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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제 3 장

2

해뜰무렵에 송금주는 정애경과 함께 1월 2일 일과의 첫 순서로 예정된 빙상운동을 하려고 화대천에 있는 스케트장으로 나갔다.

송금주와 정애경이 이 빙상경기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것은 중학교 3학년때부터였다. 그들이 나서자란 아간장마을에는 스케트를 타고 빙빙 돌아갈만 한 장소가 없었다. 강폭이란 하류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법인데 어떻게 된 셈판인지 아간장마을에 와서는 화대천이 광폭으로부터 소폭으로 되여 여름날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미역을 감을만 한 자리조차 마련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간장 아이들은 스케트를 타고싶으면 화대천줄기를 따라 강폭이 넓은 영천쪽에 무리를 지어 몰려가군 하였다. 스케트를 신고 상류쪽으로 올라가면 5분도 못되여 지금의 빙상장에 가닿는다. 송금주는 고중시절에 청년급 개인경기에서 두번인가 1등을 하여 군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녀자빙상왕이 되였다. 송금주보다 속도는 좀 떨어지는 편이였지만 정애경도 스케트를 재치있게 탔다.

뚝을 넘어서자 강곬을 타고 서북쪽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움직이는 차고 맵짠 기류에 이마와 볼이 대뜸 얼얼해지고 페장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청춘들의 도전을 기다리는 혹한이였다. 그러나 해돋이와 함께 다양한 색조를 띠고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하늘은 처녀들의 마음처럼 푸르게 열려있었다.

빙상주로를 따라가며 타원형으로 쌓은 뚝의 한쪽옆, 선수들의 편의를 위해 듬성듬성 얹어놓은 블로크들에 걸터앉아 설전날 학교 체육기자재실에서 빌려다놓았던 구두가 달린 스케트를 신고 주로에 나섰다.

검정색통바지에 빨간 샤쯔를 입고 몸풀이동작을 하는 그들은 마치 지방에 이동훈련을 나온 직업선수들 같아보였다.

빙상장에는 얼마간의 눈이 고르롭게 쌓여있었다.

티 한점 없는 그 눈은 하얗다못해 연보라빛으로도 보이고 은빛으로도 보이였다. 그처럼 정결하고 청신한 백설주단을 스케트날로 갈기갈기 찢어 흠집을 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마저 생길 지경이였다. 빨간 장미를 련상시키는 처녀들의 존재로 하여 눈은 더 순결하고 새하얘보였다. 그 눈이라는 배경의 조화와 색갈이 선명하고 검은것과 붉은것의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차림새로 하여 그들의 모습은 더 싱싱하고 생기발랄해보이였다.

스케트를 신던 그 자리에서 심호흡을 하느라고 할딱거리는 정애경을 가운데 두고 몇겹의 동심원을 그리며 돌아가던 송금주는 갑자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들뜬 소리로 말했다.

《4년만에 같이 와보는 빙상장인데 입장식을 해야 하지 않을가?》

《그것 참 멋진 생각이다!》

정애경은 눈을 반짝이며 기꺼이 호응하였다. 그러면서 혀를 찼다.

《네 머린 온통 엉뚱한 궁리로 가득차있구나. 그런 궁리가 단 한번이라도 내 요 골에서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가. 막 시샘이 나는데.》

《세상에 원, 별 시샘도 다 보겠다. 자, 입장은 둘이 손을 잡고 주로를 네바퀴 도는것으로 하자꾸나.》

《두바퀴나 세바퀴도 아니고 하필이면 왜 네바퀴니?》

《그동안 이 빙상장에 와보지 못한 봉창을 하자는거지. 4년만에 둘이 같이 이 빙상장에 와 스케트를 타게 된걸 기념해서 네바퀴 돌자는건데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도 많아?》

《오, 그래. 그렇다면야 별문제지.》

두 처녀는 말없이 주로를 차지하였다. 그들에게는 중학시절부터 무언중에 약속된 주로가 있었다. 정애경은 안쪽주로였고 송금주는 늘 바깥주로만을 탔었다. 오늘도 그 자리는 변함없었다. 송금주가 손에 끼고있던 장갑을 벗는것을 보자 정애경도 장갑을 벗어내쳤다.

