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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 회

연사사람

주 병 윤


우리 나라 함경북도의 백무고원에는 평균해발높이 1 000~1 300m에 자리를 잡고있는 연사군이 있다.

어랑군과의 경계를 이루고있는 동부함경산줄기에는 우리 나라에서 백두산 다음으로 높은 관모봉을 비롯하여 투구봉, 궤산봉, 도정산, 대덕산 등 해발높이가 2 000m이상이나 되는 높은 산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을 떠받들고 구름우에 장쾌하게 솟아있다.

연사군의 서부와 남부의 변두리로는 관모봉에 시원을 두고 천연기념물인 천상수 아흔아홉굽이를 돌고돌아 내려온 연면수가 련련히 두만강으로 흘러가고있다.

이 연면수로는 신양저수지를 가지고있는 지류인 구운수를 비롯하여 대리천, 설령천, 초소천 등 많은 산지하천들이 깊은 계곡을 따라 무수히 흘러들고있다.

연면수의 중류에는 삼포언제가 있다.

이 언제에서 연면수를 따라 50여리정도 아래로 내려가느라면 연면수 가의 자그마한 목장옆에 몇채의 집이 있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남작리를 거쳐 20여리정도 더 내려가면 읍지구에 들어서게 된다.

지도에 자그마한 점으로나마도 표시할수 없을 정도로 작고작은 마을, 여느날과 다름없이 평범한 생활이 범상하게 흘러가는 이 목장마을에 우리의 주인공이 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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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 저녁.

목장지배인 김종길은 사무실창가에 박힌듯 서서 어둠에 잠기고 비발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에 눈길을 주고있었다.

밖에서는 비방울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와 처마밑을 흘러내리는 락수소리가 간단없이 들려왔다.

이따금 번개불이 번쩍일 때마다 산골짜기들에서 태질하며 밀려내려오는 물줄기들과 한껏 불어나 사품치며 흐르는 연면수가 사나운 자태를 드러내놓군 한다.

벌써 며칠동안이나 쉬임없이 내리는 비가 오늘도 날이 저물도록 좀처럼 멎을줄을 모르는것이다.

오늘따라 웬일인지 비가 많이 내릴 때면 남달리 근심에 잠기군 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종길이가 아주 어렸을 때에 볼일이 있어 평양에 갔던 할머니는 뜻밖에도 시내를 휩쓴 물란리를 겪으면서 재해라는것이 어떤것인지를 체험하게 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비가 조금만 세게 내리는것 같으면 몹시 걱정스러워하군 하였다.

잠시 할머니 생각을 하고있느라니 자연히 종길의 눈앞에는 할머니와 더불어 흘러간 어린시절의 추억이 삼삼히 떠올랐다.

종길은 태여나서부터 일손이 바쁜 아버지, 어머니의 곁에서 떨어져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다싶이 하였다.

할머니는 손자들중에서도 종길이를 제일 고와하였고 그러한 까닭에 그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였다.

군식료공장에서 일하다가 자진하여 도로관리원이 된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혁명전적지로 가는 길들을 깨끗이 관리하고있었다.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면 할머니는 늘쌍 그림자처럼 치마폭에 묻어다니던 종길의 손목을 잡고 자주 혁명전적지들에 들려오군 하였다.

그가 어렸을 때에는 손자가 아직 철이 없다고 여겨져서였는지 그저 아무말없이 혁명전적지구내를 돌아보기만 하고 내려오군 하였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자주 반복되는 일과였던지라 빨리 집에 내려가자고 떼를 쓰군 하던적도 있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조용히 타이르군 하였다.

《그러면 이담에 커서 좋은 사람이 될수 없단다.》

어린 종길에게는 할머니가 왜 자기를 데리고 여름에도 겨울에도 꼭 그 길을 걸으려 하는지 이상야릇한 의문이 생겨났다.

그러던 할머니는 종길이가 인민학교(당시) 3학년에 올라가게 되자 혁명전적지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기 시작하였다.

어떤 때에는 구호나무들에 새겨진 글발들을 한자한자 새겨보느라 늦어서야 내려오다가 지금처럼 억수로 쏟아지는 비에 온몸이 홈빡 젖어 집에 들어섰던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래서 비가 올 때면 할머니 생각이 더 나는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젖은 옷을 벗어 널어놓고 따스한 아래목에 앉아 비바람덕에 미처 먹지 못한 법랑밥곽을 펴놓고 한술한술 입에 떠넣어주면서 할머니가 옛말처럼 집안의 래력에 대하여 이야기해주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지주놈에게 땅을 빼앗긴 종길의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살길을 찾아 사지봉기슭의 인적드문 외진 벽촌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인간세상을 등지고 밀림속으로 들어가면 마음이나마 편하게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빼앗긴 이 땅 어디에 간들 나라잃은 백성에게 마음놓고 의지할 곳이 있었으랴.

이 심산에서도 죽지 못해 살아가는 처서군들의 한숨소리가 맥없는 도끼질소리에 실려 적막한 골짜기로 잦아들고있었다.

이러한 때인 1930년대 후반기와 1940년대 전반기에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쳐가시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여러차례 연사지구에 나오시여 혁명활동을 벌리시면서 도탄에 빠진 인민들에게 재생의 백광을 안겨주시였다고 한다.

그때의 목격자의 한사람이였던 증조할머니는 딸(그 딸은 종길의 할머니였다.)에게 림산마을사람들과 허물없이 자리를 같이하시고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모두가 떨쳐일어나 싸워야 한다고 일깨워주시던 김정숙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군 하였다고 한다.

나이는 어렸어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종길의 가슴속에는 딱히 찍어말할수 없는 무엇인가가 새록새록 안겨오기 시작하였다.

종길은 인민학교를 졸업하기 전 방학기간에 할머니와 기차를 타고 평양에서 사는 친척집에 갔던적이 있었다.

손자가 이제는 평양에도 가보고 또 여러곳을 다녀보면서 많은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울 때가 되였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일부러 종길을 데리고 떠났던것이다.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는 기차려행길에서 옆에 앉은 애와 어느새 친숙해져 조잘조잘 이야기에 정신을 팔고있던 종길은 이야기거리가 거의 판이 나게 되자 불쑥 물었다.

《그런데 너희 집은 어데니?》

《응, 우리 집은 남포에 있어.》

앞에도 높은 산, 뒤에도 높은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막힌 산간오지에서 살고있는 어린 종길에게는 남포라는 지명이 귀에 설게 들렸다.

《남포? 그건 어디에 있니?》

《어디에 있긴, 남포에 있지.》

엉터리없는 대답에 리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것도 모른다고 놀림을 받을것만 같아 입을 다문채 할말이 궁해졌던 종길은 한참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긴 크니?》

《응, 크지 않구. 대동강두 있구, 넓은 바다두 있구, 다른 나라에 왔다갔다하는 아주 큰 배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 애는 두팔을 한껏 옆으로 벌리면서 자랑삼아 신이 나서 말했다.

