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40
살을 에이는듯한 추위는 계속되고있었다.
그동안
그리고는 월요일 아침에 칠골로 오시군 하셨다.
어느 토요일 저녁이였다.
《아버지께 뭐 책을 보내달라구 부탁했더랬니?》
《예, 그래요! 책을 보내여왔나요?》
《펼쳐보아라. 인편에 보내왔더구나. 그런데 놈들의 눈에 띄여서는 안되는 책이라구 그러더구나.》
《알겠어요. 할아버지!》
거기에는 등사판으로 민것도 더러 있었고 아버님께서 정성들여 써넣은 부분도 적지 않았다. 종이에 보풀이 인것으로 보아 여러번 읽은 책이 분명했다.
《야, 정말 좋은 책들이구나.》
칠골로 돌아오신
그러던 어느날 오후였다.
이날도
그들이 이날 배운 과목들의 복습과 숙제를 끝내고 예습으로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이때
그는 외할아버님을 조용히 만나서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하고 그길로 돌아갔다. 손님이 돌아간 후에 외할아버님께서는 가슴을 치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으셨다.
얼마후에 외할아버님께서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방문고리를 잡으시려다가 그만두시고 외할머님이 물레질을 하고있는 아래방으로 들어가셨다.
외할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은 외할머님께서는 물레손을 놓더니 얼굴빛이 까매지셨다.
외할아버님께서는 비분과 흥분을 억지로 가라앉힌 후에
학습에 열중하고계시던
외할아버님께서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시고 계속 한숨만 짓고계셨다.
외할아버님께서는 한군데만 오래도록 바라보시면서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시더니
《너의 아버지가 왜놈들에게 또다시 체포되였다누나. 그래서 네가 잠간 집에 다녀갔으면 좋겠다구 네 어머니가 인편에 기별을 해왔다누나.》
외할아버님의 목소리는 자못 떨리셨다.
《체포요?》
온몸의 피가 머리로 꺼꾸로 올라가는것 같았고 그자리에 마구 쓰러질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께서는 놈들의 악독한 고문으로 골병이 들어 몸이 부었다내렸다 하셨는데 또 체포되여 놈들에게 악형을 받고계시겠으니 그 몸이 어떻게 되셨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호철이가 먼저
하늘처럼 믿고있던 그리운 동무, 자기를 위하여 친형제보다도 더 살뜰하게 보살펴주시면서 옳은 길로 이끌어주었고 래일의 꿈을 안겨주었으며 생사고락을 같이하자고 굳게 맹세했던 동무와 이렇게 헤여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모든 희망과 꿈 그리고 손에 잡힐듯이 바라보이던 아름다운 미래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호철이의 눈앞에는 지난날의 잊을수 없는 가지가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잊을수 없는 즐거운 나날이였다. 정말 보람있고 값있게 지나간 세월이였다.
(그 누가 동무들의 장래를 위하여 그처럼 애타게 도와주며 이끌어줄수 있단 말인가. 그처럼 좋은 동무의 아버님을 왜놈들은 무엇때문에 잡아간단 말인가. 성주는 앞으로 어떻게 될것인가?)
호철이는 안타까이 몸부림쳤다.
어느덧 윤병이, 덕범이, 경만이들도
그리고 다른 동무들도 모두 팔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네가 가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라니?》
호철이는 목갈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것은 호철의 심정만이 아니라 모두가 하고싶은 말이였다.
《울지들 말어. 운다구 소용이 있니. 저기 밖으로들 나가자.》
학습반을 조직하고 공부한 결과 전원이 우수한 성적을 쟁취하게 되였으며 쓸모없던 산판을 리용하여 새 운동장을 닦으면서부터 두마을의 동무들이 친해지게 되였을뿐만아니라 거기서 뽈차기련습을 하여 보통학교를 이긴 사실이며 일요일에
그러나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책을 기본으로 하면서 앞으로 더 모을수 있는대로 좋은 책들을 모아가지고 책읽기모임을 크게 하려고 생각하셨던것이다.
이 구상은
《너희들과 오래동안 같이 있게 될줄 알았더니 그렇게 되지 못하는구나. 너희들 공부를 잘해라. 윤병이하구 호철이는 꼭 상급학교에 입학하구 경만이랑 덕범이두 꼭 중학교에 가도록 해라. 그리구 우리가 왜 공부해야 하는가를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찾기 위해 공부한다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단 말이야.》
동무들은
《그럼 갔다가 다시 나오지 않겠니?》
호철이가 매우 놀라는 얼굴로 물었다.
