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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제 2 장

3


새 학년도에 들어와 네번째로 맞는 일요일이였다.

송금주는 다른 날보다 한시간쯤 늦게 잠자리에서 일어나 동자질을 하였다. 오늘까지는 그가 이 합숙의 식사당번이다. 번을 서는 기간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이다. 식사당번을 선 다음에는 정애경에게 부뚜막을 넘겨주고 다음 번이 돌아올 때까지 한주일동안 합숙안팎을 정돈하고 관리해야 한다. 식솔이 통털어 두명밖에 안되는 합숙이니만큼 한주일은 식모노릇을 하고 다음 한주일은 청소부노릇을 하는 식으로 생활의 물레바퀴를 돌려가는것은 자못 흥겨운 일이다.

이 세칙의 기안자는 발견, 발명의 능수이며 규정과 규칙의 화신인 정애경이였다. 송금주는 그가 내놓은 착상을 지지하고 환영하였을뿐이다. 송금주가 규범과 격식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형이였다면 정애경은 사업과 생활에서 모호하고 두리뭉실한것을 질색하는 형이였다.

학창시절에 집단로동에 참가할 때면 그는 늘 도급제를 주장하였으며 일단 일거리를 맡으면 곁눈 한번 팔지 않고 그것을 남먼저 암팡지게 수행하군 하였다. 친자매들사이에서도 언니몫이 다르고 동생몫이 다르다는것이 정애경이 제창하는 인륜의 법도이다.

한집안식구나 다름없는 친구지간에 당번은 무슨 당번인가고 항변하는 송금주에게 당번제가 없으면 합숙도 우정도 다 망가진다고 력설한것이 바로 정애경이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자동적으로 합숙사감이 되였다. 송금주는 사감의 말을 고분고분 잘 받아물었다. 정애경이 사감티를 내며 무슨 훈시를 하거나 잔소리를 할 때면 그는 《네, 잘못했습니다.》, 《고치겠습니다.》, 《분부만 내리십시오.》 하면서 굽실거리는 시늉을 하던가 손아래 동생의 재롱을 보거나 투정질을 받아들이는듯 한 시선으로 정겹게 자기의 짝패를 바라보군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영천중학교 녀교원합숙의 하루하루는 정애경이 휘둘러대는 박자에 따라 흘러가고있었다.

이 박자의 주인공인 정애경자신은 지금 부뚜막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밥김냄새에 코를 발름거리며 금속테두리에 은박칠을 한 타원형의 거울앞에서 머리단장을 하고있었다. 단장이라고 해야 고중때보다 조금 더 길어진 새까만 중발머리를 빗으로 빗어내리고 가리마를 낸 앞머리 량쪽과 뒤머리를 핀으로 지질러놓는것이였다. 그다음은 머리기름을 살짝 발랐다. 두 처녀는 얼굴에 분과 연지를 대지 않았다. 얼굴에 그저 크림만 살짝 바르고 다니는 정도였다, 아무런 화장도 하지 않은 순수한 얼굴 그대로 교단에 나섰다.

《금주, 이제는 머리를 좀 지져야 하지 않을가?》

얼레빗에서 머리카락을 뽑아 휴지통에 떨구던 정애경이 부뚜막으로 통하는 사이문앞에 다가와 하는 말이였다. 송금주는 행주로 밥물이 부풀어나오는 가마굽도리를 훔치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였다.

《파마를 하자는거겠지?》

《그럼.》

《뭘 그다지나 급해서…》

《자기 나이가 스물두살이라는걸 잊지 않았겠지?》

《스물두살이면 어떻다는거야?》

《인생의 분기점에 서있다는걸 알아야지. 학창시절은 뒤로 물러가고 발밑에서는 사회라는 넓은 바다가 출렁이고있지 않니.》

《그렇지만 난 어쩐지 이 중발머리와 헤여지고싶지 않구나.》

송금주는 우수에 찬 눈으로 어딘가 먼곳에 눈길을 주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였다. 중발을 파마머리로 변모시킨다고 해서 송금주가 정금주로 되는것도 아니고 처녀가 새각시로 되여 부인이라는 벙거지를 쓰게 되는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리만 지지면 스물두해동안 아기자기하게 엮어오던 인생행로가 생소하고 서름서름한 초행길로 이어지고 꿈많던 소녀시절이 자기네한테 선사해준 순결하고 생신하고 아름다운 모든것을 죄다 잃어버릴것만 같은 어떤 불안에 가까운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것이였다.

