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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서포땅의 녀인들

최학명

1


깊은 밤이였다.

역구내를 대낮같이 환히 밝히던 불빛마저 꺼지자 한순간 모든것이 고요한 정적속에 잠들어버린듯 했다.

렬차정지신호인 붉은 등만이 외로이 빛을 발산하며 두줄기로 뻗어나간 철길을 어슴푸레 비쳐주고있었다.

바로 그로부터 얼마간 떨어진 역사앞 돌의자에 두 녀인이 아까부터 등을 맞대고 졸고있었다.

《에취, 아- 아, 에취.》

녀인의 요란한 재채기소리가 들려왔다. 사레가 들린듯 련이어 터뜨리는 서포1동 녀맹위원장 안영옥의 기침소리에 그와 등을 맞대고 깜박 단잠들었던 리순희는 와뜰 놀라 눈을 떴다.

《에 - 칩다.》

이미 선기가 나기 시작한 9월 중순이라 낮에는 아스팔트길을 화끈 달굴 정도로 열기를 내뿜다가도 밤이면 덧옷을 껴입고도 온몸이 으스스해질 정도로 소슬바람이 불며 기온이 내려간다.

안영옥은 으시시 몸을 떨고나서 그러지 않아도 밭아보이는 목을 후렁후렁한 잠바옷속에 자라처럼 깊숙이 파묻으며 잠기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순희부원, 이거 오늘 밤엔 기차가 안 들어오는게 아니야? 지금 몇시나 됐을가?》

순희는 손전지를 켜들고 손목시계를 비쳤다.

시계바늘이 열두시반을 가리키고있었다. 무슨 밤이 이리도 길담. …

정말 공연한 헛수고를 하는게 아닐가?

순희의 머리속에 불현듯 시녀맹위원회에 회의를 가면서 당부를 거듭하던 구역녀맹위원장 허정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순희동무, 지금 북부지구로 가는 렬차들이 때없이 역에 들어서군 한다는걸 잘 알지. 회의가 끝나면 인차 올테니 그동안 근무초소의 일을 부탁해.》

허정희, 순희의 눈앞에는 웬일인지 구역녀맹부원으로 배치받던 날 구역녀맹위원장 허정희를 처음 만나던 때의 일이 삼삼히 밟혀왔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구역녀맹위원장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순희의 첫눈에 띄운것은 보통의 녀인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별로 찾아보기 힘든 너무도 평범한 녀인이였다.

그러나 자기소개가 끝난 후 그가 내지른 탄성이야말로 순희가 마음속으로 상상해보던 첫 인사와 너무나도 거리가 먼것이였다.

《아유- 어쩜 이리 고울가?

구역당에서 전화가 왔길래 어떤 동무가 오는가 해서 목이 빠지게 기다렸더니 글쎄 이런 미인이 나타날줄이야.

축하해요! 우리 손잡고 같이 일해보자요.》

무랍없이 손을 잡으며 반갑게 하는 그의 인사에 순희의 얼굴은 순간에 딸기빛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저… 많이 도와주십시오.》

《정말 잘됐어요. 녀맹부원이면 만명이 넘는 우리 구역녀맹의 얼굴과도 같은데 이렇게 키도 쑥 빠지고 인물도 훤한 동무가 왔으니 마음이 다 놓이누만요. 노래춤은 잘해요? 어마나, 화술도 문제없다구요. 아유, 이런 기막힐데라구야. 그러니 동문 타고난 녀맹부원감이로군요.》

맞대놓고 하는 칭찬에 더욱 면구스러워진 순희는 그날 어떻게 녀맹위원장의 방을 나섰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였다. 오십고개를 바라보는 녀맹위원장 허정희는 순희에게 있어서 상급이라기보다 이모나 맏언니와도 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따뜻한 존재였다. …

회상에서 깨여난 순희는 자리에서 움쭉 일어섰다.

《왜 일어나? 네가 일어나니까 등이 막 서늘해지누나.》

잠기에 젖은 안영옥의 눈이 갑자기 올롱해졌다.

안영옥은 자기보다 거의 열살이나 아래인 순희를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구역녀맹부원이라고 깍듯이 존대해 부르다가도 이렇듯 단둘이 있을 때에는 너나들이하며 허물없이 지내군 한다.

