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31
한가위날 아침이였다.
이날도 두 집식구가 모두 할아버님네 집에 모였다. 명구는 닭도 잡고 흰쌀밥도 했다고 너무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다.
《형님! 오늘은 명절인데 하루 쉬여야지요?》
《오늘은 하루 놀아야겠다.》
《형님도 노는 날이 있구만요. 뭘 하시면서 놀 작정입니까?》
《뭘하면서 놀다니, 넌 그동안 잊어먹은게로구나. 한가위명절에 송평에 가서 밤 따먹자구 벌써 약속하지 않았니?》
《형님도 역시 기억하구 계셨군요.》
《흥, 내 머리가 이래뵈두 한번 약속하거나 한번 들으면 잊어먹지 않는 머리야.》 하며 명식형님은 시물시물 웃었다.
《그럼 갑시다. 난 오늘도 형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어찌나 하구 막 걱정하던 참이였어요.》
이때 아래방에 있던 명구가 불쑥 나타났다.
《형! 나두 갈테야.》
형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있던 명구는 대답도 기다릴새없이 모자부터 쓰고 앞장에 나섰다.
《넌 멀어서 못가. 널 데리구 갔다가는 가다오다 말게? 그대신 밤을 많이 따다주지.》
명식형님의 말이였다.
《명구는 나하구 산에나 올라가자.》
외할머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명구는 거기도 가고싶은 모양이였다.
《정말 밤 많이 따와야 해!》
《많이 따오구말구, 이렇게 자루까지 가지구가지 않니.》
명식형님이 자루를 내보였다.
《그럼 난 산에 갈래.》
명구는 어느덧 할머니곁으로 가서 치마자락을 잡았다.
공동묘지는 사람들로 거의 뒤덮였다. 벌초를 깨끗이 하고 사람들이 그앞에 모여앉은 무덤이 있는가 하면 돌아볼 사람마저 없어졌는지 쑥대와 잡초가 무성한 무덤들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아낙네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역과 굶주림, 천대와 멸시속에서 허덕이며 설음과 울분을 겨우 참아오다가 산소에 올라와서는 고인에 대한 추억과
(올망졸망한 수많은 저 무덤들속에는 먹을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것을 입지 못하고 가난과 천대속에서 허덕이다가 불쌍하게 죽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겠구나. 그중에는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싸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간분들도 있을거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외할머님께서도 산에 올라가 형무소에서 고생하시는 외삼촌을 생각하실거구
(그러면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은 마음 편안한 날이 단 하루도 없단 말인가?)
《지주놈에게 뜯기우다 못해 이런 산골에 와서 부대기를 일쿠면서 살아가는 모양이지요?》 하고
《인생으로 태여나 죽지는 못하구 저렇게 살아가려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니.》
명식형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깊은 한숨을 짓는것이였다.
《역시 잊지들 않았댔구나, 어서 들어가자. 할아버지, 할머니랑 모두 편안들 하시지?》
《예, 편안들 하십니다.》
명식형님의 대답이였다.
《그래 성주두 몸 든든해서 공부를 잘하댔니?》
《예, 전 별일 없습니다. 외할머님댁에 와서 괴롬만 끼치지요.》
《성주는 최우등을 한답니다.》
《그래! 여기 와서 처음 배우는것이 많다구 아버님도 걱정하시던데 네 글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하여간 잘됐다. 무슨 일에나 남들보다 앞서야지. 그리구 명식인 어머니를 모시구 오지 않구, 남들은 모두 산소에 가는데 혼자 방구석에 앉아있겠구나.》
《어머니는 오늘도 일하러 나갔을거예요.》
《뭐, 오늘같은 명절날도 일을 해? 네가 어머니를 잘 돌봐야겠다.》
《나보구야 하루 쉬겠다구 했지만 어머니성미에 웬걸 쉬겠나요?》
《어서 이놈의 세상이 끝장이 나야겠는데… 앉아들 있어라.》
이렇게 말하며 이모님은 부엌으로 나가더니 떡을 들여왔다.
《그래두 고모네는 떡두 치구 제법 명절답게 맞았구만요.》
《올벼를 베다가 급작스럽게 좀 했다. 먹어봐라. 그래 칠골서는 떡두 못해 먹었니?》
《작은어머니가 밭벼를 훑어다가 절구질을 해서 오늘아침엔 흰쌀밥에 닭고기국을 먹었어요.》
《한가위에 떡 한개두 못해먹었구나. 어서들 먹어라.》
《방금 밥을 먹구와서 배고프지 않아요. 우린 밤 따먹으러 나가겠어요.》
《그래두 한개 맛이나 보구 나가보렴. 금년엔 밤이 아주 풍년이란다.》
이윽고
《형님, 사과나무는 저렇게 높은 산에서두 아주 잘되누만요?》 하고
《글쎄 말이다. 사과나무는 펀펀한 밭에만 되는줄 알았더니 산비탈에두 제법 잘되는구나.》
산을 지나면 그앞에 다른 산이 새로 나타났고 그 산을 지나면 또 다른 산이 보이군 했다.
