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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제 1 장

1


말복이 지난지도 이슥한 8월 하순의 어느 쾌청한 날 오후 송금주는 렬차로 배치지인 영천에 도착하였다. 지난해 이맘때 도교육간부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한번도 와보지 못했던 고향땅이였다.

1년간의 숨가쁜 과정안을 총총히 마치고 고향땅으로 돌아오는 처녀의 심장은 사뭇 활랑거렸다.

무더위가 숙어들기 시작한다는 처서를 앞둔 때이지만 지상만물을 장마비와 고온으로 길들이는데 버릇된 여름은 아직도 삼복철 못지 않은 열파로 대지를 지져댄다. 지글지글 끓는 지열과 폭양이 한데 엉켜돌아가는 역구내로 길다란 동체를 번들거리며 들어서던 남행렬차는 50~60명쯤 되는 려객들을 홈에 쏟아놓고나서 기적소리도 우렁차게 온수평쪽으로 사라졌다.

무시로 듣는 기적소리건만 오늘은 어쩐지 가슴을 후두두하게 했다. 그것은 학창을 떠나 새로운 생활의 바다속에로 뛰여들게 될 스물두살꽃나이처녀에게 보내는 출발구령같기도 했고 기나긴 인생마라손을 달리게 될 주인공의 앞길에 만복이 있기를 바라는 례포소리같기도 했다.

형형색색의 짐짝들을 이고 진 손님들이 억양거친 북관말투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나들문을 지나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간다.

송금주도 량손에 묵직한 트렁크를 하나씩 갈라들고 나들문으로 나섰다. 늘씬한 키에 박력있는 걸음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량옆으로 물결치는 중발머리도 인상적이지만 눈정기가 이글이글하면서도 무엇인가를 흘겨보는듯 한 표정도 자못 유별나다. 처녀는 역사 처마밑의 음달에서 온몸을 화끈거리게 하는 열기를 식히며 한참동안 낯익은 산발들과 구릉들을 정겹게 둘러보았다. 모든것이 새로운 의미와 색채를 가지고 눈앞에 안겨들었다. 이전날 아무런 감흥도 없이 뻣뻣해서 지나치군 하던 고덕중학교 교사와 그 교사뒤로 무대배경처럼 펼쳐진 룡호마을의 논들에도 오늘은 정이 폭폭 박히였다. 민둥산이나 다름없는 재덕산도 칠보단장을 한 명산으로 보였다. 달구지들이 삐걱거리며 굴러가는 역사아래 황토길에서는 고향이 내뿜는 푸수하고 소박한 정취가 그들먹하게 풍겨온다.

전에는 왜 이 모든것을 그렇게도 무심히 대했던가.

영천은 도적으로도 막내동생대접을 받는 3급군이다. 상매봉 저쪽에 《함북금강》으로 불리우는 신비의 명산 칠보산이 있고 《3억탄》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고덕탄광도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것을 별로 셈에도 넣지 않는다. 도에서 간부들이 출석을 부를 때에도 영천은 늘 꼬라지를 면치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송금주는 어려서부터 이 세상에서 자기 고향보다 더 살기 좋은 고장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조국은 이제 이 영천땅에서 송금주가 활보할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줄것이다. 그 무대란 그의 둘도 없는 꿈으로 되였던 교단이다.

쥐죽은듯 조용하던 고덕중학교 교사 중앙현관에서부터 갑자기 한무리의 소녀애들이 쓸어나와 정문쪽으로 몰려온다. 무슨 신바람나는 화제거리라도 생긴 모양인지 저마끔 목청을 돋구어가며 참새들처럼 재잘거린다. 팔에 열성자표식을 단 처녀애를 끼고 뒤늦게 현관문을 나선 하얀 브라우스차림의 녀교원이 이마에 손채양을 오그려붙이고 교문밖으로 사라지는 제자들을 바래준다. 교원이 무슨 말인가를 하자 열성자표식을 단 처녀애는 교문밖의 짝패들을 따라잡느라고 있는 힘을 다하여 달음박질을 한다. 아이들이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도 녀교원은 깊은 상념에 잠긴듯 한 자태로 오래도록 현관문앞에 서있었다.

송금주가 겪게 될 미래에 대한 시연이라도 펼치려는가, 처녀는 그 별치 않은 정경앞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저도 몰래 입가에 미소를 그리였다. 이제 열흘만 지나면 그도 그런 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아이들의 별빛같은 눈동자앞에서 창조의 령감으로 심장을 불태우기도 하고 북받치는 애정을 담아 일장훈시도 할것이다. 때로는 말썽꾸러기들과 성적이 낮은 학생들때문에 남모르는 눈물도 흘리게 될것이다.

