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23
어느덧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에 들어서게 되였다.
방학을 하게 된 날이였다. 이날도
(그리구보니 팔도구에서 떠난지도 벌써 넉달이 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니 새삼스럽게 세월이 빠르다는것을 느끼게 되셨다. 조선으로 떠나보내시며 하시던 아버님의 말씀을 한마디한마디 되새기시면서 넉달동안에 하신 일들을 돌이켜보신
(내가 넉달동안에 한 일을 아버님께서 낱낱이 아신다면 만족해하실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이날 아침에
매일처럼 돌아보시던 학교정원이지만 한달나마 계속될 방학을 앞두고 한번 더 돌아보고싶으셨던것이다.
개학날에 심으신 소나무는 뿌리가 붙었는지 새순이 뾰족뾰족 돋아났고 동무들이 심은 백양나무와 아카시아나무들도 벌써 잎이 퍼그나 자랐다.
(나무는 심어만 놓으면 잠간사이에 자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니 그날 나무를 더 많이 심지 못한것이 후회되셨다.
종소리가 울렸다.
운동장에서 떠들던 학생들이 모두 정렬하였다.
방학동안의 생활에 대한 교감선생님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 학생들은 모두 자기 교실로 줄지어 들어갔다.
아이들은 교실에 들어가자 마치 통신부를 보기라도 한듯이 누구는 최우등이라느니, 누구는 우등이라느니 하면서 참새무리처럼 재잘댔다.
모두들
이윽고 담임선생님이 방학간 과제장과 통신부를 들고 들어왔다.
《야아!》 하고 아이들이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공부를 잘 못한 아이들은 벌써 얼굴이 벌개서 머리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방학기간에 할 일에 대하여 더 자세히 이야기한 후에 과제장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과제장을 가지고 방학동안에 어떻게 학습을 할것인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다음 담임선생님은 통신부를 손에 들었다.
방안은 쥐죽은듯이 고요해졌다.
《자! 이제 통신부들을 내주겠는데 학부형들에게 갖다보이고 개학하는 날에는 학부형의 도장을 꼭 받아가지고 와야 합니다. 알겠지요?》
《예!》
아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리고 성적이 뒤떨어진 학생들은 방학동안에 열심히 공부해서 새 학기에는 모두 성적들을 버쩍 올려야 하겠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말하고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어떤 아이들은 통신부를 쓱 들여다보고는 빙긋 웃기도 하였고 어떤 아이들은 통신부를 들여다보면서 자기의 셈과는 맞지 않는다는듯이 머리를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통신부를 펴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데? 내 이름은 왜 부르지 않으실가?)
맨 마지막이였다. 통신부는 한장밖에 남지 않았다.
《자! 보시오.》 하고 담임선생님은
《야! 모두 갑(甲)이구나!》
앞에 앉은 아이들이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공부하고있었습니다!》
《옳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오늘 이런 훌륭한 성적을 받게 된것입니다.》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특히 기쁜것은 학교적으로 보아서 우리 5학년학생들의 성적이 제일 좋은것입니다. 작년 1학기에는 락제점수들이 적지 않았고 학년말에 가서야 겨우 락제점수를 면할수 있었던 몇몇 학생들의 성적이 갑자기 뛰여올랐습니다. 특히 칠골아이들과 팔골아이들의 성적이 쑥 올라갔습니다. 인삼이, 덕범이, 경만이, 호철이를 비롯해서 여러 학생들의 성적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성적이 좋아졌겠습니까 . 여기에도
담임선생님은 주먹을 흔들면서 힘있게 이야기했다.
이날 오후
그러나
(배우는것이야 어찌 끝이 있겠는가. 배우고 또 배우고 읽고 또 읽자! 그리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조선을 똑똑히 알기 위하여 나는 앞으로 더욱 노력하여야 한다.)
방학은 한달나마 계속되기때문에 그동안에 집에 갔다올 시간은 넉넉했다.
그리고 방학간 과제는 길가다가 쉬는 짬짬에도 할수 있고 또 밤이나 새벽에 하면 넉넉히 해낼것 같으셨다. 빨리 가면 팔도구에서 1주일동안은 머물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어서 떠나고싶은 생각이 간절하시였다.
(팔도구에 가서 아버님과 어머님도 만나뵙고 그리운 철주동생과 영주동생도 만나보았으면 얼마나 반갑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시니 팔도구에서 떠나던 날 계속 손을 흔들던 동생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물거렸다. 그리고 팔도구에서 같이 놀던 많은 동무들의 얼굴도 하나하나 눈앞에 나타났다.
팔도구뒤산과 압록강 그리고 팔도구강으로 돌아다니며 군사놀이도 하고 헤염도 치시면서 즐겁게 놀던 그때의 일들이 삼삼히 떠오르셨다. 그애들도 만나 서로 붙들고 그동안에 얽힌 이야기들을 나누고싶으셨다.
(한번 갔다올가?)
그러나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는 나에게 조선에 대해서 잘 배워가지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지금 돌아가면 어떻게 생각하실가? 아버님이나 어머님께서는 나를 보고 반가와하기보다도 오히려 꾸지람을 하실거야.)
