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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 회

제 3 장. 겨레의 꿈

7


912년에 이르러 왕건은 수군함대를 거느리고 또다시 라주로 내려갔다.

그것은 견훤이 제2차로 라주원정을 단행한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였다.

정주에서 새로 건조한 함선으로 력량을 보강하고 종회와 김언을 좌우선봉장으로 하는 함대가 곧바로 라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왕건이 이렇듯 견훤의 움직임을 손금보듯 할수 있은것은 응통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어서였다.

이 시기에 벌써 응통은 태봉국의 경내를 벗어나 각지에로 조밀한 상업망을 늘여놓았는데 그 하나의 선이 적국이라고 할수 있는 후백제에도 깊숙이 뿌리를 박게 되였다.

한마디로 응통은 상업령역을 대외에로 확대한 결과 다른 나라들의 정치정세를 손금보듯 들여다볼수 있었다.

하여 왕건은 이번 원정에도 응통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를 데리고나온것이였다. 응통이 비밀리에 련계를 맺고있는 후백제의 상인들이 알려온데 의하면 견훤은 덕진포와 목포사이에 전함들을 늘어놓고 왕건과 승패를 가를셈이였다.

지난번 라주원정때의 참패를 수치로 여기면서 이번엔 기어이 성공하리라 믿고있었다.

전함 이백척에 수천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라주앞바다로 진격한 견훤은 무려 십여리에 걸친 대수중진을 펼쳐놓고 왕건을 기다리고있었다. 견훤은 덕진포에서 뒤따라오는 왕건의 함대를 괴멸시키고 곧바로 라주에 상륙하려고 작정한것이였다.

왕건은 조심히 덕진포를 향해 전진하였다.

견훤의 의도는 명백했다.

목포와 덕진포를 가로막아 왕건이 라주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바다에서 괴멸시켜보려는것이였다.

드디여 견훤의 진영에서 사자가 작은 배를 타고 왕건에게로 찾아왔다.

그것은 로골적으로 싸움을 거는 글이였다.

왕건은 심중히 생각하던 끝에 거기에 응하였다.

어차피 라주를 위해서는 제해권을 놓고 어느때건 견훤과 한번 겨루어야만 하였기때문이였다.

이 기회에 아예 견훤에게 된타격을 안겨 라주를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하였다. 왕건은 최후의 격전을 결심하고 덕진포를 향해 나아갔다.

왕건의 함대가 라주포구에 들어섰을 때였다.

적의 경내에 잠입하고있던 세작들이 왕건을 찾아왔다.

세작들은 견훤이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함대를 쭉 벌려세워 머리와 꼬리가 서로 늘어붙었다는것과 륙지에 일부 병력을 상륙시켜 수륙종횡의 형세를 취했다고 보고했다.

더우기 중요한것은 견훤이 일부 함선들을 떼여내여 목포쪽에서 왕건의 배후를 치려고 한다는것이였다.

견훤은 이번 싸움에 후백제수군을 모두 동원시켰던것이다.

적정을 받은 장수들은 모두가 긴장해졌다.

적아의 력량이 대비할수 없기때문이였다.

왕건은 제 부하들의 이러한 심리상태를 재빨리 포착하였다.

지금은 그 어떤 말보다도 승전할수 있는 방책을 구하는것이 급선무였다.

왕건은 자기가 가장 아끼는 수하장수인 유금필만 남겨두고 모두 자기 위치로 돌려보냈다.

유금필을 바라보면서 왕건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싸움에 앞서 뭔가 생각해둔것이 없소?》

《승패의 결정권이야 장군에게 있지 않소이까. 소장은 그저 장군의 의도를 따를뿐이지요.》

유금필이 이렇게 겸사의 말을 하자 왕건은 심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최후의 결전을 결심하였지만 생각보다 견훤의 기세가 왕성하여 힘이 들것이요. 이런 정황에서 우세한 적에게 정면으로 달려드는것은 필경 무분별한 용맹으로나 되지 않겠는지…》

왕건이 심중의 우려를 털어놓자 유금필이 힐끗 장막밖을 내다보고나서 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장군, 물에 있는자를 불로 공격하는것보다 더 좋은 방도가 없는줄 아오이다.》

왕건은 귀가 번쩍 트이여 몸을 일으켰다.