그 많고많은 산에 여기처럼 골짜기에는 밤나무를 심고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은데는 사과나무나 복숭아나무, 추리나무들을 심으면 얼마나 많은 과일을 딸수 있겠는가. 그러면 조선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것이 아닌가.
《어서 올라가자. 뭘 그리 바라보구있니?》
명식형님이 이렇게 독촉을 해서야
밤나무마다에는 밤송이들이 가득 달려있었다. 벙싯벙싯 아금이 버그러져 불그레한 밤알이 보이는가 하면 아름이 진 밤송이도 있었다. 다른 밤송이들도 조금만 있으면 모두 송이가 터질것 같았다.
명식형님은 밤나무아래로 다니며 밤아름을 줏고있었다. 그는 사위를 둘러보더니 물매 하나를 얻었다. 그는 밤송이가 많이 붙은쪽을 향하여 물매를 힘껏 던졌다. 밤송이가 후두두 하며 몇송이 떨어졌다.
《너두 와서 밤 까라.》
명식형님은 밤송이 하나를 나무가지로 퉁겨주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한발로 밤송이를 밟고 나무가지로 까기 시작하였다.
《형님! 우리 누가 밤을 많이 따나 내기해볼가요?》 하고
《해보자꾸나. 네가 나한테 견디겠니?》
《길구 짧은거야 대보아야 알지요.》
《허, 네가 언제 밤을 따봤기에 그러니?》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세알배기 밤송이 하나를 까놓았다.
《까먹어라.》
그는 한알을 자기가 쥐고 두알을
《글쎄, 뭘 대구 할가? 지는 사람에게 볼기를 여라문개 치기루 할가?》
《그건 안돼요.》
《왜 안돼?
《아니, 그럼 네가 나를 이기겠단 말이냐?》
그는 한참 웃고나서 이렇게 따지는것이였다.
《글쎄, 내기라는것은 언제나 마지막에 봐야 아는게 아닙니까.》
《하긴 그렇다. 그럼 지는 사람이 돌아갈 때 밤자루를 메구가게 하자.》
《그럼, 그렇게 합시다.》
이리하여 내기가 시작되였다.
한참동안 이가지 저가지로 오르내리시며 후려갈기셨다. 밤나무아래에는 밤송이가 수북하게 쌓이게 되였다.
나무에서 내려오신
판대기로 한동안 비벼놓으시고는 마당비로 밤송이를 쓸어내셨다. 밤송이는 마당비에 모두 쓸려나가고 밤알만 수북이 남았다.
이렇게 몇번 하신
《형님, 얼마나 땄어요?》 하고
《그래, 넌 얼마나 땄니?》
《난 자루루 하나밖에 못땄어요. 형님은 두주머니 가뜩 땄구만요. 하하하…》
《거짓말하면 이리한테 물려가.》 하며 명식형님은 곧이 듣지 않았다.
《노상 못땄니? 딴것은 다 먹었니?》 하며 그는 주머니에서 밤을 한줌 꺼내서
《잠간만 기다리세요.》
《자, 믿어지지 않으면 보여드리지요. 어때요?》 하며 자루를 털썩 내려놓으셨다.
《아니 그게 정말 밤이란 말이냐?》 하며 그는 의아한 눈으로
《그런데 너 어떻게 그렇게 많이 땄니?》
그는 리해할수 없다는듯이
《기계루 땄어요, 기계루.》
《기계루 따다니, 어디 가보자.》
명식형님은
《형님! 나한테 졌지요?》
《졌다, 졌어. … 그런데 넌 밤나무가지를 많이 꺾어놔서 안됐구나.》
《아니야요, 밤나무가지를 꺾어줘야 명년에 밤이 더 많이 달려요.》
《건 어째서?》
《가지가 부러지면 작은 가지가 여러개 돋아나거든요. 그러니까 새 가지에서 밤이 더 많이 달리지요.》
《들어보니 아주 그럴듯하구나.》
《아니 벌써 그렇게 많이 땄니?》
《글쎄, 성주는 밤따는데두 날구뜁니다. 뭐 기계루 땄다나요.》
《그럼 떡들을 먹구 한자루 더 따가지구 가거라.》
《이젠 그릇이 있어야지요 뭐.》
《그릇이야 주지 않으리. 그리구 밤청대도 해먹구 가거라.》
《밤청대가 뭐야요?》
《밤송이를 그대루 불에 묻었다가 가시가 그슬려지구 송이가 탄 후에 까먹으면 아주 별맛이란다.
그런데 식혀 먹어야지 덤비다가는 입 덴다.》
이모님도 밤청대를 먹다가 입을 데본 일이 있는 모양인지 이런 말을 하며 싱글벙글 웃는것이였다. 두분은 점심을 드시고 다시 밤나무아래에 가서 밤을 한자루 더 따왔다. 그리고 밤청대도 했다.
