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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제 1 장

3


10분이면 끝날줄 알았던 정애경의 배치담화는 30분이 지나고 60분이 지나도록 끝날줄 몰랐다. 시간을 10분이상 끌지 않는다는 교육부장의 배치담화가 1시간이상이나 지속된다는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였다. 배치가 애경의 뜻대로 되지 않아 혹시 무슨 마찰이라도 생긴게 아닐가. 설마하고 도리를 흔들었던 그 불안은 흐르는 시간과 함께 점점 그의 가슴을 옥죄이였다.

그런 찜찜한 생각이 떠오른 순간부터 송금주는 긴의자에서 일어나 군인민위원회 앞마당을 거닐기 시작했다. 아침차로 역에 도착한 정애경을 데리고 이 마당에 들어선것이 한시간반전이다. 20분쯤 한담을 하고난 뒤 정애경은 교육부장방으로 들어가고 송금주는 마당에 남아 짝패의 배치결과를 기다리였다.

정애경의 소망은 한때 아버지가 교편을 잡았고 자기자신이 중학시절을 보낸 모교에서 송금주와 함께 일했으면 하는것이였다. 그가 그 소망을 쉽게 이루게 되리라는것을 송금주는 털끝만치도 의심치 않았다.

정애경의 영천진출은 그가 만사람을 감동시킨 자기자신의 결단과 미거로써 얻어낸 특별평정서와도 같은것이였다. 이 평정서를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정애경을 도와주지 않을수 없게 되여있었다. 그가 배치를 잘 받게 되리라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였다. 정애경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자신만만해하였다.

그런데 담화시간이 예상시간보다 길어지게 되자 이런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애경이 영천에 자원해왔다고 해서 그를 읍중학교에 배치할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론리적으로도 성립될수 없는 주관이였다.

자원 그자체는 힘든 초소나 일터로 자진해서 간다는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처녀들이 바다에도 나가고 농장에도 진출한다. 어떤 처녀들은 갱내에 들어가 압축기도 돌리고 대도시의 건설장들에서 미장공으로도 일한다. 이런 처녀들의 소행에 비하면 정애경이 고향에서 교편을 잡으려고 영천에 온것은 신문에 대서특필할만 한 장거라고는 볼수 없다. 그의 영천행은 솔직히 말해서 청년들이 힘든 곳으로 앞을 다투어 탄원해가는 시대적추세와는 무관한 감상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 외피는 지방진출인데 본질은 《동무따라 강남 간다》였다.

정애경을 그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보낸다고 해서 영천군의 일군들을 몰인정하다고 탓할수는 없다. 지금이 어디 자기 욕심대로만 사고하고 처신하고 행동할 때인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라는 새로운 생활론리가 전사회를 지배하고있는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다.

교원배치문제를 다루는 실무일군들도 이런 륜리는 무시하지 못할것이다.

아니야,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수 없어. 송금주는 좀전까지 검은 구름장처럼 뇌리에 스며들던 불안을 말끔히 털어버리며 속으로 뇌이였다.

신경과민도 분수가 있지, 애경은 희망대로 배치받을거야. 도시에 집과 부모들을 두고 고향에 온 처녀를 영천사람들이 절대로 푸대접할수야 없지. 더구나 군인민위원회 교육부장은 전쟁때 애경의 아버지와 한중대에서 생사를 같이한 전우라고 하지 않았는가.

송금주는 이런 생각이 들자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손수건으로 볼편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장의자에 걸터앉았다. 교육부장이 그런 연고를 봐서라도 애경을 아무데나 경솔하게 배치하지는 않을것이다. 배치담화가 길어지는것은 사담때문일수있다. 전우의 딸을, 그것도 도시를 떠나 고향에 인생의 보금자리를 틀려고 온 처녀를 만났으니 감회인들 얼마나 깊겠는가. 성미가 시인들처럼 격렬하고 다정다감한 교육부장이니 모처럼 만난김에 《그때 나와 너의 아버진 고지에서 말이야. …》 하고 대장편과 맞먹는 전쟁담을 엮을지도 모른다.

제발 나와 같은 학교에서 일하게 해주었으면!

