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회
7
3월도 마감고비에 들어서니 벌써 봄기운이 완연히 느껴지며 날씨도 무척 따뜻해졌다. 양지바른 언덕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움돋기 시작했고 실실이 늘어진 수양버들그늘밑에서는 아이들의 구성진 호드기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소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선
봄의 선구자라는 진달래는 불그레한 망울이 앉았고 벌판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여오르고있었다.
따스한 볕을 받은 산과 들, 나무와 풀들은 사람들의 품에 한결 더 정답게 안겨왔다. 말랐던 가지에서 새싹이 뾰족뾰족 움돋고 멎었던 시내물이 소리치며 흐르고 잠자던 대지가 기지개를 켜는 이 모든 봄의 정경은 새 희망에 가슴설레이시는
들판에서는 소바리와 등짐으로 두엄을 나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조밭가래질을 하는 농민들의 모습들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올해의 농사가 바야흐로 시작된것이다.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은 집이 100호가량이나 되였는데 군데군데 기와집도 있었지만 거의가 초가집들이였다.
그때 외가집에 간다면 왜 그리도 기뻤는지 알수 없으셨다. 외가집에서도 살림이 가난한데다가 식솔들이 많아서
아무리 값진 음식을 차려놓고 대접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사랑과 진심이 없다면 정이 끌릴수 없다. 그러나 죽물을 떠놓았을망정 거기에 꾸밈없는 사랑과 진정이 깃들어있을 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기마련이다. 그때 외가집에 가기를 즐겨하신것도 아마
(이제부터 저기서 공부하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시니 벌써부터 마음이 즐거워지셨다.
어느덧 한 기와집앞에 이르셨다. 넓은 마당에는 로적가리가 가지런히 서있고 여러해 묵은 큰 나무낟가리가 있는 품이 굉장히 잘 사는 집인 모양이였다. 그런데 로적가리뒤에서 한 아주머니가 치마자락으로 눈물을 닦고있는데 그의 곁에는 허줄하게 입은 한 중년사나이가 마주서서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삽을 들고 도랑을 치던것으로 보아 이 집의 머슴군임에 틀림없었다.
《글쎄, 이렇게 로적가리를 쌓아놓구 쌀이 없다구야 말이 돼요! 빚을 물것 같지 못하니까 안주겠다는 말이지. 하기야 이미 진 빚두 갚지 못하구 또 찾아온 내가 잘못이예요.》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였다.
《그럼, 농사두 그만두구 굶어죽으란 말인가? 이놈의 세상이 왜 이렇게 공정칠 못할가요.》 하며 중년사나이가 한숨을 지으며 하는 말이였다.
(이 집으로 빚을 얻으러 왔다가 못얻어가는 모양이구나.)
초록바지저고리에 남색조끼를 받쳐입은 열대여섯살가량 되여보이는 아이가 마당에서 자전거를 타고있는데 두 아이가 뒤에서 밀어주고있었다.
자전거를 타고있는 아이는 자전거손잡이를 잡고있을뿐이고 가누기는 자전거를 밀어주는 아이들이 하고있었다. 밀어주는것도 자기 차례가 오지 않는 모양인지 몇아이는 자전거를 주런이 쫓아만 다니고있었다.
그중의 한 아이는 키가 날씬하고 눈이 류달리 컸으며 또 한 아이는 단지팽이같이 뚱뚱해서 인차 눈에 띄였다.
(흥! 저애들은 너절하게 뭘 저리 주런주런 쫓아다니구들 있을가?)
(남들은 모두 농사일에 바빠하는데 이 집은 딴세상이구나!)
이때에 자전거를 타던 아이가 훌쩍 뛰여내리더니
얼굴은 밀지짐처럼 둥글넙적하고 볼살이 척 늘어졌는데 코끝은 가위로 자른것처럼 발딱한 꼴이 정말 보기만 해도 우습강스러웠다. 어찌나 잘 먹었는지 얼굴에는 개기름이 번지르르 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새서방처럼 차려입고 아이들을 시켜 자전거를 밀게 하는 꼴이 밉살스러웠는데 밑도끝도없이 《뭐야?》 하고 소리치니 더욱 아니꼬우셨다.
