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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7 회

제 3 장. 겨레의 꿈

11


4월에 이르러 철원에서는 큰 사건이 터졌다.

순군리(순군은 수도성에 대한 순찰과 호위 등을 맡은 곳이며 순군리는 세번째로 되는 벼슬이다.) 림춘길이 대상 관나를 반역죄로 궁예에게 고변하였던것이다.

궁예는 경악하지 않을수 없었다.

관나가 자기를 들어낼 모의를 벌렸다는것을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형적이 차츰 드러나 궁예의 경악은 곧 걷잡을수 없는 분노로 변하였다.

관나의 반역건은 조정의 중신들이 많이 련루되여있어 사태가 매우 엄중했다.

관나의 심복인 환선길이 제 동생 환향식과 함께 청주에 내려가 군사를 모집하고있다는 소식을 들은 궁예는 곧 지체없이 순검을 풀어 련루자들을 붙잡아들이도록 하였다.

철원에 곧 계엄령이 내려지고 곳곳에 순검들이 풀려나갔다.

허나 도성을 지키는 수비군과 금위군, 순검을 모두 합쳐야 그 인원이 삼천명도 되나마나하였다.

이제 반역건이 탄로났다는것을 알게 되면 환선길이 언제 반란을 일으켜 철원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였다.

궁예는 우선 명주방향에 나가있는 마군장군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을 철원으로 불러올리라는 밀령을 내렸다.

관나의 반정군보다 빨리 명주군사를 불러오기 위하여 얼마전에 어명을 받고 라주에서 올라온 응통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응통은 궁예의 지시를 집행하여 수백대의 마차와 수레들을 내놓아 명주군사를 관나의 반정군보다 더 빨리 철원으로 파송하였다.

궁예가 명주에 나가있는 마군장군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을 불러올린것은 그들이 모두 궁예가 철원일대에서 신라군과 싸울 때부터 따라다닌자들로서 믿을만 하다고 타산하였기때문이다.

말하자면 궁예가 량길의 부하로 있을 때 그의 수하에서 일개 군사로 있던 사람들이였다. 궁예가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그를 오래동안 따라다닌 심복들이였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궁예에게 충실할것인가는 그 누구도 예측할수 없었다.

그것은 아무리 궁예의 심복들이라고는 하나 그 주인에게 신뢰할수 없는 리유가 있었기때문이였다.

하여튼 그들 세사람이 이끌고온 병력이 도합 칠천이니 철원에 있는 병력까지 모두 합하면 근 만명의 무력이 도성을 수비하고있는셈이였다.

응통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병력을 파송하지 않았으면 관나의 정변이 성공할번 하였다.

외부의 지원을 바랄수 없게 된 관나는 측근부하들과 함께 성을 빠져나가려다가 궁예가 보낸 형리들에게 잡힌 몸이 되였고 사지를 결박당한채 궁성별채로 끌려왔다.

이미 궁예에게서 목숨을 건질수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관나는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고있었다.

어느덧 궁예의 앞으로 끌려나온 관나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입술을 심술궂게 잔뜩 빼여문 궁예가 그 표독스러운 외눈에 살기를 가득 담고 관나를 노려보고있었다.

궁예에게 있어서 관나의 반역은 참으로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 철원성에서 궁예가 간신히 몸을 기댈 곳은 관나 하나라고 여겼었는데 이렇듯 반역을 주창하다 잡혀왔으니 뭐라고 하겠는가.

궁예는 무의식중에 앞에 놓인 쇠몽둥이를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내 너를 그리 박하게 대하지 않았거늘 어찌 반역을 꾀한단 말이냐?》

마침내 궁예의 음산한 말투가 울리였다.

관나는 애당초 살아나갈 생각을 단념하였으니 그 대답이 수월하였다.

