 사업과 생활까지도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로 구분하여 표현하는 습관이 있었다.

《아빠, 난 가짜세계에 속하나요, 진짜세계에 속하나요?》

언젠가 천진한 딸애가 입버릇처럼 외워대는 나의 가상세계타령에 대해 호기심을 나타내는 바람에 깜짝 놀라던 일이 생각난다.

딸애의 머리를 땋아주던 안해도 그 말을 듣고는 급해했었지.

《애두 참, 어쩌면 그런 소릴 다 하니?》

혹시 딸애는 그때 생활에 무관심한 이 아버지가 섭섭하여 그런 엉뚱한 질문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하긴 오죽하면 설계가인 이 남편을 리해해주느라 애쓰던 안해까지도 나를 현실적인 벼랑턱에 세워놓았겠는가.

《여보, 오늘이 며칠인지 알지요?》

이렇게 묻는 안해의 별빛같은 눈동자우에는 촘촘한 살눈섭이 매력있게 드리워져있었다. 헌데 내게는 그 매력있는 살눈섭이 왜서인지 예리한 창끝처럼 느껴졌다.

《됐소. 당신까지 날 압축하지 마오. 계획된 날자까진 아직 여유가 있는데…》

《무슨 말씀이예요?》

《53호구획소리가 아니요?》

려명거리설계분과에 동원되여있던 내게는 무슨 일이나 다 려명거리와 관련되는것처럼 생각되였다.

《아이참, 오늘이 무슨 날인줄 모르세요?》

《무슨 날이게?》

《그래보라요. 송연이에게 대줄테야요. 아버지가 제 딸의 생일날을 감감 잊었다고요.》

나는 속이 뜨끔해났다.

그렇게 방실해보이던 안해의 얼굴에서 보조개며 미소가 금시 사라지고 도톰한 입술이 비죽 내밀어진다. 몹시 서운한 모양이다.

하긴 딸애라면 코구멍을 벌름거리며 울먹거렸을지도 모른다.

《앗차, 가만 여보, 제발 그러지 마오.》

나는 제꺽 이마를 치면서 안해에게 미안쩍은 인상을 지어보이였다.

그리고는 전혀 생각밖의 말까지 불쑥 덧붙이였다.

《아무렴 내가 송연이의 다섯돐생일을 잊었겠소. 저녁에 보기요. 이 아버지명의로 이만큼 큼직한 곰을 사다주지.》

사실 내게는 언제부터 딸애에게 주려던 아주 예쁘장한 머리빈침이 있었다. 진주빛갈이 나는 구슬이 진홍색다리우에 내려앉아있는 척 보기에도 깜찍해보이는 그런것이였다. 하지만 그리도 섭섭해하는 안해앞에 줌에도 안 차는 그것을 내놓기가 좀 멋적었다. 그래서 당황한김에 무턱대고 한아름이 되는 놀이감생각을 해낸것이다.

여하튼 내가 두팔로 굉장한 동그라미를 그려보이자 안해의 뾰로통해졌던 인상이 얼마간 누그러지는것 같기는 했다.

《됐어요. 당신 꽝포에 넘을줄 알구요. 우린 당신의 마음 한쪼박이면 족해요. 헌데 그것도 못하겠단 말이예요? 오늘은 제시간에 퇴근이라두 해주세요. 딱 하루만요.》

《그래야지. 시간을 짜내겠다니까.》

듣고보니 안해와 딸애에게 안됐다는감도 없지 않기에 나는 두말하지 않았다.

헌데 이렇게 장담했던 일도 결국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바로 그날 북부전역으로의 탄원모임이 열리고 다들 오후중으로 출발하자고 결의해나섰던것이다. 살뜰한 안해의 리해를 바라면서 나도 거기에 열렬히 호응해나섰다.

손전화기의 번호판을 눌렀더니 착신대기음으로 설정해놓은 《우리 집사람》의 선률에 이어 안해의 말소리가 제꺽 울렸다.