《나오지 못하게 될거야. 내 백번 죽어두 아버지의 원쑤를 꼭 갚고야말테다.》
《참! 고놈의 불개미같은 왜놈새끼들이 거기까지 따라가서 애를 먹이누나.》
호철이가 이를 부드득 갈며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강도 왜놈새끼들이란 종자까지 싹 없애버려야 돼.》
덕범이의 분격에 찬 말이였다.
《그럼 여기서 헤여지자. 난 떠날 차비를 좀 해야겠어.》 하고
《야! 정말 이렇게 갑자기 헤여질줄은 몰랐구나. 언제면 왜놈들을 꺼꾸러뜨리구 마음놓구 살수 있을가?》
윤병이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당장 떠날셈이냐?》 하고 호철이가 물었다.
《오늘저녁으로
동무들은 산에서 내려와 운동장을 지나 마을로 내려왔다. 이때
량선생님은
《성주학생! 그동안 학교와 동무들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소. 동무들이 같이 상급학교에 다니는것을 보려구 했더니 뜻밖에 불행이 닥쳐왔구만. 왜놈들을 이 땅에 그대로 두고는 하루두 편한 잠을 잘수 없소. 나같은 사람은 이 모양으로 살지만 성주학생은 아버님의 뜻을 이어 잘 싸워주기 바라오. 가서 형편을 보구 될수록 다시 나오라구!》
《예!》
《선생님, 그동안 저때문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앞으로 윤병이랑 호철이랑 꼭 상급학교에 다니도록 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애들에 대해서는 걱정말라구. 이젠 그만했으면
량선생님은 문밖에까지 따라나와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우거나 또 어떤 일을 하거나 아버님의 뜻을 꼭 이으라고 신신당부하는것이였다.
《윤병이, 네게 한가지 부탁할것이 있어.》
《뭔데?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게.》
그러나
《말해줘. 성주가 하라는것이면 무엇이든지 하겠대두 그래.》
윤병이는 초조한 얼굴로
《우리들이 몰래 읽던 그 책을 윤병이 네게 넘겨주고 가려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그거야 무척 고마운 일이지만 그 책을 두고가두 괜찮겠어?》
《난 벌써 여러번 읽었으니까 두구가두 괜찮아. 그런데 너 혼자서 보라구 두구가겠다는건 아니야. 우선 학습반동무들이 모여서 읽구 앞으로 중학교에 가서는 책을 더 많이 모아가지구 책읽기모임을 크게 벌려놓으란 말이야. 말하자면 네가 비밀책읽기모임의 책임자가 되여 하란 말이야.》
《내가 그런걸 꽤 해낼가?》
《못할건 없어. 처음부터 크게 벌려놓지 말구 적게 시작해가지구 점점 크게 벌려놓는게 좋을거야. 문제는 어떤 아이들을 넣겠는가를 잘 생각해야 해. 우선 일본놈들을 누구보다도 미워하는 아이들을 골라야 하구 어떤 일이 있더라도 비밀을 지킬수 있는 그런 아이들을 골라야 할거야. 사실은 며칠후에 우리 학습반 동무들하구 의논을 하구 시작을 하려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떠나게 되지 않았니? 우리가 중학교에 가자는것두 강도 왜놈들이 만들어놓은 책이나 배우자구 가는것이 아니야. 오히려 그놈들이 못보게 하는 책들을 구해서 공부를 해야 하구 책을 읽기만 할것이 아니라 왜놈들을 쫓아내구 좋은 나라를 세우자는것이 아니겠니?》
《음! 알겠어. 네가 하려던 좋은 일인데 나라두 대신 해야지!》
윤병이의 얼굴에서는 흥분과 결의의 빛이 넘쳐흘렀다.
《그럼 부탁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있어라.》
그런데 윤병이는 얼굴을 찌프리고 매우 근심스러운 얼굴빛을 짓고있는것이였다.