《그래 잊으셨소? 난 원표장군의 비참한 최후를 직접 이 두눈으로 본 사람이요. 내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이 결국 대왕을 배반하는데로 부추겼지요.》

《닥쳐라, 개도 길러준 주인을 물지 않는다. 널 이만큼 내세워주었는데 감히 나를 들어낼 모의를 벌려? 내 반드시 네놈을 릉지처참하리라.》

《대왕, 이젠 꿈에서 깨여나시오. 당신의 폭정으로 이 땅에선 그 누구도 대왕을 따르지 않고있소. 오늘은 비록 나를 죽이지만 래일은 또 다른자가 일어나 무도한 폭군을 내쫓게 될것이요.》

관나는 낯색이 하얗게 질려버렸으나 마음을 가다듬고 당당하게 대꾸하였다.

《하!…》

갑자기 궁예가 미친놈처럼 껄껄 웃기 시작했다.

《어느 놈이 감히 이 자리를 넘겨다본단 말인가. 이 룡상을 그래 너와 같은 장사군놈에게 넘겨주리라 믿었더냐?》

관나는 미친놈처럼 게거품을 물고 광기를 부리는 궁예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포박된채로 비틀거리며 일어선 관나는 최후의 힘을 모아 가까스로 소리를 질렀다.

《이 무도한 폭군이여, 내 비록 이렇게 먼저 지옥으로 떨어지나 너 역시 내뒤를 따를 날이 멀지 않았다. 궁예야, 염라국에 가서 내 널 기다리마.…》

관나는 마지막말을 길게 뽑는것과 동시에 몸을 날려 담벽에 머리를 짓찧고 목숨을 끊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이 참담한 광경에 질겁하여 서둘러 물러서버리는데 오직 궁예만이 미친놈처럼 여전히 웃고있었다.

실지에 있어서 태봉국은 관나의 죽음과 더불어 멸망했다고 해야 옳을것이였다.

관나의 머리에서 쏟아진 검붉은 피가 궁성별채바닥을 적시며 흐르자 태봉국백성들은 꿈에서 깨여난것처럼 궁예의 멸망을 내다보았던것이다.

자기를 왕위에 올려앉혀준 관나에게서조차 버림받은 궁예를 거꾸러뜨릴 인물은 과연 누구이겠는가?!…

6월의 열풍은 저녁때가 되여서야 좀 기세가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후더운 입김으로 대지를 말리우고있었다.

지루한 한낮의 열풍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꽃잎들이 가까스로 생기를 되찾은듯싶었다.

밤하늘을 장식한 별무리가 깜박거리며 메마른 대지를 굽어보고있었다.

비좁은 골목길에 다섯사람의 마상객이 불쑥 솟았다.

그들은 천천히 말을 몰아 골목길을 벗어나더니 궁성을 에돌아 네거리 큰길에 나섰다.

순검들이 어둠속에서 튀여나와 앞을 막으면 앞선 사람이 짤막하게 군호를 던졌다.

그러면 순검들은 공손히 물러서서 길을 내주었다.

다섯의 마상객은 이런 식으로 앞을 막는 군사들을 물리치고는 태연하게 말을 몰아갔다.

그들이 말을 멈추어세운것은 시중 왕건의 집앞에서였다.

왕건의 집앞에 버티고 서있는 순검들이 황황히 창을 들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만, 그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조정대신들의 집에 객들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대왕의 어명이오이다.》

순검이 완강하게 막아나서자 맨 앞장에 선 마상객이 어성을 높여 꾸짖었다.

《이놈, 감히 뉘앞이라고 막아서느냐. 난 비룡성의 응통이다. 대왕님의 령을 받고 도성수비를 담당한 마군장군 홍유, 배현경, 복지겸장군들이 왕시중을 뵈오러 온것이니 어서 길을 비켜라.》

순검은 그제서야 한옆으로 비켜섰다.

철원의 수비를 담당한 인물들이 모두 왕시중의 집으로 찾아온것은 나라에 큰 사변이 일어났기때문이라고 생각할수밖에 없었다.

더우기 나라의 대상으로 손꼽히는 응통이 거기에 끼여있는것을 보고는 더이상 아무말없이 길을 비켜섰다.