그애는 잡고있던 자전거손잡이를 다른 아이에게 맡기더니
《사람인줄은 나두 안다. 뭣하러 어디로 가는가 말이야?》
그애는 턱을 재치고 뒤짐을 착 지더니 제법 따져드는것이였다.
(돈냥이나 있다구 아주 건방진데. 버릇없이 되는대로 자란 놈의 자식이로구나!)
《남이야 뭣하러 어딜 가든 그건 알아서 뭘하겠니. 너는 어서 자전거나 배워라. 아직 서툰 모양이구나.》
《뭐 어쩌구 어째?》 하며 그 아이는 대들기라도 할듯이 한걸음 다가서는것이였다.
《너 싸움을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꼭 한번 붙어보아야 하겠냐?》
그 아이놈은 뭐라고 대답은 하지 못하고 제 동무들만 둘러보면서 눈만 깜박이고있었다.
《이거 뭐 만나자바람으로 싸움부터 하겠니. 나도 이 동네로 살려온다. 정 붙을테면 붙어도 좋다만 너 그런 새옷을 입구 먼지구뎅이에 한바탕 굴면 옷이 꼴이 되겠니?》
《너 그애하고 맞섰다가 진짜 달라붙으면 어쩔려구 그러댔니? 그애 힘이 얼마나 센지 아니? 20년묵은 산삼을 세뿌리나 먹었어.》 하고 키가 날씬하고 눈이 큰 아이가 말하는것이였다.
이때에 단지팽이처럼 통통하게 생긴 아이가 먼저 이야기한 아이를 흘겨보며 대꾸했다.
《산삼이면 다가? 너같은 애나 개삼이나 산삼을 부러워하지 누가 부러워하는줄 아니? 난 조밥에 토장만 먹어두 그따위 시라소니같은건 다섯명두 당해내겠다.》 하고 툭 쏘아주는것이였다.
《나두 부러워 안해. 그새끼는 이걸루 한대 먹여대면 그만이야.》
먼저 말을 꺼낸 아이가 주먹을 흔들어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 켕기는 모양인지 기와집쪽을 흘깃 돌아보는것이였다.
그들은 말없이 한동안 걸었다.
《너 이 동네로 살려 온다는데 어느 집으로 이사오니?》
키가 날씬하고 눈이 큰 아이가 물었다.
《살려 오는것이 아니라 우리 외가집으로 공부하러 온다. 너희들두 창덕학교에 다니냐?》
《응! 너두 창덕학교에 다닐셈이냐?》
《응.》
《그래? 그럼 너의 외가집이 어느 집이냐?》
이번에는 단지팽이처럼 통통한 아이가 물었다.
《저기 보이는 저 집이 우리 외가집이야.》
《우리 학교 교감선생님네 말이구나!》
그 아이는 발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너 그럼 간도에서 오지 않니?》
《간도에서 온다. 그런데 우리가 간도에서 산다는건 네가 어떻게 아니?》 하고
《알지 않구. 이래뵈두 내 눈은 만리경이야!》
그애는 시치미를 뚝 따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로서도 웃음이 나갔던지 돌아서서 주먹을 입에 대고 키득키득 웃는것이였다.
《그건 허튼소리구 이 근방에 사는 사람치구 너의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줄 아니. 너의 아버지가 간도에 가서 무슨 일을 하고계시는지 다 알구있단 말이야.》
《네가 먼저 알리겠다구? 흥, 어림두 없다!》 하며 이번에는 통통한 아이가 먼저 달아나는 아이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어느 사이에 그 아이는 먼저 달려간 아이를 따라잡더니 앞섰다.
(재미있는 아이들이로구나.)
외가집앞에 이르자 외할아버님, 외할머님을 비롯하여 온 가족이 밀려나왔다.
