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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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하늘에 붉은 노을이 비끼더니 어느덧 아침해살이 솟아올랐다. 오래지 않아 산마루에 해가 두둥실 떠올라 온 누리에 찬란히 빛을 뿌릴것이다.
1923년 초봄 어느날이였다.
홍안령을 넘어 휘몰아치는 하늬바람은 아직도 살을 에이는듯 맵짜고 차거웠다.
팔도구뒤산에서 넘겨치는 눈가루가 마구 흩날리여 언덕과 신작로에 뿌려졌다.
산과 들에는 눈이 쌓여 은세계를 이루었고 길은 사정없이 미끄러웠다.
날씨도 춥거니와 아직 이른아침이여서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큰거리쪽으로 쌍두마차 한대가 지나가는 덜커덩소리와 마부가 휘두르는 채찍소리가 고요한 아침공기를 흔들더니 그 소리마저 어느덧 멀리 사라지고말았다.
이집저집의 굴뚝들에서는 아침연기가 가냘프게 떠오르다가 세찬 바람에 부딪쳐 이리저리로 마구 흩어지군 하였다.
나어리신
지난 년초 어느날 이른아침이였다.
아버님
《이제 며칠이 지나면 너도 팔도구소학교를 졸업하겠는데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아버님께서는 전과 다름없이 매우 부드러우신 목소리로 이렇게 물으셨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책에 담겨져있는 현실에 직접 부닥쳐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지시는것이였다. 그리고 더 공부하고싶으셨다.
하지만
그런데 지금 아버님께서 앞으로 공부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으시는것이 아닌가.
(한번 말씀드려볼가?)
《왜 대답이 없느냐?》
아버님께서 재차 물으셔서야
《상급학교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싶습니다.》
《옳다. 잘 생각했다. 사람은 많이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 제것을 알아야 하지. 조선을 알아야 한단 말이다. 지난날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아는것도 필요하지만 수난을 겪고있는 오늘의 조선을 더 잘 알아야 한다. 아름다운 내 조국이 간악한 일제의 발굽밑에서 어떻게 몸부림치고있으며 착하고 슬기로운 2천만 우리 겨레가 어떤 처지에서 울부짖고있는가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혁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법이니라. 조선을 똑똑히 알게 될 때 무엇을 해야 하며 어느 길을 걸어야 하겠다는것을 스스로 가려낼수 있게 되느니라.
물론 남의것도 배워야지. 사람은 많이 알수록 좋은것이니까. 그러나 제것을 모르고 남의것만 안다면 몸뚱이는 그 나라 사람이라구 할는지 모르지만 속은 딴 나라 사람이나 다름없을게 아니냐? 제 머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 때문에 남의것을 배우는것도 결국 제것을 더 훌륭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것이란다.》
아버님께서는
《물론 조선을 안다는 그것만으로 다되는것은 아니다. 저 벽에 붙어있는 〈지원〉이라는 글의 뜻을 알구있지?》
《예! 항상 원대한 뜻을 품어야 한다는것입니다.》
《옳다! 큰일을 하려면 언제나 원대한 뜻을 가져야 한다. 나라의 독립을 찾구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그런 행복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지원〉의 사상이 필요하다. 다시말해서 우리의 힘을 키워야 하고 어떠한 난관과 애로, 모진 풍파와 산악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더라도 싸워이길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용감히 뚫고나가야 한다. 조선의 독립을 찾구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행복한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한다. 조선의 독립을 그 어떤 다른 나라에서 찾아주려니 생각하면서 큰 나라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것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그런 사람들은 애국자도 아니고
아버님의 말씀을 들으신
《조선에 나가 칠골외가집에서 창덕학교에 다니는것이 어떠냐?》
《창덕학교요?》
교감선생으로 계시는 외할아버님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으셨던것이다.
《아버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새학년도가 시작되기 전에 도착할수 있게 지금부터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이날 방안에는 어머님과
《너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시는것이였다.
《어머니는 같이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하고
《난 나가게 될것 같지 않구나.》
어머님께서는 정색하여 말씀하셨다.
《아버님께서는 너 혼자 천리길을 걸어나가도록 하자구 하시는구나. 그래, 아버님의 생각을 알만 하냐?》
강철은 불속에서 더욱 굳어지고 사람은 어렵고 힘든 일에 부닥쳐야 더욱 억세여진다고 하시던 아버님의 말씀이 떠오르신것이였다.
(아버님께서는 내 힘으로 어려운 길을 헤쳐나가도록 하라는 뜻일거야. 그래서 나를 강철처럼 강하고 억센 사람으로 키워주기 위해서 그러실거야!)
《어머니! 알만 합니다.》
《그래 어떻게 하겠니?》
《아버지말씀대로 저혼자 나가겠습니다.》
이리하여
아침상이 들어왔을 때였다. 바람은 류달리 기승을 부렸고 눈가루는 문창을 때리군 하였다.
창문의 유리를 입김으로 호호 불어 성에를 녹이고 밖을 내다보던 철주동생이 말했다.
《어머니, 오늘 무척 춥겠는데 형님은 꼭 떠나야 하나요? 며칠 있다가 따뜻해진 다음에 떠나면 안되나요?》
《형님이 추워서 고생할가봐 걱정스러우냐. 추워도 오늘 떠나야 한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날인데 어겨서야 되겠느냐.》
어머님의 대답이시였다.
