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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0 회


40


살을 에이는듯한 추위는 계속되고있었다.

그동안 대원수님께서는 계속 바쁘신 나날을 보내셨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마을의 학습반원들과 공부를 하셨다. 한편 명구와 보패누나의 학습도 도와주셨고 토요일이면 만경대에 가시여 할아버님의 일도 도와드리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응화또래들을 모아놓고 광호가 글을 배워주는 야학방도 돌보시였다.

그리고는 월요일 아침에 칠골로 오시군 하셨다.

어느 토요일 저녁이였다.

대원수님께서는 이날도 만경대집에 가셨는데 할아버님께서 보자기에 싼 꾸레미를 꺼내놓으시는것이였다.

《아버지께 뭐 책을 보내달라구 부탁했더랬니?》

《예, 그래요! 책을 보내여왔나요?》

대원수님께서는 몹시 기뻐하시며 꾸레미를 받아드셨다.

《펼쳐보아라. 인편에 보내왔더구나. 그런데 놈들의 눈에 띄여서는 안되는 책이라구 그러더구나.》

《알겠어요. 할아버지!》

대원수님께서는 보자기를 풀어보셨다. 거기에는 두툼한 책 두권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이책저책에서 뜯어모아 만든 책들이였다. 단행본책에서 뜯은것도 있었고 잡지에서 뜯은것도 있었다.

거기에는 등사판으로 민것도 더러 있었고 아버님께서 정성들여 써넣은 부분도 적지 않았다. 종이에 보풀이 인것으로 보아 여러번 읽은 책이 분명했다.

대원수님께서는 우선 목록을 훑어보셨다. 한 책에는 사회주의나라 쏘련에 대한 글들을 모아놓았는데 거기에는 《레닌에 대하여》, 《사회주의10월혁명의 승리》, 《인류사회는 어떻게 걸어왔는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혁명이란 무엇인가》, 《제국주의는 왜 멸망할수밖에 없는가》… 이런것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책에는 조선에서 벌어지고있는 이모저모에 대한 글들을 모아놓았는데 거기에는 《불쌍한 남매》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있었다.

《야, 정말 좋은 책들이구나.》

대원수님의 가슴은 흥분과 환희로 높뛰였다.

대원수님께서는 그날저녁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셨다. 다음날도 종일 책을 읽으셨다. 이리하여 일요일 밤까지는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책들을 절반나마 읽으셨다.

칠골로 돌아오신 대원수님께서는 들기름먹인 종이로 두 책을 잘 싸서 작은 나무상자에 넣어 굴뚝모퉁이에 깊이 묻어놓으셨다. 그러시고는 밤이 깊어진 다음 몰래 책을 꺼내다가 윤병이, 호철이들과 둘러앉아 소곤소곤 읽군 하였다. 읽으면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나고 재미있는 책들이였다. 그러나 책읽기모임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도록 엄하게 단속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였다.

이날도 대원수님께서는 마을의 학습반원들과 함께 웃방에서 공부를 하고계셨다. 마을의 동무들이 모두 모였고 윤병이와 호철이도 함께 공부하고있었다.

그들이 이날 배운 과목들의 복습과 숙제를 끝내고 예습으로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이때 만경대에서 한 젊은이가 외가집에 찾아왔다. 만경대할아버님께서 보내신 손님이였다.

그는 외할아버님을 조용히 만나서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하고 그길로 돌아갔다. 손님이 돌아간 후에 외할아버님께서는 가슴을 치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으셨다.

얼마후에 외할아버님께서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방문고리를 잡으시려다가 그만두시고 외할머님이 물레질을 하고있는 아래방으로 들어가셨다.

외할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은 외할머님께서는 물레손을 놓더니 얼굴빛이 까매지셨다.

외할아버님께서는 비분과 흥분을 억지로 가라앉힌 후에 대원수님을 자기 방으로 부르셨다.

학습에 열중하고계시던 대원수님께서는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시고 외할아버님의 방으로 들어가셨다.

외할아버님께서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시고 계속 한숨만 짓고계셨다. 대원수님의 머리에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하셨다.

대원수님께서는 초조한 기분으로 외할아버님의 얼굴만 바라보고계셨다.

외할아버님께서는 한군데만 오래도록 바라보시면서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시더니 대원수님을 바라보시며 입을 여시였다.

《너의 아버지가 왜놈들에게 또다시 체포되였다누나. 그래서 네가 잠간 집에 다녀갔으면 좋겠다구 네 어머니가 인편에 기별을 해왔다누나.》

외할아버님의 목소리는 자못 떨리셨다.

《체포요?》

대원수님께서는 눈앞이 아찔해지셨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꺼꾸로 올라가는것 같았고 그자리에 마구 쓰러질것만 같았다. 그래서 대원수님께서는 밖으로 뛰여나가셨다.

대원수님께서 갑자기 외할아버님의 방으로 불리워들어가는것을 본 동무들은 저저마다 귀를 강구고 외할아버님의 방에서 새여나오는 말소리를 듣고있었다. 서로 바라보며 숨소리마저 죽이고있던 그들은 대원수님께서 밖으로 나오시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일제히 밖으로 뛰여나왔다.

대원수님께서는 동무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겠는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으셨다. 동무들도 적당한 위안의 말마디를 찾지 못하고있었다.