《넌 참, 한심한 보수주의할망구야. 네 머린 온통 봉건냄새가 물씬물씬 나는 허접쓰레기들뿐이야.》

정애경은 눈두덩의 근육을 우로 올리고 올롱한 눈으로 송금주를 흘기였다. 송금주는 싱글싱글 웃기만 하다가 눈을 힐끗 치뜨며 반격을 가하였다.

《아유, 저 말랑말랑한 입술에서 어쩌면 저렇게도 뾰족한 소리가 굴러나올가.》

정애경은 그제서야 뭇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비끄러매는 그 유혹적인 표정을 입가와 눈언저리에 담고 정색해서 말했다.

《사실은 어제 최춘숙분과장선생이 나보고 파마를 하지 않으니 학생 티가 난다고 하지 않겠어. 그 선생 말이 금년도에 배치된 신입교원들은 참 이상하다는거야. 파마도 하지 않고 고중때 입고다니던 학생복차림 그대로 교단에 서니 교원냄새가 안 난다는거지.》

《그렇다면 우리도 파마동맹에 들자꾸나, 반나절만 팔면 머리를 지지겠는데.》

송금주는 쌀함박의 가시물에 행주를 헹구어 칼도마에 얹어놓은 다음 두손을 량옆구리에 올리고 홍조가 비낀 얼굴로 정애경을 쳐다보았다.

정애경을 대할 때마다 무시로 느끼는바이지만 그는 이 순간도 개성이 두드러진 애된 미인의 초상을 담은 한폭의 미술작품을 보는듯 한 심정이였다. 정애경은 송금주의 옆구리에서 한팔을 잡아당겨 그의 손우에 자기의 손을 포개여얹으며 눈을 곱게 빨았다.

《글쎄 그러면 그렇겠지. 아무렴 그 혁신파의 기질이야 어디 가겠어.》

《잘두 나볼거린다. 보수주의할망구가 이번에는 혁신파녀사가 되구.》

둘은 소리를 내여 한바탕 통쾌하게 웃어댔다.

아침을 먹은 후 미용원행차를 하였다. 사람들의 래왕이 제일 번잡한 도시중심가에 뻐젓이 자리를 잡는 다른 고장의 미용원들과 달리 영천미용원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읍변두리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전쟁전에 야장간으로 쓰던 건물을 개조하여 일떠세운 집에 미용의자 한개와 거울 한개를 들여다놓고 운영하는 미용원이였다. 건물도 소박하지만 간판도 초라하였다. 개업한지 3년밖에 안되는 미용원이니 그럴만도 하였다. 아직은 파마머리가 대중화되지 않은 때여서 미용원을 찾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처럼 한적하던 미용원이 올해초에 사리원바닥에서 첫손가락에 꼽혔다는 미용사가 온 다음부터는 갑자기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문이 어떤 경로를 통해 날아갔는지 처음에는 탄광 로동자처녀들이 찾아오고 그뒤를 이어 군병원 의사, 간호원들과 교원들이 밀려들었다. 읍에서 30리나 떨어진 신계촌과 연평덕의 농장원녀성들도 이 미용원에서 길이가 한발이나 되는 거치장스러운 트레머리를 썩둑썩둑 잘라던지고 머리를 강굴강굴하게 지진 다음 식초냄새 비슷한 파마약냄새를 풍기며 개선장군들마냥 읍거리를 떠나갔다. 새로 온 미용사가 육담을 잘하는 말박사이고 익살쟁이라는 소문이 온 군에 퍼져갔다. 한해도 못되는 사이에 사리원내기 미용사는 녀성들의 총애를 받는 명물로 되였다.

