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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6 회

제 3 장. 겨레의 꿈

10


수군거리던 목소리들이 곧 잦아들었다.

컴컴한 골방에 가득 앉아있던 사나이들이 벌떡벌떡 일어섰다.

키가 구척이나 돼보이는 장대한 사나이가 검을 들고 문가까이 붙어서서는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거 누구냐?》

밖에서 갈린 목소리가 새여들어왔다.

《관나대상님이 오셨소이다.》

그제야 사나이들은 안심하였는지 제자리로 돌아갔다.

잠시후 방문이 열리며 관나의 갈람한 몸이 비집고들어섰다.

관나는 비좁게 서있는 사나이들을 휘둘러보고는 웃자리에 가앉았다.

맨처음 일어섰던 장대한 체구의 사나이가 긴장된 시선으로 관나를 건너다보았다.

《갔던 일은 어찌되였소이까?》

《모든게 씨원치 않아.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랑패일텐데…》

관나는 두눈을 꾹 감고 퉁명스럽게 대꾸하였다.

사나이는 재빨리 두눈을 굴리며 바싹 다가앉았다.

《북원에 주둔하고있는 무력을 불러들이시오이다. 거기 수비군장이 재물이라면 오금을 못쓰는자여서 돈만 준다면야…》

관나는 못마땅한듯 이마살을 찌프렸다.

《환선길, 도대체 너는 여벌로 가지고있는 목이 몇개냐? 너희들은 궁예를 너무도 모르고있다. 북원의 군사가 움직이는것을 궁예가 어찌 모르겠는가. 우린 될수록이면 도성의 군사를 동원시켜 거사를 치르어야 한다.》

환선길이가 퉁을 맞고 물러앉자 다른자들이 언짢은듯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럼 대상의 뜻은 무엇이오이까?》

《지금 우리들이 데리고있는 군사들만 가지고는 궁예의 금위군을 당해낼수 없소이다.》

《내게 다 생각이 있다. 너희들은 그저 시키는대로만 움직이거라.》

관나는 눈을 부릅뜨며 어성을 높였다.

관나가 오금을 박자 방안에 앉아있는 사나이들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관나는 환선길이만 남겨놓고 다른자들은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대상님의 령대로 응통의 주위에 형리들을 풀어놓았소이다. 마치 궁예가 직접 지시한것처럼 꾸몄지요. 응통의 집으로 드나드는 일체 객들과 물건들은 일일이 살펴보게 하였더니 즉시 반응이 있었소이다.》

환선길이 밖의 동정을 한번 살피고는 관나의 곁에 다가앉으며 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음… 그러니 응통이가 요새는 편안칠 않겠는걸.》

관나가 손으로 턱을 쓸어만지며 중얼거렸다.

《예, 요즘은 병을 핑게대고 두문불출하고있소이다. 그를 잘 구슬리기만 하면야…》

《그렇게 쉽게 응할가?… 그자가 원래 신중한데다가 나와 앙숙이니 쉽사리 굽어들지 않을게야.》

환선길이 코웃음을 쳤다.

《응통이 설사 뻗친다고 해도 일단 반역사건에 관계되였다는것 하나만으로도 궁예의 쇠몽둥이가 용서하겠소이까. 제게 맡겨주면 그자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겠소이다.》

관나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자네 좋을대로 하게. 허나 내놓고 의도를 알려주면 안되네.

슬그머니 에둘러서 협박해보게. 그자만 내게 돌아서주면 궁예를 쉽게 뒤집을수 있지.》

《그런데 응통이를 이번 거사에 끌어넣으려는 대상님의 의도는 무엇인지요. 거사자금쯤이야 대상님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보장할수 있지 않소이까?》

환선길이 미타한듯 제 의향을 비쳐보았다.

《흥, 돈과 재물이 문제가 아니야. 궁예가 눈치채기 전에 반정군을 철원성으로 감쪽같이 불러들이려면 역시 응통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거던. 그가 비룡성의 말과 수레를 쥐고있으니 우리에게 돌아만 서면야…

응통이 만약 내 말을 거역하고 우릴 배반할 기미만 보이면 즉시 궁예에게 꽂아놓고말겠다. 궁예가 응통을 해치면 어차피 왕시중의 세력도 제거하려고 할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단살에 두마리 새를 잡는것이 아니냐?》

환선길은 그제야 깨도가 된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관나를 추어주었다.