대원수님께서는 울타리를 향해 서계셨고 동무들은 그이의 뒤에 멍하니 서있을뿐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께서는 놈들의 악독한 고문으로 골병이 들어 몸이 부었다내렸다 하셨는데 또 체포되여 놈들에게 악형을 받고계시겠으니 그 몸이 어떻게 되셨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대원수님의 머리에는 강동에서 왜놈경찰에게 잡혀가시던 아버님의 모습이며 그후 평양감옥에서 면회할 때의 모습이며 감옥에서 나오실 때의 모습 그리고 누워서 신음하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서로 엇바뀌면서 우렷이 떠올랐다. 아버님의 그 넓으신 가슴에 안기여 목놓아 울기라도 했으면 속이 후련해질것만 같으셨다.

대원수님께서는 뒤에 정다운 동무들이 서서 근심어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있다고 생각하니 그대로 서계실수가 없었다.

대원수님께서는 천천히 동무들이 서있는쪽으로 몸을 돌리셨다.

호철이가 먼저 대원수님의 앞으로 다가서며 《성주!》 하고 소리치며 대원수님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는 얼굴을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좀처럼 눈물을 모르던 호철이건만 그의 두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나왔다.

하늘처럼 믿고있던 그리운 동무, 자기를 위하여 친형제보다도 더 살뜰하게 보살펴주시면서 옳은 길로 이끌어주었고 래일의 꿈을 안겨주었으며 생사고락을 같이하자고 굳게 맹세했던 동무와 이렇게 헤여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모든 희망과 꿈 그리고 손에 잡힐듯이 바라보이던 아름다운 미래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호철이의 눈앞에는 지난날의 잊을수 없는 가지가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잊을수 없는 즐거운 나날이였다. 정말 보람있고 값있게 지나간 세월이였다.

(그 누가 동무들의 장래를 위하여 그처럼 애타게 도와주며 이끌어줄수 있단 말인가. 그처럼 좋은 동무의 아버님을 왜놈들은 무엇때문에 잡아간단 말인가. 성주는 앞으로 어떻게 될것인가?)

호철이는 안타까이 몸부림쳤다.

대원수님께서는 눈물어린 시선으로 동무들을 바라보셨다. 친형제들처럼 사귄 잊을수 없는 얼굴들이였다. 이 동무들을 놓고 다시 산설고 물설은 북쪽 머나먼 곳으로 갈것을 생각하니 북받쳐오르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으셨다.

어느덧 윤병이, 덕범이, 경만이들도 대원수님의 손을 으스러지게 그러쥐고 흐느끼고있었다.

그리고 다른 동무들도 모두 팔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네가 가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라니?》

호철이는 목갈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것은 호철의 심정만이 아니라 모두가 하고싶은 말이였다. 대원수님을 위로해야 할 그들이였건만 그들은 이렇게 설음이 북받쳐올랐던것이다. 오히려 대원수님께서 그들을 위안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셨다.

《울지들 말어. 운다구 소용이 있니. 저기 밖으로들 나가자.》

대원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동무들과 마지막으로 마주서게 되시니 감회가 깊으시였다. 새삼스럽게 지난날의 가지가지의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학습반을 조직하고 공부한 결과 전원이 우수한 성적을 쟁취하게 되였으며 쓸모없던 산판을 리용하여 새 운동장을 닦으면서부터 두마을의 동무들이 친해지게 되였을뿐만아니라 거기서 뽈차기련습을 하여 보통학교를 이긴 사실이며 일요일에 만경대에 가서 재미있게 놀던 일이며 왜놈들의 전기시설공사와 공장건설을 반대하여 싸우던 일이며 윤병이, 호철이들과 함께 중학교입학검정시험을 위하여 낮에 밤을 이어 공부하던 잊을수 없는 지난날들이 련속 그림처럼 나타났다. 보람차고 의의있는 나날들이였다.

그러나 대원수님께서는 동무들과 하려던 일을 다하지 못하셨다. 지금 겨우 터전을 닦기 시작한데 불과하다고 생각하셨다. 이제부터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걸고 대들보를 올려 집을 짓기 시작하려고 하였던것이다.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책을 기본으로 하면서 앞으로 더 모을수 있는대로 좋은 책들을 모아가지고 책읽기모임을 크게 하려고 생각하셨던것이다.

이 구상은 대원수님의 머리속에 날마다 무르익어가고있었다. 이것은 오래지 않아 동무들과 의논하고 우선 시험적으로 칠골학습반에 망라된 믿음직한 아이들로써 조직해보고 중학교에 가면 본격적으로 해보리라고 생각하셨던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뜻하지 않던 일에 부딪치지 않았는가.

《너희들과 오래동안 같이 있게 될줄 알았더니 그렇게 되지 못하는구나. 너희들 공부를 잘해라. 윤병이하구 호철이는 꼭 상급학교에 입학하구 경만이랑 덕범이두 꼭 중학교에 가도록 해라. 그리구 우리가 왜 공부해야 하는가를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찾기 위해 공부한다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단 말이야.》

동무들은 대원수님으로부터 늘 듣던 이야기이지만 귀를 가다듬고 그이의 말씀을 들었다.

《그럼 갔다가 다시 나오지 않겠니?》

호철이가 매우 놀라는 얼굴로 물었다.

