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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제 1 장

5

새학년도준비로 바삐 돌아가던 송금주는 개학날을 사흘 앞두고 고덕탄광으로 벼락행차를 하였다. 하루 업무시간중 반나절은 생산현장에서 보낸다는 지배인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침 일찍 학교를 떠났다. 학교에서 탄광마을 중심부까지는 5리쯤 된다. 재덕산성에서부터 시작된 산줄기가 물매를 낮추며 서남방향으로 흘러내리다가 두개의 구릉으로 갈라지면서 생긴 매생이같은 골짜기에 이 고장 사람들이 《3억탄》 이라고 자랑하는 고덕탄광이 자리잡고있다. 탄광의 기본갱도는 계곡의 왼쪽막바지에 있는 전차갱과 오른쪽막치기에 있는 대사갱이다. 탄광에서는 새로운 갱구들에 대한 개발도 힘차게 내밀고있었다. 탄광규모가 커지면서 종업원수도 늘어났다.

가까운 앞날에 고덕탄광의 년간생산량은 지금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전망이라고 한다.

탄광건설직장에서는 룡암지구와 읍지구에 탄부들의 살림집을 수백세대나 건설하였다. 종업원들을 위한 종합식당과 로동자합숙만이 덩그렇게 자리잡고있던 탄광 왼쪽의 더거지도 살림집구역으로 되였다. 간선도로 동쪽의 넓은 부지에도 탄부들을 위한 주택들이 질서정연하게 들어앉았다. 수천년을 내려오는 농경사회의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있는 영천벌에 산업시대의 물결이 석탄을 앞세우고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사무원들과 농사군들만 오락가락하던 읍지구가 탄부들의 세상으로 되였다. 영천은 농업군으로부터 공업-농업군으로 비약하였다. 탄부들이 읍지구 주민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시대가 도래하여 학생구성에서도 질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송금주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이 모든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있었다.

이른아침의 상쾌한 대기를 타고 어디서인지 내내가 가볍게 실려왔다.

탄광촌상공에서 떠도는 푸르스름한 연기의 분말들이 바람결에 실려와 어느새 그의 코를 건드린것이다.

토방돌우에 큼직큼직한 석탄덩이들을 피라미드식으로 쌓아올린 한채의 양철지붕집이 송금주의 눈앞을 막아섰다. 이전날 잡화점도 차려놓고 려인숙간판도 걸어놓고 오가는 손님들에게 밥도 해주던 단양집이다.

고중을 다닐 때 송금주는 단양집아들이 옛말박사라는 말을 듣고 호기심에 끌려 이 집에 찾아와 하루종일 샬로크 홈스와 루방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그 사람은 두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자였다. 후퇴하는 인민군군인들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치안대》 놈팽이들이 붙들어다가 몽둥이로 두들겨패는 바람에 앉은뱅이가 되였다는데 성미만은 아주 락천적이였다.

정문호는 별치 않은 이야기도 살을 붙이고 양념을 쳐가며 극적으로 재미나게 엮어댈줄 알았다. 코난 도일의 탐정소설들을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재현했던지 아이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몸들을 움츠러뜨리였다.

전쟁전에 공무동력직장에서 선반을 돌리던 그가 불구의 몸이 되여 가정에 얹힌 때로부터 단양집은 탄광마을아이들을 위한 옛말마당으로 되였다. 어떤 날은 교대근무를 마치고 지나가는 탄부들도 이 집 토방돌우에 잠간씩 엉치를 붙이고앉아 정문호의 이야기를 듣다가 가군 하였다.

정문호는 영천지방의 개척사와 수난사, 이 고장에 스며있는 수백가지의 비사들에 대해서도 휑하니 꿰뚫고있었다. 그가 1950년 가을에 자신이 직접 목격한 형장에서 고문을 당하던 애국자들의 이야기를 할 때면 어른들도 아이들도 비분에 못이겨 다들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정문호는 탄광마을아이들을 딴고장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는 유식한 인간들로 만드는게 자기의 소원이라고 한다.