《화공을 쓴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우.》

《지금 견훤이 위세를 돋구는데만 치우치다보니 필경 아군이 화공을 쓰리라고는 생각도 못할것이오이다.

제가 천문을 보니 오늘 밤에 바람이 몹시 불것 같소이다. 미리 준비하였다가 불을 지르며 공격하면 반드시 견훤을 사로잡을수 있으리다.》

왕건은 여전히 어두운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계책이 심히 좋다마는 불을 지를수 있는 준비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러자 유금필은 태연히 웃으며 왕건의 말을 받았다.

《그건 념려하지 않아도 될것이오이다. 응통행수가 이미전에 이 일을 예견하여 류황과 염초를 비롯한 불에 잘 당기는 물건을 많이 싣고왔다고 하더이다.》

유금필의 말을 들은 왕건은 차마 믿을수 없다는듯 그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일개 장사군인 응통이 이렇듯 걸음마다 자기를 도와나설줄을 생각이나 해보았으랴.

왕건은 드디여 유금필의 의견을 받아들여 화공을 써서 후백제함대를 공격할 결단을 내렸다.

능환은 지금 수중진 한복판에 서서 왕건이 이끄는 함대의 움직임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시하고있었다.

그는 지금 수군부도독의 자격으로 이 싸움에 참가하고있었다.

수군도독은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였다.

비록 능환이 견훤의 신임으로 아득히 출세는 하였어도 여전히 후백제 대신들속에선 축에 들지도 못하고 배척만 당해왔다.

그것은 능환이 비록 후백제출신이지만 한때 송악지방에 있었다는 리유에서였다. 능환이 나라의 재정을 틀어쥐지 못했으면 아무리 견훤의 신임을 받는 처지라고 해도 모함을 받아 묻혀버린지 오랬을것이였다.

능환은 이를 악물었다. 재력은 힘이다. 권력도 권세도 다 여기서 나오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군함대재건에 피땀을 바친 자신의 로고가 빛을 내는가는 바로 오늘의 싸움에 모두 달려있었다.

이 싸움은 또한 능환과 응통의 싸움이기도 했다.

능환은 이번에도 응통이 보급함선들을 이끌고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내가 전생에 응통과 무슨 악연이 있길래 이렇듯 걸음걸음 맞다들리는것일가. 능환이 피땀을 바쳐 함선들을 건조해놓으면 응통이 찾아와서 부셔버리군 하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능환은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응통을 타고눌러서라도 이겨야 하지 않는가.

바로 그 길만이 능환이 자기의 뜻대로 몸을 일으켜세울 기회라고 확신하였다. 능환과 응통의 싸움은 국내에만 국한되여있지 않았다.

능환이 중원땅에 그토록 간난신고끝에 조성해놓은 상업망이 지금 응통이때문에 갈기갈기 찢겨져나가고있었다.

등주의 고려관을 통한 응통의 상업령역은 지금 중원대륙 강남이남에 조성해놓은 능환의 백제관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있었던것이다.

응통과의 경쟁에 밀려 능환은 자기의 중요상업거점들을 하나하나 내놓고 뒤로 물러나는 형편이였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있다가는 나중에 오월국안의 백제관마저 철거당하고 쫓겨날수 있었다.

능환은 어떻게 하나 이 싸움에서 응통을 이겨 견훤의 신임을 되찾는 길만이 자기가 살 방도라고 생각했다.

견훤의 신임마저 잃으면 그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함성이 더욱 가까와졌다.

이제는 육안으로도 일자로 늘어서서 돌진해오는 태봉국 수군의 모습이 뚜렷이 잘 보였다.

《응통아, 이젠 너와의 싸움을 끝낼것이니 기다려라.》

옆구리에 차고있는 장검을 피가 내배이도록 꽉 틀어잡은 능환은 이렇게 소리치며 파도를 타고 돌진해오는 태봉국의 함선들을 노려보고있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그의 얼굴로 확 끼쳐드는것이였다.

순간 능환은 뇌리에 불쑥 떠오르는 생각에 와뜰 놀라 황급히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기치들이 모두 기슭을 향해 나붓기는 모습을 보고서야 능환은 바람이 수중진을 향해 몰아치고있음을 깨닫게 되였다.…

견훤의 수중진에서 함성이 터져올랐다.

후백제군은 력량상 우세로 하여 사기가 충천한것이였다.