《장갑을 끼고 손을 잡는다는거야 비우호적인거지.》

정애경이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이였다. 그는 무슨 일에서나 주해를 즐겨 달았다.

《그만하면 청진아가씨가 셈이 들었구만. 그런데 이것 봐, 애경이. 백지같은 숫눈을 보니 저 주로에 악보를 그리고싶은 생각이 불쑥 드는구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악보는 뭘 하려구?》

《노래를 하나 짓자는거지. 우리 둘이서 공동으로 말이야.》

《그것 참 기발한 착상이구나. 그런데 금주, 가사도 없이 어떻게 노래를 짓는다는거야?》

《가산 걱정말어. 아무렴 우리 둘이서 가사 하나쯤이야 못 만들겠니. 이 빙상장을 나올 때 벌써 첫 구절을 생각해냈어. 그럼 빨리 입장식을 해야지.》

두 처녀는 몸을 량옆으로 약간씩 흔들거리며 주로를 따라 천천히 미끄러져갔다. 잠간사이에 3간 4선이 그려졌다. 출발선으로 돌아온 그들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돌면서 외발로 나머지 한선을 더 그려 3간 4선을 4간 5선으로 만들었다.

《애경이, 난 전렴의 가사를 다 생각해냈어. 후렴은 네가 만들어라.》

송금주는 눈을 수평보다 좀 높이 들고 아침해가 불타는 동녘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웅글은 녀성저음으로 미완성가사의 전렴을 읊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일터로 달려갈 때면

눈부신 태양이 우릴 반긴다

혁신으로 들끓는 로동의 거리

청춘의 이 가슴 높뛰게 한다


그는 방금 들은 전럼을 다시한번 반복하고나서 방금 그린 눈우의 4간 5선에 가사와 첫줄을 써넣었다.

《내가 생각해낸건 여기까지야. 후렴은 너의 몫으로 남겼어.》

시흥에 흠씬 취한 정애경은 아침해가 이글거리는 동천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는 방금 들은 가사의 구절들을 입속으로 조용조용 외워 보다가 돌연 나팔꽃같이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시대상이 잘 안겨오는구나. 가사가 좋다. 그런데 첫 부분에서 왜 일터로 걸어간다고 하지 않고 달려간다고 했니?》

《걸어가도 성차지 않아 막 달려가는게 우리 시대, 천리마시대가 아니니. 좀 과장된 표현이라는걸 알면서도 일부러 〈달려갈 때면〉 이라고 했어. 전렴의 감정을 물고 후렴을 멋있게 뽑아보아라.》

《시가 처마끝에서 락수물이 떨어지듯이 그렇게 뚤렁뚤렁 떨어지면 얼마나 좋겠어. 금주, 후렴이 떠오를 때까지 몇바퀴 돌자꾸나.》

그들은 또다시 출발선을 떠나 고속으로 주로를 달리였다. 송금주가 폭이 크고 활달하게 스케트를 탄다면 정애경은 좀 느릿느릿하면서도 우아하고 유연하게 탄다. 송금주의 빙상주법이 박진감이 강한 경기용이라면 정애경의 주법에는 남들의 눈요기에 좋은 관상적인 가치가 있었다. 둘 다 처음에는 뒤짐을 지고 서서히 주로를 돌았다면 나중에는 활개를 치면서 기운차고 씩씩하게 얼음우를 지치였다. 가슴이 급하게 풀무질을 하고 얼굴이 화독앞에 선것처럼 홧홧 달아올랐다.

주로를 열일곱번째로 돌고났을 떼 정애경이 송금주의 뒤에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금주, 후렴을 생각해냈다. 한번 들어볼래?》

《음, 읊어보려무나.》

정애경은 고개를 건뜻 쳐들고 한팔을 허공중에 쭉 뻗치며 후렴부분을 담당하게 될 가사를 격조높이 랑송하였다.


동무들아 피끓는 심장을 바치자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인민을 위하여


랑송이 끝나자 송금주는 《합격!》 하고 소리치며 손벽을 마주쳤다.