그 사람은 사실상 이 마을 아이들의 교사나 다름없어 학기말이면 이집에 드나드는 모든 장난꾸러기들이 정문호에게 의무적으로 성적증을 보여준다지 않는가. 락제국을 먹은 아이들은 이 아저씨곁에 얼씬도 못한다고 했지. 락제성적을 퇴치한 다음에야 단양집토방앞에 나타날수 있는 자격을 준다고 하니 교사치고도 얼마나 훌륭한 교사인가. 모든 교원들이 그런 열정을 바친다면 그 교육은 분명 수확고가 높은 교육으로 될것이 아닌가.

단양집의 두방중 한방은 세 벽면이 온통 책으로 가득차있었다. 책의 무게에 눌려 서가의 널판자들이 금시 무너져버릴것 같은 그 서재를 보고나서야 송금주는 정문호가 갖고있는 박식의 샘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로소 깨달았다.

뭇사람들이 모두 침을 흘리며 쳐다보던 단양집서재의 장지문이 갑자기 밖으로 벌컥 열리였다. 반바지에 샤쯔를 걸친 정문호가 두툼한 책을 손에 들고 문턱앞으로 다가앉는 모습이 시야에 안겨들었다. 날마다 책과 함께 문설주밑에서 꼭같은 방식으로 막을 연다는 새날의 첫 일과일것이다.

정문호가 행길쪽을 내다보는 순간 송금주는 얼결에 인사를 하였다.

저쪽도 고개를 숙이며 반사적으로 답례를 보냈다. 눈언저리의 미소가 반가움으로 떠는듯 하였으나 상대가 누구인지 인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눈치같았다. 하기는 한번밖에 만난적이 없는 어제날의 고중학생을 그가 어떻게 알아보겠는가. 마음속에 고패치는 반가움을 더 따뜻하게 터치지 못하고 단양집곁을 지나가는 송금주의 인사 역시 구면답지 않다.

오늘은 그런 반가움을 터칠만 한 시간적여유가 없다.

2년전에 공사를 시작하여 간봄에 개통했다는 고덕-영천사이의 인입선철다리밑으로 해서 골안을 얼마쯤 올라가자 왼쪽등성이에 정방형으로 웅크리고있는 단층벽돌건물이 바라보이였다. 전쟁의 란리속에서도 요행 남아있는 탄광건물이였다.

송금주는 불로크판대기를 깐 층계를 따라 청사뜨락에 올라섰다. 그러다가 흠칫하는 충격과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곤색작업복을 걸치고 로동화를 신은 지배인의 장대하고 거쿨진 모습이 현관문앞에 불쑥 나타났다. 명절날 행사장에서 이따금 보군 할 때보다는 몸도 더 다부지고 혈색도 더 불깃불깃해보이였다.

지배인의 뒤로 몸집이 박달망치같이 탄탄하게 생긴 근육질의 땅딸막한 사람이 그림자처럼 굴러나오며 《지배인동지! 아, 지배인동지!…》하고 다급히 불러댔다. 사무실에서 아퀴를 짓지 못한 흥정을 성사시키려고 필사적으로 빌붙는듯 한 그의 비장한 어조에서는 일종의 절망감이 느껴졌다.

《여보, 안된다지 않소.》

지배인은 오른쪽어깨우로 고개를 틀며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그럼 우리 침목방부제공장하군 결별입니까?》

《계획에도 없는 석탄을 내라고 강짜를 부리는 기업소하구는 두번다시 상종할 생각이 없소.》

지배인의 왼쪽겨드랑이밑으로만 따라오던 흥정군사나이는 마치 성공의 열쇠가 위치선택에 있다는것을 금시에 깨닫기라도 한 사람처럼 오른쪽겨드랑이밑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지배인동지, 우리 침목방부제를 위해 한번만 선심을 써주십시오. 선심만 쓰면 북두칠성이 굽어볼겁니다.》

《북두칠성이 아니라 8선녀를 안겨준대도 안돼.》

《허허, 선녀생각을 다 하시구.》

지배인은 흥정군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팔을 쳐들어 신경질적으로 허공을 획 내리그었다. 그러는 사이에 두사람은 송금주의 앞에까지 왔다.

흥정군은 어리광대처럼 두눈을 우습게 슴뻑거리다가 지배인에게 최후통첩을 들이댔다.

