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제 3 장

1

그해 설날에는 새벽부터 함박눈이 무너지게 내리였다. 읍지구전체가 하얀 설탕가루를 뒤집어쓴것처럼 하루밤사이에 티 한점 볼수 없는 순결하고 청신한 은백색으로 단장하였다. 영천지방사람들은 설날에 내리는 눈을 복눈이라고 한다. 설눈이 많이 내리면 풍년도 들고 만사가 다 잘된다는것이다.

읍지구에는 식료공장과 종이공장, 모피공장, 철제일용품공장, 가구공장을 비롯한 지방산업공장들이 한꺼번에 일어선다고 하니 영천땅이 생긴 이래 이런 경사가 또 언제 있었던가. 그래서 저 하늘도 정월초하루가 되기 바쁘게 저렇듯 정갈하고 호함진 꽃보라를 날리고있는것이 아닐가. 그 눈꽃들은 볼에 살짝 와닿기만 해도 공연히 사람들의 마음을 들레이게 한다.

이마와 볼과 목덜미에 소리없이 날아와 내리는 함박눈의 산뜻한 감촉과 속삭임을 통하여 영천사람들은 고향땅에 펼쳐지게 될 전변을 저마다 예감하는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저 중학생들이 왜 이른아침부터 마평덕에 올라 발구를 타고 내리막길로 쏜살같이 곤두박히는 아짜아짜한 모험을 하며 후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저 탄부들이 한마디의 롱질에도 저렇게 온 거리가 떠나가도록 껄껄거리겠는가. 공업품상점 창고에 명절상품들을 가득 날라다놓고 떠나가는 화물자동차의 기관소리마저 오늘은 유난히 기운찼다. 모든것이 새로운 박자와 보폭으로 움직이고 떠들며 어데론가 경쾌하게 흘러가는 황홀할 지경으로 아름답고 신비로운 설날아침이다.

통배추김치와 두부국으로 아침상을 물린 송금주와 정애경은 술과 고기, 담배, 사탕, 과자들을 꾸려넣은 식품구럭을 하나씩 들고 합숙을 나섰다. 설 첫날은 나들이로 보내고 두번째 날은 합숙에 틀고앉아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면서 적극적인 방어전을 벌리자는것이 그들이 사전에 짜놓은 명절각본이였다.

함박눈으로 정화된 차고 맵짠 대기에 귀바퀴와 코끝이 대뜸 저려들고 눈두덩에 얼음이 와 박히는것 같았다. 령하 15도라고 예고한 날씨였으나 들뜬 기분탓인지 추위가 모질다는 느낌은 없었다. 설탕가루보다 더 하얀 눈은 가을이 무르익힌 모든 유산을 거대한 백포자락으로 감싸안고 겨울이 얼마나 장엄하고 힘찬 계절인가를 시위하는듯싶었다. 하늘중천에서 쏟아지는 해살의 조화로 해서인지 백설의 색조는 연분홍빛으로도 보이고 때로는 보라빛으로도 보이였다.

이 신비경우에 두줄기의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그 발자국은 공설운동장을 지나 읍 중심부락으로 빠지는 영화관앞으로도 이어지고있었다.

발자국의 크기로 보아 두세사람이 지나갔음직한 흔적이다. 그 흔적을 제외한 모든것은 죄다 생눈이였다. 아직은 그 생눈우에 까치가 꽁지를 달싹거리며 지나간 자취도 없고 조무래기들이 나무꼬챙이 같은것으로 자기 이름자를 새긴 흔적도 없다. 이런 생눈우에 발자국을 내며 명절날의 아침길을 열어놓을 때 그 개척자의 심정은 얼마나 흐뭇하고 장쾌하였으랴.

두 처녀는 이름모를 나그네들이 찍고 간 발자국에 자기네 발자국을 덧놓으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였다. 선두척후는 정애경이고 송금주는 후위를 차지하였다. 차림새를 보면 서로가 눈에 뜨이는 대조를 이루고있었다. 우선 외투부터가 질이 다르다. 송금주의것이 혼방직외투라면 정애경의것은 알짜 모직외투다. 정애경이 가죽으로 지은 단화를 신었다면 송금주는 천으로 지은 편리화를 신었다. 송금주의 머리수건이 인견에 가지색물감을 들인것이라면 정애경의 머리수건은 검정색물감을 들인 모실로 뜬것이다. 정애경은 완벽한 방한장비들로 자기를 무장하였다면 송금주는 사실상 엄혹한 겨울을 이겨낼수 없는 늦가을차림새 그대로이다.