《어! 우리 성주가 이제 오는구만. 그래 팔도구에서 지금 나오는 길이냐?》 하고 외할아버님께서 물으셨다.
《잘했다. 그래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 편안하시더냐?》
《예!》
《팔도구집에서두 다 잘들 있구?》
《예!》
《철주랑 영주두 이제는 퍼그나 컸겠구나.》
《예, 철주두 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리고 영주두 이제는 방심부름을 곧잘하는데요.》
《암, 그래야지! 그러지 않아두 네가 온다는걸 알구있었다. 네 어머니가 보낸 편지가 그저께 도착했더구나.》
외할아버님께서는 매우 반가와하시였다.
《자기 늙은것은 몰라두 남 자라는것은 안다구 정말 몰라보게 컸구나. 거리에서 만나면 몰라볼번 했구나.》
가운데외삼촌의 말이였다.
《네가 기다리던 네 형님이야. 인사를 해야지.》
외할아버님께서는
《얘가 그럼 명구나요?》
《그렇다.》
《야, 굉장히 컸구나. 그때는 젖을 먹었는데.》
명구는 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너 이제는 학교에 다니겠구나?》
《래일 1학년에 붙어.》
《잘됐다. 나하구 같이 공부하자. 너 학교에 붙으면 처음부터 공부를 잘해야 한다.》
《자! 어서들 들어가자.》
외할아버님의 말씀이였다.
《이 방이 네가 공부할 방이다. 그리구 이것이 네 책상이구. 나하구 함께 공부를 해보자. 배우지 않던 과목들이 있어서 아마 한동안은 애를 써야 할게다. 래일이 개학날이니 오늘은 푹 쉬구 래일아침에 학교로 올라가자.》
책상과 책꽂이도 자작 만든것으로서 외할아버님께서 만드신것이 분명했다.
이윽고 외할아버님께서는 일이 있다면서 학교로 올라가셨다.
《어머니두 같이 오지 않구 왜 너 혼자 왔니. 네 어머니를 한번 만나면 래일 죽어두 한이 없겠는데…》
외할머님께서는 사랑에 찬 얼굴로
《어머님두 오시구싶어하셨지만 집을 떠나실수 있어야지요 뭐. 어머님의 일이 얼마나 많기에 그러세요.》
《일복 있는 사람은 어딜 가나 바쁘니라. 너의 어머니는 처녀때에만 해두 숱한 일을 했단다. 무슨 일이나 막히는데가 없었지. 바느질두 잘하구 음식두 잘 만들구 농사일은 또 얼마나 잘했겠니. 열살때부터 부엌일을 맡아서 했는데 부뚜막은 매일 물매질을 하구 솥뚜껑은 언제나 번들거렸구 독에는 언제나 물이 출렁출렁해있었단다.》
외할머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나서 무슨 생각이 나시는지 혼자 웃으시는것이였다.
《할머니, 왜 웃으셔요?》 하고
《네 어머니 얘기를 하니까 옛날생각이 나는구나. 네 어머니가 일곱살 잡히던 해 겨울이였지. 그때 나는 밤늦게까지 물레질을 하다가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어슴푸레하게 물레질소리가 들려오지 않겠니. 그래서 눈을 떠보았더니 너의 어머니가 혼자 일어나서 물레질을 하구있지 않겠니. 그런데 물레질을 곧잘 하더구나. 어느짬에 물레질을 배웠느냐구 물었더니 어머니가 하는걸 보구 해보니까 되더라는게 아니겠니. 글쎄 열살나서 베를 짰으니 말할게 있냐.…
그렇게 일을 하구두 먹을것도 먹지 못하구 입을것을 입지 못하구 고생만 하구있으니 이놈의 세상이 어떻게나 되겠는지.》
《할머니, 우리 나라두 독립을 찾구 잘살 때가 와요.》
《그래야지. 네 아버지, 어머니, 외삼촌들이랑 숱한 사람들이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으려구 애쓰는데 왜 못찾겠니. 그런 생각을 하기에 네 어머니 보구싶은 생각두 누르면서 살아오기는 했다.