《나오지 못하게 될거야. 내 백번 죽어두 아버지의 원쑤를 꼭 갚고야말테다.》

대원수님께서는 두주먹을 부르르 떠시며 동무들에게 힘있게 대답하셨다. 그리고는 고개를 드시고 먼 북쪽하늘을 바라보셨다. 저녁노을이 비친 대원수님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의 빛이 넘쳐흘렀고 두눈에서는 복수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셨다.

《참! 고놈의 불개미같은 왜놈새끼들이 거기까지 따라가서 애를 먹이누나.》

호철이가 이를 부드득 갈며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강도 왜놈새끼들이란 종자까지 싹 없애버려야 돼.》

덕범이의 분격에 찬 말이였다.

대원수님께서는 잠시 학교와 마을을 내려다보셨다. 고향처럼 잊을수 없는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학교와 마을이였다. 정든 학교와 마을의 모습이 영원히 기억에서 사라질것 같지 않으셨다.

대원수님께서는 동무들과 오래 이야기하고싶으셨다. 그러나 벌써 해는 서쪽에 기울어졌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으셨다. 외할아버님과 외할머님의 이야기도 들어야 했고 선생님도 찾아뵈와야 했고 마을의 할아버지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떠나셔야 했다. 그리고 보패와 명구도 만나 이야기해주어야 했고 맏외삼촌어머님도 만나야 하셨다.

《그럼 여기서 헤여지자. 난 떠날 차비를 좀 해야겠어.》 하고 대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야! 정말 이렇게 갑자기 헤여질줄은 몰랐구나. 언제면 왜놈들을 꺼꾸러뜨리구 마음놓구 살수 있을가?》

윤병이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당장 떠날셈이냐?》 하고 호철이가 물었다.

《오늘저녁으로 만경대에 갔다가 래일아침 기차로 떠나야겠어. 개천까지는 기차루 갈수 있으니까. 단 하루라도 빨리 가봐야겠어.》

동무들은 산에서 내려와 운동장을 지나 마을로 내려왔다. 이때 대원수님께서는 윤병이에게 조용히 만나자는것을 귀속말로 이야기하시고 동무들과 헤여지셨다.

대원수님께서는 그길로 량선생님을 찾아가셨다.

량선생님은 대원수님의 이야기를 듣더니 깜짝 놀라는것이였다.

《성주학생! 그동안 학교와 동무들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소. 동무들이 같이 상급학교에 다니는것을 보려구 했더니 뜻밖에 불행이 닥쳐왔구만. 왜놈들을 이 땅에 그대로 두고는 하루두 편한 잠을 잘수 없소. 나같은 사람은 이 모양으로 살지만 성주학생은 아버님의 뜻을 이어 잘 싸워주기 바라오. 가서 형편을 보구 될수록 다시 나오라구!》

《예!》

대원수님께서는 생각한바가 있었지만 그저 이렇게 대답하고마셨다.

《선생님, 그동안 저때문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앞으로 윤병이랑 호철이랑 꼭 상급학교에 다니도록 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애들에 대해서는 걱정말라구. 이젠 그만했으면 자신있어. 그애들은 내가 책임지겠어.》

량선생님은 문밖에까지 따라나와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우거나 또 어떤 일을 하거나 아버님의 뜻을 꼭 이으라고 신신당부하는것이였다.

대원수님께서 량선생님네 집뜨락을 돌아서시는데 윤병이가 백양나무아래서 기다리고있었다.

《윤병이, 네게 한가지 부탁할것이 있어.》

《뭔데?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게.》

그러나 대원수님께서는 좀체로 입을 여시지 않으시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시는것이였다.

《말해줘. 성주가 하라는것이면 무엇이든지 하겠대두 그래.》

윤병이는 초조한 얼굴로 대원수님을 쳐다보았다.

《우리들이 몰래 읽던 그 책을 윤병이 네게 넘겨주고 가려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그거야 무척 고마운 일이지만 그 책을 두고가두 괜찮겠어?》

《난 벌써 여러번 읽었으니까 두구가두 괜찮아. 그런데 너 혼자서 보라구 두구가겠다는건 아니야. 우선 학습반동무들이 모여서 읽구 앞으로 중학교에 가서는 책을 더 많이 모아가지구 책읽기모임을 크게 벌려놓으란 말이야. 말하자면 네가 비밀책읽기모임의 책임자가 되여 하란 말이야.》

《내가 그런걸 꽤 해낼가?》

《못할건 없어. 처음부터 크게 벌려놓지 말구 적게 시작해가지구 점점 크게 벌려놓는게 좋을거야. 문제는 어떤 아이들을 넣겠는가를 잘 생각해야 해. 우선 일본놈들을 누구보다도 미워하는 아이들을 골라야 하구 어떤 일이 있더라도 비밀을 지킬수 있는 그런 아이들을 골라야 할거야. 사실은 며칠후에 우리 학습반 동무들하구 의논을 하구 시작을 하려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떠나게 되지 않았니? 우리가 중학교에 가자는것두 강도 왜놈들이 만들어놓은 책이나 배우자구 가는것이 아니야. 오히려 그놈들이 못보게 하는 책들을 구해서 공부를 해야 하구 책을 읽기만 할것이 아니라 왜놈들을 쫓아내구 좋은 나라를 세우자는것이 아니겠니?》

《음! 알겠어. 네가 하려던 좋은 일인데 나라두 대신 해야지!》

윤병이의 얼굴에서는 흥분과 결의의 빛이 넘쳐흘렀다.