《그-으래.》

종길의 얼굴에 의문과 부러움이 한데 뒤엉켜 파도처럼 밀려왔다.

집들에 TV도 많지 않아 방송에나 귀를 기울이던 때여서 바다나 배라는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시가 얼마나 큰지를 그림으로만 보아왔을뿐 지금 타고가는 기차조차도 난생처음인 종길의 상상력으로 한개 도시를 그려본다는것은 어림도 없는것이였다.

어쨌든 종길의 어린 마음에 그 애가 좋은 곳에서 살고있다는 생각이 드는것만은 사실이였다.

이번에는 그 애가 종길을 보고 물었다.

《그럼 넌 어데서 사니?》

그러자 종길은 얼굴에 진하게 내배였던 호기심을 싹 걷어버리고 자기도 고향자랑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슴을 쑥 내밀고 뻐기며 대답했다.

《나? 난 연사에서 살아.》

《연사? 거긴 어떤 곳이니?》

종길이가 잠간 생각을 굴리는 사이에 그 애는 눈을 깜박거리며 종길이의 입만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연사엔 굉장히 높은 산들이 아주 많아. 넌 아마 그렇게 높은 산을 보지 못했을거야. 거기엔 사슴, 사향노루, 곰, 수달, 검은돈이랑 산짐승들이 얼마나 많은줄 아니. 그리구 산천어잡인 또 얼마나 재미나다구.》

종길이가 신이 나서 엮어대는데 그 애는 알만하다는듯 머리를 끄덕끄덕하더니 씩- 하고 웃었다.

《응- 그러니 너 산골애로구나.》

《뭐,산골?》

할머니가 날마다 우리 연사군이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해서 자기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꽤나 부러워할줄 알았는데… 이거 놀리는게 아니야? 종길의 눈이 호두알만큼 커지면서 불끈 틀어쥔 주먹이 가슴으로 올라갔다.

《야, 너 우리 연사가 얼마나 좋은 곳인줄 알아?》

《좋긴 뭐, 산골이야 산골이겠지.》

그 애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꾸했다.

체, 이건 산이 뭔지도 모르는 얼뜨기같은게… 산속에 들어가 산짐승잡이도 해보고 버섯따는 재미도 느껴보았다면, 산천어국맛이랑 산나물맛이랑 보았다면 저 입에서 저런 소리가 함부로 나올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

《체, 모르긴 뭘 몰라, 산골에서 사는게 그렇게 좋으면 왜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고싶어하겠니, 다 산골에 가서 살고말지.》

말문이 막힌 종길은 아연한 눈길로 그 애를 한참이나 씩씩거리며 쏘아보았다.

뭘 말해야 할가? 우리한테는 바다보다 넓고 배보다 큰것이 없을가? 어떻게 하나 저 애를 꼼짝 못하게 이겨야겠다는 생각만이 이마에 붙어 뱅뱅 돌았다.

그렇지, 종길의 머리속에는 할머니와 함께 한해에도 수없이 돌아보군 하던 혁명전적지들이 떠올랐다.


폭설이 내려도 휴식일, 명절날 가림이 없이 생명을 가진 짐승들과 온 한해 씨름을 벌려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당장 먹이도 실어오고 분쇄를 하고 배합먹이를 만들어야 하는 등 끊기지 말아야 할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계속 내리다가는 저장해놓은 먹이들이 인차 바닥이 나겠으니 참 야단이였다.

장마철이 거의 지나간 때여서 이제는 별다른 일이 없을것이라고 비교적 안심하고있었는데… 안타까이 일기예보에 귀를 강구면서 오늘이면 멎을가 래일이면 멎을가 가슴을 조이며 아무리 기다려도 비가 멎기는커녕 오히려 더 들붓기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겠는가?

종길이 착잡한 마음으로 이 생각, 저 생각에 골똘해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딸 지향이가 빠끔히 머리를 들이밀었다.

《오, 지향이로구나, 어떻게 왔니?》

《아버지 보고싶어서 왔지요 뭐.》

젖은 우산을 문가에 세워놓고 들고온 보자기를 책상우에 올려놓은 지향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버지에게로 다가와 팔에 매여달린다.

아들없는 집안의 막냉이로 자라서 그런지 이제는 15살이 되였는데도 아버지앞에서는 꼭 어린애같이 응석을 부리는 딸이다.

읍에 시집간 언니와 나이차이가 심해서인지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집에서 론의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절대적인 결정권을 행사하고있는 《실권자》이다.

《음- 아버진 언제 집에 들어오시겠어요.… 집을 옆에 두고 어제밤에도 안 들어오시더니, 엄마와 내가 기다릴 생각은 안해요?》

《왜 안하겠니, 하지만 아버진 바쁘단다, 이렇게 비가 계속 내리고있지 않니, 어서 여기 와 앉아라.》

지향이에게 의자를 내주고 자리에 앉던 종길의 눈길은 무릎까지 걷어올린 딸의 다리에 가 멎었다.

북방의 궂은 날씨에 맨살을 드러낸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딘가 모르게 찌르르 아프게 마쳐왔다.

《애두 참, 장화를 신고 올게지.》

종길은 딸애앞에 미안한 생각이 들어 혼자소리처럼 낮은 소리로 뇌이였다.

지향이가 이제는 색이 바래고 뒤축이 닳아진 낡은 장화를 잘 신으려 하지 않는다는것을 알면서도 아직까지 새 장화를 사주지 못하고 여름을 다 보내다싶이 한것이 마음에 걸렸다.

여느 처녀애들 같으면 입을 삐죽이 내밀고 투정질을 하고도 남았으련만 나이보다 철이 먼저 들었는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다.

지향이가 아버지의 말이 재미있다는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아버지도. 장화가 물앞에 손을 든지 언제게요?》

여기로 오는 길이 조금 지대가 낮아 비물이 웅뎅이처럼 깊이 고였으리라는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그리고 그 말속에는 아버지의 마음을 건너다보고 일부러 능쳐주려는 딸의 심정도 담겨져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 참 그렇겠구나.》

종길은 좋아라 웃는 딸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자 지금껏 맴돌던 근심거리들이 일시에 사라지는것 같은 느낌이 들어 빙긋이 웃었다.

삽시에 부녀간의 정이 그득히 차올랐다.

아들은 대견한 멋에 키우고 딸은 고운 멋에 키운다더니 항상 아버지의 마음을 살살 간지럽히는 딸이 얼마나 고운지 눈에 넣어도 아풀것 같지 않았다.

안해가 아들을 낳아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눈치를 보일 때마다 종길은 흔연히 말하군 했다.

《우리 딸들이 어째서, 아들맞잡이인데. 어느 집에 아들이 한구들 있다한들 우리 딸들만 할가?》

그럴수록 지향이를 열아들부럽지 않게 훌륭히 키워 내세우고싶은 소망이 가슴에 가득차오르군 하였다.