일요일은 영천미용원이 손님들로 초만원을 이루는 날이다. 송금주와 정애경은 첫 순서를 양보하지 않으려고 아침상을 물리자바람으로 미용원으로 떠났다. 빨래줄에 앞치마같은것을 널고있던 40대의 몸매가 날씬하고 해사하게 생긴 미용사가 그들을 보자 구면이라도 되는듯이 생긋 웃음부터 지어보였다.

웃이발 한가운데서 번쩍거리는 금빛광채가 녀인의 해맑은 얼굴색과 이상한 대조를 이루며 그의 미모에 상당한 매력을 보태주고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용사는 빨래를 걸어놓던 손으로 미용원의 나들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다른 한손으로 방안쪽을 가리켜보이였다.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자세와 거동이 얼마나 상냥하고 허물없었던지 송금주는 그가 오래전부터 알고지낸 구면지기인듯 한 착각을 느끼기까지 했다.

《교실농사가 잘 돼가나요?》

미용사가 밖에서 문설주가름대에 팔을 걸치고 방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3자가 보면 미용사는 이 집을 찾는 방문객격이고 긴의자에 걸터앉은 두 처녀가 주인들이겠거니 하고 빗볼수 있는 전도된 광경이였다.

난생처음 교실농사라는 괴이한 말을 들은 그들은 뻥뻥해서 아무 응대도 못하고 미용사의 얼굴만 지켜보았다.

《하하, 이 선생님들이 교실농사라는 말을 못 들어본 모양이구만.》

녀인은 방에 들어와 수건으로 손을 문대며 미용의자에 풍덩 주저앉았다. 의자의 용수철이 죄여들며 내는 소리가 녀인의 방금 내뱉은 말마디들의 뒤에 오는 결속음처럼 들리였다. 선생님들이라는 말에 송금주는 아까보다 더 어리둥절해졌다. 생판 처음 만나는 인물들의 직업까지도 알아맞추는 녀인의 신비스런 판단력에 놀라운 느낌마저 들었다. 정애경도 같은 심정인지 송금주의 팔굽을 슬쩍 건드렸다.

《아주머니, 우리가 교원이라는걸 어떻게 아셨나요?》

그는 눈을 치뜨고 미용사에게 직판 물었다.

《몸에서 백묵냄새가 나니까요.》

미용사는 처녀들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흠》, 《흠》 하고 코김을 내불며 백묵냄새가 지독스레 나서 못 견디겠다는듯 한 시늉을 지어보였다. 듣던바 그대로 장난기가 자글자글하고 유모아적인 녀자였다. 잠시후 그 녀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청진서 교육간부학교를 졸업하고 영천중학교에 온 짝패라는것도 다 알지요. 이쪽선생은 음악선생이구만. 가만, 키가 좀더 큰 이쪽선생은 낯이 익다-》

미용사는 손가락으로 거울속에 비친 송금주를 가리키며 《낯이 익다》 의 《다》 자를 길게 끌었다. 말마디들을 아무렇게나 툭툭 내던지는것 같았지만 오보나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정보가 다 사실 그대로였다. 어디서 누구를 통해 어떻게 입수한 정보라는 설명은 없었다. 명백한것은 사리원에서 왔다는 이 관상쟁이같은 미용사가 군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소사를 손금보듯이 꿰뚫고있는 간단치 않은 소식통이라는 사실이였다. 영천지방 지식인들은 이런 류형의 사람들을 흔히 인물백과라고들 한다.

(학부형인게로구나.)

송금주의 속셈이였다. 학부형이 아니라면 세상만사에 다 간참하는 수다쟁이일수도 있고 말장사군일수도 있으며 새 소식에 특별한 흥미를 느끼는 정보애호가일수도 있다.

이렇든저렇든 찍어서 말할수 있는것은 영천이라는 이 자그마한 고장에서 교원은 여론의 초점으로 될수 있는 흥미있는 대상이며 학부형들과 학생들은 물론 일반시민들의 주시속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였다.