후백제수군의 기세가 너무도 왕성하여 태봉국 함대에서는 부도독 종회이하 많은 무장들이 낯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왕건은 태연하게 그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독려하였다.

《걱정하지 말아. 적이 비록 대군일지라도 힘껏 싸우기만 하면 물리칠수 있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것은 군대의 의지가 통일되여있느냐 없느냐 하는데 있는것이지 그 수가 많고적은데 있는것이 아니다. 북을 울려라!》

왕건의 수군함대는 북을 울리며 후백제 수중진을 향해 기세좋게 육박하였다. 마침 북서풍이 크게 일어 파도가 자못 사나왔으며 함선들은 바람을 가득 안고 마치 나는듯이 짓쳐들어갔다.

견훤은 수중진 한복판에 세워진 대장기아래서 왕건의 함대가 일자로 벌려서서 육박해오는 모습을 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지었다.

《제 죽을 함정인줄도 모르고 들어왔구나. 여봐라, 북을 울려라. 한놈도 살려보내서는 안된다!》

견훤의 명령이 떨어지자 후백제수군도 기세좋게 북을 울리며 왕건의 함대를 향해 맞받아나갔다.

이때 능환이 불안한 기색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며 애원하듯 입을 열었다.

《대왕님, 징조가 좋지 않소이다. 적의 간계가 있을수 있으니 함선들을 뒤로 물려야 하오이다.》

《무슨 소리냐?》 견훤은 놀랐다.

《바람이 아군을 향해 부는데 혹 적이 화공이라도 쓰지 않을가 념려되오이다.》

능환이 이렇게 소리치자 견훤도 깨닫는바가 있어 부르짖었다.

《아차, 이번에도 왕건의 계책에 빠졌구나. 어서 전진을 멈추고 함선들이 뒤로 물러서도록 해라.》

하지만 때는 벌써 늦었다.

포소리가 한방 울리는것과 때를 같이하여 수십여척의 작은 배들이 쏜살같이 수중진을 향해 육박해오는것이였다.

《저 배들을 멈춰세워라.》

견훤이 사색이 되여 소리치자 수중진우에 있는 군사들이 저마끔 장창과 갈구리를 내대였지만 워낙 바람을 타고 내닫는 기세라 멈춰세울 도리가 없었다. 그 배들이 수중진에 부딪치는 순간 불화살이 비발치듯 날아들었다.

불화살들이 함선에 꽂히자 함선들우에 가득히 실은것이 모두 류황, 염초 등이라 한번 불꽃이 가닿자마자 큰 폭발을 일으키며 불기둥이 타래쳐올랐다.

수십척의 함선이 몽땅 불을 달고 견훤의 수중진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사면에서 불이 일어났다.

시뻘건 화염에 온 바다가 부글부글 끓어번지자 후백제군사들은 아우성을 치며 제마끔 물속으로 뛰여들었다.

왕건의 함선들이 기세좋게 함성을 지르며 진격해들어왔다.

견훤은 징을 울려 퇴각을 명령하였으나 워낙 함선들이 모두 육중하고 덩치가 커서 저희들끼리 들이받으며 갈팡질팡하였다.

이제는 거의 모든 배들에 불이 당겼다.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바다물우에 불에 타죽은 군사들의 시체가 한벌 덮이였다.

견훤은 망연자실하여 배전을 붙잡고 아비규환으로 변한 전장을 막연하게 바라보고만 서있었다.

온몸이 온통 불에 그슬린 능환이 달려왔다.

《대왕님, 어서 여기를 벗어나 옥체를 보전해야 하오이다.》

그는 다짜고짜로 견훤의 몸을 둘쳐업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능환은 견훤을 작은 배로 옮겨싣고 호위병들에게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 여기를 빠져나가도록 하였다.

그때 미처 작은 배로 옮겨타지 못한자들이 아우성을 치며 견훤이 탄 배에 매달렸는데 능환은 사정없이 장검을 휘둘러 그들을 모두 물속에 처박았다.

이때 높은 다락에 올라 불붙는 전장을 굽어보고있던 왕건은 누런 전포를 입은자가 작은 배로 옮겨타는것을 보고 그가 견훤이라고 단정하였다.

왕건은 곧 옆에 서있는 비장 김락에게 가리켜보였다.

《저자는 분명 백제왕 견훤일것이다. 어떤가, 한번 큰 공을 세워보지 않으려나?》

김락은 그 즉시에 몸을 날려 작은 배에 뛰여내렸다.