《왜,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별건 아니야. 돈을 좀 구해볼가 했더니 그것두 맘대루 잘 안되는구나.》
《돈은 갑자기 뭘하게?》
《먼길을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할게 아니야? 그래서 어머니께 말했더니 몇집 돌아다녀보기는 했지만 결국 한푼두 구하지 못했거든. 우리 아버지라두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조촌으로 조상하러 갔단 말이야.》
《야, 넌 정말 별걱정을 다하누나. 두다리가 이렇게 성한데 로비없어서 못가겠니? 그리구 우리 외가집에서두 좀 얻구
《떠나겠니?》
외할머님께서는
이때 외할아버님께서
《아마 내나 네 할머니는 너와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외할아버님께서는 침통한 얼굴로
《이미 말한바 있다만 사람이 일생 살아가노라면 탄탄대로만 걷는 법이 아니란다. 앞길에는 높은 산두 있구 깊은 골짜기두 있구 거치른 바다두 있구 험난한 가시밭두 있게마련이란다. 더구나 싸움의 길에 나선 사람의 앞길이란 더욱 험난한 법이니라. 하기야 들에 나는 잡초나 벌레처럼 세상에 태여나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야 무슨 험한 길이 있겠냐만 사람으로 태여났던 보람을 남기려는 사람의 앞길은 무척 험난한 법이란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만 하냐?》
《예!》
《네 아버지가 걷고있는 길이 그런 길이구 네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두 바로 그런 길이란 말이다. 빼앗긴 나라와 짓밟힌 겨레를 구원할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서 내 반생을 바쳐왔다. 내 손때를 먹여키운 청년들이 이미 허다하고 또 그들중에는 큰뜻을 품고 씩씩하게 나가는 믿음직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만 나라의 대들보감이 보이지 않는구나. 너를 내 외손자라고 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같이 살아가는 사이에 나는 네가 품고있는 그릇이 어지간히 크다는것을 발견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그 그릇의 깊이와 무게를 다는 알아내지 못하구있구나. 웅심깊은 지략과 아름다운 마음씨, 꿋꿋한 성격과 너그러운 품성, 나는 네게서 그런것을 발견하구있다. 넓은 바다는 수많은 해초를 기르구 물고기들을 번식시킬뿐만아니라 어지러운 물줄기도 맑게 만드는 법이니라. 나는 네 나이가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 하기야 옛사람들두 열다섯살
외할아버님의 말씀은
어느덧
《이제야 오는구나.》 하시며 할머님께서 토방으로 나오시더니 버선발로 안뜨락까지 뛰여나오셨다.
《할머니!》 하며
어느덧 할아버님도 나오시고 작은아버님과 작은어머님도 나오셨다. 모두 울적한 마음들이였다.
《어서들 들어가자.》
할아버님의 말씀이였다.
《그래 떠날 차비는 다 됐느냐?》
할아버님께서 물으셨다.
《차비할게 뭐 특별한게 있습니까. 그저 떠나면 되지요.》
《그저 떠나면 되다니. 내가 묻는건 마음의 차비가 됐느냐 말이다.》
《조선에 나가서 공부를 하라니 그저 나오구 어머니가 들어오라니 그저 들어가구 헤여지게 되니 섭섭하다구 그저 그래서는 안된다. 너두 어머니가 왜 들어오라구 기별했는지 들었지?》
《들었습니다.》
《네 아버지는 그 약한 몸으로 악독한 놈들에게 붙잡혀가서 얼마나 큰 고초를 겪고있겠니.》
할아버님께서는 후 한숨을 내쉬시더니 《정말 살아있어서 살았다구나 하는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살아있다구 하는지 네 어머니의 깊은 속내는 나도 모르겠다.》 하시며 큰 주먹을 눈가로 가져가셨다.
《그러니 잠간 들어왔다 가라는 어머니의 기별을 받은 너는 어떤 마음의 차비를 다졌느냐 그것을 묻는 말이다.》
《할아버지!》
《전 아버지의 원쑤를 갚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떠나거라! 내가 그 말을 들으려고 물었다.》
할아버님께서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시더니 말씀을 계속하셨다.
