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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9 회

제 3 장. 겨레의 꿈

13


934년 9월, 발해왕태자 대광현이 수많은 발해유민들을 이끌고 고려땅에 들어온지 두달이 지난 가을날에 운주(홍성)에서 고려군과 후백제군과의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새로 발해군사들을 받아들여 군세가 크게 떨치게 되자 왕건대왕은 후백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 통일위업을 한층 앞당기려고 결심한것이였다.

정남대장군 유금필을 선봉장으로 하는 오천명의 고려정예기병들이 운주로 집결하자 당황한 후백제왕 견훤도 오천명의 철기병을 선발하여 그앞을 막아섰다.

고려군은 거의다 옛 발해출신 군사들이였으므로 그 기세가 몹시 왕성했다. 견훤은 철기 오천명을 운주성 앞벌에 주런이 배치해놓고 기세를 올리는 한편 사자를 통해 고려군에 이런 편지를 보내여왔다.

《우리가 서로 죽기로 싸우면 량편이 다 많은 사상자만 낼터이니 군사들의 희생이 우려되오. 화친을 맹약하고 각자의 령토를 보존하는것이 어떻소?》

왕건은 견훤의 통첩을 받고서 많은것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과연 견훤의 말대로 이 싸움이 무의미한 희생만 낼것인가. 차라리 각자의 령토나 보존하면서 희생을 피하는것이 좋지 않을가.

왕건이 이러한 생각에 깊이 잠겨 장막안을 거닐고있는데 정남대장군 유금필이 이번 전역에 병참관으로 참전한 응통과 함께 들어섰다.

평양성을 옛 모습 그대로 복구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노력과 정열을 기울이고있는 응통은 왕건이 후백제군과 대격전을 결심하고 평양지방에서 발해출신 군사들을 모집하자 스스로 치중물자의 보급을 맡아 여기 운주까지 달려온 길이였다.

《페하, 어서 령을 내려주소이다. 군사들이 기다리고있소이다.》

그들이 아뢰는 말을 들은 왕건은 무거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짐은 선뜻 결심을 내릴수 없구나. 또다시 이 땅에 형제들의 피가 흘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과연 피를 흘리지 않고 국토를 통일할 길이 없단 말인가?》

《물론 힘이 모든것을 결정하는것은 아니오이다. 견훤이 스스로 깨닫고 대왕의 패업에 동참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허나 여기서 멈추어서서는 아니될줄 아오이다. 이제 멈추면 장차 더 많은 백성들의 피가 강토를 적시게 될것이오이다.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수 없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념려마시고 신들이 적을 격파하는것이나 보시오이다.》

유금필이 머리를 수그리고 잠시동안 발밑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번쩍 들며 이렇게 말하였다.

응통이도 뒤질세라 한발 나서며 간청했다.

《대장군의 말이 옳소이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오만한 견훤의 사등뼈를 부러뜨리지 않으면 앞으로 더 큰 피가 흐를것이오이다.》

그들의 말을 듣고서야 왕건은 삼국통일의 성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싸우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왕건은 장막을 나서서 적진을 향해 검을 뽑아 가리켰다.

《모두들 짐의 령을 들어라. 전군이 총공격하여 저기 저 무도한 견훤을 사로잡고 백성들의 소원을 이루자. 시작하라!》

왕건대왕의 령을 받은 고려군은 유금필을 선두로 성난 맹호마냥 후백제군을 향해 밀려갔다.

후백제군은 전투서렬을 제대로 편성하지 못한채 고려군의 공격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고려군은 거의 모든 군사가 발해에서 이주해온 군사들이라 이번 전역을 통해 명성을 크게 떨칠 기개에 넘쳐있었다.

더우기 북방군사들이란 말타고 활을 쏘고 긴창을 잘 쓰는것으로 유명한지라 기병전에서는 그들을 당할 군사가 없을듯 하였다.

유금필은 이러한 발해출신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견훤이 있는 중군으로 짓쳐들어갔다.

후백제군은 완전히 대혼란에 빠졌다.

철기는 공격에서는 유리하나 방어에서는 매개 군사의 동작이 굼떠 불리한것이다.

고려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적진에 뛰여들어 닥치는대로 베고 찍어냈다.

견훤의 맹장이라 일컫는 상달, 최필 등이 필사적으로 막아섰으나 모두 유금필의 적수가 못되였다.

견훤은 혼비백산하여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고 운주성앞에는 삼천명의 후백제군사들이 주검이 되여 나딩굴었다.

후백제군은 이번 전역에서 술사 종훈, 훈겸 등 견훤의 측근심복들과 용장이라던 상달, 최필 등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하였다.

운주성대격전은 후백제왕 견훤이 왕건과 천하의 패권을 다툰 마지막싸움이였다.

견훤의 운명은 비운속에 가리워지기 시작했다.

운주성격전이후 웅진북쪽 삼십여개의 성을 고려에 빼앗긴 견훤은 다시는 일어설 기운을 잃고말았다.

그가 피땀으로 일으켜세운 나라의 거의 절반이나 되는 령토가 고려땅에 귀속되였고 이제는 민심마저도 왕건에게 기울어지고말았던것이다.

견훤은 괴롭지만 자기가 왕건에게 미치지 못한다는것을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이즈음에 와서 견훤은 후백제의 조정대신들마저 서로 사분오렬되여있어 조정도 제 뜻대로 움직일수 없는 가혹한 현실을 믿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여 견훤은 일을 바로잡자면 보다 젊고 패기있는자에게 자기의 꿈을 넘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견훤은 이미전에 자리를 물려줄 상대를 점찍어두고있었는데 그가 바로 넷째아들 금강이였다.