하지만 두 처녀는 그런 차이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모직외투면 어떻고 혼방직외투면 어떻다던가. 가죽신이면 또 어떻고 편리화면 또 어떻다던가. 신발짝이 다르고 머리수건이 다르다고 나와 애경의 우정까지 모실과 무명실의 차이같은 격차를 가질수야 없지 않은가. 송금주는 적어도 이런 배심을 품고있었다. 정애경이 선두척후를 서는것도 결국은 송금주를 위한 마음씨의 반사일것이다. 자기가 가죽신을 신은 발로 앞장에서 걸으면 다문 얼마만큼이라도 눈이 다져질것이고 그러면 그 자욱을 따라 내가 좀 더 편리하게 걸음을 옮길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그가 왜 해보지 않았겠는가. 싫건좋건 두 처녀는 종대로 나들이를 가는셈이다.

그들은 아까부터 교단에 선 후 넉달사이에 있은 인상적인 일들을 두서없이 화제에 올리고있다.

《그 장철갑은 영천중학교가 낳은 완전한 실패작이야.》

정애경이 두달전에 있었던 자전거사건을 회고하다가 느닷없이 하는 말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입김이 대기의 흐름을 타고 송금주의 귀밑으로 날아지나갔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부모들을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속여넘기는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조직과 집단에 속을 주지 않고 얼렁얼렁 살아가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협잡군이 되는 법이야.》

송금주도 짝패의 견해에 맞장구를 쳤다.

《글쎄 자기가 범한 잘못을 보자기에 감싸 뒤로 슬쩍 빼돌리고 뭐 자기는 롱구장에 나타나 경기를 잠간 중단시킨것밖에 없다고… 정말 그런 말로 할아버지를 슬쩍 얼려넘겼으니 할아버지되는분이 동주네 소행을 두고 왜 노발대발하지 않겠어. 결국은 철룡이, 동주네만 미국놈이 된셈이지.》

《그건 참으로 심각한 교육학적문제야. 난 우리 학급에서도 교원들과 부모들을 거짓말로 슬슬 업어넘기는 아이들이 나올가봐 겁이 나.》

송금주는 종대대형을 순식간에 마사버리고 생눈판에 훌쩍 뛰여올라 정애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제야 보폭도 커지고 시야도 넓어졌다. 남의 잔등판에 눈을 견주고 꽁무니를 따라다니는것은 그의 성미에도 맞지 않는노릇이였다. 복사뼈까지 빠지는 눈판에서 눈가루들이 부실부실 흘러내려 신발짬으로 새여들어왔지만 송금주는 그 차디찬 감각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오히려 이 겨울의 도고하고 랭혹한 맛을 독차지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웃음을 짓고있었다.

《애경이, 그런데 이런 날 하필 그 오작품같은 현대판 놀부얘긴 왜 꺼내? 두달전에 벌써 삼자대면까지 시키고 아퀴를 지은 일인데…》

이번에는 송금주의 입김이 정애경의 관자노리로 날아갔다.

정애경의 눈가에 심각한 표정이 비끼였다.

《오, 그것 말이지. 지난밤 송년모임때 교장선생님이 나보고 묻지 않겠어. 장철갑과 같은 류형의 학생들은 어떻게 교양하면 좋겠는가고 한번 말해보라는거지. 교장선생님, 고견이 다 뭡니까, 교양개조할 인간들은 따로 있습니다, 장철갑은 안됩니다, 개꼬리 삼년 두어도 황모 못된다는 말을 잊으셨습니까 하고 말했더니 한숨을 짓더구나. 설날을 맞고보니 그런 말을 한게 후회돼. 그래서 장철갑을 화제에 올린거야.》

송금주는 정애경을 돌아보며 눈을 흘기였다.