철주동생은 말없이 아버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따뜻해진 다음에 형님이 떠나면 안되느냐는 물음을 그의 얼굴에서 력력히 찾아볼수 있었다.
《사람이 추위한테 못견뎌서야 쓰겠니? 오늘 떠나야
아버님께서는 철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회색두루마기를 입으시고 둥근 학생모를 눌러쓰신
마을동무들도 빠짐없이 따라섰다.
《어서 떠나거라. 어쩐지 꼭 일러주어야 할것을 채 일러주지 못한것만 같구나. 학교에 다니면서도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보자기에 싼 그리 크지 않은 꾸레미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향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서슴없이 대답은 하셨지만 이렇게 정작 길을 떠나게 되니 서운한 생각이 없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미 떠나기로 결심을 다지신 길이며 또 떠나셔야 할 길이므로 멈춰설수 없으셨다.
《아는 길두 물어가랬다는데 자주 길을 물어가거라. 아마 한 보름은 잘 걸려야 할게다.》
나루터에서 하시는 어머님의 말씀이였다.
《어머니, 걱정마세요. 아버님께서 그려주신 로정도가 있는데요뭐. 그리구 무슨 보름씩 걸리겠나요.》
《하기는 여덟살때 중강진까지 먼길을 걸어온걸 생각하면 크게 걱정할건 없다만 그때는 그냥 아버지를 따라오기만 하면 되지 않았니?》
어머님께서는 미더운 시선으로
어머님께서는
그러나 어머님의 심정은 그리 단순치는 않으셨다.
어머님께서는 말없이
《아버지, 갔다오겠습니다. 어머니, 갔다오겠습니다.》
《오냐, 어서 가서 조선에 대해서 잘 배워가지구 무사히 돌아오너라.》
아버님의 부탁은 이렇게 간단하셨다.
그러나 그 짧은 말씀속에는 여러날, 아니 여러해를 두고 나라를 다시 찾고 행복한 새 사회를 세우기 위하여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시던 깊고도 크낙한 뜻이 담겨져있었던것이다.
아버님께서는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이러한 모든것을 내다보시면서도
세찬 바람이 휙 불어왔다. 언덕우에서 넘겨치는 눈보라는 사정없이 선창가로 불어왔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옷에 뿌려진 눈가루를 털려고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계셨다. 미끄러운 선창길을 밟아내려가시는
아버님께서는
아버님께서는 그 길에서 력사의 도도한 흐름이 시작되는것을 새삼스럽게 느끼실수 있었다.
오늘은 나어린 한 소년의 외로운 발걸음이지만 한점의 불꽃이 온 들판을 뒤덮듯이 미구에 그 발걸음소리는 수천수만의 우렁찬 발걸음소리로 확대되여 강산을 뒤흔들리라 생각되셨다.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면 정녕 혁명의 한길을 걷게 되리라!)
아버님께서는 멀어져가는
이러한 아버님의 뜻을 잘 알고계시는
그러나 정작 일시나마 헤여진다고 생각하니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 않으셨다.
아버님께서는 평양감옥에서 놈들의 모진 고문을 받은 어혈로 하여 늘 기침을 하셨고 어머님께서도 늘 가슴앓이로 고생을 하고계셨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는 약하신 몸으로 더 고생을 하게 되겠구나. 그리구 동생들도 나를 무척 그리워할거구.…)
이렇게 생각하시는
얼마후에
이제는 나루터에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겨우 그들을 설복해서 돌려보낸
그후 림강을 거쳐 팔도구로 자리를 옮기셨던것이다.
팔도구는 림강에 비하면 아주 작은 거리였다.
그러나 팔도구에 와서 동무들도 사귀고 그들과 같이 놀아보니 림강에 못지 않았다.
(모두 좋은 동무들이였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날이 찾아오면 동무들은 팔도구뒤산에 올라가서 압록강건너 멀리 조국땅을 바라보며 고향에 대한 자랑으로 꽃을 피우군 했다. 강원도에서 온 동무는 금강산자랑, 함경도에서 온 동무는 동해에 대한 자랑, 황해도에서 온 동무는 쌀자랑… 모두 자기 고장의 자랑으로 해가는줄을 몰랐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살기 좋은 고향을 언제면 찾아가겠는지 막연해하였다. 한동안 제 고향에 대한 자랑을 하던 그들의 이야기는 부모들의 손을 잡고 고향을 떠나던 일로 번지군 했다. 그러다가는 누가 먼저라없이 쓸쓸한 노래가 시작되군 하였다. 그들의 노래는 그칠줄 몰랐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슬픈 감정에 휩싸여 그들은 눈물을 흘리군 했다.
이럴 때면
뒤산과 거리 그리고 압록강변을 달리며 군대놀이를 하느라면 서글프던 감정은 어느새 천리만리로 달아나고 원쑤 일제놈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가슴속에 용솟음치군 했다.
그러나
(일본놈들을 깡그리 우리 나라에서 내쫓고 온 가족과 이웃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쫓겨난 겨레가 다같이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가! 그런 날은 과연 언제나 오게 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