《그럼 부탁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있어라.》

대원수님의 심정은 매우 서글프시였다.

그런데 윤병이는 얼굴을 찌프리고 매우 근심스러운 얼굴빛을 짓고있는것이였다.

《왜,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대원수님께서 물으셨다.

《별건 아니야. 돈을 좀 구해볼가 했더니 그것두 맘대루 잘 안되는구나.》

《돈은 갑자기 뭘하게?》

《먼길을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할게 아니야? 그래서 어머니께 말했더니 몇집 돌아다녀보기는 했지만 결국 한푼두 구하지 못했거든. 우리 아버지라두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조촌으로 조상하러 갔단 말이야.》

《야, 넌 정말 별걱정을 다하누나. 두다리가 이렇게 성한데 로비없어서 못가겠니? 그리구 우리 외가집에서두 좀 얻구 만경대에 가서두 좀 얻으면 돈걱정은 없어. 그럼 잘 있어라.》

대원수님께서는 윤병이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아흔드셨다.

대원수님께서는 외할아버님과 외할머님앞에서 떠나겠다고 정중히 인사를 드리셨다.

《떠나겠니?》

외할머님께서는 대원수님의 두손을 꼭 잡으시였다. 무어라고 하고싶은 말은 서리고서리였건만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였다.

이때 외할아버님께서 대원수님께 말씀하셨다.

《아마 내나 네 할머니는 너와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외할아버님께서는 침통한 얼굴로 대원수님을 한동안 바라보시더니 말씀을 계속하셨다.

《이미 말한바 있다만 사람이 일생 살아가노라면 탄탄대로만 걷는 법이 아니란다. 앞길에는 높은 산두 있구 깊은 골짜기두 있구 거치른 바다두 있구 험난한 가시밭두 있게마련이란다. 더구나 싸움의 길에 나선 사람의 앞길이란 더욱 험난한 법이니라. 하기야 들에 나는 잡초나 벌레처럼 세상에 태여나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야 무슨 험한 길이 있겠냐만 사람으로 태여났던 보람을 남기려는 사람의 앞길은 무척 험난한 법이란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만 하냐?》

《예!》

《네 아버지가 걷고있는 길이 그런 길이구 네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두 바로 그런 길이란 말이다. 빼앗긴 나라와 짓밟힌 겨레를 구원할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서 내 반생을 바쳐왔다. 내 손때를 먹여키운 청년들이 이미 허다하고 또 그들중에는 큰뜻을 품고 씩씩하게 나가는 믿음직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만 나라의 대들보감이 보이지 않는구나. 너를 내 외손자라고 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같이 살아가는 사이에 나는 네가 품고있는 그릇이 어지간히 크다는것을 발견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그 그릇의 깊이와 무게를 다는 알아내지 못하구있구나. 웅심깊은 지략과 아름다운 마음씨, 꿋꿋한 성격과 너그러운 품성, 나는 네게서 그런것을 발견하구있다. 넓은 바다는 수많은 해초를 기르구 물고기들을 번식시킬뿐만아니라 어지러운 물줄기도 맑게 만드는 법이니라. 나는 네 나이가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 하기야 옛사람들두 열다섯살 대장부라구 했는데 네 나이 열네살이 아니냐. 너는 네가 가야 할 길이 어느 길인지 잘 알구있다구 생각한다. 오로지 그 길에서 너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한몸 바치겠다는 결의를 굳건히 가지구 한본새로 꿋꿋이 나가기 바란다.》

외할아버님의 말씀은 대원수님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어느덧 대원수님께서 칠골을 떠나 만경대에 도착하신것은 퍼그나 가냘파진 달이 동녘하늘에 솟아오른 밤이였다. 안동네로 넘어가는 마지막언덕을 넘으시자 아이들이 왁작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하는지도 알아들을수 있는 다정한 동무들의 목소리였다.

대원수님께서는 발걸음을 멈추시고 아이들이 왁작 고아대는 선창쪽을 한동안 바라보셨다. 달려가시여 동무들에게 떠나게 되였다는 인사라도 하고싶은 생각이 없지 않으셨다. 그러나 집으로 발길을 돌리셨다.

대원수님께서는 희미한 달그림자를 밟으시며 만경대집앞에 걸음을 멈추시고 사립문을 여시였다.

《이제야 오는구나.》 하시며 할머님께서 토방으로 나오시더니 버선발로 안뜨락까지 뛰여나오셨다.

《할머니!》 하며 대원수님께서는 할머님의 품에 안기시였다. 할머님께서도 대원수님의 등을 어루만지시였다.

어느덧 할아버님도 나오시고 작은아버님과 작은어머님도 나오셨다. 모두 울적한 마음들이였다.

《어서들 들어가자.》

할아버님의 말씀이였다.

대원수님을 보시는 순간 할아버님께서도 마음이 언짢으셨으나 그런 내색은 보이지 않으시였다.

대원수님께서는 할머님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래 떠날 차비는 다 됐느냐?》

할아버님께서 물으셨다.