《좀더 눈을 붙이라요. 난 좀…》

순희는 하얀 덧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아- 떨려.》

몸을 으시시 털고난 안영옥은 조는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옛말 하나 해줄가. 어느 추운 겨울날 밤에 두 부부가 험한 령을 넘다가 인가도 없는 령중턱에서 밤을 샌 일이 있었대. 그런데 바람이 어찌나 쌩쌩 불고 눈이 많이 쌓였는지 불조차 피울수가 없었더라나. 자칫하면 모두 얼어죽을판이였어.

그래 어떻게 했는줄 알아? 금방 시집장가간 젊은 부부는 서로 꼭 껴안고 몸을 덥히고 늙은 부부는 등을 맞대고 밤을 새웠대. 날이 밝은 담에 보니 젊은 부부는 꽁꽁 얼어서 다 죽게 되고 등을 맞댄채 밤을 샌 늙은 부부는 하나도 일없었더라는거야. 그래서 그담부터 사람들은…》

안영옥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다시금 요란히 재채기를 해댔다.

《감기 걸리지 않았어요? 좀 든든히 입고 나올게지.》

순희의 걱정스런 물음에 그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글쎄 망녕들었지. 홑내의바람인줄도 모르고 잠바옷만 대충 걸치고 뛰여나왔다니까. …》

일단 입만 벌리면 종조리새 열씨까듯 자신을 다잡기 힘들어하는 녀인이다.

《…글쎄 엊저녁에 애아버지가 아이들처럼 뒤등에 뭔가 감춰가지고 별스레 환한 얼굴로 들어오는게 아니야. 싱글벙글해서 날 보고 하는 말이 눈을 감으라나. 그래서 눈을 감았지 뭐. 눈을 뜨라고 해서 떠보니 호호, 무언지 아니? 요즘 류행으로 도는 레스달린 분홍색내의더구나. 애아버지가 얼굴이 시뻘개지며 하는 말이 기술혁신을 잘해서 상으로 탄거라나. 빨갛게 익은 얼굴에 그 말이 죄다 거짓이라는걸 빤히 말해주는데두 말이야. 그래서 시침을 뻑 따구 시누이에게 주는게 어떠냐구 했지 뭐. 세대주가 도리질하며 더듬더듬 털어놓는 말이 래일이 당신 생일이여서 우정 사왔다는거야. 〈식솔많은 우리 집안의 맏며느리일도 할래, 입심드센 가두녀성들의 대장노릇도 할래, 물젖은 손 아래목에서 말려볼새 없이 뛰여다니는 당신앞에 늘 미안한 심정이였는데 뒤늦은감은 있지만 오늘은 꼭 이 새옷을 입소.〉 뭐 이러는게 아니가. 야, 그 말 듣고보니 속이 알찌근한게…

난 산이 커야 그늘이 크다구 가뜩이나 키작구 체소한 우리 애아버지가 주대까지 약하구 속도 여려서 큰일 못칠 졸장부로구나 하고 늘 불만이였더랬는데 그때 보니까 속두 깊구 뜨거운게 역시 사내대장부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니까.

그래 부끄러운 생각두 잊구 그 자리에서 내의를 훌 갈아입었지 뭐. 하긴 뭐 우리 나이에 그런 내우를 할 필요두 없긴 하지만…》

얼굴표정 한번 달리 안하고 마치 남의 얘기하듯 좔좔 내리엮는 영옥의 이야기에 순희는 그만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런데 글쎄 이런 꼴불견이 어디 있겠니? 아, 몸매 형클어진지 언제게 몸에 착 달라붙는 그런 내의를 사왔을가? 아직도 날 처녀때처럼 생각하는가봐. 허리는 깍두기단지처럼 굵어졌지 엉치는 함지박이 되였으니 정말 망측하다는건. 그런데두 우리 세대준 그저 곱다, 좋다, 잘 어올린다 추어올리며 그냥 입고있으라고 우기겠지. 그때 별안간 문이 열리며 고급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들어서지 않았겠니. 호호, 그래 내의바람에 부랴부랴 덧옷을 걸치고있다가 녀맹초소근무시간이 다 됐다는 생각에 그냥 달려나왔단다. 아마 지금쯤 애아버진 빈 이부자릴 걷어안고 속이 막 쏴서 잠두 못 잘게다. 난 여기서 저때메 떨고있는줄도 모르고…》

《호호호!》 순희는 끝내 허리를 잡고 웃었다.