《너두 참 한심하구나.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말을 탕탕 하니. 인간개조의 열풍으로 온 나라가 부글부글 끓고있는 때에 이 영천골안에 틀고앉아 뭐 교양개조할 인간들은 따로 있다구? 그게 교육자가 할소리야?》

《그러게 그런 말을 한게 후회된다지 않아. 저것 보지, 범잡은 포수처럼 희색이 만면해서. 그저 날 몰아대지 못해 몸살이구나.》

《나야 너의 정치위원이 아니냐. 나와 같은 정치위원을 두고있는걸 행복으로 생각해야지.》

《정치위원님, 남 다 가는 길을 두고 왜 생눈길로 걸어갑니까? 신발안으로 눈이 새여들어가는게 보이지 않습니까? 어서 내려서십시오.》

정애경은 송금주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어 아까처럼 그를 후위에 세웠다.

하지만 송금주는 다시금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생눈판에 올라섰다.

《하긴 넌 학창시절에도 늘 숫눈을 밟으면서 학교로 오가군 했지. 무슨 놈의 습관이 그렇게도 고약하담.》

정애경의 말이 옳았다. 송금주는 발을 얼쿠면서도 노상 숫눈만을 밟아왔다. 그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백설의 대지에 처음으로 길을 열어갈 때면 자연의 힘앞에 과감히 돌진하는 이상야릇한 정복자의 심리, 개척자의 희열과 흥분이 솟구치군 하였다.

송금주의 발자국은 지금도 정애경의 발자국과 평행선을 그리며 숫눈우로 길게 뻗어가고있다.

《에헴.》 하는 귀에 익은 기침소리가 그들의 등뒤에서 울리였다. 두 처녀는 걸음을 멈추고 동시에 소리나는쪽을 돌아보았다. 10m쯤 떨어진 길 뒤쪽에서 두꺼운 도수경을 낀 사람이 안경알너머로 그들이 방금 남기고 온 발자국들을 유심히 더듬어보고있었다. 행길바닥에 무슨 귀중품 같은것이라도 흘리고 그것을 열심히 찾고있는듯 한 모습이라고나 할가, 그러나 그런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그 표정이 너무도 철학적이였다.

눈가루처럼 하얀 백발도 인상적이였지만 척추만곡증환자의것처럼 구부정한 허리와 벌쭉한 두귀, 총기가 넘치는 또록한 눈매도 몹시 유표해보였다. 사람들이 흔히 《남북골》이라고 부르는 전형적인 수재형의 골상을 가진 이 사나이는 첫 대면에서부터 송금주와 정애경에게 호감을 준 영천중학교 력사교원 조학문이다.

간밤 근무를 선다면서 송년모임에도 참가하지 않고 초저녁부터 교사안팎을 들락날락하며 설개더니 근무인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가보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두 처녀의 또랑또랑한 설인사가 조학문에게로 실려갔다. 조학문도 허리를 굽신하며 답례를 보냈다.

《고맙소. 력사가 기억하는 미인들이 되여주시오!》

설인사치고는 대단히 파격적이고 어마어마한 인사였다. 롱담같이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말이였으나 그 말속에는 통담으로 스쳐버릴수 없는 씨앗이 박혀있었다. 그는 답례를 표시한 후에도 그냥 처녀들의 발자국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고있었다.

《선생님, 아까부터 뭘 그렇게 유심히 살펴보십니까?》

정애경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뭘 보는가구? 두 인생을 보고있소.》

《두 인생이라니요? 그건 무슨 인생입니까?》

《무슨 인생은 무슨 인생이겠소. 송금주와 정애경의 인생이지.》

롱인지 롱이 아닌지를 도무지 가늠할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대답이였다. 두 처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선생님, 길바닥에서 어떻게 인생을 본다고 그러십니까?》

이번에는 송금주가 물음을 던지였다.

《그건 얼마든지 가능한거요. 이것보, 여기에 이렇게… 이렇게 다 찍혀있지 않소.》

조학문은 상체를 앞으로 푹 숙이고 손가락으로 두 처녀의 발자국을 번갈아 가리켜보이였다.

《이것 보오. 애경선생의 발자국은 알리지도 않소. 왜 그런가, 남의 발자국우에 덧놓였기때문이요. 보나마나 애경선생의 구두속엔 눈가루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을거요. 그런데 금주선생은 어떤가. 보다싶이 이렇게 누구도 걸어가지 않은 생눈우에 발자국을 내며 길을 개척하였소. 이런게 바로 초행길이 아니고 뭐겠소.》

《그럼 나하구 애경인 어떤 인생길을 걸어가게 될것 같습니까?》

조학문은 두 처녀의 앞에 가까이 다가와 두손으로 귀박죽을 한참 문지르고나서 빙그레 웃어보이였다.