《차비할게 뭐 특별한게 있습니까. 그저 떠나면 되지요.》

《그저 떠나면 되다니. 내가 묻는건 마음의 차비가 됐느냐 말이다.》

대원수님께서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겠는지 알수 없으셨다.

《조선에 나가서 공부를 하라니 그저 나오구 어머니가 들어오라니 그저 들어가구 헤여지게 되니 섭섭하다구 그저 그래서는 안된다. 너두 어머니가 왜 들어오라구 기별했는지 들었지?》

《들었습니다.》

《네 아버지는 그 약한 몸으로 악독한 놈들에게 붙잡혀가서 얼마나 큰 고초를 겪고있겠니.》

할아버님께서는 후 한숨을 내쉬시더니 《정말 살아있어서 살았다구나 하는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살아있다구 하는지 네 어머니의 깊은 속내는 나도 모르겠다.》 하시며 큰 주먹을 눈가로 가져가셨다.

《그러니 잠간 들어왔다 가라는 어머니의 기별을 받은 너는 어떤 마음의 차비를 다졌느냐 그것을 묻는 말이다.》

대원수님께서는 똑바로 앉으시여 할아버님을 쳐다보셨다.

《할아버지!》

대원수님께서는 한동안 할아버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셨다.

《전 아버지의 원쑤를 갚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대원수님의 입술은 걷잡을수없이 떨리셨다. 막 눈물이 쏟아져나올것만 같으셨다. 그러나 대원수님께서는 입을 옥무시고 울음을 참으셨다.

《떠나거라! 내가 그 말을 들으려고 물었다.》

할아버님께서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시더니 말씀을 계속하셨다.

《태평시대에는 누가 애국자인지 모르느니라. 나라에 위험이 닥쳐왔을 때에야 누가 나라를 진정 사랑하는지를 알게 된단다. 네 증조할아버지는 살림이 가난해서 남의 산당집을 얻어가지고 무덤을 지켜주면서 땅뙈기나 얻어부치던 소작인이였느니라. 그런데 미국놈들이 조선을 먹어보려고 검은 배를 타고 대동강에 기여들어와서 백성들의 재물을 로략질하구 사람들을 마구 잡아가구 할 때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앞장에 서서 미국놈들을 대동강에 처넣었다지요?》

《그렇지! 얼마나 장한 일이냐. 네 증조부님이 미국놈들을 대동강에 처넣은것처럼 네 아버지는 오늘 일본강도놈들을 우리 나라에서 쳐물리치구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구 한목숨걸구 싸우지 않느냐. 사람은 제 체통과 피값을 해야 하느니라. 오랑캐놈들한테 구박을 받으며 사는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들과 싸워야 한다.》

이때에 곁에 앉아서 할아버님의 말씀을 듣고만 계시던 작은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앞으로 할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게 되겠는지 모를게다. 명심해서 들어두어라.》

《예!》 하고 대답하시며 대원수님께서는 더욱 정중히 앉으시고 할아버님의 얼굴을 바라보셨다. 언제나 유순하고 부드럽던 할아버님이셨건만 이날만은 엄하고 위엄있는 얼굴이였다. 할아버님께서는 담배불을 끄시더니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네 아버지가 요행 왜놈의 류치장이나 감옥문을 짓부시고 뛰쳐나온다면 너는 아버지의 일을 잘 도와주어야 할것이고 만일 아버지가 다시 감옥생활을 하거나 놈들의 손에 잘못되는 경우라면 두손목을 마주잡고 눈물이나 흘리고있겠느냐? 그래서는 안된다. 아버지가 하려다가 채 하지 못한 일을 네가 해야 한단 말이다. 네 증조부님의 뜻인즉 바루 네 아버지의 뜻이고 네 아버지의 뜻인즉 빼앗긴 내 나라를 다시 찾고 앞으로는 영원히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나라를 튼튼히 꾸리자는데 있는것이 아니냐. 그 뜻을 네가 이어나가야 한단 말이다.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여있는가 말이다.》

《할아버지, 저도 그렇게 결심하고 떠나려고 합니다.》

《암, 그래야지.》

할아버님의 주름진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어리였다. 할아버님께서는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네 어머니도 아마 그런 뜻으로 너를 불렀을게다. 약한 아낙네같으면 남편이 놈들에게 붙들려갔다면 울며불며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강을 건너왔을게다만 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네 아버지가 남긴 일을 너하구 같이하려고 앙심을 먹고있을게다. 내가 하는 말을 알만 하냐?》

《예,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옆에 계시던 할머님께서는 사랑에 찬 얼굴로 한동안 대원수님의 얼굴을 바라보시더니 《용하다. 역시 형직이 아들답다.》 하시며 머리를 끄덕이시였다.

할머님께서는 대원수님을 떠나보내고싶지 않으셨다. 오래오래 같이 있고싶으셨다.

대원수님께서 이리로 오신것을 누구보다 기뻐하신분은 바로 할머님이시였다. 할머님께서는 대원수님을 보실 때마다 아드님까지 보시는것 같았고 아드님이 생각나실 때에는 대원수님을 바라보시며 마음의 위안을 받아오셨던것이다. 그러기에 토요일 저녁만 되면 할머님께서는 언제나 대원수님을 기다리군 하셨다. 대원수님께서 마을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치는것을 보시고는 무척 대견해하셨다.