눈물이 찔끔 나도록 한바탕 웃음을 쏟아버린 그는 손수건을 꺼내 눈주위를 닦았다.

《언니가 춥다는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그렇게 살뜰한 남편이 사다준 옷을 입었으니 지금 속은 불덩이처럼 확확 달았을거예요.》

안영옥은 기겁한듯 손을 홰홰 내저었다.

《에, 에- 말두 말아. 너무 뜨거워 얼어죽겠구나.》

둘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거 누구요?》

전지불이 얼추 비치더니 저벅저벅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둥글모를 쓴것으로 보아 역에서 일하는 철도사람 같았다.

그들은 앉았던 돌의자에서 냉큼 일어섰다.

《허허, 이 아낙네들이 정말 여기서 밤샘을 할 작정인가?

그러다 바깥주인들한테 쫓겨나면 어쩔려구.》

혀를 끌끌 차며 다가선 목소리의 임자는 서포청년역의 역장 리현일이였다. 거방한 체구며 젊은이들처럼 활달한 걸음씨, 왕성한 정열이 뿜어져나오는듯 한 어글어글한 두눈으로 하여 상대방이 저도 모르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리현일은 북부전역으로 떠나는 렬차들이 때없이 들이닥치군 하는것으로 하여 오늘도 침식을 현장에서 하고있었다. 전지불이 한쪽구석에 세워놓은 《녀맹돌격대근무초소》라고 쓴 명판에 가서 멎었다.

《흠, 녀맹돌격대근무초소라. 잡도리를 단단히 차렸는걸.》

혼자소리처럼 외우는 역장의 말이였다.

순희의 머리속에는 서포청년역에 녀맹돌격대근무초소를 내오던 일이 주마등처럼 안겨들었다.

…무더위에 소뿔도 휘여든다는 8월도 다 지난 어느날 순희는 허정희와 시녀맹위원회에 회의를 갔다가 돌아오고있었다.

아침에 떠날 때까지만 해도 푸르청청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던 그들은 무성한 가로수밑에 뛰여들었다.

《에, 다 젖었구나. 장마철도 다 지났는데 무슨 비가 이렇게 올가?》

비에 젖은 머리칼을 털던 허정희가 꾸역꾸역 몰려드는 구름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아마 풍년비일거예요.》

《풍년비?》

《그럼요. 지금 한창 곡식이 여물어가는 때니까 그에 필요한 수분도 보장해주고 또 가을남새도 비가 와야 하거던요.》

순희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호호, 그러니까 풍년비란 말이지. 음, 이제보니 우리 순희부원이 대단한데, 자연현상 하나를 놓고도 전국가적범위에서 생각할줄도 알고…》

허정희는 머리를 끄덕이며 사랑스러운 눈길로 순희를 바라보았다.

《녀맹위원장동지, 우리 뛰여갈가요. 이젠 거의다 왔는데…》

《남들이 웃지 않을가?》

《까짓거, 뭐래요. 자, 하나, 둘…》

두 녀인은 즐겁게 웃으며 쏟아져내리는 비발속으로 달음박질쳐갔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그 시각 우리 조국의 북변땅 한끝에서 해방후 기상관측이래 처음 보는 무서운 돌풍과 무더기비에 의하여 류례없는 대재앙이 들이닥친줄 전혀 알수 없었다.

하늘이 꿰지기라도 한듯 컴컴하게 몰려든 비구름이 북부지구의 상공을 떠돌며 낮에 밤을 이어 창살같은 비줄기를 퍼부어댔다.

골짜기를 메우며 흘러내린 산사태와 큰물에 철길과 다리, 도로가 뭉청 끊어지고 전력공급과 통신이 완전히 두절되였다.

범람하던 탕수는 세찬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주택지구와 공장, 기업소, 학교와 병원을 사정없이 집어삼켰다.

모래와 자갈속에 참혹하게 묻혀버린 들판에서는 뿌리채 뽑혀 넘어진 아름드리나무들이 사납게 불어치는 가을바람에 가지를 떨며 앙칼진 소리만 내고있었다.

세계가 깊은 동정과 우려에 잠겨 조선을 지켜보고있을 때 우리 당은 200일전투의 주타격방향을 북부지구 피해복구전투에로 돌리고 온 나라 천만군민에게 일심단결의 거대한 위력으로 북부지구 피해복구전투에서 기적적승리를 안아올것을 호소하였다.