《지배인동지, 이제부터 소인은 진지방어전으로 넘어갑니다. 래일 이 시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장기전을 선포한 그는 방금전까지 비라리질을 하던 사람같지 않게 히죽히죽 웃으며 여유작작한 표정으로 층계를 내리였다.

지배인은 아무런 응수도 하지 않고 숨을 길게 몰아쉬다가 옆주머니에서 금속제담배갑을 꺼내여 가치담배 한대를 뽑아 꼬나물고 불을 붙인다음 페장깊이 연기를 맛나게 빨아들였다가 후 하고 내뿜었다. 《진지 방어전》이라는 흥정군의 최후통첩에 좀 짜증이 난듯 한 기색이였다.

지배인이 생산현장에 나가지 않은 맞춤한 때에 탄광에 도착했다고 손벽을 치던 송금주의 마음속에서 불안이 연기처럼 서서히 괴여올랐다.

지배인의 담배대에서 내기는 삼단같은 연기가 그 기쁨을 깡그리 세척해버리고간것 같기도 했다.

침목방부제공장 업무일군과의 공방전때문에 잔뜩 화딱지가 난 지배인을 새로운 흥정판에 또 끌어들여 그에게서 무슨 대답을 받아낸다는 것은 사실 모험이나 다름없는 일이였다.

지배인이 저렇게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는것은 혈압이 극한점에 오른 탓일것이다. 이런 때에 내가 용건을 꺼낸다면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대해줄가. 《썩 물러가시오!》 하고는 생산현장으로 내빼지 않을가. 교원이라는게 철딱서니없는 착상을 했다고 나무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가. 오늘 돌아갔다가 다른날 와서 교섭을 해볼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된다. 이런 호기회는 두번다시 오지 않을수도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쳐보아야 한다. 내가 여기서 후퇴하면 송금주가 아니다.

송금주가 이런 생각을 하며 머뭇거리고있을 때 층계쪽으로 걸어가던 지배인이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처년 누굴 만나러 왔소?》

《지배인동지를 만나러 왔습니다.》

《석탄때문에 왔소?》

《아닙니다, 지배인동지의 허락을 받을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송금주는 《허락》이라는 말에 력점이라도 찍듯이 지배인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지배인은 무슨 불길한 조짐이라도 느낀 사람처럼 눈섭을 찌프리며 통명스레 물었다.

《허락을 받는다구? 무슨 문젠데?》

《갱막장에 학생들을 데리고 들어가야겠는데…》

《동문 교원이요?》

《네, 영천중학교 신임교원입니다.》

《그런 문제라면 난 만나지도 않겠소. 갱막장이 뭐 아이들의 놀이턴줄 아오. 거기가 어디라구 학생들을 데리고 들어간단 말이요. 그건 허락할수 없소.》

지배인은 이런 말마디들을 신경질적으로 내뱉고나서 그 장엄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날랜 걸음걸이로 층계를 다급히 내리였다. 송금주는 좀전에 침목방부제공장에서 왔다는 그 업무일군처럼 지배인의 왼쪽과 오른쪽어깨죽지옆으로 왔다갔다 하며 《지배인동지!》, 《지배인동지!》 하고 같은 말을 연방 되뇌이였다.

《지배인동지, 거절하더라도 제 말을 마저 들어주십시오.》

《글쎄 안된다니까.》

지배인의 보폭이 점점 커지고 걸음새가 빨라졌다. 이 순간부터는 아예 말상대를 하지 않을 심산 같아보이였다. 하지만 송금주는 단념하지않고 검질기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지배인을 납득시키자면 말을 압축해야 했다. 그는 지배인의 걸음에 자기의 걸음을 따라세우느라고 보폭을 크게 잡고 성큼성큼 발을 뗐다.

《학급을 맡은 첫날 구성상태를 료해해보니 재적인원 50명중 35명이 탄부의 자식들이 아니겠습니까.》

귀청을 째는듯 한 앙칼진 제재기소리가 송금주의 말을 집어삼키였다.

두사람은 제재소앞을 지나 저탄장쪽으로 걸어갔다. 지배인은 오가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느라고 처녀의 말을 건승으로 듣는것 같았다.