《우리 지향이 오늘 공부를 잘했나?》

《잘하는게 다 뭐예요. 학교로 가는 길이 절반나마 물에 잠겨 갈수가 없었어요. 학교에서도 다시 알려줄 때까지 등교를 하지 말라고 련락이 왔댔어요.》

아버지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워하는 눈치를 엿본 지향이가 아버지를 안심시키려는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마세요. 오늘 배울 내용을 집에서 다 공부했으니까요.》

자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것을 볼 때 제일 기뻐하는것은 자식가진 부모들의 공통된 심리이다.

《용쿠나. 공부를 계속 잘해야 한다.》

《알겠어요, 아버지. 난 공부를 잘해서 꼭 대학에 가겠어요.》

딸의 입에서 불쑥 대학이라는 말이 튀여나오자 종길은 대견한 눈길로 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딸이 아직 어리다고만 생각해온터여서 한번도 딸의 지망에 대해서 물은적이 없었는데 지향이가 이제는 자기의 결심을 스스럼없이 터놓는것이 아닌가.

우리 지향이가 벌써 이렇게 자랐는가?

《대학엘 가겠다? 그다음엔?》

《그다음엔…》

지향이가 다음말을 잇지 못하고 갑자르자 종길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지향이의 아버지, 어머니는 새끼비둘기를 하늘 멀리 날려보낸 어미비둘기처럼 외롭게 되겠는걸.》

《뭐예요? 아버진 정말 한심하네, 예술영화 〈도라지꽃〉을 못 보았어요?》

《보았지, 그런데…》

종길은 시치미를 떼며 딸의 인상을 슬며시 살폈다.

《대학에 가서 많이 배우고 돌아와 영화의 주인공 진송림이처럼 나의 고향을 꽃피우겠단 말이예요.》

그럴수록 종길은 모르쇠를 하고 더 한마디 한다.

《진송림이는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자기 고향을 가꾸지 않았니? 그런데 대학엘 꼭 가야만 할가?》

《야, 안타깝다. 지금은 첨단과학의 시대라는걸 모르나, 더구나 지배인인 아버지가 말이예요.》

자기의 말을 리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답답한 처사에 열이 오른 지향이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럴수록 종길의 입에서 능청스러운 소리가 또 흘러나왔다.

《짐승이나 키우는것이 무슨 첨단이겠니, CNC기계를 다루어야 한다면 몰라도.》

지향이는 리해가 안된다는듯 의아한 눈길로 한참이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짐승은 아무렇게나 키워도 된다는거나요? 거기에도 과학이 있다는것을 알아야 해요, 지배인동지!》

지배인동지라는 단어에 힘주어 력점을 찍는 지향이의 말에 종길은 그만에야 허허 웃고말았다.

그제야 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차린 지향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종길의 등을 마구 두드렸다.

《아버진 엉큼해요. 날 놀리는거예요?》

종길은 딸의 약을 올려준것이 재미난듯 껄껄 웃으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도 딸이 이제는 철없는 아이라고만 볼수 없을만큼 자랐다고 생각하니 대견하기 그지없었다.

《네 생각이 옳다, 그래 어느 대학에 가려니?》

《수의축산대학에 갈 결심이예요.》

아버지를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지향이의 얼굴에는 희망에 부푼 소녀의 이름못할 희열이 넘치고있었다.

《난 아버지가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가를 다 알아요.》

《허허 자식두, 그래 자신이 있니?》

《자신있지 않구요, 두고보세요.》

종길의 눈굽은 저도 모르게 축축히 젖어들었다.

아직은 자식에게 풍족하게 먹이고 입히지 못하는것이 마음에 걸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으나 부족한 속에 자라면서도 밝게 웃으며 고향을 사랑하고 앞날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안고사는 지향이를 보니 더 좋아질 래일이 눈앞에 보이는것만 같아 마음이 마냥 뜨거워졌다.

이제는 딸의 심장속에 사람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한생을 살아야 하는가를 심어줄 때가 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향아, 현대과학기술을 배우지 않고서는 자기 고향을 꽃피울수 없다는 네 생각은 옳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왜 고향을 꽃피우려하는가하는 물음앞에 자신을 세워보아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에 어떤 력사가 흐르고있는가 하는것을 항상 새겨보는것이 중요하지. 그러면 자기의 고향을 왜 남들보다 더 훌륭히 꾸려나가야 하는가를 스스로 알게 될게다. 자나깨나 자기가 백두의 혁명전통이 깃들어있는 이 연사땅에서 살고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향이는 아버지를 처음 보기라도 하는듯이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서였구나.

지금까지는 다 모르고 지나온 나날들에 대하여, 아버지가 지금까지 무엇때문에 자기에게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하였는가에 대하여 이제는 알수 있었다.

지향이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해마다 위대한 김일성대원수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국사봉과 사지봉을 비롯한 군안의 혁명전적지들을 꼭꼭 돌아보군 하였다.

그 나날에 아버지는 지향이에게 연사군에 깃든 백두산절세위인들의 불멸의 혁명업적과 높으신 뜻을 차근차근 해설해주군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어린시절에 많은 추억을 남긴 지향이의 증조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해주군 하였다.

지향이는 지금껏 아버지와 함께 걸은 길들이 바로 증조할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걸은 길이라는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였다.

아버지가 바라는것, 그것은 자기가 사는 이 땅에 흐르는 위대한 력사를 낳은 고향에 대한 사랑이였고 그 무엇에도 비길수 없는 자랑과 긍지와 자부심이였다.

지향이는 얼굴에 웃음을 함뿍 담고 힘차게 대답하였다.

《알겠어요, 아버지.》

종길은 오늘따라 웬일인지 지향이와 이렇게 앉아 밤이 지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싶은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이때 밖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경비를 서고있던 차영철이 물참봉이 되여 들어왔다.

《지배인동지, 이놈의 비가 멎을 잡도리가 아니군요. 물이 점점 더 차올라오는게…》

《다른 일은 없소?》

《없습니다. 》

《어쨌든 자주 돌아보오. 아, 그럴것 없이 함께 나가봅시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향하던 종길은 지향이를 돌아보았다.

종길의 얼굴에는 딸에게 미안해하는 심정이 짙게 내배고있었다.

《지향아, 오늘도 들어갈것 같지 못하구나. 어서 집으로 가거라. 아버지 걱정은 말고…》

《아버지, 그럼 식사라도 하고 나가세요. 아버지가 식사하는것을 어머니가 보고 오라고 했는데.》

지향이가 서둘러 보자기를 책상우에 펴놓았다.

종길의 눈길은 감자와 강냉이가 절반나마 섞여있는 밥그릇에 가 멎었다.