금강은 신통히도 견훤을 빼여물고난 인물이였다.

아홉척에 가까운 키에 지용이 겸비된 금강을 견훤은 제 눈동자와 같이 사랑했다. 금강은 또한 먼저 세상을 떠난 제 어미를 닮아 용모가 비상하고 마음이 관후했다.

견훤은 금강이야말로 자기를 대신해서 후백제를 이끌어나갈 적임자로 생각하고있었다.

풍부한 지략과 용맹을 지니고있는데다가 아비의 꿈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새기고있고 결심 또한 굳건한 아들이였다.

하지만 견훤은 자기의 생각을 현실로 옮길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맏아들 신검을 태자로 정하였던것이다.

조정의 신하들은 물론이요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견훤의 뒤를 이을 사람을 신검으로 알고있는데 그것을 하루아침에 뒤집는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그렇다고 신검에게 고스란히 나라를 물려줄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는 견훤이였다.

신검은 누굴 닮아서인지 몹시 조폭하고 잔인하기까지 하였다.

비록 신검이 제 아비를 따라 전장에서 여러번 전공을 세운 몸이였으나 견훤은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검이 만약 후백제를 이끈다면 머지않아 나라는 멸망할것이라고 생각했다.

견훤은 고려왕 왕건의 적수가 될만 한자는 넷째아들 금강밖에 없다고 단정하였다.

견훤은 운산격전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나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였다.

이미 세운 태자를 페하고 금강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될것인가.

견훤은 먼저 조정안에서 무시할수 없는 유력자들의 뜻을 타진해보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후백제조정은 어느덧 여러 갈래의 파벌이 생겨 몹시 복잡하였다.

건국이전부터 견훤을 오래 따라다닌 로장들과 원훈들은 불과 두세명밖에 남지 않았다.

조정안은 소장파의 무장들이 득세하고있었다.

견훤은 제각기 왕자들을 끼고앉아 권력다툼으로 날과 달을 보내고있는 신하들의 꼴을 보니 기가 차지 않을수 없었다.

견훤은 눈을 감고 그래도 그들중에 그중 자기의 뜻을 따를만 한 인물을 물색해보았다. 마침내 견훤은 무릎을 치며 일어섰다.

그렇지… 능환이가 있지 않는가. 견훤자신이 목숨을 구원해준 능환이, 보잘것없는 장사군으로 헤매이던 그를 이만큼 내세워주었는데 감히 나를 배반할라고?!…

지금 이찬벼슬을 지내고있는 능환은 이즈음에 와서 후백제조정의 실권자가 되였다.

오월국과의 대외무역을 독점한것으로 하여 거대한 재부를 손에 쥔 능환이라 마음먹은대로 조정을 휘두르고있었다.

능환이 이렇듯 출세하게 된것은 전적으로 견훤의 뒤받침이 있어서였다.

권모술수에 능하여 나라의 병권까지 쥐였으니 그를 금강의 편으로 돌려세우면 이 모든 복잡한 일들이 무난하게 풀릴듯싶었다.

능환이 신검과 가까운 사이지만 은인인 이 견훤의 어명을 거역할라고…

달무리가 진 밤, 견훤은 은밀히 이찬 능환을 침전으로 불러들였다.

아닌밤중에 침전으로 불리워온 능환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견훤은 태연하게 그를 맞아들였다.

《한담이나 나누자고 널 불렀으니 의아해할건 없다. 어서 편히 앉아라.》

능환이 조심스럽게 좌정하자 견훤은 의미심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경은 생각나느냐? 내가 죽을번 한 너를 구원해주던 일을 말이다.》

능환은 황송한듯 이마를 조아렸다.

《전하, 눈에 흙이 들어간들 그때일을 어찌 잊겠소이까.》

《그렇지, 그때의 곤난을 잊으면 안되지. 난 평민의 몸으로 전장에서 목숨바쳐 싸워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 나라 강산의 매 조약돌 하나하나에는 나의 피땀이 스며있구나.》

어느덧 능환은 눈물이 글썽해졌다.

《전하, 참 어려운 시절이였나이다. 전하의 은총을 받고서도 이렇게 짐으로만 얹혀있으니 부끄럽기 그지없소이다.》

견훤은 능환의 반응을 살피다가 그를 향해 우람한 몸을 기울였다.

《왕이 아닐적에 낳은 자식도 왕자라고 할수 있겠느냐?》

능환은 난데없는 견훤의 물음에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능환은 마치 벼락맞은 장승처럼 한순간 굳어져버렸다.

견훤은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능환을 노려보고있었다.

《이자 방금 말했던것처럼 나는 어제날엔 불행한 백성이였다. 그러나 나는 력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백성의 몸으로 천하를 누르고 이렇게 제왕이 되였다. 그런데 백성으로서 왕이 되기 전에 낳은 아들도 지금에 와서 왕자라고 할수 있겠느냐 말이다.》

그제야 능환은 견훤의 속심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전하, 그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말이오이까. 임금의 피를 받은 자식은 언제 낳았든지 다 왕자로소이다.》

견훤은 쓰겁게 웃으며 능환을 노려보았다.

《네가 그새 권력에 맛을 들이더니 옛 처지를 잊었는가보구나.》

능환은 견훤이 이렇게 나오자 더 반대할 용기가 없어졌다.

그러나 견훤의 뜻을 그대로 따를수는 없는 몸이였다.