《이 발자국들을 보면 두 선생의 성격을 가늠할수 있소. 성격이자 운명이라는데 금주선생은 모험가이고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이니 남들보다 곱절 힘들게 인생길을 걸어가게 될것 같소. 초행길을 걷는 사람들치고 고생을 안하는 사람이 있소?》

《선생님, 전 어떨것 같습니까?》

정애경이 조바심을 담아 물었다. 조학문은 그가 찍어온 발자국들에 얼핏 눈길을 떨구었다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남의 발자국에 발을 덧놓으며 사는 사람이니 그거야 뻔하지 않소. 한평생 운명을 좌우하는 모험은 안할게고 고생도 사서 하지 않을테니 조용히 무난하게 살아가게 될것 같소.》

그것은 평소에 송금주가 품었던 생각과도 맞아떨어지는 예언이였다.

송금주는 경탄을 금치 못하였지만 정애경은 입을 오무리면서 공감인지, 부정인지 알수 없는 묘한 시선으로 조학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선생님, 두 경우 다 비슷이 보신것 같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앞날까지 그렇게 척척 내다보십니까?》

송금주가 묻는 말이다. 조학문은 겸양의 표시로 두손을 홰홰 내저었다.

《나를 예언자나 관상쟁이로 보지 마오. 난 지나간 력사속에서 미래를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요. 방금전에 말한 두 인생에 대한 예측은 선생들이 영천중학교에 와서 보낸 넉달동안의 생활을 목격하는 과정에 얻은 견해일뿐이요. 그 넉달이 이 발자국들에 압축되여있소. 자, 그럼 이 조학문은 천하에 둘도 없는 드살쟁이이고 반알콜투사인 김탄실의 품으로 돌아가겠소.》

두 처녀는 그 말에 까르르 웃음을 터치였다.

《선생님, 부인께서 금주령을 내렸다던데 이번 설을 축배주도 없이 맨숭맨숭하게 보내게 되지 않겠습니까?》

송금주가 짜장 걱정이라도 하듯이 물었다.

《그래도 그 드살쟁이부인이 아량은 있거던. 지난밤 저녁밥속에 1월1일 9시부터 금주령을 해제한다는 쪽지를 보내지 않았겠소.》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 아니문. 왜? 믿어지지 않소?》

《네. 어제 경리부에서 명절공급물자를 받아갈 때만 해도 부인의 태도는 완강했거던요. 술은 안 가져가겠다지 않나요. 그러면 조학문선생이 얼마나 비통해하겠는가고 하니 부인이 내 귀에 대고 하는 말이 이것 보우, 송선생, 내 한생은 술과의 투쟁이였다우, 그 투쟁이 결정적승리를 이룩하려는 순간에 그 량반이 술병을 보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소 하질 않겠어요. 그렇게도 완고하던 부인이… 선생님, 이제 댁에 가시면 금주령을 해제시킨 부인에게 먼저 축배잔부터 올려야겠군요.》

조학문은 그 말을 듣자 쓴웃음을 지었다.

《송선생, 슬픈 일이지만 내가 합법적으로 술과의 사업을 할수 있는 시간은 1월 2일 밤 12시까지뿐이요. 그다음부터는 다시 금주령이 자동적으로 가동하게 되오. 왜냐하면 그 김탄실녀사가 이틀동안만 술을 마실수 있다고 언명했기때문이요.》

송금주와 정애경은 또다시 거리가 떠나가게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조학문이 어찌나도 비참한 수난자의 행색을 잘 지어보였던지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었다. 이틀동안 합법적으로 음주할수 있는 권리를 기적적으로 얻은 조학문의 처지가 궁상스럽고 불행하다기보다 오히려 시샘이 날만큼 행복해보이는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그는 믿음직한 동반자의 보호속에 있는 행복한 사나이였다.

조학문은 두 처녀교원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나서 옆길로 꺾어들었다.

《어쩌면 저 선생님이 우리들의 성격을 그렇게도 잘 알아맞출가!》

정애경이 사택마을쪽으로 걸어가는 조학문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였다.