그가 한번 손으로 가리키니 세척의 순찰선이 김락이 탄 배를 따라서 물결우를 미끄러져나갔다.

견훤이 탄 배가 거의 기슭에 당도할무렵 김락은 활 한바탕거리까지 따라잡자 선수에 서서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견훤은 게 섰거라. 비장 김락이 너를 잡으러 왔다.》

견훤이 비명을 지르자 능환은 손에 여라문개의 패검을 쥐고 태봉국 군사들이 가까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힘껏 내뿌리기 시작했다.

그바람에 선수에 섰던 군사들이 줄줄이 칼에 맞아 쓰러졌고 김락은 날아오는 패검을 간신히 장검으로 막아내였다.

그사이에 견훤이 탄 배는 기슭에 도착하여 모두가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김락은 이를 부드득 갈며 수하군사들에게 노를 죽기내기로 젓도록 하였다.

김락의 배가 기슭에 거의 다가서자 능환은 호위병들의 등을 떠밀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대왕님을 모셔라. 어떻게 해서든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그는 절대로 견훤을 버리고 혼자 도망칠수 없었다.

자기가 의지하는 기둥인 견훤을 잃으면 어디에 발을 붙이겠는가.

어떤 일이 있어도 견훤을 지켜야 했다.

두 배가 부딪칠 정도로 다가서자 능환은 고물에서 잔뜩 노리고 서있다가 배전을 차며 몸을 날리는데 어느새 큰 몸집이 김락이 탄 배에 올라섰다.

능환은 배에 뛰여들자마자 눈결에 앞을 막아선 두명을 좌우로 베고 곧장 김락을 덮쳤다.

사나운 기세로 덤벼드는 능환의 기세에 눌리워 김락은 일단 뒤로 물러서며 방어에만 급급했다.

김락이 뒤걸음질치다가 돛줄에 걸려 넘어지는 찰나 능환은 한소리 크게 부르짖으며 검을 머리우에서 회전시켜 힘껏 내리쳤다.

순간 태봉군사 한명이 제 몸으로 김락을 덮는 바람에 능환은 김락 대신 그 군사를 찍고말았다.

그사이에 김락은 재빨리 몸을 굴려 위급한 순간을 모면하고 자세를 바로잡을수 있었다.

능환은 피발선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검을 머리우에 추켜든 자세를 취하고는 김락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사이 태봉군사들이 련이어 배전을 넘어와 그들을 겹겹이 둘러쌌다.

능환은 오직 손에 든 검에만 정신을 집중하였다.

《야-앗!》

능환이 기합소리를 지르며 먼저 김락을 공격했다.

김락이 피하지 않고 검을 맞받자 두개의 검이 쟁강 부딪쳤고 두사람은 공격하는 힘을 멈추지 못해 서로 가까와졌다.

김락이 팔굽으로 능환의 면상을 후려치는데 능환은 능환이대로 발로 상대의 무릎관절을 힘껏 내찼다.

두사람이 동시에 넘어졌다.

김락이 몸을 굴려 능환에게서 멀어지며 소리를 쳤다.

《덮쳐라!》

군사들이 창검을 내대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능환은 벌떡 일어나며 맨처음 달려드는 군사의 면상을 이마로 들이받고 몸을 날려 뒤에 선 군사의 턱을 발로 걷어찼다.

련이어 세명을 때려눕혔으나 더이상 대적할수 없다는것을 짐작한 능환은 급히 몸을 돌쳐 물속으로 뛰여들었다.

《잡아라, 물속에서 멀리 갈수가 없을것이다.》

김락은 이렇게 웨치며 장창을 손에 잡고 능환이 있을수 있는 곳이라고 짐작되는 곳을 연신 찍어댔다.

배전에 주런이 늘어선 군사들도 활을 내리쏘거나 창으로 어지러이 작살질하듯 내리찍었다.

김락은 분하여 주먹으로 배전을 힘껏 내리쳤다.

《분하구나, 다 잡은 고기를 놓치다니…》

김락은 분했지만 견훤의 종적을 놓쳤는지라 하는수없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 싸움이 바로 력사에 유명한 덕진포해전이였다.…

왕건은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탄 지휘선으로 여러 장수들이 달려와 저마끔 승첩을 올리였다.

승리도 이만저만 큰 승리가 아니였다.