만일 신검을 페하고 금강을 태자로 삼는 날이면 내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기때문이였다.

더우기 능환자신은 오래전부터 신검이 왕위에 오르기 바라서 은밀히 그의 뒤를 밀어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견훤의 뜻을 따르면 신검을 배반하는 길이요, 또 제스스로 화꾸레미를 뒤집어쓰는 일이였다.

금강이 설사 태자로 봉해지고 즉위한다면 이 능환같은것을 돌아다나 볼것인가. 능환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금강이 태자로 되면 내 운명은 어찌되는가. 아니, 절대로 그럴수 없다.

아버지 영창이처럼 명분만 내세우다가는 또다시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견훤이 아무리 은인이고 내가 받드는 주군이라고 해도 그의 령을 맹목적으로 따를수 없다.…

능환의 이러한 심리를 알수 없는 견훤은 단호하게 자기의 뜻을 밝히였다.

《내가 평생을 걸었던 이 나라를 웅지와 도량이 엷은 자식에게 물려줄수는 없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의지를 따르라.》

궁에서 물러나온 능환은 그길로 신검을 찾아갔다.

능환에게서 전후사연을 다 들은 신검은 즉시에 낯색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이찬의 뜻은 어떠한가? 이왕지사 한배에 탔으니 함께 노를 저어보세.》

신검은 초조하게 능환의 입만을 쳐다보았다.

능환은 슬쩍 밖을 내다보고는 인기척이 전혀 없음을 확인하자 신검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이제 대왕님이 조정대신들을 모두 불러놓고 태자책봉을 바꾸고보면 모든 일이 글러지고마오이다. 선손을 써야 할줄 아오이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어서라도 왕위를 금강에게 빼앗겨서는 아니되옵니다.》

《어떻게 하란 말이요?》

《군사를 일으켜서 부왕을 상왕으로 모시오이다. 후일은 내가 감당하겠소이다.》

능환은 랭정하게 말끝을 맺었다.

《엇?! …》

신검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하였다.

《군… 군사를 일으켜서라도 부왕을 상왕으로 모시다니?!… 그… 그것은 반역이요.》

능환은 차겁게 웃었다.

《그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소이다. 태자님의 앞에는 천하가 있나이다. 천하를 놓고 무얼 주저하는것이오이까?》

능환의 말에 신검의 낯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대의 말을 따르겠소.》

신검은 한참만에야 괴롭게 중얼거렸다.

《잘 생각하셨소이다. 태자님은 나라일부터 먼저 봐야 하오이다. 금강이 즉위하면 나라는 삽시에 여러 쪼각이 나버릴것이고 고려의 왕건에게 먹히우고말것이오이다. 백제사직을 보전하는 길은 바로 이 길뿐이오이다.》

음모자들은 능환의 부추김밑에 군사를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신검 삼형제와 파진찬 신덕, 영순, 이찬 능환 등이 음모의 주동인물들이였다.

그들은 거사날을 이달 보름날 삼경무렵으로 정하였다.

견훤을 상왕이라는 명색으로 멀리 외진 절에 가두어두고 완산주를 완전히 수중에 장악한다. 그다음 금강왕자이하 그에 추종하는 대신들을 가차없이 처단해버리고 조정을 일조에 평정한다. 이것이 음모자들의 계획이였다.

그들의 음모는 차츰 무르익어갔다.

신검, 량검, 룡검 세 왕자가 수중에 장악하고있는 군사들이 무려 삼천명이요 이밖에도 조정안팎의 군사는 거의다 능환, 신덕, 영순 등이 쥐고있었다.

바야흐로 거사날이 가까와왔다. 견훤은 코앞에 어떤 화가 닥쳐오는지도 모르고 태평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음모군들이 거사를 벌리려는 바로 전날에 후백제왕 견훤은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새끼범 한마리가 침전에 뛰여들어 견훤의 잔등을 아프게 물어뜯고는 벽에 걸린 왕관을 벗겨쓰고 껑충껑충 뛰여나가는것이였다.

하도 이상한 꿈이라 견훤은 소스라쳐 일어나앉았다.

온몸은 물주머니가 된듯 땀에 화락하니 젖어있었고 꿈에서처럼 잔등이 쿡쿡 쑤시고 아파났다.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야 그 꿈이 무엇을 예고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다음날 하루종일 심기가 불안해있던 견훤은 곧 일관들을 불러 해몽하게 하였으나 누구도 그 뜻을 해석하는자가 없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떨려왔고 잔등은 여전히 진짜 범에게 물리운듯 그냥 아프기만 했다.

불안한 생각에 눌려 뒤척이던 견훤이 겨우 엷은 잠에 들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커졌다가는 불시에 잦아들고 그러다가 점점 뚜렷하게 귀가에 들려오는것이였다.

벽이 드르릉 울리였고 살기띤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몰방으로 터져나왔다. 견훤은 기절초풍하여 침상에서 기여나왔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마치 살벌한 싸움판에서처럼 무시무시한 함성이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견훤은 역시 무사라 창황중에도 벽에 걸린 장검을 벗겨들고서 밖으로 뛰여나갔다.

무수한 홰불의 바다, 수천명의 군사들이 창검을 들고 견훤을 빙 둘러싸고있었다.

아직도 미처 영문을 깨닫지 못한 견훤은 눈을 부릅뜨고 앞을 무섭게 노려보기만 했다.

《무엄하다! 감히 뉘앞이라고 소란을 피우는것이냐? 썩 물러가지 못할가?》

견훤이 성난 범처럼 길길이 날뛰며 고함을 질러도 누구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군사들의 물결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누런 전포를 입은자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오는것이였다.

