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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4 회

제 3 장. 겨레의 꿈

8


대상 관나는 이른새벽에 갑자기 궁예의 부름을 받고 궁으로 불리워갔다.

그는 지금 상중이였다. 나라를 좌우지할수 있는 재력을 가지고 온갖 횡포를 다 부리고있던 두근이도 끝내 중풍에 걸려 쓰러지고말았던것이다. 하여 관나는 아비의 뒤를 이어 시전상인들의 두목이 되여 나라의 대상으로 된것이다.

이른새벽에 궁으로 불리워가기는 처음 있는 일이였으므로 관나는 불안에 가슴을 조이며 전각안에서 궁예가 나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대왕님께서 드시오이다.》

환관의 전갈을 받은 관나는 고개를 들었다.

금실로 짠 고깔을 깊숙이 눌러쓴 궁예가 소리없이 들어왔다.

궁예는 항상 외눈인것을 부끄럽게 여겨 얼굴의 거의 절반이나 가리우게 금고깔을 깊숙이 눌러쓰기를 좋아했다.

궁예에 대해 잘 알고있는 관나는 요즘에 와서 차츰 괴벽해지는 궁예가 두려웠다.

궁예는 화를 내기만 하면 자기에게 충실한 대신까지도 가리지 않고 죽였다.

이것으로 해서 조정에서는 무엇을 하나 해도 궁예의 비위를 거슬릴가싶어 문무관료들이 항상 조심해야 하군 했다.

어렸을 때부터 궁예를 잘 아는 관나도 어쩐지 요즘은 자주 해를 입지 않을가 불안에 사로잡히군 하였다.

관나는 제발 이른새벽에 궁에까지 불리워온것이 자기에게 화를 입히는 일이 아니기를 바라고있었다.

궁예는 자리에 앉아 무슨 영문인지 관나의 아래우를 훑어보기만 하였다.

관나도 짐짓 태연한 기색으로 궁예를 마주보았다.

《관나야, 너도 이젠 많이 늙었구나.》

관나는 아연하여 고개를 들었다.

웃는 빛이란 한점도 없는 궁예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기를 노려보고있었다.

관나는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기만 했다.

관나의 나이가 어느덧 마흔고개에 이르렀다. 궁예가 자기를 왜 이른새벽에 불러내여 새삼스레 이런 말을 꺼내는지 통 갈피를 잡을수가 없어 관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왕님, 신은 무슨 말씀이온지 영문을 모르겠소이다.》

《너도 이젠 반백이 다되였다는 소리이다.》

관나는 아예 얼떠름해졌다.

이런 한담이나 하자고 이른새벽에 자기를 불러낼 궁예가 아니겠는데…

《내가 널 보자는것은 한가지 추궁을 하기 위해서이다.》

《?!》

관나는 놀라서 궁예의 입만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지금 바로 턱밑에서 반역사건이 꾸며지고있다. 짐이 은총을 베풀어 너로 하여금 역당의 씨를 말리라고 령을 내렸는데 아직도 질질 시간을 끄는것은 무슨 속심이냐?》

《예?!…》

관나의 간담이 스러졌다.

궁예가 말하는 반역사건이란 황당하기 그지없는것이였다.

세상이 험악하니 별의별 야심가들이 다 일어나는 판이였다.

누군가가 투서로 모함을 하면 궁예는 그 사실여부를 따져보지도 않고 죽여버리는 판국이였다.

원훈대신 원표는 스무해남짓이 창업의 큰 공을 세운 인물인데 그의 부하로 있던자가 상관에게서 배척을 받자 궁예에게 원표가 반역을 꾀한다고 허위밀고하였다.

궁예는 이 사건을 원표를 잘 아는 관나에게 맡겨 은밀히 조사해보게 하였는데 반역을 꾀한 행적이 아무것도 없었다.

관나는 이미 자기가 조사한 내용을 그대로 보고하였고 궁예는 상관을 모해한자를 각을 찢어 죽이게 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지 한달도 못되여 이렇게 자기를 불러들여 따지니 관나는 무엇이라고 말할지 몰라 그저 아연해할뿐이였다.

《대왕님, 사실은 이미 밝혀졌소이다. 원표대장군이 대왕님을 도와 창업에 큰 공적을 쌓은것은 천하가 다 아는터이니 간사한자들의 모함에 귀를 기울이는것은 대왕님의 덕에 손상을 주는 일인줄 아뢰오이다.》

《그럼 짐의 눈이 어두워 사람을 잡는다는 소리냐?》

궁예는 살기가 돋아 소리쳤다.

《아, 아니올시다. 그저 신의 소견에는 사실여부를 정확히 따져본 후에 일을 처결해도 늦지 않을것 같아 아뢰는것이오이다.》

관나는 이마에 돋은 땀방울을 옷소매로 꾹꾹 찍어냈다.