백여척의 대함선들을 물속에 처박고 십여척을 로획하였으며 적의 머리를 벤것만 해도 오백여급에 달했다.

삼천명의 후백제군사들중 태반이 불에 타죽었거나 물에 빠져죽었으며 창칼에 찔리워죽었다.

왕건이 부하들에게서 한창 전승보고를 듣고있을 때 김락이 화염에 그슬린 상태로 지척거리며 들어왔다.

《제가 무능하여 견훤을 놓쳤소이다.》

《장수가 전장에서 싸우다 실수도 종종 있는 법이니 락심해할건 없다. 견훤의 운이 아직 진하지 않았구나.》

왕건이 이렇게 말하자 김락이 도리질하였다.

《아니오이다. 견훤을 거의 따라가 잡으려는데 그쪽에서 능환이라는자가 건너와 싸움을 거는통에 놓치고말았소이다.》

《능환이라?!…》이렇게 되뇌이던 왕건은 그제야 생각이 미쳤는지 깜짝 놀라 돌아섰다.

《능환이라면 등주 신라방의 총관으로 있은자가 아니냐?》

《그렇소이다. 》

유금필의 침울한 대답을 들은 왕건은 심중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능환이?!… 전장에서 한번 만나게 될 날이 있겠지.…》

자맥질을 잘하는 덕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능환은 물속에서 솟구쳐나와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면팔방 화염이 자욱하여 한치앞도 가려보기 힘들었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찌르고 열기에 얼굴이 고동색으로 타들었다.

가까스로 기슭까지 헤여나온 능환은 맥을 놓고 모래기슭에 넘어졌다.

아까 배에서 뛰여내릴 때 다리를 상했는지 피가 뻘겋게 배여나왔다.

능환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이렇게 어이없이 패할줄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였다. 그는 견훤의 행방부터 찾기로 했다.

능환은 기진맥진한 몸을 끌며 견훤의 행방을 찾아 사방 헤매이였다.

점차 앞으로 가면서 달아나는 패잔병의 수는 늘어났다.

능환은 맞다드는 사람을 붙잡고 무작정 견훤의 행방을 물었다.

다행히 한 군사가 숲을 향해 손으로 가리켜보이며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아까 호위병들이 저 숲으로 들어갔사온데 혹시 대왕님이 그속에 계실지도 모르오이다.》

능환은 그제야 긴숨을 토해내며 숲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가느라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그 목소리의 임자가 장막호위장수라는것을 알아본 능환은 반갑게 소리쳤다.

《날세, 수군부도독 능환일세.》

숲속 여기저기에서 호위병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반기였다.

《대왕께서 부도독의 생사를 걱정하고계시오이다.》

능환이 눈을 들어보니 자그마한 불무지앞에 마주앉아있는 견훤의 우람한 몸이 눈에 띄였다.

능환은 허겁지겁 달려가 부복하였다.

《대왕님, 모든것이 신의 불찰로 일어난 일이오이다. 왕건의 화공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신의 죄 백번 죽어 마땅하오이다.》

《일어서거라, 싸움에서 승패란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다. 어떻게 네탓으로만 돌리겠느냐? 너는 이번 싸움에서 내 생명을 구해준 일등공신이다.》

《대왕님께선 죽을번한 저의 목숨을 구해주지 않았소이까. 신은 그 빚을 갚았을뿐이오이다.》

견훤은 쓸쓸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때일을 아직 잊지 않고있었구나.》

《대왕님, 신이 패병을 수습하여 다시한번 결전을 벌리겠으니…》

《날 위로하느라 다신 그런 말을 꺼내지 말아라. 우린 패했다.》

견훤은 능환의 말을 사정없이 막아치웠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물러서지는 않겠다. 반드시 왕건을 죽여버리고야말것이다. 내게 큰 굴욕을 주고 씻을수 없는 수치를 안겨준 왕건을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이 원한을 갚겠다.》

견훤은 육중한 몸을 힘들게 일으켰다.

아직도 덕진포쪽에서는 화광이 충천하는지 서쪽 밤하늘이 검붉게 타고있었다.

견훤은 이를 부드득 갈며 갈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왕건이 이놈, 다음은 네 차례다. 내 잊지 않으마.》

견훤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들을 거느린채 완산주로 떠나갔다.…

견훤의 제2차 라주원정은 또다시 참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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