순간 견훤은 제 눈을 의심했다.

맏아들인 신검이 량검, 룡검 두 동생과 이찬 능환 등 심복들을 거느리고서 걸어나오는것이였다.

견훤은 피가 거꾸로 솟는듯 한 분노에 몸을 떨었다.

《이… 이놈, 감히 제 아비의 얼굴에 칼을 내대느냐? 이 불효막심한 천하의 역적놈아!…》

신검은 태연하게 고개를 들고 이렇게 말하였다.

《부왕마마, 부디 고정하소이다. 부왕의 천운은 이미 진한줄로 아오이다. 부왕의 꿈은 제가 반드시 이루어드릴것이니 상왕이 되여 여생을 편히 보내시오이다.》

《무… 무어라구?! 상왕으로 모시겠다고… 이놈, 이 나라는 나의 나라이다. 너같은 무도한 놈에게 물려주노니 차라리 이 손으로 멸하고말테다.》

견훤은 이렇게 노성을 터뜨리고나서는 신검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몸부림에 불과했다.

제 아들에게 배신당한 견훤은 가슴이 울화로 터져 끝내 땅에 쓰러지고말았다. 그는 신검의 옆에 태연한 기색으로 서있는 능환을 보고는 너무도 기가 차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길러준 개 발뒤꿈치를 문다더니 네놈이 감히 나를 배반해?》

견훤이 마지막힘을 다해 으르렁거리자 능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하, 날보고 동료들을 배반하라고 하실 때 이런 일이 있을줄 생각해보지 못했나이까.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전하올시다.》

《여봐라, 상왕을 금산사로 어서 모시거라. 천하가 태평해지면 짐이 직접 모셔올것이다.》

신검이 령을 내리자 수십여명의 군사들이 견훤을 떠메고 밖으로 나갔다.

너무도 억이 막히고 울화가 불덩이처럼 치솟아 견훤은 말 한마디도 못하고 밖으로 끌려나갔다.

견훤이 밖으로 끌려나오자 신검을 둘러싸고있던 무리가 온 완산주가 떠나갈듯이 만세를 불렀다.

그 만세소리에 견훤은 갑자기 미치광이처럼 웃어댔다. 자기를 붙들고있는 군사들조차 아연할 정도로 미친듯이 웃기만 했다.

그러나 웃고있는 견훤의 눈가에서는 죽어가는 맹수의 처량한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이 천하에 둘도 없는 역적무리들아, 부자간의 의리도, 군신간의 명분도 모르는 짐승같은 역당들이 내가 평생을 바쳐 일으켜세운 위업을 일조에 무너뜨리고마는구나! 아, 하늘이여! 부디 저 역적무리를 한놈도 남김없이 이 손으로 쓸어버리게 하여주옵소서!…》

견훤은 이렇듯 하루밤에 신세가 바뀌여져 외로운 금산사에 감금되는 처지로 굴러떨어졌다.

다음날 정오무렵, 견훤의 맏아들 신검이 후백제국의 새 왕으로 즉위하였다.

금산사에 감금된 견훤은 복수를 갈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었다.

그는 무도한 자식들과 신하들을 절대로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한생을 복수로 살아왔다고 할수 있었다.

어렸을 때에는 자기 부모를 살해한 신라귀족들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가슴을 태웠다면 차츰 성장하면서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한 원한을 가슴속에 자래웠다. 그 결과가 바로 후백제의 건국인것이다.

그러한 견훤이 인생의 말년에는 아비를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한 무도한 자식들과 자기를 배반한 신하들을 복수하리라 벼르고있는줄 누구도 알수 없었다. 무도한 신검일당이 금강왕자를 살해하고 아비의 시책을 갈아엎는것을 외로운 절간에 갇혀 바라보고있는 견훤의 눈에서는 사람이 상상 못할 복수의 광기가 뿜어져나왔다.

마침내 뜻을 정한 견훤은 오랜 호위무사인 신강을 라주로 탈출시켰다.

935년 6월 전 후백제왕 견훤의 망명요청이 신강을 통해 고려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안이 벌컥 뒤집혔다.

견훤의 망명요청에 대한 반응 또한 매우 심각하였다.

홍유, 공훤 등 오랜 원훈대신들은 견훤을 받아들이는것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견훤이라면 오래동안 고려를 괴롭혀온 둘도 없는 적수였던것이다.

더우기 공산 동수싸움을 비롯하여 여러 싸움에서 수많은 고려사람들과 유능한 무장들이 견훤의 손에 살해되였다.

고려의 오랜 원훈들뿐아니라 후백제에서 귀순해온 여러 장군들도 견훤이라면 이를 가는것이였다.

견훤을 받아들일것을 주장하는 조정대신들은 대광 만세, 향우를 비롯해서 몇명밖에 되지 않았다.

조정이 둘로 갈라져 옥신각신 제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공산 동수싸움의 원한을 벌써 잊으셨소이까. 아직도 신숭겸장군과 김락장군의 피가 식지 않았는데 견훤을 받아들이는것은 옳지 않은 행동인줄 아오이다.》

《견훤에게 살륙당한 많은 사람들의 넋이 창천에서 굽어보고있소이다. 견훤을 받아들이는것은 대의에도 어긋나오이다.》

《견훤은 이미 끈떨어진 갓에 불과하오이다. 설사 그자를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에겐 아무 힘도 못되오이다. 페하, 그를 절대로 받아들일수 없다고 생각하오이다.》

왕건은 원훈들이 저마끔 아뢰는 말을 유심히 듣고나서 한구석에 물러나있는 대장군 유금필에게 시선을 주었다.

