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12
일년 열두달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어느 하루도 편안히 쉬지 못하고 뼈가 휘도록 일을 하고도 나물죽조차 배불리 먹을수 없는것이 조선농민들의 생활이였다.
자기의 피와 땀으로 지은 곡식을 강도 일제에게 뜯기우고 지주에게 빼앗기다나니 가을이 되여도 소작인들에게는 쭉정이 몇말이 차례지는것이 고작이였다.
그나마도 타작마당에서 물세니 땅세니 비료값이니 장리쌀이니 하며 다 빼앗기고나면 비자루와 빈 키만 들고 나앉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러기에 농사는 지었건만 겨울부터 식량이 떨어지는 집이 많았고 다소 식량이 있다는 집마저 봄까지 이어대기가 어려웠다.
지난해에 조금 남은 낟알은 다 먹어버리고 아직 보리나 밀은 나지 않아 굶주리게 되는 시절을 《보리고개》라고 한다. 이 《보리고개》야말로 조선농민들의 굶주림과 눈물과 한숨과 원한의 상징이였다.
이 시절을 넘길수 없어 정든 고향산천을 떠나 천리타향으로 정처없이 떠나는 사람은 그 얼마였으며 사랑하는 처자를 두고 로동판을 찾아 헤매이거나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공장이나 머슴군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딱한 사정에 처했던 사람은 또 얼마였던가!
언제나 소작인들의 피와 땀을 빨아 자기의 배를 채우는 지주들은 이 《보리고개》를 리용하여 농민들의 기름을 더 가혹하게 짜냈던것이다.
어느날 이른새벽이였다.
《아무래도 조 두섬은 있어야 두집에서 밀 나올 때까지 이어댈것 같습니다.》
가운데외삼촌의 말이였다.
《밀 나오기를 기다린댔자 뭐 먹어볼게 있겠나? 순응골 밀밭에두 가물이 들어서 밀이 소돌소돌 마르던데 엎친데덮친다구 날씨는 왜 이리 가무는지 모르겠군. 기미년처럼 가물어서 곡식을 다 태워죽인 후에 큰 장마가 지려는 모양이지.》
외할아버님의 말씀이였다.
《그러기에 모두 굶어죽는다구 야단들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외할아버님께서는 《후―》 하고 긴 한숨을 짓는것이였다.
《먹지 않구 사는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수도 없구. 야단이 아닌가?》
《그래서 어제 귀동이네 집에 가서 장리루 조 두섬만 달라구 부탁했습니다.》
《장리?》
외할아버님께서는 약간 놀라는 표정이시였다.
《할수 없지요. 가난한 사람이란 그래서 점점 더 가난해지게 마련이구 부자놈들은 점점 더 큰 부자가 되는 법이 아닙니까.》
《그래 시원히 대답은 하던가?》
《그놈이 언제 소작인이 부탁하는 말에 시원히 대답하는 일이 있나요. 제 배속을 채우는 일인데두 죽어가는듯이 엄살을 하다가 마치 소작인들의 큰 사정이라도 보아주듯이 장리두 놓구 장변두 주는걸요. 그 사람두 평양에 펴놓았다는 비단공장이 잘 안되는 모양입니다. 그 보충을 농민들한테 춰볼 배심이겠지요.》
《그래서 또 비굴한 소리를 했나?》
《그놈의 배속을 다 알구있는데 무슨 비굴한 말을 하겠어요. 썩어나는 곡식인데 장리를 먹겠다구 하면 달구지에 실어다가라두 주구싶어하겠는걸요.》
《그래 뭐라고 하던가?》
《조가 몇섬 없는데 좀 생각을 해보자는게지요.》
《고현놈같으니라구, 보리고개에 장리를 주려구 곡식을 창고에 치쌓아놓구서두 조가 몇섬 없다구? 안주겠으면 그만두라지. 조 두섬을 먹구 석달후에 석섬을 물어야 하는데 빌붙어서는 안되네.》
《할수 있습니까. 이놈의 세상은 돈있는 놈의 세상인걸요.》
《얘기를 해두었으면 그냥 내버려두라구. 그놈이 안준다구 어디 가서 장리야 못얻어오겠나. 내 성안에 들어가서라도 변통을 해보지.》
《그만두세요. 성안의 부자라구 별다른줄 아세요? 그놈이 그놈인걸요.》
《그놈이 그놈이란 말은 옳으네. 후― 이놈의 숨막히는 세상이 언제까지나 가려누.》
외할아버님의 한숨소리가
썩어나는 곡식 두섬을 가져다먹고 석달후에 석섬을 갚아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놈의 법이 그렇게 돼먹었는지 알수 없었다.
농민들이 조 한섬을 벌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가.
그런데 최돼지는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농민들이 지은 곡식을 공짜로 빼앗는것이 아닌가.
소작료로 빼앗고 장리로 빼앗고 장변 리자로 빼앗고… 이렇게 빼앗기고 저렇게 빼앗기다나면 농민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
오히려 칠골 외가집보다 더 구차하면 구차했지 조금이라도 나을수는 없다고 생각되셨다.