(어쩌믄 그렇게두 제 아버지를 닮았는지.…)

할머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시며 대원수님께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배워주시는 집앞을 오래도록 떠나지 않으실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사실 할머님께서는 대원수님만 이렇게 늘 같이 있을수 있다면 헤여진 아드님과 며느리에 대한 생각은 한결 덜어질것 같으셨다.

그런데 하루밤만 지나면 마음의 등대이며 희망이였던 대원수님을 떠나보내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오래오래 같이 살줄 알았던 대원수님을 떠나보내게 된 할머님의 심정은 한없이 쓰리고 아프셨다.

이러한 할머님의 심정을 꿰뚫어보신 대원수님께서는 할머님앞으로 다가앉으시며 이야기하셨다.

《할머니, 왜놈들은 멀지 않아서 꼭 망하게 돼요. 왜놈들을 모조리 우리 나라에서 쫓아버리구 아버지, 어머니, 철주, 영주 아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돌아와서 같이 행복하게 살자요.》

《글쎄, 그런 세상이 빨리 왔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내 당대에 그런 세상이 돌아오겠는지?!》

《오지 않구요. 꼭 돌아와요.》

《할아버지나 할머니걱정은 하지 말구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너두 큰일을 하여라.》

할머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손등으로 눈언저리를 누르시였다.

이윽고 대원수님께서는 만경대동무들을 만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목소리라도 한번 더 듣고싶으시여 뜨락으로 나가셨다.

그러나 마을은 무척 고요하였다. 그렇게 동네가 떠나갈듯이 떠들며 놀던 아이들도 모두 돌아가 꿈나라로 헤매는 모양이였다.

대원수님께서는 밤하늘을 쳐다보셨다. 하늘에는 구름 한쪼각 보이지 않는데 수많은 별들만이 반짝이고있었다. 고향마을에서 하늘을 쳐다보는것도 마지막이구나 하고 생각하시니 무척 서글프시였다. 별들도 모두 잘 다녀가라고 손짓하는듯 더욱 반짝이였다.

대원수님께서는 북쪽하늘을 향하여 북극성을 쳐다보고계셨다.

(래일부터 저 하늘아래로 떠나가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니 쓸쓸한 생각이 더욱 사무쳤다.

이때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할머님께서 밖으로 나오셨다.

《할머니, 저 여기 있어요. 곧 들어가겠어요.》

《어서 들어가자. 바람이 무척 차구나.》

대원수님께서는 할머님을 모시고 방으로 들어가시였다.

방으로 들어가시면서 대원수님께서는 작은어머님에게 물으셨다.

《응화가 요즘두 야학에 잘 다니나요?》

《잘 다니구말구. 네가 그렇게 직심스럽게 배워준 덕분으로 아이가 달라졌다구 그애 부모들이 얼마나 기뻐하기에 그러니.》

《책을 읽게 됐다구 공부를 그만두지 말구 계속 열심히 하라구 하세요. 공부한다는건 끝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얘기를 하지. 떠나기 전에 그애들을 한번 만나보구 가는게 좋지 않겠니?》

《짬두 없지만 그만두겠어요. 만나야 뭐 서로 서운하기만 할걸요 뭐. 떠난 후에 공부들을 잘하라는 얘기나 전해주십시오.》

《네가 떠났다는 말을 들으면 광호랑 응화들이랑 무던히 섭섭해하겠는데…》

《만났다 헤지면 더 섭섭할것 같아요.》

《하기는 그럼직도 하다.》

이날 대원수님께서는 자리에 누우시여 많은것을 생각하셨다. 아버님을 다시는 뵈옵지 못할것만 같으셨다.

(나는 그럼 아버님의 가르치심을 더는 받지 못하고 왜놈들과 싸워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시니 대원수님께서는 아버님의 사랑의 품이 더욱 사무치게 그리워지시는것이였다. 앞으로 어느 길을 걸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뚜렷하셨다. 그러나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겠는지 갈피를 잡을수 없으셨다. 실로 대원수님께서 걸으셔야 할 길은 너무나도 험하고 준엄하였다. 이런것을 생각하시는 대원수님께서는 자신도모르게 한숨을 지으셨다.

《왜 아직 잠들지 못하냐?》

대원수님의 곁에 누우신 할머님의 말씀이였다.

《예, 할머님두 아직 잠들지 못하셨군요.》

《어쩐지 잠이 오지 않는구나. 래일 먼길을 걷겠는데 눈을 좀 붙여야 하지 않겠니.》 하시며 할머님께서는 어깨우로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시였다.

할머님의 손길이 어깨에 닿자 대원수님께서는 어린시절의 옛 기억들이 되살아나는것이였다. 밤마다 할머님이나 어머님의 품에서 잠드시던 그 시절이 꿈결마냥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살림은 역시 가난했지만 할머님과 할아버님을 모시고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작은아버님과 작은어머님이 함께 모여살던 그 시절이 무한히 행복하게만 회상되였다.

(이밤이 새면 할아버님과 할머님 그리고 작은아버님과 작은어머님의 품을 떠나야 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대원수님께서는 서글픈 심정을 누를길이 없으셨다.

할머님께서는 손자의 숨결이라도 한번 더 들으시려는듯 대원수님곁에 바투 누워계셨다.