《태평시대에는 누가 애국자인지 모르느니라. 나라에 위험이 닥쳐왔을 때에야 누가 나라를 진정 사랑하는지를 알게 된단다. 네 증조할아버지는 살림이 가난해서 남의 산당집을 얻어가지고 무덤을 지켜주면서 땅뙈기나 얻어부치던 소작인이였느니라. 그런데 미국놈들이 조선을 먹어보려고 검은 배를 타고 대동강에 기여들어와서 백성들의 재물을 로략질하구 사람들을 마구 잡아가구 할 때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앞장에 서서 미국놈들을 대동강에 처넣었다지요?》
《그렇지! 얼마나 장한 일이냐. 네 증조부님이 미국놈들을 대동강에 처넣은것처럼 네 아버지는 오늘 일본강도놈들을 우리 나라에서 쳐물리치구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구 한목숨걸구 싸우지 않느냐. 사람은 제 체통과 피값을 해야 하느니라. 오랑캐놈들한테 구박을 받으며 사는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들과 싸워야 한다.》
이때에 곁에 앉아서 할아버님의 말씀을 듣고만 계시던 작은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앞으로 할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게 되겠는지 모를게다. 명심해서 들어두어라.》
《예!》 하고 대답하시며
《네 아버지가 요행 왜놈의 류치장이나 감옥문을 짓부시고 뛰쳐나온다면 너는 아버지의 일을 잘 도와주어야 할것이고 만일 아버지가 다시 감옥생활을 하거나 놈들의 손에 잘못되는 경우라면 두손목을 마주잡고 눈물이나 흘리고있겠느냐? 그래서는 안된다. 아버지가 하려다가 채 하지 못한 일을 네가 해야 한단 말이다. 네 증조부님의 뜻인즉 바루 네 아버지의 뜻이고 네 아버지의 뜻인즉 빼앗긴 내 나라를 다시 찾고 앞으로는 영원히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나라를 튼튼히 꾸리자는데 있는것이 아니냐. 그 뜻을 네가 이어나가야 한단 말이다.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여있는가 말이다.》
《할아버지, 저도 그렇게 결심하고 떠나려고 합니다.》
《암, 그래야지.》
할아버님의 주름진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어리였다. 할아버님께서는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네 어머니도 아마 그런 뜻으로 너를 불렀을게다. 약한 아낙네같으면 남편이 놈들에게 붙들려갔다면 울며불며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강을 건너왔을게다만 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네 아버지가 남긴 일을 너하구 같이하려고 앙심을 먹고있을게다. 내가 하는 말을 알만 하냐?》
《예,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옆에 계시던 할머님께서는 사랑에 찬 얼굴로 한동안
할머님께서는
(어쩌믄 그렇게두 제 아버지를 닮았는지.…)
할머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시며
사실 할머님께서는
그런데 하루밤만 지나면 마음의 등대이며 희망이였던
이러한 할머님의 심정을 꿰뚫어보신
《할머니, 왜놈들은 멀지 않아서 꼭 망하게 돼요. 왜놈들을 모조리 우리 나라에서 쫓아버리구 아버지, 어머니, 철주, 영주 아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돌아와서 같이 행복하게 살자요.》
《글쎄, 그런 세상이 빨리 왔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내 당대에 그런 세상이 돌아오겠는지?!》
《오지 않구요. 꼭 돌아와요.》
《할아버지나 할머니걱정은 하지 말구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너두 큰일을 하여라.》
할머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손등으로 눈언저리를 누르시였다.
이윽고
그러나 마을은 무척 고요하였다. 그렇게 동네가 떠나갈듯이 떠들며 놀던 아이들도 모두 돌아가 꿈나라로 헤매는 모양이였다.
(래일부터 저 하늘아래로 떠나가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니 쓸쓸한 생각이 더욱 사무쳤다.
이때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할머님께서 밖으로 나오셨다.
《할머니, 저 여기 있어요. 곧 들어가겠어요.》
《어서 들어가자. 바람이 무척 차구나.》
방으로 들어가시면서
《응화가 요즘두 야학에 잘 다니나요?》
《잘 다니구말구. 네가 그렇게 직심스럽게 배워준 덕분으로 아이가 달라졌다구 그애 부모들이 얼마나 기뻐하기에 그러니.》
《책을 읽게 됐다구 공부를 그만두지 말구 계속 열심히 하라구 하세요. 공부한다는건 끝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얘기를 하지. 떠나기 전에 그애들을 한번 만나보구 가는게 좋지 않겠니?》
《짬두 없지만 그만두겠어요. 만나야 뭐 서로 서운하기만 할걸요 뭐. 떠난 후에 공부들을 잘하라는 얘기나 전해주십시오.》
《네가 떠났다는 말을 들으면 광호랑 응화들이랑 무던히 섭섭해하겠는데…》
《만났다 헤지면 더 섭섭할것 같아요.》
《하기는 그럼직도 하다.》
이날
(나는 그럼 아버님의 가르치심을 더는 받지 못하고 왜놈들과 싸워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시니
《왜 아직 잠들지 못하냐?》
《예, 할머님두 아직 잠들지 못하셨군요.》
《어쩐지 잠이 오지 않는구나. 래일 먼길을 걷겠는데 눈을 좀 붙여야 하지 않겠니.》 하시며 할머님께서는 어깨우로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시였다.