설사
(어떻게 할가? 팔도구로 돌아갈수도 없는 일이구…)
이날아침에 가운데외삼촌은 귀동이네 집에서 조 두섬을 장리로 가져왔다.
《아버지, 이거 어디서 실어왔나?》 하고 명구가 물었다.
《성안에 가서 사왔다.》
《돈은 어디서 났나?》
《아버지가 벌었지.》
《그럼 왜 좁쌀을 사왔나. 흰쌀을 사오지, 난 흰쌀이 좋아.》
《흰쌀두 이제 사오지.》
《이만큼 사와야 해.》
명구는 두팔을 힘껏 벌려보였다. 가운데외삼촌은 천진한 명구를 바라보며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그날아침
《아니, 너 왜 벌써 술을 놓는거냐. 응?》
가운데외삼촌이 깜짝 놀라는것이였다.
《어서 더 먹어라. 왜 지레 술을 놓는것 같구나.》 하며 외삼촌어머님은 숭늉그릇을 들어
《지레 놓기는 왜 지레 놓아요. 배불리 많이 먹었는데요.》
《너 어디 몸이 말짼게로구나.》 하고 이번에는 외할머님께서 물으셨다.
《아니야요. 할머니, 몸이 왜 말째요. 이렇게 건강한데요.》
《그럼, 왜 아침을 먹다가 마는거냐.》
《네가 무슨 말을 들은 모양이구나. 걱정말아라. 산사람의 입에 거미줄 쓸겠니? 어서 더 먹어라.》
외삼촌어머님은
《말은 무슨 말을 들어요. 배불리 먹었는데요 뭐.》
그날 오후였다.
그러나 오늘따라 책을 펼쳐놓을 생각도 나지 않으셨다. 이른새벽에 외할아버님과 가운데외삼촌이 하시던 말씀들이 기억에 되살아났던것이였다.
그리고 어머님께서 팔도구나루터에까지 나오셔서 두 집의 농사일도 잘 도와드리라고 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히 울려왔다.
(어머님께서는 집형편을 잘 아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셨댔구나. 내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가?)
물론
뜨락과 방안청소로부터 동생들의 시중을 도맡아하다싶이 하셨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직접 살림에 보탬이 되는 일은 되지 못했다.
한동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잠겨계시던
그것은 밀밭에 물을 주어 가물을 막아보자는 생각이였다. 요즘 농민들은 누구나 서로 만나기만 하면 가물에 대해서 걱정들을 하고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오래동안 비는 오지 않고 가물어서 밀보리들이 소들소들 말라가는게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라고 누구도 그 가물을 막을데 대해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가물이 들었다고 어째서 하늘만 쳐다보고있어야 하겠는가. 하늘에는 구름 한점 보이지 않는데 언제 비가 내리겠는지 알수 없지 않는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기다릴것이 아니라 흘러내리는 강물을 논과 밭에 끌어넣거나 물웅뎅이에 고여있는 물을 등짐으로라도 져다가 곡식에 주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남새밭에는 물을 길어다주어서 가물을 이겨내는데 하필 밀밭이라고 하지 못할 리유는 없지 않는가.
《얘야, 너 물지게를 지고 어디로 가는거냐?》 하고 외할머님께서 물으셨다.
《순응골 밀밭에 좀 나가보겠어요.》
《거긴 뭘하러?》
《밀밭에서 가물을 쫓아보내려구요.》
《그래 밀밭에 물을 주겠단 말이냐?》
《예, 비가 온것만큼 본때있게 물을 주면 가물을 막을수 있지 않아요?》
《호호호… 세월이 너같으면 정말 좋겠다.》
외할머님께서는 이렇게 웃고마셨다.
그러나
가물에 쪼들려 곡식들은 소들소들 말라붙었다. 세벌이나 김을 매서 이랑을 북돋기는 하였으나 밀들은 아직 한뽐도 되나마나하였고 콩포기들마저 박주가리처럼 잎이 오그라들었다.
잔디도 잎이 까칠해졌고 바랭이풀마저 촐촐 말라붙었다.
습기라고는 거의 찾아볼수 없이 보송보송한데 아직 잎이 마르지 않은것이 용해보였다.
그리고는 밀밭을 바라보셨다. 오늘저녁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다가 못한다면 래일 계속하고 래일 하다가도 채 못한다면 모레… 이렇게 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밀을 가물에서 구원하고야말리라고 결심하셨다. 가물이 못견디나 사람이 못견디나 어디 내기라도 해보리라고 속다짐하셨다.
책상에 마주앉아 책을 펴놓으시려던 외할아버님께서는
《여보, 성주가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소?》 하고 아래방에 대고 큰소리로 물으셨다.