《경의 소견은 어떠한가?》

유금필은 사려깊은 눈으로 조정안을 둘러보고나서 단호하게 자기 결심을 피력했다.

《페하, 신은 의견을 달리하오이다.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겠다는것은 물론 더는 갈곳이 없어 내린 결단이겠지만 이것은 하늘이 주는 단한번의 기회라고 생각하오이다.

옛날 그토록 강대하던 대고구려가 멸망한것은 연개소문장군이 죽은 후 그 아들들의 권력다툼때문이였소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검이 제 아비를 밀어내고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앞당겼다고 할수 있소이다. 견훤을 받아들이면 대왕의 통일대업이 인춤 이루어지는것이요, 그것을 거절하면 지금까지 피를 흘리며 쌓아놓은 공든 탑이 언제 빛을 보겠는지 가늠할수가 없소이다.》

그러자 대광 만세도 한발 나서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견훤을 포섭하면 세가지 좋은 점이 있소이다.

우선 우리 고려를 원쑤보듯 하던 견훤을 포섭함으로써 대왕의 덕망과 도량을 천하에 펼수 있소이다. 그리고 견훤이 귀순해오면 백제의 내부가 분렬될것이요, 감히 귀순하기 두려워하던자들도 앞을 다투어 찾아올것이오이다. 그렇게 되면 신라도 자청하여 찾아올것이고 대왕의 패업이 반드시 이루어질것이오이다.》

왕건은 그들의 말에 수긍하였다.

《짐의 뜻도 그대들과 같소. 지난날의 편협한 감정만 앞세우며 오늘의 대세를 가려보지 못한다면 하나로 모여살려는 겨레의 꿈을 이룰수가 없소.》

왕건은 마침내 조정안의 의견상이를 눌러놓고 대장군 유금필, 대광 만세, 원보 향우, 오담, 능선, 충질 등에게 대함선 40여척을 가지고 급히 라주로 내려가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하거든 곧장 개경으로 맞아오도록 령을 내렸다.

견훤의 수하무사 신강은 수십여명의 고려무사들과 함께 금산사에 은밀히 들어가서 견훤과 그의 아들, 딸, 후궁 고비 등을 탈출시켜 무사히 라주까지 데려오는데 성공하였다.

라주에서는 견훤을 성대히 맞아들이고 고려함대의 엄엄한 호위속에 바다길로 개경에 올라왔다.

견훤은 선두에 선 다락선에 높이 올라 차츰 가까와오는 개경을 바라보았다 .

례성강의 맑은 물결이 처절썩 끊임없이 배전을 들이쳤다.

견훤은 복잡한 심리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느끼고있었다.

어느덧 개경(송악)장안이 시야에 불쑥 안겨왔다.

한때는 저기 저 개경을 말발굽으로 짓밟고 평양성의 다락우에 활을 걸어놓겠다고 호언장담하였던 견훤이였다.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보무당당하게 개경성안으로 입성하기를 꿈속에서도 바라던 견훤이 이렇듯 초라한 모습으로 고려함대의 보호속에 개경으로 들어설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늙으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더니 견훤의 주름잡힌 눈가에서 어느덧 눈물이 비오듯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번 산 인생을 갈아엎고 다시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누구를 탓하겠는가.

지금 와서 뒤돌아보니 자신의 한생은 갈라져나간 겨레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민족을 하나로 모으겠다는 의지를 가지지 못하고 오직 권력야망이나 이루기 위해 줄달음쳐온 한생이였다.

후회없이 평생을 산다는것이 이렇게 힘든줄을 견훤은 인생의 마지막고비에 들어서서야 깨달을수 있었다. …


이야기는 잠시 거꾸로 돌아간다.

920년 10월에 후백제왕 견훤이 오천명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량, 구사지방으로 진격하였을 때였다.

이에 당황한 신라의 경애왕은 급히 이찬 김률을 고려에 보내여 구원을 청하였다.

당시 신라로서는 고려밖에 도움을 청할데란 없었던것이다.

그해 봄에 신라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여 왕건의 고려건국을 축하한데 이어 이번에는 후백제의 사나운 공격에 대처하여 이렇듯 청병을 요구하는데 이르렀다.

고려의 왕건대왕은 신라의 청병요청에 쾌히 응낙하고나서 수천의 기병으로 후백제군의 배후를 치게 하였다.

신라 이찬 김률은 감지덕지하여 거듭 사의를 표하였다.

이때 왕건이 김률을 바래워주는 장소에서 불쑥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는것이였다.

《짐이 듣건대 그대의 나라에 세가지 큰 보물이 있다고 하더군.

즉 장륙금불상, 9층탑, 성제대가 있는데 이것만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그중 9층탑과 불상은 아직 있다는것을 알고있는데 성제대도 그대로 있소?》

《소신은 여적 처음 듣는 소리오이다.》

김률이 당황해하자 왕건은 호탕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잘 알고있는것을 신라의 고관이 어찌하여 모르고있는것이요? 계림에 가거들랑 한번 잘 알아보시오.》

김률은 곧 왕건에게 하직인사를 하고나서 부리나케 계림으로 돌아가서 제가 보고 듣고온 이야기를 그대로 왕에게 아뢰였다.

경애왕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타들었다.

경애왕은 곧 조정의 귀족들을 모두 불러모은 다음 성제대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누구도 아는자가 없었다.