《과시 대상님의 계책은 옛사람들도 미치지 못할바이오이다.》

《참, 세상사란 모를 일이다.… 내가 이 손으로 궁예를 들어낼 모의를 벌릴줄 어이 알았으랴.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 내 손으로 올려앉힌자이니 내 손으로 넘어뜨려야지 남의 손에 넘어지는것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

관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길게 탄식하였다.

궁예를 왕으로 올려앉히는데 제일가는 공을 세운 관나가 이렇듯 역모의 수창자로 나선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수 있었다.

권력과 결탁하여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졌는지라 나중엔 그 권력을 해치는 칼이 되였던것이다.

이것은 이미전에 응통이 예상했던 일이며 왕건이 궁예에게 충고한 그대로였다. 한마디로 권력과 결탁된 시전상인이 그 권력의 실체마저 장악하려고 나선것이였다.

관나의 지시대로 환선길은 하인들에게 약을 들리워가지고 비룡성의 관리인 응통의 집으로 길을 잡았다.

응통은 며칠째 고뿔을 핑게대고 두문불출하며 집안에만 꾹 박혀있었던것이다. 응통이 송악에서 철원성으로 올라온지는 몇달밖에 되지 않았다.

전국각지로 뻗은 그의 상단이 늘어나고 후량과의 대외교역의 규모가 커지게 되자 궁예는 응통에게 나라의 모든 말과 수레를 관할하는 비룡성의 벼슬을 주어 철원으로 불러올렸던것이다.

이밤도 응통은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놓고 복잡한 심연속을 헤매이고있었다.

그의 손에는 해명이 죽기에 앞서 남긴 절절한 당부가 적혀있는 서신이 들려있었다.

해명은 응통에게 끊어진 혈맥을 이어가는 길, 단군성왕님의 자손모두를 하나로 모으는 길에서 곧바로 가라고 절절히 당부하였다.

이 땅, 이 하늘이 하나로 된 그 시각 무덤가에 와서 술 한잔 뿌려주면 편히 눈을 감을것이라고 한 해명의 서신을 받아본 응통은 가슴을 찢는 고통을 느꼈다. 그는 철원에 올라와서야 자기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인 해명이 궁예의 손에 처참하게 죽은 사실을 알게 되였다.

해명이 자기때문에 궁예의 손아귀에 들어 지금껏 철원궁성에 머물고있었음을 알게 된 응통은 비분에 몸을 떨었다.

궁예야말로 응통의 부모를 죽인 원쑤였다.

가슴속에는 아버지 검용을 해치고 나중엔 어머니와 같은 해명까지 죽인 궁예에 대한 원한이 불길로 타번지고있으나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어 이렇듯 홀로 방황을 거듭하고있었다.

그가 걱정하는것은 나라의 운명, 더 구체적으로 말하여 궁예의 학정밑에서 멸망의 길로 줄달음치는 나라와 백성의 운명이였다.

민심은 태봉국을 완전히 떠나있었고 도처에서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정의 관리들은 궁예에게 해를 입을가싶어 저마다 자기 보신에만 치우치고 정사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니 나라의 통치체계는 극도로 마비된 상태에 처했다.

궁예의 주위에는 아첨군들과 야심가들만 맴돌고있었으며 간신들은 저마끔 승이 뻗쳐 궁예의 본을 따서 사람잡이에 미쳐날뛰였다.

응통은 이러한 근심으로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있었다.

물론 그에게 직접적인 화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장사를 하는 처지라고 해서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 고통에 몸부림치는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강건너 불보듯 멀리에서 구경만 하고있어야 하겠는가?!…

창천에 계시는분들이 말없이 질책하는 시선으로 응통이 자기를 굽어보는것만 같아 마음은 괴롭기만 했다.

고구려의 후손임을 웨치던, 이 땅, 이 하늘이 하나로 될 그날을 피타게 절규하던 검용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갈라지고 흩어진 겨레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넋을 바치라고 절절히 당부하는 해명의 목소리가 귀전에 맴도는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 응통이는 이들의 기대에 무엇을 했단 말인가.

혼란되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길을 걷고있는가.

지금 태봉국은 궁예의 폭정으로 지옥의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고있었다.

궁예의 광증은 귀신도 혀를 찰 정도에 이르렀다.