《할머님,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우리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꼭 살아계셔야 해요.》

대원수님께서는 할머님의 목을 그러안으시며 말씀하시였다.

《오래오래 살겠다. 왜놈들이 망하는걸 보기 전에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갈수 없을게다.》

할머님께서는 대원수님을 품에 꼭 안아주시였다. 대원수님께서는 할머님의 뜨거운 사랑의 품을 영원히 떠나고싶지 않으셨다. 그러나 시간은 자꾸만 흘렀고 밤은 깊어만갔다.

다음날 이른아침 할아버님께서는 짚신 두컬레와 로비로 쓰라고 돈 60전을 대원수님께 들려주셨다. 더 많은 돈을 주고싶으셨으나 가난한 살림에 더는 방도가 없었던것이다.

대원수님께서는 검은 두루마기에 둥근 학생모를 눌러쓰시고 어깨에는 자그마한 보퉁이를 둘러메셨다. 나서자란 정깊은 만경대고향집에서 또다시 찬바람 휘몰아치는 거치른 땅을 향해 머나먼 길을 떠나게 되신것이다.

대원수님께서는 추녀낮은 초가집을 몇번이고 돌아보셨다. 대를 물려오며 살아오신 고향집을 뒤에 두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할수 없는 길을 떠난다고 생각하시니 저려드는 마음을 금할수 없으셨다.

엷은 안개에 싸인 마을은 사뭇 고요하였다. 광호네 돼지우리에서 벌써 밥을 달라고 울짱을 퉁기며 꿀꿀거리는 돼지소리만이 고요한 아침공기를 흔들뿐이였다. 그토록 고역과 가난에 시달리는 만경대의 초가집들이건만 아직 잠에서 채 깨여나지 않은 마을의 정경은 무척 평온해보였다. 그러나 이제 조금만 지나면 삶을 위한 허덕임이 다시 계속될것이다. 지금은 광호네 돼지만이 먹을것을 달라고 보채지만 잠든 어린것들이 잠에서 깨여나면 밥달라고 울것이고 그의 부모들은 주린 배를 달래며 어린것들에게 나물죽을 넘겨주고 허리띠를 다시한번 졸라맬것이다.

대원수님께서는 광호와 응화네 집들을 바라보시니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셨다. 그들과 함께 노시던 가지가지의 기억들이 생생히 떠오르시였다. 그러나 이미 결심하신대로 동무들을 만나는것을 단념하셨다. 대원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동무들과 다시금 작별하시며 마을을 떠나셨다.

온 가족이 동구밖까지 멀리 따라나와 배웅해주셨다. 작은아버님께서는 대원수님께서 굳이 만류하심에도 불구하고 평양역까지 나가겠다고 따라서시였다.

《할아버지, 안녕히 계십시오. 할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작은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대원수님께서 모자를 벗어드시고 허리를 굽혀 작별인사를 드리셨다.

《오냐. 어서 떠나거라. 나라를 찾구 너의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구 철주서껀 영주서껀 모두 돌아올 때까지 죽지 않구 오래오래 사마.》

할머님께서는 북받쳐오르는 울음을 참으시며 겨우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름진 얼굴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대원수님께 보이지 않으시려고 얼굴을 돌리셨다. 그러나 할머님의 어깨는 계속 들먹이고있었다. 작은어머님께서도 길가에 돌아서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싸고 계속 흐느끼고계셨다.

《어서 떠나거라.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는 그후 어떻게 되였구 동생들은 어떻게들 지내구있는지 곧 기별을 하여라. 편지는 보내지 말구 믿을만한 인편에 련락을 띄워라.》

할아버님의 말씀이였다.

《예!》

대원수님께서는 할아버님과 할머님 그리고 작은어머님께 위안의 말씀을 드리고싶었으나 목이 메여 말씀이 나가지 않으셨다.

대원수님께서는 만경봉으로 오르는 오솔길로 접어드셨다. 몇해전에 아버님의 뒤를 따라 어머님과 철주동생과 함께 만경대를 떠나시던 그 오솔길로 오늘 다시 떠나시는것이였다. 길은 그때나 오늘이나 다름없건만 그 길을 걸으시는 대원수님께서 짊어지신 짐은 그때와는 너무나도 판이했다. 어리신 그 시절에는 모든것을 아버님과 어머님께 의탁할수 있었으나 오늘의 대원수님의 두어깨에는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산같이 크고 쇠뭉치같이 무거운 짐이 지워져있는것이였다. 그렇듯 크고 무거운 보이지 않는 짐을 지시고 멀고먼 길의 첫 발걸음을 떼신것이다. 이 오솔길에는 높은 산과 준령이 잇닿아있고 가시밭과 돌바위가 첩첩히 놓여있다.

그러나 대원수님께서는 그토록 험난한 행로를 헤치시고 나라와 겨레의 찬란한 승리와 행복한 미래를 마련해주시기 위하여 오솔길에 첫 발자국을 떼신것이다.

대원수님께서는 만경봉의 우거진 소나무숲사이를 천천히 걸으셨다. 어느덧 이전에 아버님께서 자주 올라오셨고 대원수님께서도 늘 올라오시여 책을 보던 자리에 이르셨다. 대원수님께서는 큰 소나무아래에서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셨다. 여기에 앉아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시던 옛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셨다.