순검들은 그 이상 더 가타부타할 생각을 버리고 그들을 대문안으로 들여보내였다.

홍유, 배현경, 응통 등 다섯사람이 대문안으로 들어서니 왕건의 심복부하인 김락이 두명의 무사를 데리고나와 앞을 막아섰다.

《아닌 밤중에 무슨 일이신지요? 왕시중은 지금 쉬고있소이다.》

요즘은 도성의 분위기가 매우 살벌하여서인지 김락은 호락호락 들여보낼 잡도리가 아니였다.

응통이 급한 용무가 있다고 무작정 내밀어서야 김락은 마지못해 길을 내주는것이였다.

응통이 먼저 사랑채앞에 다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시중, 응통이오이다.》

사랑채문이 열리며 왕건의 자태가 드러났다.

왕건은 익숙되지 않은 어둠속을 눈여겨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대들이 이 밤중에 여긴 웬일로…》

홍유가 응통의 뒤에서 불쑥 나오며 머리를 숙여보였다.

《막중한 국사를 의논하려고 이렇듯 무례를 범하면서까지 찾아왔소이다.》

왕건은 잠시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방안으로 들어오라는듯 손짓을 하였다.

응통은 떨어지고 나머지 네사람이 왕건을 따라 사랑방에 들어왔다.

왕건의 처 류씨가 손수 다반에 차잔을 올려놓고 일일이 돌아가며 차를 부어주었다.

이때 홍유가 류씨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걸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부인, 남새밭에 새로 익은 오이가 있으면 하나 따주소이다. 제가 급히 오느라 목이 말라서 그러오이다.》

홍유는 이런 말로 여기엔 류씨가 끼울 자리가 아니라는것을 묘하게 암시하는것이였다.

류씨는 재빨리 왕건과 그들 네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왕건의 낯색이 몹시 굳어져있는데 이것은 다른 네사람의 태도에서 분명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꼈기때문일것이였다.

능산(신숭겸)은 마치 우연히 이 집에 들린 사람마냥 무심히 천정만 올려다보고있었고 배현경은 차를 들이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복지겸이라는 무장만이 태연히 웃고있는데 어쩐지 웃는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어색했다.

류씨는 왕건이 고개를 끄덕여주자 손님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나서 밖으로 물러났다.

류씨는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싶어졌다.

혹시라도 왕건의 신상에 루가 미치는 일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는 녀성특유의 본능이 그를 행동에로 떠밀었다.

류씨는 사랑채를 에돌아 북쪽창문으로 해서 가만히 휘장속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그들이 주고받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먼저 홍유가 무릎을 꿇고앉아 말하였다.

《삼한이 분렬되고 사방에서 봉기군이 일어날적에 궁예왕이 삼척검으로 그들을 평정하고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한지도 이미 2기(12년)가 넘었소이다. 그러나 사람은 처음 시작보다도 끝을 어떻게 맺는가가 중요하오이다. 지금 궁예왕의 포악한 행위가 극심하다못해 형벌을 마구 람용하여 처자를 살륙하고 관리들을 죽여없애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임금을 원망하고있소이다. 옛적의 폭군들도 그 죄악이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것이오이다. 폭군을 들어내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청컨대 왕공은 우리의 간절한 뜻을 저버리지 말아주시오이다.》

왕건은 삽시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는 목이 마른듯 차잔에 손을 가져갔으나 그것을 제대로 잡지 못하였다.

배현경이 홍유의 뒤를 이어 다시한번 간청하였다.

《나라가 멸망의 문어구에 달하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후세의 큰 치욕이 될터이니 어서 결정해주소이다.》

그제서야 왕건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있으니 임금이 비록 포악무도하다 해도 두마음을 가지지 않겠소.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루라도 임금으로 삼았으면 종신토록 섬겨야 한다〉고 하였으니 신하로서 차마 임금을 징벌할수 없구려.》

이때까지 잠잠하던 왕건의 심복부하 능산이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어성을 높이며 나섰다.