죄없는 사람들을 의심하여 마구 때려죽이다못해 얼마전에는 왕후 강씨와 《청광보살》이요, 《신광보살》이요 하던 두 아들마저 죽여버리는 망동까지 벌렸다.

응통은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몸서리가 쳐졌다.

더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다고 해서 형리들을 불러온 궁예는 왕후 강씨를 별채로 끌고가도록 령을 내렸다.

여기서 궁예는 차마 사람의짓으로는 상상도 못할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강씨를 죽였던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왕후를 불에 시뻘겋게 단 쇠몽둥이로 음부를 쑤셔 입과 코로 연기가 나오게 하여 무참하게 죽이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두 아들이 별채로 달려오자 궁예는 그들마저 쇠몽둥이로 머리를 까서 아예 죽여버리고말았다.

궁예의 이러한 행위가 전해지자 온 철원성이 다시한번 경악하였다.

말그대로 철원은 지옥으로 화했다.

응통은 이제 자기에게까지 그 화가 미치지 않는다는 담보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것을 절감하게 되였다.

그러나 궁예의 곁을 떠나는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자기에게 의탁하고있는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스스로 걸머진 처지에서 제 한몸의 위험을 피해 떠난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또 자기 한몸에 닥칠 위험을 피해간다면 자기를 친아들처럼 키워준 검용과 해명의 념원, 남강마을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배신의 길이 될것이였다.

응통은 바로 이러한 복잡한 심리속에서 앞날을 어떻게 기약할것인가 하고 계책을 모색하고있었다.

《환선길장군이 뵙자고 찾아왔소이다.》

심복이 전하는 말을 듣고 응통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환선길이라면 철원의 실질적인 실권자인 대상 관나의 심복이였다.

그의 동생 환향식은 형부에 적을 두고 많은 사람을 처형한 악명높은자이기도 하였다.

원래 철원지방의 영향력이 강한 문벌가문에서 자란 그들형제는 일찌기 관나의 심복이 되여 온갖 못된짓을 다하여 백성들의 규탄을 받는자들이였다. 응통은 환선길이와 안면만 있을뿐이지 서로 오가며 상종하는 사이가 아니였다.

그러한 환선길이 이렇게 불쑥 찾아온것은 분명 관나가 보냈을것이였다.

자기와 경쟁자인 동시에 량립할수 없는 적수인 관나가 어째서 아닌밤중에 제 심복을 보냈을가.

조금 있다가 기골이 장대한 환선길이 응통의 앞에 나타났다. 환선길은 응통에게 례를 표하고나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제가 일찍부터 대행수의 명성을 익히 들으면서도 친분관계가 없는것을 깊이 한탄만 하다가 이렇게 렴치없이 내정돌입을 하였소이다. 무례가 되였으면 용서해주시오.》

《오히려 장사에 바쁘다는 구실로 조정백관들과 담을 쌓고 살아온 내가 부끄럽소이다. 자, 그럼…》

응통은 흔연한 표정으로 그를 사랑방에 이끌고 들어갔다.

환선길은 심상한 눈길로 사랑방을 휘둘러보고는 짐짓 태연하게 웃었다.

《소문에 대행수가 서화에도 뛰여나다고 하더니 역시 소문 그대로이군.…》

응통의 사랑방은 네 벽이 서화와 명필의 족자들로 꽉 차있었는데 환선길은 바로 이러한것을 보고 이야기한것이였다.

응통은 하녀를 불러 차를 내오도록 이르고는 환선길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천하가 나누어져 시국이 어수선할 때 이런 붓장난으로 세월을 보내는것이 부끄럽소이다.》

하녀가 들어와 조심히 차탁을 놓고 물러가자 환선길은 차잔을 들어 한모금 들이키고나서 단도직입으로 말을 떼였다.

《지금 궁예왕의 폭정으로 나라는 위태롭게 낭떠러지를 향해 굴러가는 수레와 같소이다. 공은 이것을 어떻게 보시오?》

응통은 순간 놀라서 낯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설마하니 환선길이 이렇게 로골적으로 궁예를 욕하는 말부터 꺼낼줄은 생각도 못했던것이다.