《거기에 놓아두렴. 내 인차 들어와 먹겠다.》

《엥이, 아버진 항상 그렇다니까… 할수 없지. 하여튼 감기에 걸리지않게 비바람을 주의하세요. 잊지 않았겠지요? 9월 4일 아버지생일, 그래야 내가 아버지앞에서 멋지게 노래를 불러드리지요.》

《오냐, 알겠다. 지향이가 노래를 부르면 아버진 춤을 추겠다. 좋지?》

《예, 좋아요. 》

《그럼 어서 가봐라.》

종길은 지향이에게 집을 잘 보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고말았다.

몇채 안되는 종업원들의 집은 목장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으니 별다른 일이 없을것 같아서였다.

밖으로 나와 딸을 바래주고난 종길은 차영철과 함께 다시 축사들올 돌아보았다.

물이 축사들마다 출입문에 쌓아놓은 흙마대들을 넘어들어가려고 넘실거리고있었다.

기계설비들이 집중되여있는 먹이배합장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비는 멎지 않고 물은 점점 더 불어나니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흙마대를 보강할것인가? 아니면…

물이 넘어들어가면 제일 문제로 되는것은 전동기들이였다.

전동기들이 물에 잠기는 경우 그것들을 말리우자면 많은 시일이 걸려야 하는것이다.

그러면 먹이분쇄와 배합을 비롯한 적지 않은 문제가 걸리게 된다.

종길은 옆에 다가온 차영철에게 물었다.

《동무생각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나이는 젊었으나 평시에 말이 없고 성실한게 믿음이 가는 사람이여서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던진 말이였으나 실은 자기자신에게 묻는 말이나 같은것이였다.

《며칠동안 내릴만큼 내렸으니 이젠 멎을 때가 됐겠는데… 출입문에 쌓아놓은 흙마대들을 보강할가요?》

순간 그 말을 부정해버리려는듯 번개불이 번쩍 하더니 뒤이어 《꽈르릉.》 하는 우뢰소리가 폭우에 묻힌 목장을 흔들며 간담이 서늘하게 들려왔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종길이 결심한듯 주먹쥔 손을 우로 쳐들었다가 아래로 홱 내리그었다.

《이젠 더 물러설 길이 없지, 전동기들과 물에 젖으면 안될 물자들을 저기로 옮겨야겠소.》

종길은 가까이에 있는 산기슭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목장에서 먹이밭을 운영하느라고 지어놓은 건물이 있었던것이다.

종길은 먼저 무엇을 해야 할것인가를 곰곰히 따져보았다.

우선 인원이 문제였다.

사람들을 모두 불러내자니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도로가 도간도간 물에 잠겨 당장 알리기도 힘들었고 집집마다 련락을 띄울 인원조차도 없었다.

다만 목장옆에 종길의 집을 비롯해서 몇명의 종업원들의 집이 있을뿐이였다.

그러니 몇명 안되는 종업원들로 짐승들과 물자들을 옮기자면 서둘러야 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동무는 우선 목장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나오라고 알리오. 난 전동기들을 분리하겠소. 그리구 사람들이 나오는 즉시에 달라붙어 뜨락또르에 물자들을 실읍시다.》

《알겠습니다. 》

힘있게 대답하는 차영철의 선망어린 눈길이 지배인에게로 향했다.

여느때에는 말이 없이 성실한 실농군이라고만 느껴지던 지배인의 모습이 오늘은 꼭 전투를 앞두고 명령을 하달하는 인민군대지휘관을 련상케 했던것이다.

누군가가 우스개소리로 책임자가 되면 모양새부터 달라지더라 했지만 자기의 지배인은 늘 수수한 작업복을 입고 축사나 먹이밭에서 살다싶이하다나니 그를 만나려고 목장에 처음 찾아오는 손님들은 그를 앞에 놓고도 전혀 지배인일것이라고 짐작조차도 못하는 정도였다.

그런 생활을 거쳐오는 과정에 차영철뿐아니라 온 종업원들의 마음속에 끝없이 성실한 자기 지배인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한가득 자리잡고있었던것이다.

이런 지배인과 함께라면… 멀어져가는 지배인을 바라보는 차영철의 눈앞에는 얼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어느날 차영철은 지배인과 함께 군에서 조직한 보여주기참관성원으로 이웃군인 대홍단군에 갔던 일이 있었다.

아담하고 깨끗하게 꾸린 목장을 돌아보던 그들은 한 호동에서 새로 개량된 우량종돼지들을 보게 되였다.

도무지 석달밖에 안된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피둥피둥 살이 오른 돼지들이 네활개를 펴고 쿨쿨 자고있는것을 보면서 사람들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히야, 그놈 크기두 하다.》

《한 팔십kg은 잘 나가겠구만.》

참관이 끝나고 차가 떠나려고 부르릉거리자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있던 지배인이 차영철에게 들려볼데가 있다면서 인차 따라가겠으니 먼저 가라고 하고는 서둘러 내리는것이였다.

그날 저녁 아무리 기다려도 지배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방 높고 험한 산발들이 우중충 하늘을 가리우고 짐승들의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머리칼을 곤두세우는 이 벽지에서 이것은 비상사고가 아닐수 없었다.

설사 도로를 따라 온다고 하여도 몇십리를 가야 마을이 나타나군 하는 인적이 드문 여기에서는 마음을 놓을수 없는것이였다.

밤 12시가 되여도 그가 나타나지 않자 차영철을 비롯한 몇명의 종업원들이 지배인을 찾아 떠났다.

얼마쯤 갔을 때 바람이 불면서 별이 총총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비가 부실부실 내리기 시작하였다.

《지배인동지!》

그들은 목청껏 소리치면서 도로를 따라 걸음을 다그치였다.

몇시간이나 걸었을가.

앞서가던 종업원이 갑자기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한 나무밑에 앉아있는 사람의 형체가 어슴푸레 보였다.

부리나케 달려가보니 지배인이였다.

혼자서 하도 먼길을 내처 걷다나니 너무 힘이 들어 잠간 쉬고있었던 모양이였다.

맨살이 드러난 그의 웃몸으로는 비물이 흘러내리고 입술은 덜덜 떨고있었으나 웃옷을 벗어씌운 바구니만은 꼭 껴안고있었다.

무슨 보물단지라도 들어있기에 그렇게 소중하게 안고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어 다급히 들춰보니 그안에서 새끼돼지 두마리가 태평스럽게 자고있었다.

《지배인동지, 이건 뭡니까, 어쩌자고 이러는가 말입니다. 같이 떨어지자고 말이라도 하실게지.》

차영철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난 일없소. 이렇게 펀펀해있지 않나. 동무들이 나때문에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왔구만.》

종길이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차영철이 비옷을 벗어 씌워주며 말했다.

《빨리 갑시다. 집에서 기다려요. 젠장, 아 그 돼지 없다고 못살겠습니까.》

한동안 저벅저벅 물을 차는 소리만이 울렸다.