경애왕은 방문을 붙여 성제대의 존재여부를 알고있는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며칠후 황룡사의 늙은 중 한명이 찾아와 이렇게 아뢰는것이였다.

《소승이 알고있기에는 성제대는 바로 진평대왕이 띠던것으로서 력대로 전해와 지금 남고에 보관되여있는것으로 알고있소이다.》

신라 경애왕은 바싹 등이 달았다.

《남고라는것은 어디를 가리키는 말이냐?》

《소승도 그것까지는 모르오이다. 그저 궁성 남고에 보관되였다는 말만 들었소이다.》

경애왕이 환관들을 시켜 남고의 행처를 수소문해보니 후원 한구석에 고삭은 지붕을 인 자그마한 창고가 바로 남고라고 하는것이였다.

경애왕은 나라의 큰 보물을 다시 찾는다는 기쁨에 귀족들과 궁인들까지 모두 휘동하고서 다 허물어져가는 창고로 행차하였다.

드디여 그 창고를 열게 하였는데 맞는 열쇠가 없어 부득이 도끼로 까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궁성 호위무사가 도끼로 녹쓴 자물쇠를 까고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모진 풍우가 일어나고 먹장구름이 밀려와 하늘의 해를 가리우는것이였다.

낡은 창고앞에 어깨성을 쌓았던 사람들이 모두가 질겁하여 물러서는데 정말 귀신의 조화인듯 뢰성벽력이 울렸다.

삽시에 대소동이 일어났다.

저마끔 질겁하여 달아나는 인파에 밀리워 전각에 돌아온 경애왕은 듣던바대로 성제대가 나라를 지키는 국보가 틀림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길한 날을 택하여 창고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구석에 길이가 무려 열발이나 되는 띠가 놓여있었다.

경애왕은 먼지가 쌓여있는 띠를 직접 제 옷소매로 닦아내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금으로 새기고 화려한 옥으로 장식한 띠돈이 모두 해서 62개이니 사람의 허리에 감는 물건이라고는 전혀 상상 못할 거대한 띠였다. 경애왕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아, 이제야 나라의 위력을 떨칠수 있게 되였구나!》

경애왕이 성제대를 들고나와 보이니 모두가 감격에 겨워 만세를 부르는것이였다.

그후로 경애왕은 이 성제대를 애지중지하여 궁성보물고 깊숙한 곳에 보관해두도록 하였다.

경애왕자신은 물론이요, 신라의 모든 사람들이 이 성제대가 나라를 지켜주리라 믿어의심치 않았던것이다.

과연 성제대가 멸망의 위기에서 허덕이는 신라를 구원해주겠는지?…

성제대를 찾아내여 그토록 애지중지하였건만 신라의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참변을 겪고 스스로 목에 칼을 박아 자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견훤이 던져준 검을 잡고 제 목을 겨누는 순간 경애왕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였을가?

그 순간까지도 어리석은 꿈에서 깨여나지 못해 성제대의 운명을 걱정한것은 아닌지.…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경순왕 김부 역시 정사의 처음 시작으로 성제대의 행처를 찾게 하였다.

경애왕이 성제대를 어찌나 잘 감추어두었는지 견훤이 신라궁성의 보물이란 보물은 말끔히 거두어갔지만 그것만은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부는 페허속에 묻혀있던 성제대를 찾아내자 애당초 그것이 신라를 구원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무슨 영문에서인지 성제대를 침전 깊숙한 곳에 보관해두는것이였다.

그래도 한가닥이나마 마음속 위안을 주는 그 무엇인가가 그에게는 필요했던 모양이였다.

신라는 날이 흐를수록 더욱더 멸망의 구렁텅이를 향해 굴러가고있었다.

이제는 그 어떤 힘도 이것을 멈추어세울수 없게 되였다.

지금에 와서 신라의 앞에는 피하지 못할 두갈래의 길만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계속 속수무책으로 있다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강제로 멸망당하는 길과 대세의 흐름에 따라 제스스로 사직을 없애는 길뿐이였다.…

바로 이러한 때 충격적인 소식이 계림에로 날아들었다.

제 아들들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견훤이 고려대왕 왕건에게 몸을 의탁했다는 소식이였다.

김부왕이하 신라의 귀족들은 선뜻 그 소식을 믿을수가 없었다.

견훤은 고려와 피맺힌 원쑤지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더우기 공산 동수싸움에서 견훤은 왕건의 제일가는 충신인 신숭겸을 비롯한 수많은 고려군사를 죽인 원쑤였다.

그러한 견훤이 고려땅으로 피신하였다는것이 의심스러웠고 또 견훤을 흔연히 받아들였다는 소문 또한 그대로 믿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이 모든것은 사실이였다.

견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려조정의 환대를 받았고 왕건은 그를 년장자라고 하여 상부로까지 존대해준다는것이였다.

또한 견훤의 지위를 백관우에 두고 양주를 식읍으로 내주었다고 하니 김부왕이하 경주의 귀족들이 아무리 애써 부정하려고 해도 이 모든것은 엄연한 사실이였다.

신라왕 김부는 무려 사흘동안 침전에 홀로 들어박혀 심한 정신적고민에 시달렸다.

(왕건과 견훤은 지금까지 죽일내기를 하던 적수였다. 백제국은 고려가 국토를 통일하는데서 제일 큰 장애로 되였다. 그런데도 왕건은 견훤의 귀순을 흔쾌히 받아주었구나. 이제는 천하가 왕건에게 들어온것이나 다름없는것이다.