《?!…》

응통이 전혀 입을 열지 않자 환선길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공은 지금 항간에서 도는 동요를 들어보셨소?》

환선길이 집요하게 물어보자 응통은 마지못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이들의 동요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라…》

《아니, 장사를 하는분이 항간의 동요도 모르고서야 어찌 민심을 알며 민심을 모르면 장사를 하시겠소? 그 노래의 가사가 하도 절묘하고 신통하여 내가 뜬금으로 외우고있으니 한번 불러드리리다.》

환선길은 두눈을 감고 한참이나 글귀를 고르는듯 하더니 무릎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러나갔다.


삼수중과 사유(동서남북)아래 옥제(옥황상제)께서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내니

사년에 두 룡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동쪽에 형적을 드러내리

먼저 닭을 잡고 오리를 칠것인바

밤이면 하늘에 오르고 낮이면 세상을 다스려

자년이 되면 중흥위업을 이룩하리


응통은 두눈을 감고 요지부동이였다.

그의 표정은 무표정했으나 내심으로는 풍랑이 격류하고있었다.

(이게 뭔가?! 《삼수중과 사유아래 옥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내니》라는것은 진한, 마한이라는 뜻이요, 《사년에 두 룡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동쪽에 형적을 드러내리》라는 뜻의 《청목》은 소나무니 송악군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흑금》은 철이니 그것은 지금의 철원을 가리키는 말일것이다.

그러니 결국 궁예왕이 처음 여기에서 일어나 여기에서 멸망한다는 말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는것은 계림(신라)을 점령하고 압록강 강안까지 령토를 넓힌다는 뜻이다.

이것은 평소에 왕공이 즐겨 외우던 소리로서 누가 왕시중을 모해하기 위해 지어부르는 동요이다.)

응통은 드디여 두눈을 크게 뜨고 환선길을 태연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 노래의 뜻을 모르겠소이다.》

《난 지금까지 공의 선견지명이 뛰여나다는 말을 많이 들었소. 그런데 이처럼 모르쇠를 하다니…》

환선길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입부리를 놀렸다.

《아니, 전혀 무슨 소리인지 짐작도 못하겠소이다. 그 노래의 해석을 들으려면 나같은 장사군을 찾아올것이 아니라 수춘부의 학사들을 찾아가는것이 좋을거웨다.》

응통이 이렇게 딱 잘라매자 환선길은 더 할말이 없는지 품속 깊은 곳에서 차곡차곡 접은 종이 한장을 내놓았다.

무심결에 그것을 펼쳐본 응통은 삽시에 두눈이 꼿꼿해졌다.

응통의 손에서 종이장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종이에는 궁예를 들어내기 위한 여러 장군들의 모의가 적혀있었다.

응통은 펄쩍 정신을 차리고 뛰쳐일어났다.

《이건 무슨 뜻이요? 굳이 나에게 이런것을 가져온 리유가 무엇이오이까?》

《고정하시오. 나는 관나대상의 령으로 공의 도움을 받으러 왔을뿐이지 공을 해칠 마음은 없소이다.》

응통은 한순간 비칠거리며 벽에 등을 기대였다.

갑자기 현훈증이 치밀어오르고 사랑방이 통채로 빙글빙글 눈앞에서 돌아갔다. 응통은 대상 관나가 반역을 꾀하며 그 음모에 자기를 끌어들이려 한다는것을 대뜸 깨달았다.

응통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데도 환선길은 여전히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있었다.

《물론 당장 답변을 달라는것은 아니요. 하지만 낡은 하늘을 새 하늘로 바꾸면 공은 자기가 원하는것을 모두 가질수 있을것이요.》

응통은 자칫하면 자기의 운명이 여기서 끝날수 있다는것을 직감했다.

결정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이제는 숨박곡질도 필요없는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관나와 그 일당의 모의에 끼여들지 말고 몸을 피해야만 했다. 무슨 구실을 대서라도 철원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관나일당이 자기를 찾아올 정도이면 이미 반정전야의 형세가 도래했음을 말해주는것이였다.

하루라도 철원에서 어물거리다가는 무슨 덤터기를 들쓸지 예측할수 없었다.

응통은 관나가 음모를 꾸며도 궁예를 당해내지 못한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불행이랄가 관나는 무력을 쥐고있지 못한것이다. 결국은 지방에 상주하고있는 병력을 철원으로 끌어오기 위해서 응통의 도움이 필요한것이였다.