눈앞에 고속으로 날아드는 그 미래를 한시바삐 맛보고싶은 충동으로 가슴을 들먹거리며 송금주는 짐짝을 들고 음달을 나섰다. 역에서 신작로를 따라 동남방향으로 10리쯤 걷느라면 영천읍에 가닿는다. 평보로 걸어도 오후 다섯시까지는 군인민위원회 교육부의 문을 두드릴수 있다.

그가 신작로와 언덕길의 교차점에 이르렀을 때 참고서적들과 강의록들, 소설책들을 넣은 트렁크의 손잡이끄트머리에 난데없는 손이 와닿았다.

《누나, 같이 들고 가자요!》

그 손의 임자가 하는 말이였다.

송금주는 소리나는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였다. 상체에 런닝샤쯔만 걸친 열두어살쯤 되는 소년이 감실감실한 얼굴을 쳐들고 꺼리낌없이 그를 쳐다보고있었다. 쏟아져내리는 해빛이 시그러운지 한쪽눈귀를 좁히고 상대를 바라보는 얼굴표정이 몹시도 인상적이고 귀염상스러웠다.

내가 이런 애를 어데서 봤더라, 아무리 기억을 들추어도 떠오르지 않는 생면부지의 인물이다.

《누난 날 몰라도 난 누날 잘 알아요.》

소년자신이 마침내 송금주를 알게 된 인연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한다.

《어떻게?》

《롱구장에서 많이 봤지요 뭐.》

《아, 그래

그런 인연이라면 읍지구 주민들의 과반수가 송금주를 안다고 말할수 있다. 그는 고중시절에 학교 녀자롱구팀의 주장으로 이름을 날리였다.

아무튼 이 아이는 대단한 롱구애호가임에 틀림없다.

《네 이름은 뭐니?》

《김동주예요.》

《동주? 난 금주인데 남매간같구나. 어느 학교를 다니니?》

《9월에 영천중학교에 입학하였어요. 누난 어데까지 가요?》

《읍까지 간다.》

《그럼 날 따라오라요.》

김동주는 송금주의 손에서 트렁크를 냉큼 앗아들었다. 잽싼 걸음걸이로 고덕중학교 교문에 들어선 다음 운동장 한쪽구석에 서있는 화물자동차 《승리-58》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손에 들었던 트렁크를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메고양이처럼 날래게 적재함으로 날아올라갔다.

《누나, 트렁크를 줘요!》

김동주는 송금주가 들어올리는 트렁크들을 받아 적재함 한쪽구석에 얹어놓고 휘파람으로 《자동차운전사의 노래》를 불렀다.

송금주는 동주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이게 어느 기관 차인데 저 쪼꼬만게 저렇게 주인행세를 할가.

《허락도 없이 짐짝을 실었다고 꾸중을 듣지 않겠니?》

김동주는 대답대신 적재함우에서 쿵- 하고 뛰여내리였다.

《걱정말라요. 이 찬 내 차나 같아요. 난 이 차의 운전견습생이거던요. 이 차 운전사아저씨하구 우리 아버진 친구예요.》

《용쿠나. 너만 한 나이에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운다는건 대단한 일이다. 견습을 몇달동안 했니?》

《석달동안 했어요. 한번 볼래요?》

김동주는 송금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운전석밑에서 시동돌리개를 찾아들었다. 솜씨를 자랑하지 못해 이만저만 안달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송금주도 호기심이 부쩍 동했다. 그는 동주가 발동만 제대로 걸어도 합격이라고 생각하였다. 어지간한 완력을 가진 어른들도 시동돌리개를 몇번 돌려보고는 고개를 가로 젓는것이 자동차견습생의 속내인데 강냉이송치만 한 팔뚝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해낸다는것은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허풍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시동돌리개가 서너고패 돌아가기 바쁘게 부르릉 하는 발동소리가 울리고 이어서 자동차가 서서히 앞으로 굴러가는것이 아닌가. 동주는 자기의 운전솜씨를 뽐낼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도 만난듯이 차를 몰아 운동장을 한바퀴 돌았다. 이 모든 일이 2분도 못되는 사이에 벌어졌다. 따지고보면 이것도 교육의 덕이 아닐가.

송금주는 이런 순간에조차 교육이라는 확대경으로 세계를 보는 자기자신을 두고 놀랍게 생각하였다. 교육간부학교의 학습과정이 그를 1년사이에 교육지상주의자로 만들어버린것이다.