송금주는 다시한번 숨을 길게 내그으며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는 소학시절부터 오늘까지 정애경과의 우정을 소홀히 한적이 없었다. 그와 헤여져지내야 했던 고중시절에도 처녀는 마음속으로 동갑친구가 가있는 청진을 그리였고 교정과 마을에서 오손도손 나누던 소녀시절을 뜨겁게 추억하군 하였다.

우정을 만일 구슬에 비긴다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홍보석이나 록주석에 비길수 있지 않을가. 《우정은 불이고 꽃이며 영원히 마를줄 모르는 샘이다.》 언제인가 그가 번쩍이는 시상을 무르익히다가 일기장에 적어넣은 글이다. 처녀는 지금까지 정애경보다 더 마음에 드는 친구를 한명도 만나지 못하였다.

무슨 매력에 끌려서 우리는 서로가 그렇게도 아낌없는 정을 나누었던가. 그것을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송금주는 할말이 없다. 한마디로 설명할수 없는것이 우정이고 사랑이 아니겠는가.

해빛은 시시각각으로 이해의 마지막더위를 들붓는다. 하나 송금주는 그 더위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의 온 신경은 지금 인민위원회청사 현관문으로 쏠리고있었다.

송금주는 불현듯 정애경의 운명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가슴을 조이며 그 결과를 기다리군 해온 자기의 모습을 돌이켜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던 그해 5월 정애경이 면인민병원에서 충수염수술을 하던 날 병원뜨락에서 엄습하는 공포와 불안을 누르지 못하고 사색이 되여 오돌오돌 떨고있을 때 송금주의 넋을 지배한것은 무엇이였던가. 그것은 정애경의 생명에 대한 념려였다. 집도자인 김공의가 수술을 성과적으로 끝내고 뜨락에 나서는 순간 송금주는 먼발치에서 허리를 굽혀 절을 하였다. 소녀의 가슴에서 끓고있는것이 무엇인지 알길없던 의사는 그 인사를 건성으로 받아들이며 담배를 꼬나물었다.

전후 어느해인가 송금주는 평양음악대학 교정에서 이와 비슷한 정황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그때의 체험은 인간의 생명과는 인연이 없는것이였다. 그는 시험장에서 울리는 피아노소리에 온 신경을 다 모으고있었다. 그것은 정애경이 두드려대는 리스트의 《마쟈르광상곡》이였다.

다른 수험생들은 대체로 두곡씩 연주하였는데 정애경한테만은 어떻게 된 갈래판인지 네곡째 연주시키고있었다.

네곡째라는 이 류다른 회수가 송금주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였다.

수험생들의 기교가 어정쩡하면 시험관들은 실력을 정확히 가늠하기 위해 이것도 타보아라, 저것도 타보아라 하고 연거퍼 주문을 들이대군 한다. 지금 정애경이 네곡째 연주하는것도 그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송금주는 유리한 방향으로 추리의 조종간을 돌리였다. 시험관들이 정애경의 연주기교에 탄복하여 재청, 삼청을 했을수도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그런 아전인수식추리를 인차 부정해버리였다. 정애경의 연주는 어딘가 모르게 소심스럽고 불안정하게 들리였다. 강약이 미미하고 감정도 빈약하였다. 그는 악보를 충실하게 전달하는데만 급급하고있는것 같았다.

저래서는 안되겠는데. 송금주는 몸에서 식은땀같은것이 흐르는것을 느끼며 시험장창가로 다가갔다. 반원형으로 들어앉아 정애경의 연주를 감상하는 시험관들의 심각한 얼굴들이 창유리너머로 바라보이였다.

불합격이 되면 어찌나, 정말 그렇게 되면 야단이다. 학교의 명예에도 손상을 주고 송금주와 정애경에게 8년동안이나 피아노훈련을 시키고 음악대학에까지 추천받도록 힘써준 정수일선생의 노력과 기대에도 먹칠을 하게 된다.

자기가 떨어져도 정애경만은 꼭 입학에 성공했으면 하는것이 그의 소원이였다.

지금도 송금주는 4년전 그날처럼 정애경의 전도를 두고 가슴을 조이고있다. 정황도 비슷하다. 그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음악대학 교정이 영천군인민위원회 청사뜨락으로 바뀐것뿐이다.

이런 역은 내가 일생을 걸머지고 가게 될 숙명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정애경이 현관문을 나선다.