응통은 설사 반정이 가능하다고 해도 관나를 도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까지 궁예를 등에 업고 치부와 영달에로 줄달음쳐온 관나가 아닌가.

그를 도와 거사를 치르는것은 대의명분에도 어긋나는것이였다.

응통은 불쑥 손을 쳐들어 환선길의 말을 저지시켰다.

《장군이 나를 찾아온것을 누가 알고있소이까?》

《관나대상과 나 둘만이 알고있소.》

환선길의 대답을 들은 응통은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이제 단마디로 그들의 청을 거절하면 그 앙갚음으로 궁예에게 모해를 할수 있었다.

그러니 우선은 슬슬 환선길을 구슬려 돌려보낸 후에 몸을 빼여 철원을 떠나는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 될것이였다.

《이것은 이 나라 백성의 운명이 달린 큰일이니 며칠동안 생각할 말미를 주시오이다.》

환선길은 이 정도라도 응통이 응해주니 반가운 태도로 일어섰다.

《거사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결단을 내려주시오. 그럼 일후에 찾아뵙겠소이다.》

환선길은 군례를 표하고는 올 때처럼 간다온다 소리없이 사라져버렸다.

응통은 후- 한숨을 길게 내쉬며 옷소매로 이마에 돋은 땀을 닦아냈다.

지금까지 환선길이와 나눈 대화가 모두 꿈인듯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것은 꿈이 아니고 엄연한 현실이였다.

관나가 어째서 반역을 꾀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응통이였다.

이때에 와서 완전히 미쳐버린 궁예는 많은 전장과 재산을 가지고있는 고관대작들을 반역죄로 처형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여 자기 개인재산으로 만드는데 몰두하고있었다.

아무리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대신이라도 일단 궁예의 미친 눈에 걸려들면 순간에 가문이 적몰되고말았다.

그것은 나라의 원훈인 원표의 비극적인 말로가 잘 보여주었다.

지금 두근이가 중풍에 걸려 죽은 다음 시전상인들을 거느릴 채가 아들 관나에게 넘어갔는데 그가 앉아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있지 않으리라는것은 삼척동자도 알수 있는 일이였다.

나라에서 제일가는 재산가라고 하면 관나가 첫손가락에 꼽힐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응통은 환선길이 마시다만 차잔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관나야, 너는 나를 빠져나올수 없는 함정에 밀어넣은줄 믿고있겠지만 큰 실책을 범했다. 네 덕분에 나는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였구나.》

응통은 그밤으로 왕건을 찾아가 만나 전후사연을 그대로 고하였다.

왕건은 마지막까지 그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나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의 소견엔 어찌하면 좋을것 같은가?》

《멀리로 떠나시오이다. 우리가 응해나서지 않으면 관나는 분명 시중님을 해치려고 할것이오이다. 시중님을 해치면 결국 그는 한살에 두마리 새를 잡을수 있으니…》

왕건은 손을 들어 응통의 말허리를 끊으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 언제부터 묻고싶은것이 있는데 사실대로 말해주겠나?》

응통은 왕건의 물음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시각을 다투는 이 순간 왕건이 곁가지를 치는것만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계책을 정하여야 하오이다.》

왕건은 응통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는 어인 일로 날 따르게 되였는가. 구태여 내가 아니라도 자네의 능력이면 얼마든지 다른 주인을 정할수 있을텐데…》

응통이 고개를 들어 보니 왕건의 시선이 지꿎게 자기를 응시하고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중님이 고구려의 후손이기때문이오이다.》

《고구려의 후손이라… 오직 그것 하나때문에 날 주군으로 받든다는 말인가?》

왕건이가 이렇게 물어보자 응통은 정색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시중님은 궁예왕에게 해를 입은 해명암주님을 아시오이까?》

《학식이 깊고 명망높은 승려임을 잘 알고있네.…》

《해명암주님은 저에겐 어머니나 다름없는분이오이다. 그분이 제게 남긴 서신이오이다. 이걸 보시면 제가 어째서 시중님을 따르는지 알수 있을것이오이다.》

응통은 이러면서 품속을 더듬어 해명의 서신을 꺼내여 받들어올렸다.

응통의 손에서 해명의 서신을 넘겨받은 왕건은 그것을 유심히 읽어내려갔다.