이것을 무시하거나 망각하면 돌이킬수 없는 후과를 낳게 될것이라는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나나 정애경이 처신을 잘하지 못하면 저 녀자의 귀에 제일선참으로 소문이 날아갈것이다. 저 능갈치게 생긴 금이발쟁이 미용사는 미용원을 찾는 모든 손님들에게 그 소문을 호박씨를 까서 뱉듯이 무차별적으로 뱉아버릴것이다. 그러면 나나 애경인 만사람의 관심거리가 될것이다.

송금주는 자기가 수만명의 관객앞에 서있는듯 한 심정에 사로잡히였다. 한개의 말마디와 하나의 손동작, 한순간의 자세와 거동에도 수천 수만쌍의 눈길이 조명등의 불빛처럼 따라다니고 마이크가 바투 붙어서 가동하는듯 한 환각에 진땀이 흐르고 등골이 서늘해지는것 같았다.

교단에 섰으면 말밥에 오르지 말아야지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면 서쪽산마루에서 메아리가 되여 울리는 이 자그마한 읍거리에서 남들의 웃음거리가 된다는거야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교원을 할바엔 교단에 자기를 깡그리 바치는 충복이 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자! 송금주는 이런 결심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 그럼 시작해볼가요?》

미용사가 의자에서 일어나 말코지에 걸린 위생복을 벗겨 몸에 걸치였다. 그의 눈빛과 말투에서는 갑자기 묘사대상을 눈앞에 둔 미술가들 한테서나 볼수 있는 강한 직업의식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는 방안에 들어서던 때와 마찬가지로 번개같은 시선으로 두 처녀의 얼굴을 스쳐보았다. 얼핏 지나가는 눈길이였지만 종심이 꽤 깊어보이였다.

송금주는 정애경을 미용의자앞으로 떠밀었다. 그는 무슨 일에서나 첫 순서는 매번 짝패한테 양보하군 하였다. 정애경도 이제는 거기에 습관되였다. 그는 아무런 사양도 하지 않고 의자우에 거침없이 몸을 실었다.

미용사는 리발가위를 들고 미용의자뒤에 서서 거울에 드러난 정애경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정말 곱구만. 영천바닥 총각들이 이 선생때문에 다들 몸살을 앓게 되지 않을가. 이제 군병원입원실이 상사병에 걸린 총각들로 초만원을 이루게 되겠네.》

그 말에 정애경의 귀뿌리가 단박에 빨개졌다. 송금주는 자기자신이 평가를 받기라도 한것처럼 우쭐해서 말했다.

《내가 이 선생 건사를 온전히 하게 되겠는지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영천골안이야 이런 인물이 있을 자리가 아니지. 어떤 독수리가 채가게 되겠는지.…》

그러자 잠자코있던 정애경이 뾰족한 말로 미용사에게 반론을 가하였다.

《아주머니, 영천은 뭐 못난 사람들만 사는 고장입니까. 난 한평생 영천에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결심대로 될가.》

미용사는 여기까지 말하고나서 입방아질을 멈추고 리발가위로 어깨우에까지 드리운 정애경의 머리를 썩둑썩둑 자르기 시작했다.

소문과 같이 그는 미용솜씨가 뛰여난 녀자였다. 형태도 잘 잡았고 파마방울도 나이와 얼굴형에 맞게 적합한 형태와 크기로 지었다. 정애경은 이마우에 큰 방울을 세개정도 준 반면에 뒤머리에 자름자름한 방울들을 많이 만들어 남달리 큰 눈을 가진데다가 약간 요염하면서도 육감적으로 생긴 그의 얼굴미에 아기자기한 맛을 보태주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송금주한테는 앞머리에만 큼직한 방울을 두개 강그려붙이고 뒤머리엔 한단으로 된 물결형의 굴곡을 주어 그의 서글서글한 외형과 활달한 성미를 돋구어주었다.

얼마나 품을 많이 들였던지 두 처녀의 미용에 3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였다. 그처럼 수다스러워보이던 미용사가 일손을 잡은 그 시각부터는 말도 하지 않고 온 심혼을 미용에만 깡그리 쏟아부었다. 언행과는 달리 직업의식이 투철하고 진지하면서도 책임성이 높은 녀인이라는것이 대뜸 알리였다. 두 처녀는 오전 11시가 다 되여서야 미용원을 나섰다. 순번을 기다리느라고 의자에 주런이 앉아있는 손님들을 뒤에 두고 수수께끼같은 미용사는 문밖에까지 따라나와 그들을 바래주었다.