그런데 저 애 몰골이 왜 저 모양인가. 왜 고개도 쳐들지 않고 기가 죽은 모습으로 나오는가. 머리를 얼핏 쳐들고 긴의자쪽을 바라보다가 내리까는 그 눈길에는 초점이 없다.

육체의 여기저기에서 몸과 팔다리를 지탱해주던 어떤 나사같은것들이 죄다 빠져달아난것 같은 자태다.

송금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어째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정애경의 거동만 지켜보았다.

《왜 그렇게 울상이 됐니? 꼴이 말이 아니구나.》

정애경이 자기앞에 와서 긴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다음에야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뜻대로 안됐니?》

정애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입술만 감쳐물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곧잘 보게 되는 그의 유표한 입모습이다. 교육간부학교시절에 력사지리학과의 싱검둥이총각과 대들이로 다투고나서 점심밥도 먹지 않고 기숙사호실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정애경을 보고 《네 입은 입이 아니라 뢰관이야.》 하고 빈정거린적이 있다. 좀 어처구니없는 비유인지는 몰라도 그의 입술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면 무서운 폭발이 일어나 상대를 쩔쩔매게 하는 언어의 파도식폭격이 가해지군 한다는것은 모든 동급생들이 다 아는 사실이였다.

《요 깜찍한게 날 골리느라고 그러지?》

송금주는 정애경이 중학시절부터 위수구역으로 삼고있는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간지럽히였다. 여느때 같으면 목을 움츠리고 캐득캐득 웃으며 몸을 뒤틀어댈 정애경이였으나 오늘은 비명소리도 내지르지 않고 간지럼도 별로 타지 않는다. 다만 옆구리에 두팔을 꼭 다가끼며 침침한 눈길로 상대를 흘겨볼뿐이였다.

《금주, 이러지 마, 남은 속상해죽겠는데.》

송금주는 정애경을 긴의자끝으로 홱 밀치며 발끈 성을 냈다. 그리고는 그 빈정거리는듯 한 눈매로 자기의 단짝을 흘겨보았다.

《그럼 무슨 일이 생겼는지 속시원히 말이라도 해야 할게 아니야. 도대체 배치지가 어디게 그 모양이냐?》

《아직 배치는 못 받았어.》

《왜? 무엇때문에?…》

《자꾸 그렇게 날 욱박지르지 말어. 넌 지금 내가 얼마나 묘한 운명의 갈림길에 놓여있는지 몰라.》

인형아기의 눈처럼 속눈섭이 우로 잔뜩 까부라진 정애경의 커다란 쌍겹눈에서 콩알같은 눈물이 뚤렁 떨어졌다. 송금주는 가슴이 철렁해서 입밖으로 튀여나오려던 지청구를 급하게 씹어삼키였다. 일이 이렇게 된바에는 저 못난 애경이가 스스로 만단사연을 토해놓을 때까지 잠자코 있는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애경이가 저다지도 속이 타서 《운명의 갈림길》이라는 요란한 수식사까지 동원해가며 이렇게 분위기를 긴장시킬가. 혹시 교육부장이 청진사람은 청진에서 교원을 해야 하니 부모들곁으로 되돌아가라는 통첩이라도 한게 아닐가.

송금주가 이런 생각을 굴리고있는 사이 정애경은 손가방에서 모조지로 된 새하얀 봉함편지를 꺼내여 그의 무르팍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이걸 보면 다 알게 될거야. 내가 어째서 이렇게 괴로워하는지. 그리고 어째서 이다지도 갈팡질팡하는지.…》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정황이다. 사달은 이 편지로부터 생긴 모양이다. 봉투상단의 《영천군인민위원회 교육부장 김춘택동지 앞》 이라는 수신인의 주소성명과 하단의 《청진교원대학 정수일》이라는 글발이 눈에 확 안겨들었다. 어째서인지 속지를 펼치면 《여보게 춘택이, 제발 부탁이니 우리 애경이를 돌려보내주게. 그 애가 없이야 우리 부부가 무슨 재미로 살겠나.》 하는 간절한 청탁을 읽게 될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예감이 일었다.

송금주는 앞부분의 한페지정도 되는 문안인사는 건승으로 훑어보고 정애경을 속상하게 만든 알맹이에 다급히 육박했다.