《그럼 우리 전렴부터 후렴부분까지 가사를 쭈욱 련결시키면서 랑송해보자.》

두 처녀는 목청을 합쳐 가사를 뜬금으로 랑송하였다. 그들은 다같이 가사가 천리마시대 청년들의 감정세계를 진실하게 반영했다고 자부하였다. 이왕이면 콩나물대가리도 달아야 하지 않을가. 송금주는 잡힐듯 말듯이 가물거리는 곡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모지름을 쓰면서 한참동안 허공을 쳐다보았다.

《금주, 왜 멍청해서 그래? 얼나간 사람처럼.》

정애경이 눈이 휘둥그래서 묻는 말이였다.

《곡상을 잡느라고 그래. 1분동안만 잠자코 있어라.》

송금주는 머리속에 연줄연줄 떠오르는 선률들을 웅얼웅얼 코노래로 익히다가 생긋 웃으며 얼굴의 표정을 일변시켰다.

《애경이, 내가 첫행의 선률을 뽑으면 네가 두번째 행의 선률을 뽑아보아라. 그다음은 나, 그다음 다음은 또 너… 이어달리기식으로 곡을 만들어보잔 말이야.》

《응, 교육간부학교시절처럼 말이지.》

《그래.》

송금주는 첫행의 선률을 소리내여 불렀다. 은근하면서도 다정하고 서정깊은 선률이였다. 박자는 4분의 2박자였지만 행진곡풍의 곡은 아니였다. 그 선률을 따라부르며 눈을 깜박거리던 정애경이 다음행의 선률을 얼른 달았다. 두 처녀는 아까처럼 손을 맞잡고 천천히 얼음판우를 미끄러져가면서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식으로 선률을 이어나갔다. 잠간사이에 하나의 완결된 악곡이 태여나 수억만가락의 해살이 눈우에서 부서져 아롱거리는 은반우로 은은히 흘러갔다. 두 처녀는 무슨 빙상무용이라도 하듯이 서로 팔을 엇걸고 맵시있게 얼음판을 지치면서 가사와 선률을 다 익힐 때까지 대여섯번 반복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나중에는 성부까지 갈라서 2중창을 하였다. 송금주는 저음을 맡고 정애경은 고음을 담당하였다.

노래가 다 끝나자 동뚝우에서 난데없는 박수소리가 터졌다. 어깨에 스케트를 둘러멘 대여섯명의 고중학생들이 두 처녀의 발랄한 노래소리와 우아하고 세련된 률동에 완전히 심취된듯 한 표정으로 빙상장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대학생교복을 입은 청년들도 보이였다.

《그새 숱한 관객이 나타났구나.》

정애경이 송금주에게 귀속말로 말했다.

《퇴장할 때가 된 모양이다. 이제는 저 스케트광들에게 자리를 내줘야지.》

두 처녀는 스케트를 벗고 부랴부랴 외투를 입기 시작했다.

그들은 동뚝을 넘어 학교 가까이에 이를 때까지도 방금 지은 노래를 불렀다. 하나의 즉흥곡을 낳은 명절날의 아침산보는 처녀들의 심신에 날개를 달아준상싶었다. 직일교원에게 스케트를 인계해준 다음 정애경은 청진의 부모들에게 신년축하전보를 치려고 체신소에 가고 송금주는 합숙으로 돌아갔다.

빙상장에서 일어난 흥분은 오래도록 그의 가슴을 움켜잡고 놓아주지않았다. 그 흥분때문인지 도무지 마음을 진정시킬수가 없었다. 송금주는 일기장에 《청춘무곡》이라는 제목으로 은반우에서 태여난 노래의 가사와 곡을 정리해넣은 다음 그아래에 이런 기록을 남기였다.


《천리마시대를 끝없이 사랑하는 녀교원 송금주와 정애경이 1960년대가 시작되는 해의 정월초이튿날 화대천 은반우에서 함께 작사, 작곡한 노래임.》


송금주는 일기장을 치운 후에도 입속으로 그냥 《청춘무곡》을 흥얼거리였다. 하루종일 불러도 힘이 진할것 같지 않고 입에 침이 마를것 같지 않았다.