하기는 너를 이렇게 만나보니 네 어머니 본것보다 더 반갑긴 하다만…》
외할머님께서는 말끝을 얼버무리고마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보낸 우리 가족사진은 받지 못했나요?》 하고
외할머님께서는 말없이 한동안
《그럼 왜 사진틀에 넣지 않았어요?》 하고 다시
《너의 아버지사진을 버젓이 내걸구 살 때가 왔으면 얼마나 좋겠니. 하기야 그런 세상이 멀지 않아 오기야 오겠지.》
서운하시던
(개놈들! 사진도 마음대로 걸지 못하게 하는구나! 우리 아버지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지.)
강진석선생님께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혁명을 위해 몸바쳐 싸우시였다. 선생님께서는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시고 그 조직을 평양과 평안남북도일대 그리고 황해도에까지 확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처음부터
선생님께서는 3.1인민봉기가 폭발되자 군중의 선두에 서서 용감히 싸우셨다. 놈들은 선생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였다.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자 선생님께서는 국내에서 투쟁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여 간도로 들어가게 되셨다. 간도로 들어간 후부터는
선생님께서는 세차례나 조선에 건너와서 활동을 하고 네번째로 다시 국내에 들어왔던것이였다.
강진석선생님께서는 평양에 나와서 동지들도 만나보고 군자금도 모집하는 등 임무를 수행하고 다시 황해도로 나갈 준비를 하고계셨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선생님께서 가지고계시던 5련발권총이 고장났다. 그래서 권총을 수리해가지고 나가기 위하여 지체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 강진석선생님께서는 평양대동려관에 들어계셨는데 여기서 억울하게도 일제경찰에게 체포되고말았던것이였다.
《맏외삼촌의 소식은 전연 모르고있나요?》
사진을 보시던
《면회를 간다고 하면서 아직 한번도 못갔다. 그놈의 돈이 있어야 면회도 갈게 아니냐. 금년농사나 잘 지으면 어떻게 되겠는지…》
외할머님의 대답이였다.
《어머니는 늘 큰어머니때문에 걱정을 하신답니다. 가까운데라면 자주 만나러라두 갈수 있겠는데 먼곳에 있으니 가볼수두 없구 만날 눈물로 세월을 보내지나 않는지 모르겠다구 말입니다.》
《눈물을 흘린들 무엇하구 가슴을 친들 무엇하겠니. 나라잃은 백성이라 그것을 자랑스러운 일로 생각하면서 크게 마음을 먹구 살아가야지.》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시는데 일터에 나갔던 맏외삼촌어머니와 외사촌형 명식이네 부부와 작은외삼촌이 달려왔다. 그리고
이날 저녁에는 맏외삼촌네 가족들도 외할아버님네 집에 모였는데 두집 식구는 모두 열세명이나 되였다. 이날은 모두가 명절날기분이였다.
그러나 차려놓은 음식은 메기알같은 조밥과 시래기를 가뜩 넣은 비지였다.
외가집어른들은 멀고먼 곳에서 찾아온
《이것참, 오래간만에 왔는데 안됐다. 흰쌀밥에 고기국으로 알구 많이 먹어라.》
외할아버님을 모시고계시는 가운데외삼촌어머님의 말이였다.
《별말씀 다하시는군요. 저는 비지를 제일 좋아해요.》
《흰쌀밥에 고기국을 놓고도 소화가 안돼서 갤갤하는것보다 조밥에 토장이라도 입달게 먹는것이 제일이니라.》
외할아버님께서는 가족들을 둘러보시며 만족한 웃음을 지으셨다.
《말타면 견마잡히구싶다더니 너를 만나니까 너의 어머니까지 만나구싶구나. 너의 어머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란다. 이 동네사람치구 너의 어머니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던? 언제나 한번 만나보게 될는지.》
맏외삼촌어머님께서는
《글쎄요. 오래지 않아 만나게 되겠지요. 왜놈들이 우리 나라에서 기승을 부리면 얼마나 부리겠나요.》
이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