《그러게 말이다. 그 두꺼운 도수안경으로 모든걸 죄다 투시하고있었구나. 난 저 선생앞에만 서면 매번 렌트겐촬영을 당하는것 같은감이 들군 해. 그럴 때마다 몸에 이상한 전률이 오거던.》

송금주도 조학문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건 나도 마찬가지야. 저것 봐라, 조선생 걸음이 점점 빨라지누나.》

《막 날아갈것 같지 않아? 금주령해제후 첫 술잔을 들게 될 학문선생의 심정을 좀 상상해보럽.》

두 처녀는 이렇게 찧고 까불며 걸음을 옮기다가 네거리에서 헤여졌다. 학부형들의 초청을 받은 정애경은 탄광마을주택이 자리잡고있는 군병원쪽으로 가고 송금주는 화약고 경비원 박경만아바이를 만나려고 탄광쪽으로 향하였다. 그는 정월초하루날의 첫 세배대상으로 박경만을 정하였다.

읍에서 화약고로 가자면 덕거리 등판에 있는 탄광로동자합숙을 지나가야 한다. 합숙을 지나 백m쯤 가면 화약고로 통하는 내리막길이 나진다. 너비가 한자도 못되는 오솔길이다. 송금주는 그 오솔길에 난 발자국을 보자 아바이가 화약고에 나와계시는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출근을 안했으면 어찌나 했는데 발이 멋있게 맞아떨어진 셈이다.

송금주는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가라앉히며 저탄장 한복판에 솟아있는 고깔모양의 석탄산을 흐무진 마음으로 부감하였다. 석탄산의 음달진 북쪽경사면은 눈으로 덮여있어 마치 하얀 털외투를 걸치고있는것 같았다. 하지만 남쪽과 서쪽경사면은 아무런 보호색으로도 가리우지 않은 천연의 검은색갈 그대로였다. 석탄산의 겉면을 도색한 흰눈과의 대조로 인해서인지 오늘따라 그 산의 색갈은 더 선명하고 새까매보이였다.

저 석탄덩어리들을 《검은 금》 이라고도 하고 《검은 진주》 라고도 부르는 탄부들의 심정이 저탄장이 지척에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에서는 더 친근하고 뚜렷하게 가슴에 새겨지는것 같았다. 송금주는 석탄이라는 저 보화가 자기의 운명과도 여러 갈래로 얽혀있는 값진것이라는것을 지금처럼 사무치게 느껴본적은 없었다고 생각하며 저탄장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는 생눈을 밟으면서 오솔길을 내리다가 섬광처럼 번쩍이는 어떤 령감에 사로잡혀 걸음을 멈춰세웠다.

박경만아바이가 불편을 느끼지 않게 오솔길의 눈을 쳐내고싶은 충동이 불쑥 치밀어올랐다. 그런 충동이 일기 바쁘게 그는 로동자합숙에 뛰여가 눈가래를 빌려가지고 돌아왔다. 구럭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어내친 다음 맹렬하게 눈을 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가래질을 하고나니 가파로운 령길이라도 오르는것처럼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들먹거리였다.

길이 울퉁불퉁해서 가래질을 하기가 여간 말째지 않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몇분동안 숨을 톺다가 다시 가래를 잡고 눈을 밑어냈다.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면서 정신이 또릿또릿해지고 힘이 용솟음쳤다.

그가 걸싸게 눈을 쳐내고있을 때 내리막길 아래쪽 후미진 곳에서부터 손에 비자루를 들고 털모자를 쓴 사람의 형체가 불쑥 솟구쳐올랐다.

송금주는 멀리서도 그가 박경만아바이임을 알아보았다. 비자루를 시계추처럼 량옆으로 움직이며 눈을 쓸어내던 로인은 가래질을 하며 마주 다가오는 송금주를 보자 눈언저리에 손채양을 해붙이였다.

《그게 뉘시오?》

로인이 석쉼한 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 나 금주예요. 새해를 축하해요!》

송금주는 먼발치에서 허리를 직각으로 꺾어 절을 하였다.

《금주야, 너 어데로 가던 길인데 거기서 눈가래질이냐?》

박경만은 전혀 뜻하지도 않은 정황에서 급작스레 맞다들게 된 송금주와의 랑만적인 해후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이런 해괴한 우연이 어떻게 되여 이루어졌는지 도무지 종잡을수 없는 모양이였다.