집에 갔다오려면 적지 않은 려비가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을 마련하자면 빚을 내거나 또 장리쌀을 내다가 파는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건 안돼. 그렇게 되면 나때문에 살림은 더 쪼들려들고 두 집에서 공연히 걱정만 하게 될거야. 절대로 그런 말을 꺼내놓을 필요도 없어. 통신부는
이때 호철이가 씨근덕거리며 그리로 뛰여올라왔다.
《야! 여기 있는걸 모르구 찾아다녔구나.》 하며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왜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특별한 일은 없어두 좀 만날 일이 있어서 여기저기루 널 찾아다니댔지 뭐.》
《왜?》
《난 오늘 우리 어머니한테 가서 통신부를 보였더니 말이야, 얼마나 기뻐하시겠니. 사실 난 학교에 입학해서 이번 성적이 제일 좋거덩! 그런데 난 우리 어머니한테서 꾸중을 들었어.》 하며 호철이는 머리를 약간 숙이였다.
《그건 어째서?》
《내 성적이 높아진것을 아신 후에 우리 어머니는 〈그래, 네 성적이 어떻게 좋아졌는지 알구나 있니?〉하고 묻질 않겠니. 그래서
이 말을 들으신
《아니, 네 성적이 올라간거야 네가 부지런히 공부한 덕이지 나때문에 올라갈게 뭐란 말이냐. 넌 정말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학교운동장을 지나 언덕아래로 내려서는데 동무들이 한패 밀려올라오고있었다.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길게들 하구있니. 어서 가자. 자, 봐라. 80전이야. 이거면 아마 배가 불쑥하게 먹구두 남을거야.》
덕범이는 돈을 흔들어보이며 떠들썩 고아댔다.
《사실은 우리 칠골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했어야 할건데 호철이한테 한꼴 먹은셈이야.》 하며 윤병이가 앞장섰다.
《윤병아, 너까지 그러면 어쩌겠니. 그건 안돼. 내가 뭘했다구 한턱을 얻어먹는단 말이냐. 같이 모여서 공부를 한거야 너희들에게만 좋았니. 그건 내게두 좋았지. 그런데 무슨 한턱을 내구 또 얻어먹구 하겠니.》
《여기서 가타부타 떠들지 말구 어서 가자. 난 참외생각만 해두 벌써부터 닭알침이 꿀꺽꿀꺽 넘어간다.》 하고 덕범이가 말했다.
《덕범이, 너두 생각해보려마. 내가 어떻게 너희들한테서 그런 대접을 받을수 있겠니. 정 그렇다면 나두 돈을 내구 같이 가서 먹기루 하자.》 하고
《아니야, 그건 안돼. 그랬다가는 난 우리 어머니한테 한번 더 욕을 먹게 돼!》
호철이의 말이였다.
《그렇게 하면 너만 욕먹는줄 아니? 나두 욕먹어.》 하며 경만이는 호철이를 쓱 흘겨보더니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우리 어머닌 백로지 사겠다구 돈 3전만 달라구 해두 벌써 다 썼느냐구 욕을 한바탕 하구서야 벌벌 떨면서 돈을 주군 했단다. 그런데 오늘은 호철이가
《넌 삼일례배보러두 가구 일요일에두 례배당에 가야 하지 않니?》 하고 덕범이가 빈정대는투로 말했다.
《이젠 우리 어머니두 례배당에 못다니게 됐어. 우리 아버지한테 욕을 먹었단다.》
《왜?》
《전번에 비왔을 때 우리 논에 물이 찼댔는데 그날이 바로 일요일이였거덩.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례배당에 갔단 말이야. 우리 아버지 혼자서 논두 갈구 써레질두 하구 모두 뜨구 심기까지 해야겠는데 그렇게 할수 있니? 그래서 하루밤 지나는 바람에 물이 다 잦아들구말았지. 물이 없는데 어떻게 모내기를 하겠니? 할수없이 말뚝모를 했지 뭐.》
《그래서 잘됐니?》
《잘됐으면 우리 아버지가 늘 욕하겠니? 그리구 우리 어머니는 례배당에 가서 내가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구 늘 기도를 드렸다나? 그래두 계속 락제만 하더라는거야. 그런데 교감선생님의 외손자가 와서 배워준 덕에 락제두 면하구 우등생에 가깝게 되였다는거지 뭐. 우리 아버지는 뭐라고 말했는지 아니?》
《뭐라구 말했니?》
《거 보라구, 결국 교감선생님의 외손자가 하느님보다 낫지 않은가. 그래두 만날 가서 〈천당 만당〉하겠는가 하고 놀려주었단다. 그리구 〈예수를 믿어서 무슨 복을 받았는가. 결국 가난하게 사는것밖에 더 있는가. 그런데 뭐가 고맙다구 만날 엎디여서 감사합니다 하구 기도를 드리는가 말이야. 교감선생님의 외손자 말대루 그건 다 권력있구 돈많은 놈들이 우리네 가난한 사람들을 소나 말처럼 부려먹기 위해서 만들어낸것이란 말이 옳단 말이야.〉 이렇게 말했단다.》
《그럼 너의 어머닌 이제는 례배당에 안다니냐?》 하고 인삼이가 물었다.