그가 한참 노래를 흥얼거리고있을 때 누구인가 문을 두드리였다. 출입문앞에는 읍식료상점책임자의 아들인 리형수가 서있었다. 살결이 닭알껍질처럼 해말쑥한 귀공자형의 소년이였다. 그는 약간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네, 고마워요. 형수도 새해에 건강한 몸으로 공부 잘하세요.》

송금주는 답례인사를 하고나서 리형수의 손을 잡아끌었다.

《방에 들어가 놀다가지 않겠나요?》

《선생님, 전 인차 가야 합니다.》

소년은 담임교원의 손에서 팔을 뽑으며 가재걸음을 하였다. 송금주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으나 단념하지 않을수 없었다. 만사람이 다 들떠돌아다니는 설날 제자들과 마주앉으면 소득을 볼수 있다. 모르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되고 비뚤어진 견해나 착오도 바로잡을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기념품이나 음식보따리를 넘겨주고는 인차 빳빳이 꽁무니를 뺀다. 김동주와 고철룡도 그랬다.

리형수는 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인차 가지는 않고 어째서인지 송금주의 눈치를 살피며 머밋머밋하다가 쪽지를 불쑥 내밀었다.

《선생님, 어떤 대학생형님이 정애경선생님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송금주는 쪽지를 받아들었다.

《어떤 대학생인데?》

《연극영화대학휘장을 단 대학생입니다.》

《알겠어요. 가봐요.》

그제야 리형수는 제 할바를 다 한듯 한 만족감 비슷한 표정을 입가에 그리며 합숙처마밑에서 황황히 물러섰다. 연극영화대학 학생이라면 정애경의 청진고급중학교시절의 선배일수도 있고 친지일수도 있다. 영천에는 그런 정애경의 친지나 선배가 없다. 그건 송금주가 잘 안다. 설사 정애경과 연고가 깊은 인물이라 해도 이런 쪽지놀음은 하지 않을것이다. 왜 합숙으로 직발 찾아오지 않고 어린 파발군에게 쪽지를 주어 자기 요구를 전달하라는 구차스러운짓을 하겠는가.

무슨 일로 정애경을 만나자고 할가. 애경에게 혹시 리도령과 같은 사또님이라도 생기려는게 아닐가, 난 향단이가 되구, 세상에는 이런 쪽지놀음으로부터 인생대사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무튼 심상치 않다. 당사자도 아닌데 가슴이 울렁거리였다.


정애경선생!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한석림


쪽지의 글은 이게 전부였으나 그 실오래기같은 샘줄기에서는 바다가 느껴졌다. 그것은 총각들이 처녀들을 낚을 때 흔히 내던지는 미끼였고 상용무기였다. 그리고 도전이였다. 우회전술도 아니고 배후타격도 아닌 완전한 정면돌파다. 아까 동뚝우에서 박수를 쳐주던 대학생들중 한사람일수도 있다. 비위가 떡판같은 사람, 유들유들한 얼굴에 피는 O형.

송금주는 자기가 이처럼 아무런 타당성도 없이 나름대로 그려보는 한석림이라는 그 대학생이 합숙 가까이에서 자기를 지켜볼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머리를 번쩍 쳐들고 사택마을옆으로 지나간 행길쪽을 얼핏 돌아보았다. 과연 그 행길가에는 대학생모자를 쓴 청년이 서있었다.

예감과는 달리 용모도 유들유들하지 않고 무분별해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샌님처럼 얼굴이 강마르고 체소해보이는 인물이였다. 송금주는 사택앞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 그 대학생앞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난 정애경선생과 한합숙에 있는 교원입니다. 저… 동무가 애경선생을 찾았는가요?》

《그렇습니다.》

《미안하지만 애경선생은 지금 외출하고 없는데요. 애경선생과는 구면인가요?》

《아니, 우린 한번도 만난적이 없습니다. 방금전에 먼발치에서 스케트를 타는것을 보았을뿐입니다.》

대학생은 별로 숨기는 기색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담담하고 의젓한 태도만은 마음에 들었다.