마침내 해명의 서신을 다 읽은 왕건은 그것을 내려놓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불가에 적을 둔 한갖 녀승도 이럴진대 대장부로 세상에 나서 찢겨져나간 겨레의 아픔을 외면하여서는 안되지.…》

《제가 시중님을 따르는 리유는… 바로 겨레의 아픔을 달래고 세상을 바로잡을분은 왕시중 한분이라는 확신때문이오이다. 계림을 치고 고구려의 옛땅을 찾겠다는 시중님의 그 경륜이 이루어지도록 저의 모든 힘을 다해 받들겠으니 부디 하나로 모여살려는 겨레의 숙원을 이루어주소이다.》

응통의 말을 들은 왕건의 두눈은 그 어떤 결심으로 황황히 타올랐다.…

다음날 갑자기 조정안이 뒤숭숭해졌다.

새벽에 라주쪽에서 전령이 급보를 가지고 올라왔다는 소문이 온 장안에 퍼진것을 빌미로 조정안까지 벌컥 뒤집혔다.

그런데 사실상 해당 관청에서는 아무런 공문도 받지 못했고 또 라주에서 파발이 올라온것을 봤다는 사람도 없었건만 라주가 견훤의 공격을 받아 위급하다는 소문이 바람에 연기날리듯 온 철원성을 휩쓸고있었다.

가뜩이나 궁예의 횡포로 도성안이 뒤숭숭한 판에 라주가 함락될지 모른다는 소문까지 나돌아 민심이 아주 흉흉해졌다.

곧 궁예가 소집한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소문의 사실여부를 확인해보지도 않고 조정중신들의 의견은 라주가 위급하다는쪽으로 기울어졌던것이다.

전령의 급보든 항간의 소문이든 아니땐 굴뚝에서 연기가 나랴.…

조정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종 왕건이 반렬에서 나와 궁예앞에 부복하였다.

《대왕님, 신이 늘 근심하였던바가 라주의 수비였나이다. 라주를 빼앗기면 나라의 만년대계가 위태로우니 속히 정병을 보내여 견훤을 막아야 할줄 아오이다.》

궁예는 충혈된 눈을 들어 조정백관들을 둘러보았다.

《짐도 라주일이 늘 마음에 걸려있었다. 그런데 이렇듯 흉흉한 소문이 왕성하게 퍼지고있으니 몹시 근심이 되는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라주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궁예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왕건이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하였다.

《페하, 신을 보내주시오이다. 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라주를 지켜내겠소이다.》

《왕시중이?…》 궁예는 무척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정백관들도 놀라서 서로 돌아보며 웅성거렸다.

궁예는 한참동안 생각을 굴리다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짐도 왕시중과 생각이 같다. 왕시중은 이길로 라주에 내려가 나라의 만년대계를 도우라. 거병하려면 시중의 벼슬이 불편할테니 그것을 벗어놓고 수군을 통솔하도록 해라. 짐은 경에게 일체 수군무력을 총괄할 병권을 맡기겠다.》

《망극하오이다.》

응통은 내심의 흥분을 감추고 궁밖으로 물러나왔다.

그는 왕건에게 청을 들여 라주로 내려가는 수군함대의 병참관이 되였던것이다. 철원성을 탈출하려는 그의 계책이 성공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라주의 위기란 왕건이 응통의 계책을 받아들여 부하들을 시켜 돌린 랑설에 불과했다.

왕건과 응통은 도성안팎에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궁예의 곁을 떠나게 된것이였다.

《대행수, 잠간 뵈올수 있을가요?》

응통은 뒤에서 누군가가 불러서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관나가 얼굴을 잔뜩 찌프리고 서있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관나는 거만하게 얼굴을 들고 응통을 노려보았다.

《응통대행수는 장사에만 능한줄 알았더니 술수에도 뛰여났구려.》

《무엇을 념두에 두고 하시는 소리웨까?》

《모르쇠를 하지 말게. 내가 그대의 속심을 모르고있는줄 아는가? 왕시중을 구하기 위해 라주의 위협설을 내돌리고 궁예왕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것을 내가 모르는줄 아는가 말이요.》

응통은 쓰겁게 웃었다.

《오히려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오이다. 그리고 나는 피신하는것이 아니라 위험을 맞받아나가는것이요. 그럼 이만…》

응통은 관나를 뒤에 두고 걸음을 크게 내짚었다.

관나는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응통의 뒤모습만 멀거니 바라볼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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