외할머님께서 사이문을 열고 웃방을 들여다보시더니 《글쎄, 그애가 노상 엉뚱한 생각을 해낸다오.》 하고 말하며 어이없다는듯 허그프게 웃으셨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
《나도 처음 듣는 소리웨다. 뭐 가물든 밭에 물을 길어다준다나요. 그래서 물지게를 지구 순응골로 나갔다우.》
《순응골로? 음, 사람의 힘으로 가물을 막아낸다 그런 말이지.》
외할아버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
행동하시는것, 말씀하시는것, 생각하시는것, 그 모든것을 주의깊게 보는 동안에 외손자에게서 그 어떤 큰것이 싹트고있음을 느껴온 외할아버님이시였다.
외할아버님께서는 혼자 머리를 끄덕이시며 결연히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공연히 나이만 먹었지. 사람은 늙어죽도록 배운다는 말이 옳아!》
이렇게 혼자말처럼 중얼거리고나서 외할머님을 돌아보시며 이런 말을 하셨다.
《여보, 당신도 동이를 이고 나갑시다. 그리구 보패에게 얘기해서 김을 매구 돌아들 오면 물지게와 동이들을 가지고 모두 순응골 밀밭으로 나오라구 일러두어야겠소.》
《아니 그럼, 령감두 밀밭에 물을 주러 나가겠단 말이요?》
외할머님께서는 눈이 둥그래져서 물으셨다.
《가물든 밭에 물을 준다는데 그렇게 놀랄거야 있소?》
《내 원! 머리가 희도록 살아왔어두 밀밭에 물을 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쉐다.》
《우리 조상들이 하던 그대로만 하다가는 될 일이라군 아무것도 없단 말이요. 여러말 말구 어서 나갑시다.》
외할아버님께서는 약간 언성을 높이셨다. 그리고는 이웃집에서 물지게를 얻어지고 순응골을 향하여 바쁜 걸음을 걸으셨다. 한번 말하시면 그대로 하시고야마는
《아니 할아버지두 나오셔요?》
물을 길어가지고 밀밭머리로 돌아오시던
《내가 너한테 진셈이로구나. 밀이 총총 마르는것을 보고도 밀밭에 물을 줄 생각이야 어디 꿈엔들 했니? 하기야 밀밭에 물을 준단 말이야 50이 넘도록 들어보지두 못했지.》
이렇게 말씀하시며 외할아버님께서는 큰 늪으로 내려가셨다.
《할머니는 또 왜 나오셔요? 제가 나오는걸 보시구는 웃으시기만 하시더니.》
《너의 할아버지까지 나오는데 내라고 안나올수 있던. 뒤로 보패랑 너의 삼촌이랑 삼촌어머니도 아마 나올게다.》
세분께서 부지런히 물을 길어다주고계실 때였다. 마을의 할아버지 한분이 소를 몰고 그리로 지나가다가 《여보게 교감선생.》 하고 불렀다.
황주에서 왔다고 해서 황주집할아버지라고 하는분이였다.
《예, 벌에 나가셨댔습니까?》
《논 갈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일세. 그런데 자고로 밀밭에 물을 주는 법이라군 없다네. 그만두구 어서 들어가세.》
《없는 법두 만들면 될게 아닙니까.》
《만들다니, 옛날부터 밀밭에 김을 매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밀밭에 물을 주다니? 그 무슨 망녕스런 일을 하구있나. 책상물림이란 참 딱하단 말이야. 어서 들어가자구.》
《먼저 들어가십시오. 정말 망하나 한번 시험해봅시다그려.》
《허허허… 그것참, 오래 사니까 별일을 다 보겠는데. 밀밭에 물을 주다니…》
이렇게 말하며 황주집할아버지는 가던 길을 계속갔다.
《그놈의 무지가 나라까지 망쳤건만 아직 깨뜨릴 생각은 하지 않고 그대로 미신에 매달려있으니 참 딱한 일이야.》
외할아버님께서는
두 집의 남은 식구들과 학습반동무들이 물초롱과 물동이를 이고지고 순응골 밀밭으로 달려오고들 있었다.
《아니, 너희들은 또 왜 나오니?》
《모두 달라붙어서 제깍 끝내구 가서 공부를 하자꾸나.》
동무들을 데리고나온 윤병이의 대답이였다. 그들은 곧 큰 늪으로 달려가서 물을 길어다 밀밭에 주기 시작하였다.
컴컴해오던 누리는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사람들은 모두 일에 성수가 났다. 물을 길러 언덕아래로 내려가는 사람, 밀밭이랑에 물을 주는 사람, 물통과 물동이에 물을 길어넣는 사람, 모두 분주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몇시간 안되는 사이에 서마지기나 되는 밀밭에 물을 흠흠하게 주었다.
《야, 이거 정말 미안하구나 너희들에게까지 수고를 끼쳐서.》
《넌 별말을 다 하는구나. 저녁 먹구 운동을 한참 했더니 기분이 아주 썩 좋아진다 얘.》
덕범이의 익살맞은 대답이였다.
《자, 그럼 이제는 돌아가서 공부를 해보자.》
그들은 유쾌하게 노래를 부르며 마을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