《그럼 무슨 일로 만나려는지… 제가 전달해주면 안될가요?》

대학생은 좀 난처해하는 기색을 지어보이면서도 여무지게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건 3자가 나서서 전달해줄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건 그 누구의 개입도 필요로 하지 않는 쌍무회담입니다.》

마주서고보니 록록치 않은 강질이였다. 송금주는 대학생의 마지막말에 그 어떤 소외감 비슷한것을 느끼며 오금을 박았다.

《그럼 전달병노릇은 단념하지요. 그렇지만 이 송금주라는 관문을 돌파하기 전에는 절대로 정애경을 정복할수 없다는걸 명심해두는게 좋을거예요. 조금 있으면 애경이가 올테니 합숙에 들어가시자요.》

《아니, 괜찮습니다. 후에 다시 오지요.》

대학생은 이런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대학생이 돌아간 다음에도 송금주는 뒤숭숭한 마음으로 행길가에 서있었다. 무엇때문인지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활랑거리였다. 아, 우리가 어느새 총각들이 포대경으로 훔쳐보고 쌍무회담까지 꿈꾸는 그런 시절에 들어섰을가. 나이 스물셋이 넘기 바쁘게 총각들의 레이다에 걸려들다니. 녀자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응당한 인생공정을 체험하면서도 송금주는 마음속으로 이것이 과연 우리가 바라던 생활이였던가 하는 당치 않은 생각을 하였다. 그는 그 어디에도 하소할수 없는 어떤 곤욕을 강요당하는것 같은 억울한 심정도 동시에 느끼며 방안을 오락가락하였다.

도무지 마음을 진정할수도 없었고 사색을 집중할수도 없었다. 순조롭게 흐르던 생활이 갑자기 궤도를 탈선한듯 한감마저 느껴져 공연히 마음이 싱승생승해졌다.

30분후 정애경이 호들갑을 떨며 합숙에 들어왔다.

《애경이, 방금전에 독수리가 널 채가려구 날아왔댔어.》

송금주는 정애경이 어떤 모양으로 이 비상사건을 대하는가를 보고싶은 호기심이 불시에 일어났다. 정애경은 눈에 불을 황하게 켜들고 짝패를 돌아보았다.

《독수리라니?》

송금주는 대답대신 대학생한테서 넘겨받은 쪽지를 내밀었다. 정애경은 한줄밖에 안되는 글을 통채로 삼켜버릴 심산인지 세번, 네번 곱씹어 읽는것 같았다. 심장을 활랑거리게 하는 내적흥분을 억제하느라고 모지름을 쓴다는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어랍쇼, 꽤나 용감한데!》

첫 화산폭발은 이런 자지러진 탄성으로 쏟아져나왔다.

그다음은 찬바람이 내불리는 야유와 비난이 터졌다.

《이 애경이가 좀 만만해보였던게지. 대학생모표만 한번 번쩍거리면 나같은 시골처년 단숨에 자기 사유재산으로 만들수 있다고 생각한게 틀림없어. 이 애경인 영낙없이 평양총각의 포로가 되겠는걸.》

《자네 그렇게 함부로 독설을 퍼붓지 말라구. 총각의 순정을 그런 식으로 모독하면 되나. 평양총각의 포로가 되는게 좀 좋은 일인가.》

송금주가 령감티를 내며 수염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정애경은 한참동안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그다음 숨을 가라앉히고 정색해서 말했다.

《금주, 정신을 바싹 차리지 않다간 큰일나겠어. 이 신성한 요새에 총각동맹이 척후병을 파견했는데 우리가 그걸 용납할수 있어?》

《나비가 꽃을 찾아다니는거야 생물계의 법칙인데 뭘 그다지나…》

《넌 만사를 그저 무사태평하게만 대하는게 탈이야. 두고보렴, 그렇게 무경각하게 지내다가 이제 큰 봉변을 당하지 않나.》

《기껏해서 총각들이 정애경을 훔쳐가는거겠지.》

《송금주는 무사하구?》

《나야 절반짜리남자나 다름없는데 총각들이 욕심을 내나.》

《쳇, 이제 송녀사부터 꿀꺽하지 않나 두고보지.》

그들은 이런 말을 주고받다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그러나 두 처녀의 마음속에서는 대학생총각의 출현으로 해서 일어난 지진이 계속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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