《할아버지, 나 할아버지한테 세배오던 길이예요.》

《이런 인사불성이라구야. 세배를 와준것만두 고마운 일인데 눈까지 치다니. 내 체면을 봐서라두 아서라, 금주야, 가래질은 그만 두고 어서 저리로 내려가자. 어서!》

《할아버지, 인차 내려가요. 5분이면 돼요. 한말이나 되는 이 피를 뒀다가 어디 쓰겠나요.》

송금주는 종전보다 더 세차게 눈을 밀었다. 언땅을 긁어대는 가래질 소리가 인적없는 골안에 로동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처럼 울린다. 처녀와 로인이 한 지점에서 마주치는 순간이 마침내 왔다. 로인은 갈퀴같은 손으로 송금주의 두손을 덥석 끌어당기였다.

《고맙다, 금주야. 이런, 장갑도 없이… 손이 다 얼었구나.》

《할아버지, 장수하십시오. 그새 한번도 찾아와 뵙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게 무슨 소리냐. 교원을 하는 사람이 설세배를 온것만두 대단한 일이지. 여기가 어디라구 세배를 온단 말이냐. 감기에 걸리기 전에 외투를 입어라.》

잠시후 송금주는 화약고 경비실과 곁달린 어느 한 방에서 로인과 마주앉아 구럭속의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술 1병에 단물 2병, 《금강》 표 담배 10갑, 볶은 돼지고기 1키로그람이였다. 그는 합숙을 떠날 때 마련해가지고 온 잔에 술을 부어 로인에게 드리였다. 그 잔을 들어올리는 로인의 눈가에 물기가 고이였다.

《네 마음이 정말 비단같구나. 내 이 잔을 너를 축복해서 들겠다.》

박경만은 잔을 비우고나서 송금주의 얼굴에 시선을 박았다.

《전번에 왔을 때보다 얼굴이 퍽 축간것 같구나. 훈장노릇을 하기가 조련치 않을게다. 우리 집 봉숙이와 봉철인 어렸을적에 늘 내 팔베개를 베고 잤다. 한팔에 한 아이씩 끼고 한참 자느라면 팔이 어찌나 저려 나던지. 그러면 아이들을 팔에서 떼내여 베개에 눕히군 했구나. 두 아이를 팔베개에 끼고 자는것도 이렇게 힘든데 네 팔에는 50명이나 되는 애들이 매달려있지 않니. 그러니 팔이 얼마나 저리겠니.》

《힘든건 사실이예요. 그렇지만 보람은 있어요.》

《그러면 됐다. 무슨 일이든지 애착을 가져야 성수가 나는 법이니라.》

《할아버진 이 화약고를 지키는 일이 힘들지 않나요?》

《힘들기야 뭘. 좀 따분해서 그렇지. 그렇지만 나도 너처럼 자기 일에 애착을 가지고있다. 며칠전에 년간총화에 참가했는데 이 화약고에서 나간 남포약들은 불발이 하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내 사업에 대한 평가가 아니겠니. 그거면 됐지 뭐냐. 어, 오늘은 술맛이 류달리 좋구나!》

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잔을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동안은 말도 없었다. 발가우리해지는 눈갓우에서 희슥희슥한 장미가 이따금씩 꿈틀거리고 볼편이 실룩거리였다. 묵념에 잠긴 로인의 모습은 인자하면서도 엄엄해보이였다.

《금주야, 우리 수령님께서 열어주신 이 좋은 시대를 위해 젊었을적에 일을 많이 해라. 나도 초소를 잘 지키겠다. 모두가 일을 잘해야 나라가 흥할게 아니냐.》

《할아버지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송금주는 저가락에 고기점을 집어 로인의 입에 넣어주었다. 로인은 그 고기토막을 맛나게 씹으면서 또 입을 열었다.

《너도 알고있겠지만 새해에는 우리 탄광이 3년전보다 두배나 더 많은 석탄을 생산하게 된다. 우리 공업은 그만큼 많은 밥을 요구하게 되였다. 이건 우리 나라가 부강한 나라로 되고있다는 증거이다. 이 좋은 세상에서 오래 살아야 하겠는데…》

《할아버진 장수할거예요.》

《금주야, 오늘은 세배할데도 많겠는데 어서 가봐라.》

로인은 말코지에 걸린 솜옷주머니에서 새빨간 사과 두알을 꺼내여 송금주의 손에 쥐여주었다.