《내기 해서 내가 이기긴 했지만 형님의 몫을 제가 좀 져다드려야겠군요.》 하시며
《추리와 복숭아를 먹을 때 왔더라면 좋았을건데. 사과 먹을 때 꼭 한번 더 오너라. 대국광맛이 아주 좋단다.》
《산마루에 심은 사과나무가 이모님네것인가요?》
《우리 사과나무란다. 몇나무 되지는 않아두 가을에는 사과를 지천으로 먹는단다. 꼭 오너라.》
《예, 짬을 봐서 오겠습니다. 그런데 사과나무는 왜 밤나무처럼 많이 심지 않았습니까?》 하고
《밤나무는 이 마을의 조상할아버지들이 아들, 손자들을 위해서 심었는데 어디 지금이야 멀리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있다더냐. 하기야 당장 먹을것이 없는데 어떻게 7~8년후에 먹을것까지 생각하겠니?》
《그런데 이모님네는 사과나무를 용케 심으셨구만요.》
《그건 우리 시아버님이 심어주신 덕에 지금 잘 따먹구있단다. 시아버님이 다섯해만 더 계셨더라면 저 뒤산이 모두 과일동산이 되였을게다. 시험삼아 심어본다면서 심은 사과가 저렇게 주렁주렁 달리지 않았겠니.》
(왜놈들을 쳐부시구 나라의 큰 살림군이 나서기만 하면 우리 나라의 수많은 산들을 과일동산으로 만들수 있겠구나. 깊은 골짜기들에는 밤나무들을 심고 경사가 뜬데는 사과와 배들을 심고 마을들에는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추리나무들을 심으면 봄에는 꽃동산, 가을에는 과일동산이 될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로 될수 있겠는가.)
저쪽 오솔길로 웬 처녀애와 어린애가 나무단을 이고지고 아래로 내려오는것이 보였다.
(명절날에도 나무를 하러 다니는 아이들이 있구나.)
그 처녀아이와 어린애도
《아니, 이게 누구냐. 남북이랑 장쇠가 아니냐?》
남북이는 이고가던 나무단을 길가에 내려놓더니 《오빠!》 하고 소리칠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두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글썽해졌다. 장쇠도
《너희들 어떻게 여기 와서 나무를 하니?》 하고
《우린 이리루 이사왔어요. 저아래 움막집이 우리 집이예요.》 하고 처녀애가 대답했다.
《언제 이사왔니?》
《그때 공장을 짓겠다구 집을 헐라는걸 우리 아버지는 절대로 헐지 못하겠다구 뻗치구있었지요 뭐. 그랬는데 하루는 그놈들이 자동차를 타고 와서 집을 밀어버리지 않겠어요. 그리구 우리 아버지는 일판에서 일자리까지 떨어지구말았어요.》
《그럼 아버지는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냐?》
《이 산너머에 새 공사판이 생겼는데 거기서 흙파는 일을 하고있어요.》
《그래서 여기다 움막집을 지었구나.》
《예.》
남북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이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일두 못하겠다구 해요.》
《왜?》
《일은 몹시 고되구 돈두 제때에 주지 않는다구 그 일두 그만두어야겠다구 해요. 벌써 이리루 온지 두달이나 됐는데 돈은 상기 한번두 못받아봤어요.》
이 말을 들으신
《그럼 다른데 어디 일자리라두 있다구 하던?》
《다른데 일자리가 있으면 벌써 그리루 갔지요 뭐. 아버지는 북간도로 들어가겠다구 해요. 아마 며칠후에 떠나게 될것 같아요.》
《그래?》
《아는 아이들이냐?》 하고 명식형님이 귀속말로 물었다.
《토성랑에서 만났던 오누이인데 불쌍한 어린애들이예요. … 이 밤을 주고 갈가요?》
《주구 가자꾸나.》 명식형님도 서근서근 대답하였다.
《그럼, 너희 집으로 내려가자. 가서 집구경이라도 하자꾸나.》
《집구경이야 뭐 할게 있나요. 부자집 돼지우리만두 못한데요.》
일행은 움막으로 내려갔다. 뒤는 언덕을 허물어 벽으로 만들고 량옆을 떼로 막고 앞에는 나래를 달았는데 지붕은 나무가지를 걸치고 조짚을 아무렇게나 덮어놓았었다. 그리고 그옆에는 작은 솥이 하나 걸려있었다. 우선 이 움막에서는 겨울을 날것 같지 않았다.
《남북아! 이 밤을 장쇠에게 삶아주어라.》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야요.》
남북이는 펄쩍 뛰는것이였다.
《누나!》
장쇠는 누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밤을 받으라는 눈치였다. 장쇠의 두눈에서는 밝은 빛이 넘쳐흘렀다.
《너희들 잘 있어라.》
《오빠, 안녕히 가세요.》
《형, 잘 가요.》
두 남매는 언덕에까지 따라와서 배웅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