아버님의 품에 안기여 이야기를 들으시던 몇해전의 그 시절이 무척 그리워지시는것이였다.

아버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되실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대원수님의 가슴은 쓰리고 아프셨다.

이때 바람이 《쏴》 하고 불어오더니 굵은 소나무가지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바람소리와 소나무가지들은 저마끔 대원수님께 이야기라도 하는듯싶었다.

《가슴아파하지 마세요. 그리고 눈물을 거두세요. 아버님께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원쑤놈들과 용감히 싸우고계신답니다.》

이런 속삭임소리가 들려오는듯 하였다.

(그렇다. 아버님께서는 어디서나 싸우고계실게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대원수님께서는 새 용기가 솟아오르시였다.

아까까지만 하여도 소나무들조차 정기를 잃고있는것 같더니 이제는 소나무들도 그 절개가 더 굳어보이고 기개가 더 름름해보였다. 소나무밑에는 눈이 군데군데 쌓여있었으나 그윽한 송진냄새가 바람에 풍겨왔다. 나서자란 고향의 향기를 맛보는듯 하셨다.

대원수님께서는 잠시 사위를 둘러보셨다.

만경봉에 아침노을이 아름답게 비껴왔다. 동편하늘이 불그레 물들기 시작하더니 아침노을은 점점 더 짙어지면서 하늘높이 붉게 물들어갔다. 하늘에는 솜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고있었다. 아름다운 만경대의 크고작은 골짜기들에는 엷은 안개가 은은하게 흐르고 높고낮은 봉우리들은 그우에 둥둥 떠서 움직이는것 같았다.

대원수님께서는 이렇듯 아름다운 고향땅을 두고 떠나고싶지 않으셨다.

대원수님께서는 소나무사이로 마을을 내려다보시였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할아버님과 할머님이 계시고 그리운 동무들이 있다. 어려서 즐겨놀던 군함바위와 썰매바위, 물쌀바위들이 있으며 무지개를 잡겠다고 올라갔던 들메나무며 봄이 오면 불그레 꽃망울이 질 복숭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들이 서있었다. 만경대에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바위 하나도 대원수님의 눈에 익지 않는것이 없었다.

들판에는 오곡이 무르익고 강에는 물고기가 펄펄 뛰며 땅속에는 금은보화가 가득차있는 내 나라, 내 고향을 떠나 진정 멀고먼 곳으로 가고싶지 않으셨다.

그러나 대원수님께서는 그 길을 떠나셔야 하였다. 천리길, 만리길을 멀다하지 않으시고 아버님께서 계시는 그곳으로 가셔야 하였다.

대원수님께서는 오래지 않아 태양이 솟아오를 동편하늘을 희망에 찬 눈길로 바라보셨다. 캄캄하던 밤하늘이 밝아오고 붉은 아침노을이 비끼고 광명한 태양이 솟아오르듯이 이 답답하고 안타깝고 숨막히는 세상도 이대로만 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으셨다.

대원수님께서는 만경봉에서 내리시여 대동강변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는 지름길로 접어드셨다. 여기서 성안이 빤히 바라보이지만 20리길이 넘는것이다.

대원수님께서는 흐르는 강물도 바라보시고 낚시배에도 눈길을 주시며 한동안 걸으시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시고 뒤를 돌아보셨다. 대동강의 맑고 파란 강물은 유유히 흘러 만경봉을 굽이쳐흐르고있는데 높이 솟은 만경봉의 아름드리소나무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솨솨》 소리치고있었다.

만경봉은 작은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앞으로 달려나가다가 강물에 길이 막히여 더는 나가지 못하고 대동강가에 우뚝 서서 그 모습을 자랑하는듯 하였다. 굽이쳐흐르는 대동강과 우뚝 솟은 만경봉은 아름답게 조화되여 한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이렇듯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왜놈들의 더러운 발굽밑에 짓눌려있다고 생각하시니 분하고 원통하셨다.

이때에 대동강의 밀물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저 대동강에 올라오는 밀물을 보아라. 한참 올라올 때는 무섭지 않냐?》

작은아버님의 말씀이였다.

《정말 그래요. 동뚝을 막 넘을것 같구 벌판이니 집들까지두 다 잠길것 같아요.》

《그러다가두 얼마 안가서 또 내려가는 법이지. 왜놈들두 그 형국이란다. 지금은 조선땅이 모두 왜놈의것으로 된것 같지만 두구봐라. 제놈들이 망하구 조선은 독립되고야말지. 하기야 밀물이나 썰물은 하늘땅의 조화로 저절로 오르내리지만 왜놈이 망하는건 저절로는 안되는거다. 왜놈들을 꺼꾸러뜨리구 우리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 조선사람들이 모두 들고일어나야지. 그래서 너의 아버지랑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내걸구 싸우지 않니?

난 배운것이라구는 농사밖에 없어서 그놈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이 모양대로 살아가고있다만 너는 부디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꼭 나라를 찾는 큰일을 성취하도록 하여라. 설사 아버지와 함께 싸우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락심하지 말고 네 머리로 모든것을 생각해가면서 싸워이기란 말이다.》

대원수님께서는 그자리에서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으실 때마다 속다짐은 더욱더 굳어지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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