백제의 신검은 제 아비를 왕위에서 몰아낸것으로 하여 천하의 지탄을 받는 불효자가 되였다. 신검은 아무리 노력해도 왕건의 적수가 되지 못할것이다.

왕건의 유일한 적수였던 견훤도 끝내는 꺼꾸러지고말았다.

지금에 와서 신라가 할 일이란 더 지체말고 고려에 투항하는 길뿐이다. 그것이야말로 력사의 흐름에 발을 맞추는 길이다.)

김부는 여러날에 걸쳐 이러한 결심에 도달하였다.

935년 10월.

김부는 궁성 전각앞에 만조백관과 경주의 귀족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화려한 대청에는 천년의 력사와 위풍을 보여주는 정교하고도 웅장한 조각품들이 찬란한 빛을 뿌리고있었다.

하지만 그 위풍에 비해 전각앞에 모인 신라왕이하 모든 신하들의 얼굴색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모두들 사연을 알고있었지만 그 누구도 선뜻 말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전각앞에 모인 신하들을 굽어보던 김부왕은 한동안이 지나서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경들을 불러놓은것은 다른 뜻이 아니요.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지는 모르나 나는 이미 결심을 내렸소.

제공들도 알다싶이 나라의 땅은 대부분 남의 손에 들어가고 남은것은 왕경(계림)부근의 몇개 군, 현뿐이요. 그나마도 보전할 군사와 식량도 가지지 못했으니 이러고 앉아서 어찌 사직의 유지를 운운하리오.

대세는 이미 기울었으니 차라리 사직을 깨끗이 페하고 고려에 의탁함이 어떤가 하는것이요.》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왔다.

동안을 두었던 김부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자락으로 훔치고나서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고려를 택하는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요.

수십년싸움에 지칠대로 지친 나라의 민심이 벌써 오래전에 고려에로 쏠려있는것이고 또 대세의 흐름에 따라 동족인 고려국에 의탁함이 력사에 오명을 남기지 않는 현명한 도리라고 생각했기때문이요.》

김부가 말을 마치자 흐느낌소리도 잦아들고 온 궁성이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큰소리로 웨치며 앞으로 나와서는것이였다.

《부왕마마, 아니될 말씀이오이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아니되옵나이다.》

모두가 놀라 눈을 들어보니 태자였다.

태자는 강경한 어조로 웨쳤다.

《천년의 사직을 어찌 일조에 버릴수가 있나이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사오니 나라의 충의지사들을 모두 불러모으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여 끝까지 나라를 지켜내야 하오이다.》

태자의 눈에서는 어느덧 비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현실적가능성도 없는 무의미한 광기에 불과했다.

신라가 더는 일어설수 없다는것은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아는 현실이였던것이다.

설사 용기를 내여 일어선다고 해도 그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무고한 백성들만 참혹한 고통을 당하게 할뿐이였다.

태자의 말을 듣고 그를 내려다보던 김부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태자의 눈에는 사직의 래력만 보이고 한나라, 한강토에서 살기를 바라는 백성들은 보이지 않느냐? 나라의 민심이 이러한것은 천명이거늘 끝까지 사직을 지킨다는 헛된 명분으로 대세의 흐름을 거역할수는 없다. 그만 물러가라.》

그해 11월초 신라의 김부왕은 끝내 력사의 순리를 따라 고려국으로 귀순의 길을 떠났다.

김부를 위시하여 경주의 문무백관들과 그들이 탄 수레, 향나무로 꾸미고 구슬로 장식한 행렬이 삼십여리에 뻗어 길을 메웠고 구경군들이 담벽처럼 늘어섰으니 참으로 력사에 처음 있는 사변이였다.

행렬이 고려지경에 들어서면서부터 연도의 고을과 고을, 마을과 마을마다에서 백성들이 떨쳐나와 경순왕일행을 성의껏 맞아들였다.

왕건대왕이 친히 화려하게 꾸민 의장병을 거느리고 교외에까지 나와 김부일행을 축하하고나서 류화궁을 내여 일행이 머물게 하였다.

김부왕이하 모든 귀족들이 고려로 귀순해왔으므로 텅 빈 옛 신라의 수도 계림에는 태자만이 홀로 외롭게 남아있었다.

태자는 여러날을 두고 텅 빈 성에 앉아서 통곡하다가 끝내 몇명의 자기 신하들과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금강산으로 떠났다.

금강산에 이른 태자는 신하들과 함께 장안사에 찾아가 대륜법사와 만났는데 그때 법사는 태자의 잘못된 생각을 간곡하게 타일러주었다.

태자는 탄식하며 따라왔던 신하들과 군사들을 헤쳐보내고 금강산의 깊은 골로 들어갔다.

동굴을 집으로 삼고 삼과 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여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친 그를 후세사람들은 《마의태자》라고 불렀다.

개경 궁궐의 류화궁에 머물고있던 김부는 왕건을 찾아가 이런 청을 하였다.

《대왕페하, 나라의 국력이 쇠잔하여 왕실 하나 보전할수 없어 이렇게 찾아왔으니 저를 신하로 대해주시기 바라오이다.》

신라왕의 요청에 이어 고려조정백관들의 요청 또한 끊길새 없었다.

《자고로 하늘에는 두개의 해가 없으며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이오이다. 한나라에 두 임금이 있다면 백성들이 견디여내지 못하는 법이니 원컨대 신라왕의 간절한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옵소서.》

드디여 왕건은 나라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참가한 가운데 궁성뜰에서 신라왕이 드리는 신하의 절을 받게 되였다.

신하들의 축하하는 소리가 온 궁성을 뒤흔들었다.