《또 오세요.》

인사는 짧았으나 음성과 억양에서는 각별한 정이 넘치였다. 송금주는 녀인의 미용솜씨와 손님접대에 만족하였다. 미용사가 우리를 특별히 따뜻하게 대해준것은 교육자들에 대한 호의의 표시일것이다. 교원이라면 어디서나 《어서 오십시오!》 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만사람의 축복을 받는 이 딸을 두고 얼마나 대견해할가.

《애경이, 난 어쩐지 저 미용실에서 성인식이라는걸 치르고 돌아가는듯 한 기분이 드누나.》

송금주는 무슨 시상이라도 찾아낸 사람처럼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실눈을 지으며 아무런 시름도 없는 9월의 파라말쑥한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정애경은 골목길에 걸음을 못박아세우고 《뭐, 성인식?》 하고 되물었다.

《우리야 4년전에 벌써 공민증을 받고 어른이 되지 않았니. 그거면 성인이 되고도 남을텐데 또 성인식이라구?》

《물론 그때 공민증을 받고 어른들의 대렬에 들어선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내용적인 측면이구 오늘은 저 미용원에서 머리형태를 갱신하는 방법으로 성인들이 가지고있어야 할 형식상의 표징을 갖추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가.》

《하긴 그래. 지금까진 너나 나나 다 중닭이였어. 속은 어른인데 겉에서는 학생티가 물씬물씬 났거던. 금주, 이런 날에는 기념으로 한장 남겨야 하지 않을가?》

《그러자꾸나, 본격적인 처녀시절의 시작을 기념해서 한장!》

없는 구실을 만들어가면서 사진을 찍는 처녀시절이였다. 한달전에 영천도착기념으로 한장 찍던 그 사진관에서 송금주와 정애경은 머리형태의 갱신을 기념하여 또 한장의 사진을 찍었다. 한달전에 찍은 사진이 사회생활의 첫출발을 기념하는 증표 비슷한것이였다면 오늘 찍은 사진은 새로운 모습으로 본격적인 녀성의 세계에 들어선 두 처녀의 주정토로와도 같은것이였다. 걸음마다 웃음이 넘실거리는 장쾌한 행차였다.

합숙마당에서는 학교경리원의 딸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자물쇠를 따고 부엌문을 열어제끼는 송금주를 보자 그 애는 아무 말도 없이 색테프로 띠를 두른 봉투묶음을 불쑥 내밀었다. 송금주는 봉투묶음을 받아들며 소녀애에게 물었다.

《이건 누가 보내는거니?》

《우리 어머니가 보내는겁니다.》

《뭔데?》

《잘 모르겠습니다. 아흡시전으로 전달하라고 해서,》

《그럼 네가 여기서 두시간동안이나 우리를 기다렸단 말이냐?》

소녀애는 대답대신 한쪽입귀를 들고 샐쭉 웃어보였다.

《안됐구나, 수고했다.》

그 애가 돌아간 다음 송금주는 정애경과 함께 경리원이 보낸 봉투를 개봉하였다. 첫 봉투와 두번째 봉투에는 두 교원이 받아야 할 9월분생활비가 들어있었고 세번째 봉투에는 그들에게 보내는 경리원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송금주는 생활비를 꺼내기 전에 편지부터 뽑아 읽었다.


송금주, 정애경선생들에게

첫 생활비를 받게 된 선생들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회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선생들의 인생에서 아마도 이 생활비는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기게 될것입니다.

두 선생의 3급교원 월생활비전액을 다 드립니다.

어제는 두 선생이 군당에 회의를 갔기에 미처 드리지 못했습니다.

일요일에 혹시 돈 쓸 일이라도 생길것 같아 아이에게 쥐여보내니 량해해주세요.

경리원 리원숙


《경리원아주머니가 대단한 문장가로구나.》

편지를 두번세번 곱씹어 읽어보던 정애경이 탄복해서 하는 말이였다.