할머님의 손길이 어깨에 닿자
(이밤이 새면 할아버님과 할머님 그리고 작은아버님과 작은어머님의 품을 떠나야 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할머님께서는 손자의 숨결이라도 한번 더 들으시려는듯
《할머님,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우리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꼭 살아계셔야 해요.》
《오래오래 살겠다. 왜놈들이 망하는걸 보기 전에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갈수 없을게다.》
할머님께서는
다음날 이른아침 할아버님께서는 짚신 두컬레와 로비로 쓰라고 돈 60전을
엷은 안개에 싸인 마을은 사뭇 고요하였다. 광호네 돼지우리에서 벌써 밥을 달라고 울짱을 퉁기며 꿀꿀거리는 돼지소리만이 고요한 아침공기를 흔들뿐이였다. 그토록 고역과 가난에 시달리는
온 가족이 동구밖까지 멀리 따라나와 배웅해주셨다. 작은아버님께서는
《할아버지, 안녕히 계십시오. 할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작은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오냐. 어서 떠나거라. 나라를 찾구 너의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구 철주서껀 영주서껀 모두 돌아올 때까지 죽지 않구 오래오래 사마.》
할머님께서는 북받쳐오르는 울음을 참으시며 겨우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름진 얼굴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서 떠나거라.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는 그후 어떻게 되였구 동생들은 어떻게들 지내구있는지 곧 기별을 하여라. 편지는 보내지 말구 믿을만한 인편에 련락을 띄워라.》
할아버님의 말씀이였다.
《예!》
그러나
아버님의 품에 안기여 이야기를 들으시던 몇해전의 그 시절이 무척 그리워지시는것이였다.
아버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되실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이때 바람이 《쏴》 하고 불어오더니 굵은 소나무가지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바람소리와 소나무가지들은 저마끔
《가슴아파하지 마세요. 그리고 눈물을 거두세요. 아버님께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원쑤놈들과 용감히 싸우고계신답니다.》
이런 속삭임소리가 들려오는듯 하였다.
(그렇다. 아버님께서는 어디서나 싸우고계실게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아까까지만 하여도 소나무들조차 정기를 잃고있는것 같더니 이제는 소나무들도 그 절개가 더 굳어보이고 기개가 더 름름해보였다. 소나무밑에는 눈이 군데군데 쌓여있었으나 그윽한 송진냄새가 바람에 풍겨왔다. 나서자란 고향의 향기를 맛보는듯 하셨다.
만경봉에 아침노을이 아름답게 비껴왔다. 동편하늘이 불그레 물들기 시작하더니 아침노을은 점점 더 짙어지면서 하늘높이 붉게 물들어갔다. 하늘에는 솜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고있었다. 아름다운
들판에는 오곡이 무르익고 강에는 물고기가 펄펄 뛰며 땅속에는 금은보화가 가득차있는 내 나라, 내 고향을 떠나 진정 멀고먼 곳으로 가고싶지 않으셨다.
그러나
만경봉은 작은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앞으로 달려나가다가 강물에 길이 막히여 더는 나가지 못하고 대동강가에 우뚝 서서 그 모습을 자랑하는듯 하였다. 굽이쳐흐르는 대동강과 우뚝 솟은 만경봉은 아름답게 조화되여 한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이렇듯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왜놈들의 더러운 발굽밑에 짓눌려있다고 생각하시니 분하고 원통하셨다.
이때에 대동강의 밀물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저 대동강에 올라오는 밀물을 보아라. 한참 올라올 때는 무섭지 않냐?》
작은아버님의 말씀이였다.
《정말 그래요. 동뚝을 막 넘을것 같구 벌판이니 집들까지두 다 잠길것 같아요.》
《그러다가두 얼마 안가서 또 내려가는 법이지. 왜놈들두 그 형국이란다. 지금은 조선땅이 모두 왜놈의것으로 된것 같지만 두구봐라. 제놈들이 망하구 조선은 독립되고야말지. 하기야 밀물이나 썰물은 하늘땅의 조화로 저절로 오르내리지만 왜놈이 망하는건 저절로는 안되는거다. 왜놈들을 꺼꾸러뜨리구 우리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 조선사람들이 모두 들고일어나야지. 그래서 너의 아버지랑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내걸구 싸우지 않니?
난 배운것이라구는 농사밖에 없어서 그놈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이 모양대로 살아가고있다만 너는 부디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꼭 나라를 찾는 큰일을 성취하도록 하여라. 설사 아버지와 함께 싸우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락심하지 말고 네 머리로 모든것을 생각해가면서 싸워이기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