이윽해서 종길의 나지막하고 저력있는 말소리가 어둠을 뚫고 그들의 페부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다른 곳엔 있는 이런 좋은 종자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되지. 그건 우리 연사군이 조선혁명의 뿌리가 내려있는 곳이기때문이요. 더구나 축산을 잘해야 한다는것은 우리 수령님들과 경애하는 원수님의 뜻이거던. 그 뜻을 누가 앞장에서 받들어야 하겠나?》

절절하게 울리는 지배인의 말소리에 비물과 눈물이 흘러내리는 볼을 훔치며 묵묵히 걷는 그들의 발자국소리만이 화답할뿐이였다.

후에 참관을 갔던 대홍단군의 목장지배인의 말을 들은데 의하면 김종길지배인이 그날 새끼돼지를 내놓으라고 어찌나 따라다니면서 생떼를 쓰는지 자기들도 충분히 그 종자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 열성에 감동이 되여 더는 버티지 못하고 두손 들고 내놓고말았다는것이였다.…

생각에 잠겼던 차영철은 사람들을 데리러 급히 비속을 뛰여갔다.

김종길이 집에서 뛰여나온 남자들과 함께 전동기들을 차에 싣고있을 때 목장의 녀성종업원들인 정명화와 김정화가 다른 사람들의 안해들과 같이 뛰여왔다.

《녀자들까지 어떻게 나왔소?》

종길이 의아하여 자기의 안해인 정명화에게 물었다.

《세대주들이 비를 맞으며 고생하고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집안에 가만히 앉아있겠어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훔치며 말하는 안해와 그뒤에서 웃음을 짓는 녀자들을 바라보는 종길의 눈굽은 뜨거워났다.

평시에도 목장에서 급한 일이 제기될 때마다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것이 목장옆에 집을 두고있는 가족아주머니들인것이였다.

《다들 고맙소.》

종길의 목메인 소리에 박영호의 안해가 익살기가 어린 소리로 한마디 받아넘긴다.

《고맙긴요. 우리 아낙네들이 아무렴 이런 때 세대주들만 내보내고 못 본척하겠나요. 전쟁이 일어났대두 함께 싸워야 할 우리들인데… 그리구 우리야 이 목장에서 한생을 살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나요. 그렇지요?》

《그렇지 않구요.》

차영철의 젊은 안해가 말을 받았다.

얼마나 의로운 녀인들인가?

가슴이 찌르르해져 그들을 한사람한사람 눈여겨보던 종길은 안해에게 물었다.

《지향이가 혼자 있겠구만.》

《혼자 있을게 뭐예요. 그 앤 경비실에 아이들을 모여놓고 함께 있어요.》

종길은 지향이가 종업원들의 자식들을 돌보고있다는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자, 그럼 모두들 함께 해봅시다.》

상차가 끝나자 종길은 뜨락또르운전칸에 올랐다.

《지배인동지, 저앞을 보십시오. 도로가 군데군데 물에 잠겨서 차길을 가려보기 힘든 구간이 많을것 같습니다.》

수리공 최광철이 어둠속으로 눈길을 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빨리 불망치를 들고 도로가운데로 앞서나가오. 내 따라가겠소.》

잠시후 비발속을 뚫고 불망치가 앞서나가고 그뒤로 뜨락또르가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목적지에 짐을 부리운 그들이 다시 목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관리공 박영호가 숨이 턱에 닿아 첨벙거리며 뛰여왔다.

《지배인동지, 일이 심상치 않습니다. 조금 있으면 연면수가 뚝을 넘어설것 같습니다.》

《뭐, 뚝을?》

종길은 착잡한 생각에 잠겨 어둠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제부터 낮에 사람들이 동원되여 흙을 넣은 마대로 연면수의 뚝을 보강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더 버티여낸다는 담보가 이제는 없다는것이 아닌가.

그러다가 뚝이 견디지 못하고 터지는 날에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섬찍했다.

《빨리 다그쳐야겠소. 돼지들도 싣고 소도 함께 끌고가기요.》

이제는 결정적인 대책을 취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종길은 목장사무실들이 있는 건물로 급히 들어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수령님들의 초상화부터 안전하게 모셔야 한다.)

자기 방에 들어간 종길은 지향이가 가져온 밥이 아직도 그대로 펼쳐져있는 책상을 와락 끌어당겨놓고 우로 올라갔다.

그는 수령님들의 초상화를 차례차례 모심함에 정중히 모시였다.

이렇게 다른 방들을 다 돌고난 종길은 미흡한 점이 없는가를 다시한번 확인한 후 잔등에 지고 비옷을 입었다.

수령님들의 초상화만은 몸에서 한순간도 떼여놓을수 없었기때문이였다.

밖에 나서니 사람들이 물자들을 싣느라고 정신없이 뛰여다니고있었다.

《여보!》

종길은 안해를 불러세웠다.

《녀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모두 적재함에 타라고 하오.》

그러자 정명화가 비물을 훔치며 말했다.

《다들 한번만 더 실어주고 나가겠다고 하면서 말을 안 들어요.》

《제길, 그러다가 일을 치겠소.》

종길은 더 말할새가 없어 앞으로 뛰여갔다.

돌풍에 시달리는 산골마을의 밤은 깊어갔다.

대줄기같은 비발이 억수로 쏟아지는 어둠속에서 그들이 서로 찾고 부르며 웨치는 고함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들이 위대한 수령님들의 초상화를 안전한 곳에 모신 후 또다시 짐승들과 물자들을 실어나르려고 목장에 다시 들어섰을 때는 새벽 3시경이였다.

짐들을 싣고있던 종길의 눈에 물이 축사안으로 조금씩 넘어들어가는것이 밟혀왔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가까이에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뚝이 터졌다.》

《뭐라구?!》

깜짝 놀라 연면수를 주시해보던 종길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과연 물이 무섭게 밀려들어오고있었던것이였다.

종길은 조금전에 연면수 중류에 있는 삼포언제가 터져나가기 시작했다는것을 알수 없었다.

그 물이 삽시에 밀려내려와 연면수가에 쌓아놓았던 뚝마저도 허물어버리고말았던것이다.

물은 시시각각으로 주위의 모든것을 덮어버리고있었다.

재빨리 주변을 살피던 종길의 눈길이 울타리에 가멎었다.

경비실에 바투 붙어있는 그 울타리로 해서 지붕우로 올라갈수 있다고 보았던것이다.

《이젠 안되겠소. 모두 아이들을 데리고 빨리 저 울타리로 해서 지붕으로 오르라.》

경비실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은 모두 물을 피하여 허겁지겁 울타리를 타고 지붕꼭대기로 기여올라갔다.

흙탕물이 회리를 치며 점점 더 차올랐다.

한순간에 그들은 물에 완전히 포위되고말았다.

모두들 어둠에 싸인 주위를 불안한 눈으로 둘러보고있었다.

박영호는 자기의 옆에서 떨고있는 지향이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말했다.