《왕공,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법이오이다. 하늘이 주는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여 큰 재앙을 받는 법이지요. 지금 백성들은 모두 궁예왕을 뒤집어엎길 원하고있으며 또 지위높고 권세있는자들도 무리로 죽어 몇이 남지 않았소이다. 때는 지금이오이다. 간자의 보고에 의하면 청주에서 도망친 환선길이 동생 환향식과 함께 수천의 군사로 철원성을 향해 진격해오고있다 하오이다. 만약 왕공이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철원은 치렬한 전장으로 화할것이고 하늘이 준 좋은 기회를 놓치고말것이오니 부디 오늘을 놓치지 마소이다. 만백성이 겪는 고통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부디 우릴 이끌어주사이다.》

바로 이 순간 휘장이 걷혀지며 류씨부인이 불쑥 나와섰다.

모두가 놀라 고개를 쳐드는데 류씨부인은 왕건의 앞에 단정히 무릎을 꿇고앉았다.

《큰뜻을 내세우고 폭군을 갈아버리는것은 옳은 처사이오이다. 지금 여러 장군들의 말을 들으니 한갖 아녀자인 나도 의분을 참을수가 없는데 하물며 큰뜻을 품고계시는 대장부야 말할나위가 있겠나이까? 장군이 나서지 않으면 다른 야심가들이 왕위를 노릴것이온즉 백성들을 또다시 도탄에 들게 하여서는 안되오이다. 장군, 부디 백성들의 소원을 풀어주시오이다.》

류씨부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벽장속에 두었던 갑옷과 장검을 꺼내다가 왕건앞에 놓았다.

마침내 왕건은 류씨가 공손히 받들어올리는 장검을 손에 들며 이렇게 소리쳤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장검을 들겠소. 평생에 품은 뜻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소.》

홍유, 배현경, 복지겸, 능산 등은 일제히 왕건의 앞에 부복하였다.

《우리가 죽어 백골이 진토가 된다 할지라도 왕공 한분만을 받들겠소이다.》

그들은 곧 왕건을 옹위하여 마당으로 나와 로적가리우에 앉게 하고 군신의 례를 거행하였다.

왕건의 집은 수많은 사람들이 추켜든 홰불로 하여 불에 타는듯 하였다.

홍유 등이 왕건을 설복하는 동안 응통이 불러모은 사람들이였다.

장안의 여기저기에서도 홰불바다가 일어섰다.

드디여 여러 장군들이 왕건을 옹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수천명의 군사들이 기대를 안고 다가섰다.

마군장군 홍유가 군중을 둘러보더니 검을 뽑아들며 큰소리로 웨쳤다.

《군사들, 왕공이 의기를 들었다! 무도한 폭군을 들어내고 새 세상을 세우자!》

순간 수천수만의 창검이 충천하며 함성이 일어났다.

온 철원성이 깨여나 설레이였다.

장안의 골목골목길로 전령들이 《왕공이 의기를 들었으니 모두 나오라!》고 소리치며 말을 달렸다.

거기에 호응하여 도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들고일어났다.

왕건은 삽시에 수십여만으로 불어난 반정대오를 이끌고 궁성으로 말을 달렸다.

무수한 홰불들로 이제는 온 천지가 빨갛게 타는듯 했다.

이 장엄한 광경을 지켜보며 응통은 감격에 겨워 마음속으로 웨쳤다.

《아버님, 보시오이까. 절 보고 고구려의 후손임을 잊지 말라고 하시던 아버님의 소원이 오늘에야 이루어지고있소이다. 이 아들은 아버님과의 약속을 지켰나이다!》


궁예는 요즘 며칠째 악몽속에서 시달리고있었다.

눈만 감으면 자기가 죽여버린 목없는 귀신들이 나타나 머리를 돌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것이였다.

이부자리에 누우면 왕후 강씨의 혼이 머리우에서 질책하는 눈빛으로 서있었고 침전구석 어두운 그늘에서는 자기를 왕위에 올려세운 관나가 웃는 얼굴로 손저어부르는것이였다.