억만금을 쏟아붓고 나라의 재부를 통채로 기울여서라도 당장 들이닥칠 엄혹한 강추위전으로 북부피해지역 인민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시려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숭고한 이민위천의 뜻을 받들어 온 나라 천만군민이 산악같이 떨쳐나섰다. 려명거리건설장과 세포등판, 백두전구를 비롯하여 200일전투의 주요전구들마다에 전개되였던 건설주력부대들과 인민군장병들이 일제히 북부전역을 향해 렬차와 자동차로, 배길과 도보로 강행군에 올랐다.

온 나라가 북부피해지역 복구전투로 불도가니마냥 부글부글 끓던 어느날 구역당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온 허정희는 급히 녀맹일군들의 모임을 열었다.

《동무들, 당중앙위원회 호소문에는 수송실적이자 곧 피해복구속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서포땅엔 시적으로도 제일 큰 화물역이 있어요. 지금 이곳으론 하루에도 수백톤의 물동량과 수십대의 차량들이 지나가고있습니다. 기관사들을 비롯한 승조원들모두가 침식을 잊어가며 수송전투에 떨쳐나섰어요. 난 우리 녀맹일군들로 서포청년역에 근무초소를 내오고 전시수송에 나선 수송전사들을 돕자는걸 제의합니다.》

정희의 제의는 모두의 한결같은 찬동을 받았다.

여기저기서 좋은 의견들이 쏟아져나왔다.

부원인 전련희는 아침마다 녀맹원들이 역전에 나가 경제선동을 벌려 철도종업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자고 했고 안영옥은 근무초소에 기관사와 승조원들의 도중식사와 간식들을 준비해두었다가 렬차에 실어주자고 했다.

하나같이 좋은 의견들이였다. 이렇게 되여 서포청년역이 생겨 처음보는 녀맹돌격대근무초소가 생겨나게 되였다.

구역당위원장 봉성권은 이 소식을 듣자 제일먼저 자기의 집에서 적지 않은 량의 식량과 고기를 비롯한 부식물을 준비하여 아무도 모르게 슬그머니 안해를 시켜 구역녀맹위원회에 가져다주게 했다.

《그저 평범한 가두녀인의 성의라고 하오. 이름일랑 아예 적을 생각 말구.》

서포청년역의 녀맹돌격대근무초소는 이렇게 첫걸음을 내짚었다.… 순희는 또다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녀맹위원회에 볼일이 있어 간 허정희는 아직도 돌아올줄 모른다. 하긴 저녁늦게 회의가 끝난다면 아마 돌아서기 힘들것이다.

집에서 그가 일하는 형제산구역 녀맹위원회까지 출근거리는 거의 20리나 된다.

북부피해지역 복구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정희는 아예 자기의 방에서 침식을 하며 피해복구지원사업에 발벗고 나섰다.

벌써 열흘나마 집에도 들어가보지 못했으니 안해를 기다리는 남편과 대학에 다닌다는 딸애앞에 본인이 미안한것은 두말할것 없고 같이 일하는 순희로서도 보기 딱할 정도였다.

그러니 오늘 밤 그가 집에 들려 하루밤 쉬고 온다면 사실 순희로서도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아유, 담배연기야. 에취-》

안영옥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리현일은 허허 웃고나서 담배불을 발로 비벼 꺼버렸다.

《허허, 고뿔 들렸군. 아무래도 안되겠소. 우리 철도종업원대기실로 가자구. 거긴 뜨뜻해. 더운물도 있고…》

역장의 말에는 따뜻한 인정미가 넘쳐흘렀다.

안영옥의 얼굴에 금시 화색이 돌더니 묻는듯 한 눈길을 순희에게 던졌다. 순희는 한순간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들어가자구. 이 역장의 체면도 봐줘야지. 우리 종업원들이 날 욕해. 우리 철도를 도우려고 나온 임자들을 푸대접한다고 말일세.

정 안 들어가겠다면 나도 장밤 여기서 버티겠네.》

리현일이 강경한 태도로 나오자 그러지 않아도 동요하던 순희의 마음이 돌아서고말았다.

(가서 조금만 몸을 녹이자. 기차가 들어오면 기적소리가 울릴텐데 그때 뛰여나오면 되겠지.)

이런 자체위안까지 하고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아담하고 정갈한 종업원대기실은 역장의 말대로 뜨뜻한 무동력 열난방으로 화끈 달아올랐다. 리현일이 언제 시켰는지 종업원식당의 야간근무성원이 그들에게 더운물을 떠왔다.