《지향아, 춥지. 무서워말아.》

그리고는 생각에 잠겨있는 지배인을 바라보았다.

지배인동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가.

정작 이런 정황에 부닥치고보니 결단성있게 일처리를 해나가는 지배인에 대한 신뢰심이 더욱 커진다.

저런 지배인을 사람들을 다몰아대며 그저 일밖에 모르는 인정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온 자신이 더없이 부끄러워졌다.

더구나 지향이를 보니 얼마전에 있었던 일이 되살아나면서 죄스러운 마음이 더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얼마전 영호가 군에 다녀와야 할 일이 제기되여 막 떠나려고 하는데 지배인이 부르더니 장화를 한컬레 사다달라고 부탁하는것이였다.

영호에게는 분명히 지배인이 장화를 지향이에게 주려는것인줄로 짐작이 갔다.

우리 지배인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었는가.

평시에는 그저 일만 일이라고 하면서 도무지 집안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목석인줄 알았는데… 글쎄 지배인도 인간이고 아버지이겠지.

그날 저녁 집에 들어간 영호는 자기가 지배인에게 사다준것과 색갈과 모양이 신통히도 같은 장화가 토방 한가운데에 놓여있는것을 보고 생각되는바가 있어 안해에게 물었다.

《이건 웬 장화요? 사온거요?》

그런데 안해가 하는 말이 오후에 돼지두엄을 쳐내고있는데 발이 축축해서 보니 장화가 새더라는것이였다.

두엄냄새가 배인 발을 빼들고 울상이 되여 서있는데 축사로 들어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웃고있던 지배인이 돌아서서 나가더니 새 장화를 가져다주더라는것이였다.

《글쎄 어쩐지 비슷하다했더니. 당신도 참, 그걸 받으면 어떻게 하오? 맹꽁이.》

영호가 야단을 하자 영문을 알게 된 안해는 모르고 이왕 받은것인데 어떻게 하겠는가고 하면서 다음번 군에 갈 때 더 좋은것을 사다가 지향이에게 주겠다는것이였다.

그후 비가 내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기에 오늘래일 하면서 지나쳤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미안스러운 마음이 가량없었다.

(이제 비가 멎으면 인차 꼭 사주어야겠어.)

영호가 이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 종길은 말없이 사람들을 둘러보고있었다.

한사람한사람 일별하며 눈길을 돌리던 그의 시야에는 룡마루의 맨 끝에 서서 아연한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보고있는 안해가 보여왔다.

종길은 오늘처럼 남편의 일을 하나라도 더 돕기 위해 알게모르게 아글타글 애를 쓰는 안해를 보면서 고마운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안해를 귀애하고 따뜻이 위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갈마들자 서서히 올해 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여보, 래년 봄엔 줄당콩넌출을 옆집처럼 쇠줄로 좀 든든하게 해줘요. 해마다 새로 다시하자니 품이 많이 들어서 어디 견디겠어요.》

지난해 가을부터 이렇게 시작되였던 안해의 지청구가 봄이 다가오자 한겨울에 골로 빠지는 바람처럼 맹렬하게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목장을 돌아보려고 토방에서 신발을 신고있던 종길의 귀에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있던 안해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여보, 오늘은 휴식날인데 저 콩넌출이나 좀 매주지 않겠어요?》

《음, 다음번 휴식날에 해주지.》

《정말이예요?》

《정말이라니까, 약속하기요.》

안해가 믿어지지 않는다는듯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르겠어요. 당신 언제 지킨다 하고 지킨 약속이 있었던지.》

흔연히 하는 아버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여느때에는 아버지의 편에 서군 하던 지향이까지 어느새에 나와 이번엔 어머니의 공격에 합세해나선다.

《아버지! 어머니를 좀 도와주세요.》

딸이 자기의 편역을 들자 안해가 때를 만난듯이 한마디 더 한다.

《어쩌면 세대주라는 사람이 집안일에 그렇게 무관심할가?》

종길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정하듯 안해에게 말을 던졌다.

《또 또, 아 당신이야 지배인의 안해가 아니요.》

《이 집 세대주의 안해는 아니구요? 말도 말아요, 솔직히 말해서 이집안의 세대주야 나지 어디 당신이예요? 당신이 목장일에 바쁘다는것을 리해는 하면서도 이런 때는 남편없는 녀자같은게, 막 섭섭해요.》

종길은 허허 웃고말았다.

저러다가도 돌아앉아서는 남편을 곧잘 리해해주고 오히려 남들앞에서는 변호까지 해주는 안해여서 저런 푸념쯤은 지나가는 바람소리만큼도 새기지 않는데 습관된 종길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정말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가정적으로 보면 안해가 이 외진 산간오지에서 남편 하나만에 의지해서 한생을 살아가는 연약한 녀인인것만은 사실인것이다.

콩줄 하나 매줄 시간이 없다는것은 가정일의 무관심성에 대한 변명이 아닐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언제부터 얻어달라던 저 쇠줄도 종내 안해가 자기의 손으로 얻어온것이 아닌가.

종길은 이번엔 어떻게 하나 콩줄을 늘이는것만이라도 자기 손으로 꼭 해주리라 속다짐했다.

이번엔 지향이가 아버지편으로 재빨리 넘어갔다.

《어머니, 믿어보세요. 아버진 꼭 해줄거예요. 그렇지요? 아버지.》

그러자 안해가 어이가 없어 웃으며 지향이를 흘겨본다.

《요건 그저 간에 붙었다 섶에 붙었다 하면서… 모르겠다, 네 아버지의 거짓말을 또 믿어야 할지.》

《내 이번에는 꼭 지킨다니까.》

하지만 집을 지척에 두고도 목장에 장참 나가살다싶이하는 종길은 끝내 그 약속을 지킬수 없었다.

그래서 절기가 늦어질가봐 안해가 감기에 걸려 콜록콜록 앓으면서도 종내 제 손으로 콩넌출을 늘이게 되였던것이였다.…

생각에서 깨여난 종길의 눈길이 이번에는 온몸이 물주머니가 되여 룡마루에 몸들을 의지한채 입술이 새파래서 추위와 공포에 떨고있는 가족아주머니들에게로 돌아갔다.

9달잡이 아들을 품에 꼭 껴안고있는 차영철의 안해, 3살나는 딸을 꼭 안고있는 김창걸의 안해, 5살나는 아들을 그러안고있는 최광철의 안해, 11살나는 딸의 어깨를 그러잡고있는 박영호의 안해들이 눈에 밟혀오자 가슴이 쓰려났다.

이럴줄 알았으면 먼저 저들부터 물밖으로 내보냈어야 하는건데.

아, 내 왜 뺨을 쳐서라도 녀인들과 아이들을 떠나보내지 못했던가. 가슴이 미여지도록 후회가 막급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탕수소리, 돌들이 굴러내리는 소리, 흙이 무너져내리는 소리들이 골안을 울리며 종길의 심란한 마음을 더해주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 순간처럼 지배인으로서, 세대주로서의 책임의 무게와 능력의 한계를 페부로 절감해보기는 처음이였다.