《다니긴 해두 이전과는 달라졌어. 요전에두 밭이 묵었다면서 일요일에 김매러 나갔댔단다. 며칠을 두고 요전에
지금까지 경만이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계시던
《경만이, 네가 공부를 더 잘하면서 어머님께 잘 말씀드리면 똑똑히 깨달을수 있을거야. 례배당에 다니는것은 우리 나라를 먹으려고 하는 미국놈들한테 속아넘어가는것이란다. 그런걸 잘 대드리란 말이야.》
《그 말두 다 했어!》
《한번만 해서는 안돼. 례배당에 나가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야 되는거야.》
《응, 알겠어.》
《그건 그렇구. 참외먹으러 가는건 그만두자. 너희들이 그런 말을 부모들에게까지 해서 돈까지 타가지구 왔다니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는 모여서 공부두 하지 못하게 되구 서로 묻구 대주지도 못하게 된단 말이야. 그리고 아이들이 원두막에까지 나가서 참외추렴을 한다는건 좋지 않아. 생각해보려마. 여기있는 사람치고 누구네가 잘사니. 너네들두 모두 집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밀죽들을 쑤어먹구있지. 그런데 부모님들한테 돈을 타가지구 나가서 우리들이 참외추렴을 해? 그건 절대로 안돼. 그런 생각들은 그만두구 방학동안에 할 일들이나 의논해보자.》
《그럼 저 돈을 어떻게 하겠니?》 하고 호철이가 매우 딱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너의 어머니께 돌려드리면 될게 아니냐.》
《아니야. 그랬다가는 어떻게 우둔하게 말을 했느냐구 또 욕할거야.》
《그건 네가 이야기하기나름이지. 너의 어머니성격을 잘 알겠으니까 가서 잘 이야기하려무나. 하여간 원두막에 가는건 그만두자.》
옳은 일이라면 꼭 하시고야말고 그른 일이라면 단연코 그만두시는
《그래, 너희들 방학동안에 무슨 일들을 할 작정이냐?》 하고
《정방산에 한번 가보는것이 어때. 산성두 한번 돌아보구 말이야.》
《산성까지 돌아보려면 2~3일 묵어야겠는데 너네 돈이 그렇게 많으니? 그러지 말구 여름방학동안에 뽈차기련습을 잘해가지구 보통학교아이들하구 축구시합이나 한번 해보자꾸나.》 하고 덕범이가 말했다.
《좋아! 나는 대찬성이다.》
인삼이가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딱소리를 냈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찬성했다.
《윤병이, 넌 뭘했으면 좋겠니?》 하고
《돈이 있다면 경만이 말대로 정방산에 가서 산성을 한번 돌아보는것두 좋구 축구련습을 해가지구 축구시합을 하는것두 좋지만 방학이라구 해서 놀기만 해서는 안될것 같애. 지금 집에서는 무척 바빠하는데 놀기만 해서는 안된다구 생각해!》
윤병이는 노상 어른답게 대답했다.
《윤병이 말이 옳아. 방학이라구 해서 놀기만 해서는 안된다는거야.》
《그럼 보통학교하구 축구시합은 못한단 말이지?》 하며 인삼이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우리들이 잘 짜구들면 축구련습두 할수 있구 보통학교아이들하구 시합두 할수 있을거야. 이제 김은 한 스무날 걸리면 다 맬수 있을테니까. 그리구 학습은 집의 일을 도와주면서 그날그날 해나가면 될게구. 어떠냐? 래일부터라두 우리모두 아버지, 어머니들의 일을 도와서 김두 매구 아이두 보구 소도 먹이구 해서 김매기들을 제꺽 마치구 뽈차기를 하는게 말이야.》
아이들은 모두
이리하여
이날저녁
《인삼이, 너 호철이에게 창유리 깨뜨린 얘기를 한번 해봤니?》 하고
《아직 못해봤어. 말이 나오지 않거덩.》
《왜, 그애가 무서워서?》
《무서운 생각은 좀 적어졌는데 그애가 좋아할것 같지 않거덩.》
《당장은 좋아하지 않을수 있지만 앞으로는 좋아할게다. 그런 말을 해주는 아이가 사실은 친한 동무란다.》
《앞으로 꼭 얘기해주겠어.》
《우물쭈물할게 있니 뭐. 한번 조용히 만나서 귀띔해주면 되겠는데.》
《응, 그렇게 하겠어.》
《이것봐, 내 통신부!》
그는 통신부를
《음, 모두 갑이로구나! 명구가 아주 공부를 잘했는데.》
《형두 공부 잘했지?》
《난 너만 못해.》
《어디 형 통신부 보자. 여기 있지?》
명구는
명구는 통신부를 들고 아래방으로 뛰여내려가며 소리쳤다.
《할머니! 형두 몽땅 갑이야. 이거 봐요!》
《그렇게 직심스레 공부를 했는데 왜 갑을 못받겠니?》
외할머님의 얼굴에는 웃음빛이 넘쳐흘렀다.
이날
그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