그는 한시바삐 이 자리를 모면했으면 하는 생각뿐이였다.

궁예가 옷자락을 들추더니 둘둘 만 편지를 관나에게 훌 집어던졌다.

관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펼쳐보았다.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관나의 낯빛은 점차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편지는 원표가 패서에 있는 자기 처남에게 보내는것인데 궁예가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여 민심이 몹시 뒤숭숭하다는것, 자기자신도 언제 피해를 입을지 모르니 정병을 거느리고 한시바삐 철원으로 올라오라는 당부가 적혀있었다. 관나는 손을 와들와들 떨었다.

궁예가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에서 편지를 나꾸어챘다

《이래도 짐을 탓하겠는가. 원표는 너희 부자가 내게 추천하였으니 네 손으로 죽여라.》

궁예는 얼음장같이 차거운 말들을 내뱉았다.

《저, 대왕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는것은 아무래도 가당치 않을가 하나이다. 신이 의형대로 끌고가서 사건을 밝혀내는것이 어떠하올지?… 혹 종실들과 원훈대신들이 이 일로 불안해하는것도 막아낼겸 그게 상책인줄 아오이다.》

《아니다. 짐을 모해한자는 살려둘수 없다. 너도 따라 죽지 않겠으면 짐의 어명을 받들라.》

궁예는 단호하게 관나의 마지막간청마저 물리쳐버렸다.

관나는 궁예가 붙여준 형리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원표의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을 가까이할수록 관나의 마음은 무거워만 졌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를 친자식처럼 돌봐준 원표를 제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미쳐죽을것 같았다.

생각같아서는 그에게 미리 알려주어 화를 면하게 해주고싶었지만 그것은 마음뿐이였다.

관나는 형리들을 밖에 세워두고 저 혼자 원표의 집으로 걸어들어갔다.

대문이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관나는 그의 집이 떠나간 집처럼 너무도 한적한데 속으로 놀랐다.

원표의 집쯤 되고보면 노복이 수백을 헤아리는 대가인데도 인적기 하나 볼수 없었던것이다.

가슴이 철령 내려앉은 관나가 급히 밖에 있는 형리들을 부르려고 몸을 돌리는 찰나 등뒤에서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리였다.

《관나가 왔느냐?》

사랑채 장지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체통이 큰 중늙은이가 조용히 나와섰다.

관나는 그가 원표임을 알아보자 불시에 다리맥이 쑥 빠지는것만 같았다.

관나가 쭈밋거리는것을 본 원표는 다가서며 쓰겁게 웃었다.

《너무 심란해할건 없네. 어차피 올것이 왔으니까. 그리 두려울것이 없구만. 말 안해도 다 알고있네. 궁예가 보내서 왔을테지?…》

관나는 답답한듯 목을 감싸쥐였다.

《어찌 그런 생각을 다 가지셨소?》

원표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껄껄 웃으며 관나의 손을 덥석 잡아쥐였다.

《어쨌든 들어가세. 귀한 손님이 한분 더 있으니까.…》

원표는 이러면서 관나를 안으로 질질 끌어들이다싶이 하였다.

원표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였지만 관나는 그의 눈이 이상하게 번뜩이는것이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랑방은 여러대의 초를 켜놓아서인지 휘황하게 밝았다.

사랑방으로 발을 들여놓던 관나는 뜻밖에도 응통이 앉아있는 모습에 와뜰 놀라 주춤 멎어섰다.

잘못 보았는가싶어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 분명 응통의 모습이였다.

《내가 불렀으니 자네도 거기 앉게.》

원표가 지그시 내리누르듯 말하자 관나는 더이상 뭐라고 대꾸할 용기가 없어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저도 모르게 오싹 오한이 끼쳤다.

《대장군, 어찌… 반역을?…》

관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원표가 손을 들어 관나의 말을 잘랐다.

《자네도 이미 알고있을테지? 궁예가 신라왕족의 후손이라는것을 말일세.》

《무… 무슨 소리오이까?》

원표는 소리내여 웃었다.

《고구려사람이라고 자처하는 궁예가 실상은 신라사람일세. 그것도 헌안왕의 외손이요,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네.… 사람이 만든 장난이란 이런것일세그려. 신라왕족의 당당한 후손이 왕실을 뒤집으려고 할줄 누가 알았겠는가? 궁예가 고구려사람으로 자처하며 건국을 선포할 때야 굉장했지.

자네와 나는 그를 처음부터 받들고 내세웠으니 이제 와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이젠 우상이 깨여졌어. 포악무도하고 잔인한자를 임금으로 모시고 받들어왔으니 스스로 화를 초래하게 되였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원표는 이러면서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응통에게 고개를 돌렸다.

《검용장군이 불행하게 피살된 내막을 털어놓자고 그대들을 이 자리에 불렀네.…》

원표의 말이 여기까지 와닿자 응통은 두눈을 번뜩이였다.