나는 더듬더듬 사연을 말하고나서 오늘 저녁 아이를 즐겁게 해주기 바란다고 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이거 안됐소. 갔다와서 송연이에게 꼭…》

《여보세요, 여보세요, 송연이 아버지, 몇시차라구요?》

안해가 출발시간을 따지자 나는 그가 집에 잠간이라도 들려가라고 조를가봐 걱정스러웠다.

《오후 4시쯤 떠날 예정인데 나오지 마오. 떠날 준빈 자체루 하겠소. 그저 송연이만 잘해주라구.》

《아이 참, 당신두.》

그때 왜서인지 통화가 끊어졌다. 내게는 다시 신호해주지 않는 안해가 섭섭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괜한 생각이였다. 몇시간후 송연이와 함께 평양역에 달려나온 안해는 딸애의 생일음식으로 준비했던것이라고 하면서 도중식사지함까지 내놓았다.

나는 안해에게 감사하다는 미소를 벌씬 지어보이며 엄마의 치마꼬리를 만지작이던 딸애를 덥석 안아올렸다.

《송연아, 우리 귀염둥이, 생일을 축하한다. 아버지가 저녁에 생일선물을 주려댔는데… 안됐다. 후날…》

내가 미안쩍어하며 딸애에게 후날 약속을 하려는데 뜻밖에도 송연이의 꽃잎같은 손바닥이 내 입술을 살짝 덮었다. 그리고는 내 볼에 얼굴을 가져다대며 이렇게 속살거렸다.

《엄마가 그러는데 아버진 내게 굉장한 생일선물을 주려구 북쪽으루 간대요.》

《?》

《해가 떠오르기 직전에 하늘을 쳐다보면 동트는 해님이 북쪽하늘부터 먼저 비쳐준대. 그렇게 밝아진 북쪽하늘이 아버지가 송연이에게 주고싶은 선물이나요? 세상에 딸에게 밝아지는 하늘을 선물로 준 아빠는 아직 없대요. 맞나요?》

《그럼.》

어린 딸애의 천진한 말에 우리 일행모두가 뭉클해졌다. 나는 진짜 려명을 기대하는 어린 넋에게 참된 긍지를 안겨주고싶었다.

(기다려다오, 송연아. 이 아버지가 꼭 남먼저 북방의 하늘가에 떠오르는 원수님의 사랑의 해살이 되겠다. 네가 두고두고 자랑할수 있게 말이다.)

나는 안해를 감사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 귀에다 대고 《우리 아빠 뽀뽀가 제일 좋아!》 하고 속삭이는 딸애에게 정답게 뽀뽀해주었다.

출발을 알리는 기적소리에 우리는 배웅나온 가족들과 뜨겁게 작별하고 기차에 올랐다. 안해와 한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한 나도 송연이에게 주려던 구슬빈침을 줌안에 쥔채 기차에 올랐다.

(이제 북부전역에서 돌아오면 발쭉한 귀에다 이 예쁜 빈침을 찌른 《풍채좋은 곰》을 안고 집에 들어가리라. 그러면 식구들이 추위를 이겨낸 이 《곰아저씨》를 반겨맞을테지.)

이런 감상에 젖은 나의 눈앞으로 황금빛전야며 불길처럼 단풍든 나무잎새들이 줄지어 흘러갔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그 잎새들은 꼭 송연이가 자그마한 손바닥을 저어주는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들리는 새된 고함에 억지로 감고있던 눈을 떠보니 박금주가 입을 하 벌린채 손가락으로 제앞을 가리켜보이고있었다.

놀랍게도 벽체 동쪽귀퉁이가 무너져있었다. 분명 큰물이 났을 때 기초를 다친것 같았다. 거기에다 굉장히 불어난 군식구들이 문돌쩌귀에 불이 일도록 들락거리는통에 아예 터져나가려는 모양이였다.

우리는 어슴푸레한 달빛속에서 살풍경이 된 방안을 수습하느라 분주탕을 피웠다. 그런데 이번엔 근무성원으로 남겨두었던 류지성이까지 뛰여들어오며 벅적 고아댔다.

《망이, 〈평양성〉이 열렸습니다.》

《그게 정말이요?》

그 순간 우리에겐 이처럼 깊은 밤중에도 잠들지 않고 북방의 소식을 기다려주는 조국의 고마움이 페부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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