왕건은 김부왕을 정승으로 봉하고 그 지위를 태자의 우에 있게 하며 신라국을 페지하고 계림을 김부의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또한 맏딸 락랑공주를 김부의 안해로 삼게 하여 자기의 뜻을 나타내였다.

김부왕을 따라온 대신, 왕족들도 모두 그 능력과 지위에 따라 토지와 록봉을 내리였다.

이리하여 신라의 마지막왕인 김부는 고려의 신하로, 왕건의 사위로 되였으며 신라는 고려에 통합되였다.

937년 5월 김부는 그때까지도 깊이 간직하고있었던 성제대를 왕건에게 바쳤다.

하여 이 성제대는 세상에 나온지 400여년만에 신라가 멸망하면서 고려대왕 왕건에게 돌아가게 되였다.

왕건은 이 성제대를 국가물장고에 고이 간수해두도록 하였다.

신라는 이렇게 종말을 고했다.


935년 6월, 귀순한 후백제왕 견훤이 갑자기 왕건에게 이런 청을 하는것이였다.

《이 늙은 몸이 멀리 창파를 건너서 대왕에게로 온것은 대왕의 위력을 빌어서 나의 못된 자식을 처단하려는것뿐이오이다. 그러니 더이상 지체말고 군사를 내여 이 늙은이의 한을 풀어주소이다.》

왕건은 온몸을 우들우들 떨고있는 견훤을 측은하게 바라보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왕건이 삼국통일의 마지막고리로 후백제정벌을 결심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응통은 멀리 평양성에서부터 개경까지 말을 타고 한나절동안에 대여왔다.

얼마나 고대하던 시각인가.

응통의 꿈이 아니, 하나로 모여살려는 겨레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고있었다.

평양성에서부터 응통이 올라왔다는 신하들의 보고를 받은 왕건은 그를 궁성으로 불러들여 반갑게 맞이하였다.

응통은 그 자리에서 자기도 통일성업을 이루는 마지막격전에 참가시켜줄것을 왕건에게 극구 간청하였다.

《경의 심정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짐의 오랜 신하들이 많이들 세상을 떠나 짐의 심중이 괴로운 때 경마저 잃고싶지 않구려. 그대의 나이도 어언 예순을 가까이하니 이번만은 젊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쉬는것이 어떠한가?》

왕건이 이렇게 권유하자 응통은 어성을 높이며 나섰다.

《페하, 불민한 소신을 아끼시는 페하의 깊은 뜻을 어찌 모르겠나이까. 그러나 겨레를 하나로 모으는 이 마지막싸움만은 반드시 소신의 두눈으로 지켜보고싶소이다.》

왕건이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하는것을 보고 응통은 무릎을 꿇어앉았다.

《페하, 신은 페하의 통일성업을 위해 모든것을 바칠 결심이오이다. 그동안 신이 나라의 모든 운송업을 경영하면서 마련한 재부인 오천필의 군마와 수천대에 달하는 수레를 바치겠으니 부디 겨레의 소원을 이루어주소이다.》

왕건은 응통의 결심을 듣고서 깜짝 놀랐다.

《그대는 이미 짐의 의지를 받들어 평양성건설에 많은 재부를 기울이였으니 나라와 겨레를 위한 공적은 남아있을것이다. 짐이 맡겨준 운송상단들은 그대가 잘 경영하여 자손들에게 물려주도록 하라.》

응통은 두눈을 열광으로 빛내이였다.

《페하,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장사군은 돈을 벌줄 아는것이 아니라 돈을 쓸줄 알아야 한다.〉고 했소이다. 신은 지금 이 두눈으로 통일된 천하를 굽어보고있는 심정이오이다. 얼마나 고대하던 시각이나이까. 이 영광의 순간에 신의 미흡한 힘이나마 보태려는것이니 부디 막지 말아주옵소서.》

응통의 절절한 청은 마침내 왕건의 마음을 움직이였다.

《좋소. 그대의 청을 받아들여 대승의 벼슬을 내리고 정벌군의 병참관으로 임명하노니 짐의 통일성업을 끝까지 성취할수 있게 힘껏 도우도록 하오.》

《망극하오이다.》

응통이 흥분으로 설레는 마음을 다잡으며 물러나오려는데 별안간 왕건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대는 구월산 아사봉밑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조상들의 넋을 이어 자신의 호를 아사달이라 하였다던데 그것이 사실인고?…》

《그렇소이다. 페하…》

응통이 영문을 몰라 의아한 시선을 쳐드는데 왕건은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짐의 뜻을 받드는데 많은 공적을 세운 그대에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이제부터 류차달이라는 정식 이름으로 부르도록 하라.》

응통은 왕건의 말이 여기까지 미치자 황송하여 부복하였다.

《페하, 응당 하여야 할 일을 하였을뿐이오이다. 그러한 소신이 감히…》

《아니요. 그대는 아무런 사심이 없이 누구보다 짐을 곁에서 힘껏 보좌해준 이 나라의 아들이오니 짐은 그대에게 차달이란 이름을 하사하노라.》

왕건이 하사한 이 이름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민족의 꿈을 이루는 통일성업에 자신이 가지고있는 수천대의 수레들을 모두 바치려는 응통의 마음을 헤아려 뜻깊은 이름을 지어준것이다. 하여 응통은 이 시각부터 왕건이 하사한 차달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류차달! 응통은 이렇듯 뜻깊은 이름을 삼한벽상공신으로 죽백에 드리우게 되였으며 구월산기슭 문화현을 식읍으로 하사받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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