《아버지, 형님들이 석탄을 캐는 갱안에 들어가본 학생들이 있는가고 물어보니 손을 드는 학생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어떤데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자식들은 효도도 할수 없고 애국자로도 될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배인이 지나가던 길손과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이 말도 공중으로 날아가버리였다.

송금주는 지배인을 따라 전차갱쪽으로 뻗은 비탈길에 들어섰다. 버럭더미들과 탄재들로 이루어진 언덕받이였다.

이거야말로 소귀에 《하늘 천, 따 지》로구나, 사람이 왜 저렇게도 목석같을가, 간부가 돼서 일에 부대끼면 다들 저런 몰인정한 인간이 될가, 무감각에 무감정! 그야말로 석탄같은 인간이다. 아니다, 석탄이야 그래도 불만 달리면 무섭게 타번지는 열정을 가지고있지 않는가.

콩크리트로 테두리를 친 낯익은 전차갱입구가 언덕받이너머로 바라보이였다. 여섯살때인가 일곱살때 교대작업을 떠나는 아버지에게 강떼를 써서 따라왔던 전차갱이였다. 송금주의 아버지는 이 갱에서 16살때부터 채탄공으로 일하였지만 자기가 일하는 작업장과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일만 수걱수걱 하였다. 집에 오면 간데라불구멍에 바늘침을 놓느라고 신고하든가 뜨락의 닭장을 손질하든가 터밭을 가꾸군 하였다.

한번은 아버지가 겉면이 니스칠을 한것처럼 반들반들한 사과알만큼 큰 석탄덩이를 딸에게 가져다준적이 있었다.

《엇다, 아버지네 갱에서 나온 석탄이다.》

송금주는 이 말과 함께 기름기가 반질거리는 석탄덩어리를 보물처럼 받아안았다. 그때부터 그는 줄곧 아버지가 일하는 일터를 상상해보군하였다. 그가 상상속에 그려본 막장은 검은 금덩어리들로 꽉 들어찬 번쩍거리는 궁궐이였다. 송금주는 그 궁궐에 들어가보고싶어 아버지의 작업복 아래자락을 움켜잡고 전차에 오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린 딸의 심중을 알길없는 아버지는 탄광골안이 들썩하게 엉엉 울며 막장에 들어가겠다고 강떼를 쓰는 송금주를 휴계실에 떼던지고 혼자서 갱으로 들어가버리였다. 교대를 마치고 갱에서 나온 박경만이라는 탄부가 갈색바탕에 하얀 줄로 무늬를 돋군 알사탕을 손에 쥐여주며 달래지 않았더라면 송금주는 하루종일 갱휴계실에서 눈물로 시간을 보냈을것이다.

그날의 그 정경이 지금도 송금주의 기억속에 사진처럼 생생히 찍혀있었다. 갱구앞 언덕받이에서 진달래가 만발하던 5월의 그날도 가고 아버지도 갔지만 채탄공의 어린 딸이 지녔던 그 소원은 10여년세월이 층층으로 얹어놓은 망각의 락엽밑에서도 보라빛으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딸에게 보낸 마지막편지에서 전승의 그날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너를 막장에 데리고가주마 하고 약속하였다. 아버지가 전사하는 바람에 그 약속은 미결로 남았다.

갱 사무실쪽으로 걸어가던 지배인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작스레 몸을 뒤로 돌리고 송금주의 얼굴에 눈을 견주었다. 그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것을 본 그는 련민의 정을 담아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선생, 울긴 왜 우는거요?》

《지배인동지, 실례했습니다. 아버지 생각을 좀 하느라고…》

송금주는 손수건으로 눈굽을 얼른 훔치였다.