《문장도 문장이지만 마음씨가 더 아름답고 진실해.》

《네 말이 맞아. 얼굴은 촌아낙네처럼 수더분해도 그 마음이야 얼마나 웅심깊어.》

《그러게 말이야. 오늘은 모두가 우리를 축복해주는구나. 미용사도 사진사도 경리원도…》

송금주는 봉투속에서 돈을 뽑아 손바닥에 놓고 한참동안 그 무게를 가늠해보다가 그것을 가슴에 꼭 갖다대며 마음속으로 뇌이였다.

이건 우리가 후대들을 위해 창조한 첫 가치야, 그리고 국가가 우리의 로동에 지불하는 첫 보상이구. 우린 오늘 이 생활비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하는 근로자로서의 인증을 받은셈이지. 이런 날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가. 그러면 이걸 봉투채로 들고 한달음에 뛰여가 《어머니, 받아주세요. 저의 첫 생활비예요.》 하고 자랑할수도 있을게 아닌가. 그러나 지금 송금주에게는 그의 생활비를 받아들고 기뻐할 부모가 없다.

《애경이, 이 돈을 어떻게 쓸래?》

송금주는 상념에서 깨여나 정애경에게 느닷없이 물었다. 정애경은 마치 그 대답이 허공중에라도 있기나 한듯이 눈을 삼박거리며 천정을 쳐다보았다.

《글쎄, 어따 쓸가? 이 딸이 교원을 하면서 받은 첫 생활비입니다 하면서 어머니에게 송금할가, 아니면 첫 로동의 기념으로 영구보존할가. 금주, 넌?》

《글쎄… 어떻게 쓰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고모에게 나를 키워준 보상의 일부로 드려야 할지, 은행에 저금을 해야 할지, 아니면 옷을 지어입어야 할지. 우리야 사실 단벌신사들이 아니냐.》

《선택이란 확실히 우습강스러운 물건짝이야. 요 생활비앞에서도 사람을 우물쭈물하게 만들구. 그런데 인간은 매 순간마다 선택이라는 숙제앞에서 결심을 채택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해야 하니 얼마나 고달픈 일이냐. 생각 좀 해보럽. 생활비를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거야 선택가운데서 가장 단순하다고 볼수 있는 선택이 아니냐. 그런데두 우린 이렇게 할가, 저렇게 할가 하면서 괜히 속을 썩이고있거던. 그런즉 선택도 고통의 한 형태지 뭐야.》

정애경이 이런 식으로 철학을 내리엮을 땐 그 세계가 너무도 심오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그는 이따금씩 번쩍거리는 명제들을 만들어내군 해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송금주는 철학적사색에 돌입하는 순간의 정애경을 제일 사랑하였다.

《이것 봐 정 헤겔, 선택을 고통의 한 형태라고 하는건 엉터리없는 철학이야. 선택이라는 그 고상한 개념을 그런 식으로 모독할수가 있어? 우리가 매일, 매 시각으로 체험하게 되는 선택이야 인간이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새것을 창조하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공정으로 봐야지. 난 말이야, 선택을 락이라고 봐. 선택이 없는 인간생활이란 상상할수도… 가만…》

송금주는 말을 끊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첫 생활비에 고모가 준 돈을 보태서 정애경과 함께 옷을 해입어야 하겠다는 착상이 문득 떠올랐던것이다. 그러면 단벌신사의 신세도 면할수 있고 교육간부학교를 다닐 때 자기에게 겨울내의 한벌을 사입힌 정애경의 신세도 갚을수있다. 송금주는 며칠전에 읍 공업품상점에 갔다가 매대에서 도라지색의 스프천을 본 일이 있다. 진달래색과 도라지색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색갈이다. 좋아, 그 천으로 조선치마저고리를 해입자. 둘이서 한날한시에 꼭같은 천으로 꼭같은 형태의 옷을 해입으면 그것은 교단의 기념품으로 될수도 있고 나와 애경의 영원한 우정을 표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도 될수 있을것이다.