결국 그에게는 지금 한가정의 세대주로서 품어주어야 할 안해와 딸 그리고 지배인으로서 지켜주어야 할 종업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곁에 있는것이였다.

이제는 비가 멎고 물이 내릴 때까지 가능한껏 어떤 대책을 세울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뒤를 보며 울지 말고 앞을 보며 웃으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연히 하늘을 나는 새가 부러워졌다.

이런 때 날개라도 있었으면… 모두를 품에 안고 광란하는 저 물의 바다를 훨훨 날아넘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에 잠겼던 종길은 갑자기 갈마드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슴푸레한 어둠속에서 집들이 물에 잠기고있는것이 보였던것이였다.

거기는 목장보다 조금 높은 둔덕이여서 마음을 놓고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둔덕같은것에 아무런 미련도 가질수 없게 되였다.

(아차…)

지금까지 걱정하던 모든것이 깡그리 사라져버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기에는 모두의 생명을 합쳐도 비기지 못할 자기들의 생의 전부가 있는것이였다.

종길은 지체없이 울타리로 내려섰다.

《어딜 가요?》

그의 안해가 의아하여 소리쳤다.

《집으로 가야겠소.》

《어떻게 가요, 저걸 못 보세요?》

안해는 무섭게 날뛰며 소용돌이치는 물을 가리켰다.

《지배인동지, 어델 간다는겁니까? 위험합니다.》

최광철이 또다시 소리쳤다.

《가야 하오. 수령님들의 초상화를 모셔내와야 하오.》

《? …》

종길의 말에 그만 사람들이 굳어졌다.

너무도 갑자기 들이닥친 큰물앞에 창황중이여서 누구도 미처 생각을 못했던것이다.

《내가 가겠습니다.》

차영철의 목소리였다.

《아니, 내가 가야 하오. 걱정말고 녀자들과 아이들을 돌보오.》

지체없이 물을 헤가르며 집으로 향하던 종길은 《지향아!》 하고 찾는 안해의 부름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건 또 뭔가?

지향이가 자기의 뒤를 따르고있었던것이다.

《넌 왜 따라오는거냐?》

《아버지, 나도 갈래요. 참고서들이 있는 가방을 가져와야 해요.》

《물이 점점 불어나는데… 넌 다시 못 나와. 걱정말고 있어라. 아버지가 가져오겠다.》

그래도 지향이는 막무가내로 아버지를 따라섰다.

종길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딸이 너무도 안타까와 지향이를 힘껏 밀어던졌다.

《죽자고 그래?! 네가 따라오면…》

그 말에 지향이가 우뚝 그 자리에 멈춰섰다.

지향이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공부를 잘해서 꼭 고향을 꽃피워야 한다고 그처럼 당부하던 아버지… 지향이는 방금 아버지가 자기에게 하려던 말이 무엇이였겠는가를 잘알수 있었다.

돌아서서 집을 향해 몇걸음 옮기던 종길은 문득 스치는 예감에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속에서도 그의 눈길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를 바라보고있는 안해의 눈길과 부딪쳤다.

종길은 한순간 안해의 눈빛에서 지금껏 수십년간을 함께 살아오면서도 다 느낄수 없었던 남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볼수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진 종길은 안심하라는듯 웃음을 보내고는 다시 돌아섰다.

허리를 치는 물을 헤가르며 한발자국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갈수록 물은 점점 더 깊어지고 물살이 더욱 빨라졌다.

바로 서기도 힘들었다.

여느때는 눈을 감고도 잠간이면 오고가던 이 길이 이렇게 한순간에 물의 바다가 될줄 언제한번 상상이나 해보았던가.

종길은 아래로 내려밀리는 몸의 균형을 바로 잡으려고 다리에 힘을 주면서 안깐힘을 썼다.

중심을 잃으면 걷잡을수없이 물에 떠내려가고말것이였다.

오직 가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가까스로 집들이 있는 곳에 다달았다.

종길은 첫 집에 있던 모심함에 초상화들을 모시고 가슴에 안은채 나머지 집들을 한집한집 거치면서 자기의 집에 들어섰다.

방안에 들어서니 벌써 무릎이 잠길 정도로 물이 차있었다. 종길은 서둘러 수령님들의 초상화를 모심함에 정중히 모시였다.

지향이의 책가방을 찾아쥔 그가 돌아섰을 때에는 한초한초가 다르게 불어나는 물이 조금 높은 곳에 있다고 하는 자기의 집 마당에서도 벌써 가슴을 치고있었다.

이제 앞으로 나가느라면 물이 키를 훨씬 넘을것이였다.

앞을 보니 물이 무섭게 사품치며 흐르는 소리가 등골이 오싹하게 들려오고 통나무들과 널판자들이 사정없이 떠내려오고있는것이 어둠속에서도 어렴풋이 보였다.

종길에게는 자기가 망망대해에 빠져든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이 조금이라도 더 불어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건너가고싶었다.

그러자면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무사히 건너갈수 있을가. 한순간 불길한 예감이 종길의 뇌리를 쳤다.

(그러다가 혹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종길의 온몸에 전률했다.

여느때에는 죽음에 대하여 그저 범상하게 대해온 그였으나 이 순간에는 삶과 죽음의 계선이 자기 몸의 앞뒤에 한치도 안되게 놓여있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

종길의 가슴속에 비장한 마음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는 등에 지고있는 모심함의 끈을 손으로 당겨보았다.

이제 저 물을 헤쳐나가느라면 그사이에도 물량은 더 많아지고 물살이 더 세지겠는데 그 과정에 모심함의 끈이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담보가 없었다.

어떻게 할것인가.

주위를 둘러보던 종길의 눈에 줄당콩줄기가 뻗어올라간 쇠줄로 된 콩넌출이 보였다.

급히 거기에 뻗쳐지던 종길의 손이 한순간 무춤 굳어졌다.

안해가 등뒤에서 자기를 바라보고있는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던것이였다.

안해에 대한 자기의 죄스러운 감정이 줄기줄기 슴배여있는 콩넌출. 그러나 더 생각할 사이가 없었던 종길은 주저없이 쇠줄을 힘껏 나꿔챘다.

그리고는 모심함을 등에 지고있는 자기의 몸에 칭칭 감기 시작하였다.

그사이 물은 점점 더 불어올랐다.

안전상태를 다시한번 확인한 종길은 건너가던 도중에 물에 내리밑리울것을 타산하여 집뒤를 에돌아 조금 우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물을 헤가르며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빨리 가야 한다, 빨리.

사나운 물살에 몸이 아래쪽으로 자꾸 떠밑렸으나 종길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힘을 다하여 헤염쳐갔다.

그가 중간쯤에 거의 들어섰을 때였다.