《지난밤에 전차갱 탄부들이 신년축사를 하고 돌아가다가 주고간거다. 합숙생이 둘이라는데 한알씩 나누어먹어라.》

《할아버지, 그러지 말고 손주들한테 주십시오.》

《그런 념려는 말고 어서 주머니에 넣어라.》

송금주는 외투주머니에 사과를 한알씩 집어넣은 다음 경비실옆방을 나섰다. 경비실뜨락에서 차석진지배인이 신발바닥에 묻은 눈을 탁탁 털다가 그를 보고 환성을 올리였다.

《이게 누구요? 어이구, 송금주선생이구만!》

《지배인동지, 새해를 축하합니다!》

송금주는 지배인이 내미는 손을 얼추 잡아쥐고 꾸벅 절을 하였다. 한해가 시작되는 명절날에 갱견학을 도와준 지배인까지 만나고보니 이상스레 마음이 들떴다. 지배인도 넉달전에 송금주한테서 성화를 받던 일이 떠오르는지 싱글벙글 웃고있었다.

《이 아바이가 선생의 아버지와 한갱에서 일한 친구지간이라는 말을내 다 들었소. 그런 인연을 잊지 않고 선생이 로탄부한테 설인사를 하려고 찾아온데 대해 지배인으로서 감사를 드리는바이요.》

《지배인동지도 저의 인사를 받아주십시오. 그때 갱견학을 끝내고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는데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런 말은 하지도 마오. 송선생네 갱견학이 우리 탄부들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는지 아마 선생은 다 모를거요. 영천땅에 교원들이 많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갱에까지 들어온 교원은 금주선생 한사람밖에 없소. 전차갱 탄부들은 그때부터 선생을 갱사람으로 여기고있소. 명예탄부로 여긴다고 할가.》

《저도 갱에서 탄을 캐는 심정으로 교단을 지키고있습니다.》

《아무튼 탄부의 자식들을 잘 키워주시오.》

지배인은 송금주의 손을 힘차게 잡아흔들며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격려하였다. 로인과 지배인은 울타리밖에까지 따라나와 작별인사를 하였다.

송금주는 간밤에 정애경과 한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고 황천왕동이도 무색케 5리도 넘는 장거리를 고속으로 누비였다. 오전중으로 합숙에 돌아와서는 점심식사도 하지 않고 그달음으로 곧장 고향마을에 다녀오자는것이 그들이 짜놓은 정월초하루날의 명절프로그람이였다. 아간에는 송금주의 고모와 정애경의 막내삼촌이 있었다. 두 처녀는 여기서 태여나 소학시절과 중학시절을 보냈다.

합숙에 돌아와보니 손에 드레박을 든 김동주와 음식꾸레미 같은것을 든 고철룡이 뜨락에서 서성거리다가 그를 보자 어줍게 인사를 하였다.

《왜들 방에는 들어가지 않고 이렇게 밖에서 오락가락해요? 애경선생은 없던가요?》

송금주는 두 소년의 등을 무작정 떠밀며 수선을 떨었다. 그러나 소년들은 뜨락에 버티고서서 움쩍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새해에는 말썽을 부리지 않고 공부를 잘하겠습니다. 이걸 받아주십시오.》

김동주는 바줄로 칭칭 동여맨 드레박을 송금주앞에 내밀었다.

《이건 명절선물인가요? 어떻게 드레박을 가져올 생각까지 다 했는가요?》

《선생님들이 남의 집 드레박을 빌려쓰는걸 보고 동주가 제 손으로 만든겁니다. 만들기는 두달전에 만들었는데 드레줄이 없어서 둬두었더랬는데 동주네 아버지가 샘덕마을에 가서 이 줄을 구해오지 않았겠습니까.》

고철룡이 짝패를 내세우느라고 열정적으로 주해를 달았다. 그는 묵직한 음식보따리를 쳐들고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선생님, 이것도 받아주십시오. 설기떡입니다.》 하고 말했다. 송금주는 드레박과 떡꾸레미를 량손에 하나씩 갈라들고 멀리로 달음박질해가는 두 제자를 정겨운 눈길로 바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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