나는 한평생 정애경이네 집 사람들의 신세를 갚아야 할 사람이다.그의 아버지는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어머니는 전쟁의 마지막해에 나를 자기 집에 데려다 여섯달동안이나 같이 살게 해주었다. 면소재지의 고모네 집은 폭격을 당할수 있으니 샘골 벼랑밑에 있는 자기네 집에 와있으라고 강권하였다. 그 집에서 송금주와 정애경이 다니는 영천중학교 가교사까지는 1키로메터도 되나마나하였다. 정애경의 어머니 로춘영은 아무런 부대조건도 없이 송금주를 친딸처럼 먹여주고 입혀주었다.

전쟁이 끝나자 정애경이네는 다시 이전날 살던 면소재지의 집으로 내려오고 송금주도 고모네 집으로 옮겨갔다. 그렇지만 송금주는 전후에도 정애경이네 집으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와 로춘영과의 관계는 친모녀처럼 되여 만사람의 부러움까지 자아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에 송금주네 분단은 소년단야영을 떠나게 되였다. 출발을 사흘 앞두고 담임선생은 분단성원모두가 분홍리봉에 하얀 운동화로 차림새를 통일하라는 지령을 내리였다. 천과 물감만 있으면 아무때든지 마련할수 있는 리봉은 별문제였지만 송금주에게는 하얀 운동화가 없었다. 그래서 치분가루를 물에 타서 검정운동화를 흰 운동화로 만들었다. 하루가 지나자 치분가루가 떨어져내리면서 그 운동화에는 보기 싫은 얼룩들이 생기였다. 그래서 다시 치분가루를 발랐다. 하지만 아무리 묘하게 분장을 해도 시꺼먼 바탕색은 좀처럼 감출수 없었다. 흰 운동화를 살 힘이 없는 송금주는 그 신을 그대로 신고 야영의 길에 올랐다.

마음속으로 아버지,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였던가. 고모도 밭은 혈육이지만 흰 운동화를 사달라고 조르지는 못하였다. 송금주는 눈물을 삼키면서 역으로 향하였다. 그때 흰 운동화를 사가지고 숨이 턱에 닿아서 정거장으로 뛰여온 사람이 다름아닌 로춘영이였다. 딸에게서 송금주의 검정색운동화가 흰 운동화로 변신하게 된 전말을 들은 로춘영은 그달음으로 하얀 운동화를 사가지고 곧추 야영생들의 뒤를 따라왔다는것이였다. 그는 송금주를 아무도 보이지 않는 홈 한쪽구석에 데리고가서 검정운동화를 잡아벗기고 흰 운동화를 신겨주었다.

치분가루가 벗겨져 얼룩얼룩한 파신발같은 운동화를 량손에 갈라들고 나들문을 나서는 로춘영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그날 송금주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그때부터 그는 로춘영을 《애경이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그저 《어머니》 라고 불렀다.

한평생 보상해도 못다 보상할 사랑이 바로 정수일일가가 그에게 준 사랑이였다. 치마저고리 한벌로 그 보상을 대신할수는 없지만 그거라도 해입히면 그래도 마음이 후련해질것 같았다.

선택은 끝났다. 이 이상 더 멋들어진 선택이 어디 있겠는가.

송금주는 코노래로 《직포공의 노래》 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우선 정애경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천부터 사놓고 보자. 그다음 무작정 그를 데리고 양복점으로 가자.

《좋아!》

송금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랑송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허공중에 한팔을 쭉 내뻗치였다. 정애경은 눈이 뗑그래서 그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다는거야?》

《선택이 끝났으니까 좋은거지.》

《어떤 선택이게?》

《그건 아직 공개할수 없어. 지금은 우선 요기부터 해야겠어. 배가 출출해지는구나.》

송금주는 부뚜막앞에 나가 찬장문을 열며 생각했다. 래일, 래일중으로 당장 상점에도 가고 양복점에도 가자. 한주일후에는 치마저고리를 찾고… 그길로 사진관에 가서 사진도 찍자. 아, 그러면 그 사진은 고향에 돌아온 후 세번째로 찍는 기념사진으로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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