《아버지가 누군데?》

《송석정이라구… 이 전차갱 채탄공이였습니다. 전쟁때 1211고지에서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음, 내가 목숨으로 조국을 지킨 훌륭한 탄부의 딸도 몰라봤구만. 우리 탄광 탄부출신군인들가운데서 모범전투원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나도 들었소. 그래 선생은 학창시절에 아버지가 일하는 갱막장에 들어가본적이 있소?》

《없습니다. 어렸을 때 막장이 보고싶어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아버지가 절 떼두고 혼자 입갱하는 바람에…》

송금주는 그날의 사연을 추려서 말해주다가 또 눈물을 흘리였다. 전사한 아버지 생각에 어머니 생각이 겹치고 아버지가 선물한 석탄덩이를 놓고 소꿉놀이를 하던 어린시절의 감회까지 덧놓이게 되니 울컥해지는 격정을 다잡을수 없었다.

지배인은 한쪽눈을 가늘게 좁히고 입귀로 담배연기를 날리며 몹시 감심한듯 한 표정으로 송금주를 지켜보았다.

《우리 탄부의 자식들이 좋은 선생을 만났구만. 내 당장 갱장동물 만나서 아이들의 갱참관을 조직해주도록 하겠소.》

《지배인동지, 고맙습니다. 지배인동지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사실 저도 지구전으로 넘어갈 계획이였습니다.》

《하하하, 선생도… 그랬더면 이 지배인이 땀을 뽑을번 했구만.》

지배인은 걸걸한 웃음소리를 다시한번 뒤에 남기며 갱사무실쪽으로 걸어갔다.

고생깨나 하리라고 예상했던 교섭이 한시간도 못되는 사이에 결속되였다. 교원으로 임명된 후 처음으로 해본 대외사업이여서 그 성공으로부터 오는 희열은 대단히 컸다. 송금주는 갱장과 실무적인 문제들을 의논한 다음에는 두번째 일정에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 일정이란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 갱에 들어가지 못하고 땅바닥에 퍼더버리고앉아 발버둥치던 자기를 휴계실에 안아다 사탕을 주며 달래던 어제날의 채탄공 박경만아바이를 만나는것이였다.

풍문에 의하면 아바이는 3년전에 자기가 섰던 초소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화약고지기로 돌았다고 한다. 어려서는 그 로인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는데 철이 들어 20고개에 이른 지금에 와서는 이상할 정도로 그 아바이 생각을 자주 하게 되였다.

찾아가라! 찾아가라! 어서 빨리 찾아가서 안부라도 물으라!

그것은 고막에 와 부딪치는 단순한 충동의 목소리가 아니였다. 그 목소리는 가슴속 깊은 곳에 씨앗으로 묻혀 흐르는 세월과 함께 줄기를 뻗고 아지를 쳐온 리성의 폭발이였다.

갱장을 만나 참관날자와 시간을 약속한 후 송금주는 덕거리쪽으로 뻗은 산릉선을 따라 화약고가 있다는 함박골로 향하였다. 한시간전까지만 해도 그는 탄광마을 뒤더지기에 함박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갱장은 굴진을 할 때 쓰는 모든 남포약은 바로 그 골안에 있는 화약고에서 출고하는데 그 책임자가 박경만아바이라고 하였다. 산밑에 굴을 뚫고 철문을 해단 마당에서 짧은 바지에 베적삼을 걸친 강대같이 마른 사람이 높이가 두자도 더 되는 철조망너머로 송금주를 뚫어지게 바라보고있었다. 이 골안에서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자주색의 달린옷을 입고 칠칠한 중발머리를 한 도회지풍의 낯설은 방문객을 지켜보는 로인의 눈에는 경계의 빛이 어리였다.

그 눈빛과 달리 철조망 안쪽에 장방형으로 꾸려놓은 화단은 온통 꽈리일색으로 손님을 반겨맞는듯 하다. 꽈리라면 오금을 못쓰는 처녀애들의 성화를 덜 받는 모양인지 포기마다 새빨간 열매들로 풍작을 뽐낸다.

꽃밭전체에 불이 타는듯 한 그 풍경은 주름으로 주글주글한 로인의 볼편과 희슥희슥한 머리카락에 비낀 석양과는 대조적으로 억제할수 없는 기백과 열정을 가지고 그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호소하는것 같았다.

《할아버지, 그새 안녕하셨습니까?》

송금주는 나들문앞에 이르기도 전에 먼발치에서 절을 하였다. 철조망넘어 날아오는 그 청신하고 발랄한 인사에 로인도 허리를 굽석하며 엉거주춤한 답례를 보냈다.