말그대로 궁예의 침전은 그가 평생에 무참히 죽여버린 온갖 귀신들로 꽉 들어차있는듯 했다.

매일과 같이 악몽에만 시달리다나니 궁예의 몰골은 참혹하게 여위였고 마치 그자신이 귀신같은 꼴이 되여버렸다.

궁예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괴로왔다.

그의 곁에는 이젠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던것이다.

누구나 그의 곁엔 역병귀신이라도 붙어있는지 얼씬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태봉국왕 궁예가 겪는 비참한 운명인것이였다.

지금 이 시각도 궁예는 무수한 귀신들과 악을 쓰며 싸우고있었다.

궁예에게 있어서 유일한 호신부는 오래동안 차고다닌 환도뿐이였다.

밖에서 함성이 차츰 가깝게 들려왔다.

궁예는 착각인가싶어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으나 함성은 여전히 끊기지 않고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죽어가는 맹수의 눈같이 처량하고 공허하게 시들어있던 궁예의 외눈이 불시에 표독스러운 빛을 띠였다.

분명 궁예는 심상치 않은 부르짖음을 제 귀로 똑바로 들었던것이다.

《궁예를 잡아라!》

《포악무도한 궁예를 죽여 억울한 령혼들의 원쑤를 갚자!》

이러한 함성이 이제는 똑똑히 들려왔다.

궁예는 장검을 빼여들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한순간 궁예는 너무 놀라 손에 들었던 장검을 떨굴번 하였다.

온 천지가 불에 타는듯 하였다.

무수한 홰불이 일렁거리며 홍수와 같이 밀려오고있었다.

얼혼이 빠진 궁예는 얼른 뒤문을 박차고 후원으로 뛰여들었다.

후원의 나무들사이에 몸을 감춘 궁예는 넋을 잃고 반정군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전히 궁예를 잡으라고 웨치는 고함소리들이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속에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 여러 무장들이 한명의 장수를 옹위하여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띄웠다.

궁예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그 일행이 지나치는 곳마다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만세를 부르는데 심지어 궁성안의 환관, 궁녀 등 궁인들까지 환성을 올리는것이였다.

갑자기 궁예가 화살에 맞은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

수천수만백성들의 옹위를 받으며 들어서는자가 다름아닌 왕건임을 알아본것이였다.

궁예는 미친놈처럼 안절부절하다가 이 모든것이 꿈이 아닌가싶어 제살을 꼬집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꿈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였다.

리성을 잃은 궁예는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왕건이 이놈, 내 이때껏 어리석은탓에 네놈을 죽이지 못한것이 천추에 씻지 못할 한이 될줄 몰랐구나.》

태봉이라는 다 무너진 집에서 궁예가 천하를 향해 내뱉은 마지막몸부림의 웨침이였다.

궁성에서 홀로 도망친 궁예는 부안(강원도 평강)의 어느 한 마을에서 너무도 배가 고파 밭에 들어가 보리이삭을 훔쳐먹다가 그 밭주인에게 맞아죽는것으로써 죄악에 찬 인생을 끝마쳤다.

오늘날에 와서 궁예라는 인간의 인생행로를 더듬어보면 참으로 많은 교훈을 력사의 비문에 새겨주고있다.

궁예가 자기의 기구하고도 불행한 인생행로를 감추기 위해 얼마나 죄악으로 얼룩진 피의 력사를 걸었는가.…

그래도 한때는 통일천하를 꿈꾸었고 타민족에게 빼앗긴 옛 강토를 되찾을 큰뜻을 표방하던 궁예가 아닌가.

그러나 시작은 어떻든지간에 백성의 삶을 무시하고 폭정을 일삼은 궁예의 운명은 달리될수가 없었다.

태봉국왕 궁예의 비참한 종말은 야심적인 인간증오사상, 다시말해서 백성들을 멸시하는 안하무인격이고 광적인 독재정치로 인해 필연적으로 초래된 력사의 응당한 심판이였다.

때는 918년 6월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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