《이거 역장이라는게 동무네들이 벌써 며칠째나 밖에서 떨고있는걸 뻔히 보면서도 방 하나 따로 내줄 생각을 못했거던. 내 래일 조직사업을 해서 역사건물에서 제일 좋은 방을 하나 내주겠소.》

순희에게는 역장의 말이 눈물이 나게 고마왔다.

처음 녀맹근무초소를 어디에 정하는가를 토론할 때 안영옥을 비롯한 일부 녀맹일군들이 아직 날씨도 더운데 시간교대제로 그냥 밖에서 새우자고 주장했다. 그 바람에 순희는 이왕 철도를 도와주자고 시작한 일인데 페를 끼칠 일을 하고싶지 않아 그만 깊은 생각없이 머리를 끄덕였던것이다. 그런데 그때 두팔을 걷어올리며 《아, 전투근무초손데 가설건물이나 새나. 인민군대 보초병들을 좀 보라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밖에서 전투근무를 수행하는걸.》하고 장담해나섰던 안영옥이 이렇게 제일먼저 손을 들고 나설줄이야.

순희가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그의 손전화에서 통보문신호음이 흘러나왔다.

이밤중에 누가 통보문을 보내왔을가? 혹시 구역녀맹위원장이…

순희는 급히 손전화기를 꺼냈다.

《새벽 2시 서평양역에 도착함.》

발신인의 이름을 훑어보던 순희의 얼굴이 한순간에 확 밝아졌다.

두달전 최전연부대의 싸움준비완성을 위한 훈련판정으로 출장을 갔던 아버지가 돌아왔다는 딸애의 전화였다. 결혼생활을 시작한지 십년이 되여오지만 군관인 남편이 줄창 출장을 다니는것으로 하여 단란한 가정생활을 별로 하지 못한 그는 지금도 남편앞에 서기만 하면 첫날 새색시처럼 공연히 얼굴이 달아오르며 심장이 콩콩 뛰군 한다.

(아이, 어쩌면 좋아? 저녁전에라도 소식을 알았다면…)

두달만에 돌아온 남편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자기가 없다는것을 알면 얼마나 서운해할텐가?

순희는 급히 손전화로 집전화번호를 눌렀다.

자기를 대신하여 더운 밥 한그릇이라도 대접하게 하고싶었다.

올해 11살나는 그의 딸 김태향은 초급중학교 1학년생이다.

학급적으로 제일 공부를 잘하는 최우등생일뿐아니라 늘 집떠나 사는 군관인 아버지와 녀맹일에 바쁜 어머니를 대신하여 밥도 짓고 빨래도 곧잘하는 딸애를 두고 이웃들은 《진짜 가정주부》라고 불렀다.

그런 기특한 딸애를 남편은 끔찍이도 고와했다.

호출신호를 여러번이나 울렸으나 좀처럼 집전화는 응답할줄 모른다. 아무리 깊은 잠에 들었다고 해도 지금쯤은 일어났을텐데…

간혹 일이 몰리여 늦은 밤중에 집에 들어서는 경우에도 잠기가 빠른 딸애는 한두번 문두드리는 소리에도 제꺽 일어나 달려나오군 했다.

의혹이란 참 별난것이여서 생각을 굴리면 굴릴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이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

학교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책에만 여념이 팔려 차사고나 치지 않았을가? 혼자 다림질을 하고나서 전기다리미 스위치를 뽑지 않아 집에 화재라도 난것이나 아닐가? 아니면…

무서운 환영들이 련속 가지를 치고 꼬리를 물었다.

불안해하는 순희의 모습을 바라보던 안영옥이 그 사연을 물었다.

《원, 우리끼린데 걱정말고 가봐.

아-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있지 않니.》

사연을 듣고난 안영옥은 이렇게 장담해나서며 등을 떠밀었다.

하여 리순희는 개운치 못한 심정을 안고 집을 향해 급한 걸음을 내짚었다. …

반시간나마 부지런히 걸어 석전동에 있는 자기 집에 거의 다달았을 때 별안간 그가 떠나온 서포역쪽에서 기적소리가 길게 울려왔다. 순희의 발걸음이 무춤 멈추어섰다.

그러나 다음순간 안영옥의 목소리가 귀전을 울렸다.

《아-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있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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