《할아버지, 전 전차갱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채탄공 송석정의 딸입니다.》

《어느 송석정? 군대에 나갔다가 전사한 그 송석정 말이냐?》

《네, 그래요.》

《송석정이한테 이런 큰딸이 있었던가?!》

로인은 무슨 혼란에 빠진듯 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찌붓해보이였다.

송금주는 로인의 그 말이 우습강스러워서 큰소리로 깔깔거리였다.

《할아버지두 참, 전차갱 휴계실에서 사탕을 쥐여주며 나를 달래시던 일을 벌써 잊으셨나요?》

《그걸 왜 잊어. 그게 1946년이던가 1947년이던가. 그때 넌 고추잠자리만 했지.》

《그때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나요.》

《그 고추잠자리가 이렇게 컸으니 쉽사리 알아볼수 있나. 아무튼 반갑다.》

로인은 화약고철문앞에 놓인 쪽의자 두개를 들고 울타리밖으로 나와 그중 한개를 송금주에게 권하고 다른 한개는 자기가 차지하였다. 화약고마당에 외인들을 들여놓지 않고 밖에서 손님대접을 하는 그 철저한 준법정신에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이름을 금주라고 했지?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니?》

《도교육간부학교를 졸업하고 며칠전에 영천중학교 교원으로 배치받았어요.》

《거 참 잘됐구나. 교원이란 해볼만 한 직업이다. 가만, 너희네 학교에도 탄부자식들이 많겠지?》

《네, 절반이상은 탄부의 아들딸입니다.》

로인은 마라초에 불을 달아 맛스럽게 연기를 삼켰다가 내뿜었다. 그리고는 기대와 애정이 엇갈리는 눈으로 묵묵히 송금주를 바라보았다.

《네가 교단에 섰다니 내놓고 하는 말인데 탄부의 자식들가운데 대학모자를 쓰고 고향에 오는 아이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우리 로동자구에 중학교가 선지도 여러해가 되고 읍에도 중학교가 하나 있지만 탄부의 아들딸들이 상급학교에 간게 도대체 몇이나 되니?

우리 군의 교원들이 헛농사를 많이 하는것 같다. 훈장을 할바엔 쇠소리가 나게 해야 한다.》

《할아버지,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송금주는 《용광로》 담배 두갑과 부들부채를 로인에게 건네주고 그와 마주앉아 한시간쯤 지난날을 회고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뜻밖에 찾아든 상봉으로 기분이 흡족해졌던 로인은 급작스레 이루어지는 작별이 못내 아쉬운듯 처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 번지기도 잘 번졌다. 키도 늘씬한게 정신이 번쩍 드는구나. 석정이 그 사람이 살아있다면 중학교교원이 된 딸을 보고 얼마나 대견해하겠나.》

송금주는 그 말에 눈굽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화약고를 등지고 대여섯발자국 걸어가다가 뒤로 돌아서서 또 인사를 하였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오냐, 고맙다. 가만, 게 좀 섯거라.》

로인은 울타리안으로 허둥허둥 들어가 꽃밭에서 꽈리를 한웅큼 따다가 송금주의 손에 쥐여주었다.

《오래간만에 널 만났는데 이거라도 가지고 가거라. 난 우리 봉숙이가 보고싶을 땐 저 꽈리포기와 말을 하군 한다. 그년이 꽈리를 무척 좋아했다. 폭격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지금쯤 너처럼…》

로인은 말끝을 흐리며 엄지손가락으로 눈귀를 꾹꾹 찍었다. 교원을 할지도 모를거라는 말을 하고싶었을것이다.

송금주는 자기도 모르게 줌안에 쥐여져있는 꽈리알들을 내려다보았다. 포동포동 살찐 꽈리알들이 무슨 사연이라도 조잘거리려는듯 일매진 모습으로 말똥말똥 그를 올려다보고있었다. 꼭지를 떼면 당장이라도 새빨간 거풀속에서 수천마디의 말이 쏟아져나올것 같은 느낌이 드는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가. 송금주는 천만근의 무게가 실리는 꽈리알들을 웅큼에 꼭 잡고 로인과 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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