물 한가운데로 뿌리채 뽑힌 통나무가 사선으로 내려오면서 모심함을 진 종길의 잔등을 향해 육박해오고있었다.

앗!

종길은 팔을 휘저으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 순간 통나무의 굵은 가지가 종길의 가슴을 세차게 들이쳤다.

아!

숨이 컥 막히면서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신음소리가 앙다문 이발사이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한순간도 지체할 사이가 없었다.

종길은 이를 악물고 계속 앞으로 헤여나갔다.

그런데 얼마간 전진하였을 때 이번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커다란 독같은것이 빠른 속도로 등등 떠내려오면서 종길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눈앞에서 불이 번쩍했다.

종길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한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 빨리 깊은 물곬을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각에 종길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앞으로 전진하였다.

맥을 놓으면 죽는다.

그는 자기 등에 초상화모심함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안깐힘을 다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조금만…그러나 인간의 육체적힘에는 한계가 있는것이였다.

시간이 지나 점차 맥이 진해가자 종길의 눈앞에는 불현듯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오르던 국사봉과 사지봉의 산발들이 안겨왔다.

매일처럼 또박또박 한자한자 쓰고 외우던 구호나무의 글줄들도 떠올랐다.

다음에는 언제나 연사사람이라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절대로 쓰러질수 없다.)

그는 초인간적인 힘을 다 내여 필사적인 노력끝에 사람들이 있는 곳에 거의 도달하였다.

앞을 보니 이제는 사람들이 의지하고있는 지붕도 거의 물에 잠겨버리고있었다.

안타깝게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어둠속에서 그를 가려보고 급하게 소리쳤다.

《여보, 빨리 와요.》

《지배인동지, 조금만 더.》

지향이가 안타까와 아버지에게로 조금씩 다가왔다.

《아버지, 힘을 내세요.》

이때였다.

사람들속에서 누군가가 절망적으로 부르짖는 소리가 아츠럽게 들려왔다.

《산이 온다!…》

엉? 산이? 산이 온다는건?

종길은 어망결에 고개를 돌렸다.

순간 번개불이 번쩍하면서 주위의 모든것을 확 드러냈다.

그는 너무도 놀라운 광경에 눈을 흡뜨고 굳어졌다.

결코 그것은 착각이 아니였다.

가까이에 있는 높은 산의 허리가 뭉청 떨어져나가면서 흙과 바위들이 통채로 쏟아져내렸던것이였다.

그 서슬에 사태에 밀리우고 얻어맞은 집채같은 물이 갈기를 쳐들고 달려들고있었다.

《아버지, 가방…》

지향이가 아버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내미는 가방끝에 한순간 닿을듯 하던 그의 손이 멀어지면서 지향이가 물속에 묻혀버리고말았다.

《지향아.》

종길은 딸의 희망이 들어있는 가방을 추켜든채 부르짖었다.

그러나 종길은 그속에서도 모심함을 감고있는 쇠줄을 부여잡은 한손만은 놓을수가 없었다.

물은 또다시 사정없이 그들을 덮쳤다.

아버지와 딸이 서로 찾고 부르는 소리는 골짜기의 소란한 탕수소리에 잦아들고말았다.

꽈르릉-

둔중한 우뢰소리만이 골안의 굉음을 짓누르며 길게 울렸다.

이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였다.

×

무정하고 횡포한 자연의 재난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한순간에 빼앗아갔다.

그로부터 며칠후, 비가 멎고 물이 찌자 차영철을 비롯한 몇명의 종업원들이 잃어진 사람들을 찾아 떠났다.

지배인을 잃다니, 그들을 잃다니.

혹시 살아있기라도 했으면…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도 기가 막힌 일이여서 그들은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부르고 또 불렀다.

하루종일 안타까이 잃어진 사람들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해질무렵에 목장으로부터 강아래쪽으로 30여리정도 떨어져있는 신장리의 강변에 있는 밭에서 지배인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지배인동지!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억이 막힌 그들의 울부짖음이 감탕만이 깔려있는 한산한 강변을 처절하게 흔들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은채 한동안 자기를 잊고 움직일념을 못했다.

자기들모두가 그처럼 아끼던 지배인의 옷은 갈가리 찢기고 몸은 탕수에 구을고 떠밀려내려오면서 터지고 부서졌으나 그의 몸에는 모심함이 그대로 쇠줄로 칭칭 감겨져있었던것이였다.

그들은 지배인이 살아있는듯 조심스럽게 그의 몸에서 모심함을 벗기였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머리를 숙이였다.

자기 지배인의 시신을 묵묵히 바라보는 그들은 누구도 말이 없었다.

주위의 모든것이 금시 얼어붙은듯 괴로운 정적이 깃들고 절통한 순간순간만이 그들을 에돌아 무정하게 흘러가고있었다.

언제나 신심에 넘쳐 누구보다도 더 밝아질 앞날을 그처럼 갈망했던 사람, 누구보다도 생을 그처럼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그 귀중한 생을 아낌없이 바쳤는가.

모두 입술을 깨물며 터져나오는 오열을 씹어삼켰다.

그들은 누구도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 아니, 울수가 없었던것이였다.

어려워도 힘들어도 고락을 함께 하면서 앞장에서 웃음으로 만난을 헤쳐온 그였기에 모두가 존경하고 따르던 참된 사람, 생의 마지막순간을 어떻게 빛내여야 하는가를 참모습으로 보여준 강의한 인간앞에서 어찌 사나이들이 나약하게 울음을 터뜨릴수 있으랴.

아-

그러나 비애에 잠긴 그들의 두볼로는 막을수 없는 비통한 눈물이 흐르고흘러 재난이 휩쓸고 지나간 어수선한 땅에 줄줄이 떨어져내리고 내렸다.

살았더라면, 살아있었더라면 이 땅을 살기좋은 락원으로 가꾸는데 아낌없는 땀을 바쳤을 지배인 김종길.

한생을 평범하게 살았어도 생의 마지막순간을 별처럼 빛내이고 연사사람 김종길은 이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그날은… 그날은 바로 지향이가 노래를 불러 생일을 맞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겠다던 9월 4일, 바로 그날이였다.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자기의 집재산보다도 목장의 귀중한 재산을 먼저 생각하고 생명을 바쳐 구원한 종업원들과 안해들, 그들도 이렇게 갔다.

그러나 그들이 영영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고는 생각지 말자.

그날의 그들은 항일혁명투사들의 넋이 깃든 국사봉의 저 높은 령마루에 올라 원수님 보내주신 사랑의 렬차를 타고 즐거운 야영의 길을 떠나는 아이들을 손저어 바래주었으리라.

저 령마루에서 오늘도 원수님 지어주신 선경마을 새집들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생의 노래를 웃으며 듣고있으리라.

그들의 넋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으며 그들의 심장은 우리의 심장속에서 고동을 멈추지 않을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살아있다.

우리 당의 기억속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오래오래 그리고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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