《장군, 그건 이미 잊혀진 사실이요. 그걸 꼭 이 자리에서 밝혀야겠소?》

관나는 혼탕된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아니, 말씀해주시오이다. 그래야 벗과 원쑤를 똑바로 가려볼게 아니오이까.》 응통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원표는 응통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자네 아버지를 해친 장본인은 날세.…》

이렇게 서두를 뗀 원표는 근 스무해전에 있었던 그때 일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원표의 이야기를 듣는 응통의 얼굴은 옆에서 보기가 무섭도록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그때 일을 정황으로만 알고있는 관나까지도 비로소 검용이 살해된 내막을 구체적으로 들을수 있었다.

원표는 이야기를 끝내자 곧 응통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이제 와서 용서를 빌어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와서 살지 못하겠구만. 부디 이 늙은이의 죄악을 용서하지 말아주게.》

응통은 무거운 한숨을 쉬고나서 자기앞에 꿇어앉은 원표를 일으켰다.

《장군을 원망하지 않소이다. 다만 이 세상에 정의가 남아있는 한 죄악을 저지른자는 반드시 하늘의 벌을 받게 된다는것만 확신할뿐이오이다.》

관나는 응통의 이 저주가 누구에게 향한것인가를 너무도 잘 아는것만큼 아예 입을 꾹 다물고있을뿐이였다.

《궁예를 찾아가는것이 어떻소이까. 장군이야 나라의 원훈이고 페업에 큰 공이 있으니…》

응통이 이렇게 권유하자 원표는 차겁게 거절했다.

《내 죽으면 죽었지 포악무도한 궁예의 발밑에 꿇어엎디여 빌지 않겠네. 내가 인생에 가장 큰 실수를 범한것은 바로 권력과 부귀를 탐내여 궁예와 같은자를 섬긴거라네. 무도한 폭군이 그 자리에 앉아있을 날도 멀지 않았으니… 누군가가 반드시 궁예를 거꾸러뜨리고 새시대를 열것일세.》

원표는 이 말만 남기고는 곁에서 부여잡을새도 없이 허리에 차고있던 단검을 빼여 제 목에 힘껏 박았다.

관나가 질겁하여 쓰러진 그의 손목을 부여잡았으나 원표는 생의 마지막힘을 다하여 가까스로 물리쳐버렸다.

관나가 다시 대들어 칼을 빼냈을적엔 이미 절명한 뒤였다.

《자, 보시오. 그래 치부와 영달만을 꿈꾸며 무도한 폭군의 손발이 되여 백성들의 고혈을 악착하게 짜내더니 결국 그대에게 남은것이 뭐가 있소? 자고로 상도를 어기고 권력에 붙어 기생하는자들이 갈길이란 파멸밖에 없소.》

응통은 원표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관나를 이렇게 단죄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온몸이 피범벅이 된 관나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한참만에야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맑고 싸늘한 새벽공기가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그의 몸을 꾹 찔러댔다.

밖에서 초조한듯 서성거리던 형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어찌되였소이까?》

궁예의 형리들이 초조한 어조로 물어보자 관나는 공허한 눈길로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관나는 형리들앞에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쳤다.

《궁예야, 네가 이젠 완전히 외로운 처지에 빠졌구나. 네곁의 마지막사람이 바로 나였다. 이 관나대상이란 말이다. 그러나 나도 이젠 네 곁을 떠나겠다. 너와의 인연이 부질없는 꿈이라는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았구나.》

형리들이 달라붙어 거칠게 흔들어서야 관나는 간신히 정신을 돌리고 맥빠진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궁성으로 갔다.

궁예는 여전히 잠자리에 들지 않고 관나의 보고를 기다리고있었다.

관나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공허한 눈길로 궁예를 올려다보며 맥없이 입을 열었다.

《대왕의 령대로 집행하였소이다. 원표대장군과 온 가족이 래세로 떠나갔나이다.》

궁예는 외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나무아미타불!…》

궁예는 여전히 한본새로 물러갈념을 하지 않는 관나를 의아쩍게 노려보았다.

《짐에게 무슨 할말이 있느냐?》

관나는 어전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앉았다.

《대왕님!…》

관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정신없이 부르짖었다.

《사실대로 말씀해주소이다. 어째서 원표장군을 해친것이오이까. 정말 대왕의 신상에 루가 미칠가싶어 그를 제거한것이오이까?》

궁예가 소름끼치는 시선으로 관나를 노려보았다.

여느때없이 격해진 관나는 쉽사리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신에게 진실을 밝혀주시오이다.》

《관나야, 정치란 이런것을 두고 말하는것이다. 이 나라에는 이 궁예대왕을 따르는 백성만이 필요하다.》

마침내 궁예는 이렇게 뱉아놓았다.

궁예를 노려보는 관나의 시선은 그 어떤 원한으로 불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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