《어때요. 운전사가 될만 해요?》

김동주는 물걸레로 손을 닦은 다음 운전석을 내리였다. 웃사람한테서 칭찬을 받고싶어하는 천진스러운 심리가 눈망울에 찰랑거리고있었다. 송금주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무렴 되구말구. 견습을 잘했구나. 운전사아저씨한테 절을 해야겠다. 이 차가 어데 차라고 했지?》

《고덕탄광 운수직장 차예요.》

《운전사아저씬 어데 갔니?》

《역에서 석탄을 부리우고 오다가 역장실로 들어갔어요. 지금 역장을 만나고있어요.》

《그 운수직장사람들이 좋은 후비를 키워냈구나! 지금은 어데서나 자동차운전사들을 요구할 때가 아니냐.》

그들이 이런 말을 나누고있을 때 아사직반소매를 입고 물에 적신 수건을 어깨에 걸친 얼굴이 너부죽하고 수염터가 거밋거밋한 사람이 한쪽입귀로 마라초연기를 날리며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자동차앞으로 스적스적 다가왔다. 하늘이 무너져도 끄떡하지 않을듯싶은 그 사나이의 반석같은 몸가짐과 인자하고 부드러운 눈매는 송금주로 하여금 동주가 참으로 훌륭한 교관을 두었구나 하는 판단을 직감적으로 내리게 하였다. 단추들을 채우지 않고 앞자락을 활짝 터친 운전사의 옷섶사이로는 런닝샤쯔우에 록색으로 찍혀진 《천리마》라는 세글자가 유난스레 두드러져보인다.

《만삼아저씨, 내가 어떤 손님을 모셔왔는지 좀 보세요.》

김동주가 힘살이 박달망치같은 운전사의 팔뚝을 잡아흔들며 응석기가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박만삼은 송금주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발디디개우에 벋디디고 서서 운전석의 시동돌리개를 꺼냈다.

《어떤 손님은 어떤 손님, 장거리대포지. 장거리대포도 모르면야 우리 군 사람이 아니지.》

《장거리대포》란 중장거리슛을 잘한다고 영천사람들이 송금주에게 붙인 별명이다.

박만삼은 운전실옆에 달린 발판에 한쪽발을 걸치고 《금주동무, 청진 가서 교육간부학교를 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는 졸업했소?》 라고 물었다.

《네, 졸업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것까지…》

송금주는 목이 메여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가슴을 뜨끔하게 하는 전류 같은것이 온몸에 흘러들었다. 그러고보면 온 군이 그를 기억하고 그의 운명을 지켜보며 그가 고향으로 돌아올 날을 진심으로 기다리고있은것이 아닌가.

《왜 그렇게 놀라오? 우리 군 사람들치고 금주동무를 모르는이가 있는줄 아오. 금주가 경기장에 나설 때에야 우리 군 롱구가 볼만 했지. 그런데 지금은 엉망이요. 지난 봄에 군롱구가 무슨 망신을 당했는지 아오? 도에 올라가서 20등을 했소. 그래도 선수들은 꼴찌를 면했다고 싱글벙글이요. 로동자들이 수천명 와글와글하는 영천골안에 인재고갈이라니 어디 말이 되오. 야 동주야, 이거 오늘 내 연설이 너무 길어지는게 아니야?》

《어서 계속해요. 아저씨 연설은 길수록 재미나요.》

김동주는 기관실뚜껑우에 수직으로 세운 팔로 턱을 고이고 흠뻑 취한듯 한 표정으로 박만삼의 다음말을 기다리였다.

《뭐, 갈수록 재미난다구? 아첨쟁이같은게…》

박만삼은 엄지손가락끝으로 동주의 엉치를 찌르고나서 말을 이었다.

《우리 군이 남들보다 앞서는가 뒤지는가 하는건 교육에 달려있소. 금주동무가 교육부문을 지망한건 아주 잘한 일이요. 학교도 졸업했으니 이제는 고향에 발을 붙이고 우리 탄부의 자식들을 잘 키워주오.》

《로동계급의 이름으로 부탁하오.》

김동주가 박만삼의 말투를 그대로 본따서 하는 말이였다. 그러나 박만삼은 자기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한것 같은 그 말에 까박을 붙이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 조향륜을 잡았다.

《동주야, 발동을 걸어라. 금주동문 여기 와앉소. 자, 그럼 한바탕 달려봅시다.》

화물자동차 《승리-58》은 영천읍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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