내 부탁이란 별게 아니네. 자네가 삼촌쯤 된셈치고 우리 애경이를 강쇠로 만들어달라는거야. 그 앤 어려서부터 아들없는 집안의 외딸이라고 호강하며 자랐네. 큰 고생도 없이 호의호식만 해왔지. 그러니 물렁물렁한 떡쇠나 다름없어. 나이는 스물두살이지만 실은 응석꾸러기라네. 수틀리면 대뜸 폭군이 되구. 애경인 우리 집안에서 절대군주나 다름없는 존재라는걸 알아두게.

그런즉 신발부터 단단히 신겨야 할것 같네. 애경이가 인생수업을 똑바로 하게 하자면 그 애를 제일 힘든 초소로 보내야 하네. 읍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일수록 좋다고 봐. 부탁인데 읍지구에 배치하지 말아주게. 사람은 돌밭에서 자라야 인생만리를 무탈하게 걸어갈수 있다는게 내 주장이야. 그 애가 아버지의 의사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나를 대신해서 완력을 행사해도 좋아. 자네에게 모든걸 위임하네.

자네의 충실한 전우 정수일


송금주는 편지를 접어 정애경에게 돌려준 다음에도 숙연한 생각에 압도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목격하고 체험한 부성애가운데서도 가장 고결하고 훌륭한 부성애였다.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을 시련속에서 단련시켜 기나긴 인생수업을 똑똑히 하게 해달라는 이 부탁이야말로 얼마나 정정당당하고 원칙적인 사랑인가. 송금주는 정수일선생이야말로 천리마시대가 요구하는 참된 인간의 본보기라고 생각하였다.

《교육부장동지는 뭐라던?》

《요행수나 우연 같은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생을 정보로만 걸어온 아버지로서는 응당 그런 부탁을 할만 하다는거지. 그러나 아버지의 요구를 나한테 내려먹이진 않겠다고 했어. 군당간부들도 아버지가 그런 부탁을 했지만 영천에 자진해서 진출한 대상인것만큼 본인의 의사에 맡기라고 했다누나. 교육부장동진 나에게 하루동안 생각할 여유를 줬어.》

《그렇다면 뭘 걱정할게 있어? 소원대로 모교에 보내달라고 하면 될텐데.》

《글쎄 그거야 간단하지.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누나. 아버지의 요구를 무시하자니 량심에도 찔리구. 금주야, 이런 땐 어떻게 하면 좋아? 너야 내 소망을 잘 알지 않니. 난 너에게 선택의 권리를 전적으로 맡긴다.》

송금주는 정애경이 얼마나 난처한 립장에 빠졌는가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교육부장의 방에서 걸머지고 나온 무거운 짐이 이제는 송금주의 어깨에 실리였다. 그는 정애경이 가정에서 절대군주로 군림해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요구라면 무조건 따르고 받아들이는 충실한 효녀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지금도 그가 아버지의 의향때문에 대답을 망설이는것은 아직 량심에 때가 묻지 않았다는것을 의미한다. 송금주는 그런 정애경을 보는것이 무엇보다 기뺐다.

그렇다고 하여 그에게 무작정 아버지의 요구를 따르라고 할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영원히 한일터에서 일하고 한마을에서 살자던 꿈이 물거품이 된다. 송금주도 정애경도 그런 비참한 결과는 바라지 않았다. 우리 운명을 부모들 손에 맡기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도 이제는 당당한 20대이다. 무엇을 오물쪼물 잴 필요가 있는가.

송금주는 두손으로 정애경의 어깨를 가볍게 밀쳤다 놓으며 절절한 어조로 말했다.

《애경아, 난 네가 나와 헤여지는것을 원치 않는다. 고중때 3년동안 갈라져있은것만 해도 분통한 일인데 또 헤여지다니… 어떻게 두번다시 그런 일을 당할수 있니. 어서 교육부장동지를 만나 모교에 가겠다고 해라.》

《금주야, 고맙다. 네가 아니였다면 난 온밤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을거야. 좋아, 우리 운명이야 우리 결심대로 개척해야지.》

정애경은 송금주의 손을 꼭 잡았다 놓고나서 인민위원회 청사쪽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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