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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 회

제 3 장. 겨레의 꿈

6


응통과 하의는 내실을 나와 사랑채로 건너가 서로 마주앉았다.

하의는 응통이 자기 누님의 생명의 은인이라는것을 안 순간부터 그에 대한 공경이 배나 더해졌다.

《이런 일도 있소이까? 우리 누님이 항상 향불을 피워놓고 해동의 이름모를 사람을 잊지 못해하기에 그가 누굴가, 내가 살아 생전에 만나볼수 있을가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눈앞에 불쑥 나타날줄이야…》

《저도 정말 기쁘오이다. 그때 제가 직접 데리고 변주에 가지 못한것을 후회했었는데… 이렇게 혈육이 서로 만나 의지하여 사는 모습을 보니 정말 꿈인듯싶소이다.》

이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포도장이 병부로 파송할 공문을 들고와서 수결해주기를 청하는것이였다.

병부로 파송할 공문은 바로 변주에서 도망친 후백제상인들의 체포를 의뢰하는 공문이였다.

하의가 공문에 수결하려고 붓을 드는데 별안간 응통이 무릎을 꿇고앉는것이였다.

《절 생각하신다면 그 공문을 거두어주시오이다.》

응통이 이렇게 간청하자 하의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손에 든 붓을 떨어뜨렸다. 하의는 떨군 붓을 집어들더니 대뜸 고개를 흔들었다.

《은인의 뜻은 알겠으나 이것만은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오이다. 어쨌든 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해친자들이 아니오이까.》

《그렇다고 군사를 동원시켜 그들의 뒤를 쫓으면 또다시 피가 흐를게 아니오이까? 쫓아버리면 될것을 괜히 일을 크게 벌려놓았다가 랑패를 볼가 두렵소이다.》

마침내 하의는 응통의 제의를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우리 누님이 반할만 하오이다. 지경이 그처럼 작은 나라에 형님과 같은 대범한 큰 상인이 있는줄 몰랐소이다.》

이렇게 되여 응통은 중병에 걸린 성문을 또다시 살려내고 이것이 인연이 되여 변주부의 판윤인 하의와 의형제의 정을 맺었다.

이 사실이 변주부 관원들의 입을 통해 조정에 전해져 결국 온 변주성이 해동의 마진국에서 온 의로운 상인에 대한 이야기로 법석 끓었다.

응통은 변주부 판윤 하의의 도움으로 변주의 관전상인들에게 이번에 가져온 막대한 량의 잡화와 약재를 넘겼을뿐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이면서도 안정적인 판로를 열수 있게 되였다.

특히 문방구가 잘 팔렸는데 변주성의 귀족들은 질좋은 송악의 문방구들을 너도나도 사가는 형편이였다.

응통은 또한 왕창근과의 약조를 지켜 그가 마진의 질좋은 비단들을 독점하여 전매할수 있게 하여주었다.

이렇듯 응통은 처음의 뜻대로 대륙에로 진출할수 있는 교역로를 개척하게 되였다.

그는 하의가 힘써준 덕분으로 후량왕 주전충이 궁예왕에게 보내는 국서까지 가지고 드디여 변주를 떠나 귀향의 길에 올랐다.

변주판윤 하의를 비롯한 여러 관원들과 왕창근을 위시한 상인들, 응통이 준 인삼을 비롯한 귀한 약재를 쓰고 병석에서 일어난 많은 사람들이 성밖까지 그를 바래우겠다고 나왔다.

모두가 응통과 이렇게 헤여지는것을 못내 아쉬워하는것이였다.

그중에서 하의 남매와의 리별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이번에도 응통의 도움으로 살아난 성문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슬퍼하였다. 하의는 누님을 대신하여 거듭 사의를 표하면서 자기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석별의 정을 이기지 못하여 계속 따라서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나서 응통은 먼저 간 상단의 뒤를 쫓아 말을 달렸다.

변주에서 크게 성공하고 돌아가는 응통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올랐다.

다만 한가지 걸리는것은 그래도 마음속 한귀퉁이에 한쪼각 량심이나마 가지고있으리라 믿었던 능환이 완전히 타락한것이였다.

응통은 장사란 남을 속여 돈을 버는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것이라고 한 아버지 검용의 말을 항상 정신적지탱점으로 삼아왔기에 이렇듯 장사에서 늘 성공할수 있은것이라고 굳게 확신하고있었다.

반면에 리익만 탐내면서 장사를 하는자는 일시적으로는 돈을 벌수 있어도 그런것이 오래가지는 못할것이였다.

남을 속이는자는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고 나중에는 자기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불행한 인간으로 굴러떨어지고마는 법이다.

사람의 마음을 속이는자가 성공하는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자가 성공하기마련이다.

이러한 세상리치를 일찌기 페부로 터득한 응통이였기에 오늘과 같은 성공의 희열을 맛볼수 있은것이였다.

등주로 돌아온 응통을 미령이 뜨겁게 맞아주었다.

그는 응통이 변주로 가있는 새에 인수한 발해관을 번뜻하게 꾸려놓고 흩어졌던 동족의 상인들을 불러들여 상업거점으로서의 체모를 갖추어놓았다.

응통은 등주에 도착하자마자 변주판윤 하의가 해당 관청을 통해 발급한 상업운영을 허가한다는 문서를 등주부에 제출하였다.

이것으로 등주에 상업거점을 마련하고 그를 통해 중원으로 교역로를 확장하려던 응통의 구상이 마침내 실현되게 되였다.

응통은 옛 고구려의 명칭을 단 고려관의 총관으로 을추를 앉히고 미령과 함께 귀국의 길에 올랐다.

이번 길에 응통은 막대한 상업자금을 마련하고 또 앞으로 계속 대외무역을 확대할수 있는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응통이 중원땅에서 성공하고 무사히 귀국하자 온 마진땅이 그에 대한 소문으로 술렁거렸다.

응통은 이번 중원행을 통해 명실공히 나라의 대상인으로 일어설수 있었으며 그에 대한 마진국 백성들의 치하는 대단했다.

그도 그럴것이 나라의 상권을 장악한 두근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이 자기 나라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여 배를 불리우는 반면에 응통은 대외에로 드넓은 시장을 개척하여 전란으로 시달리는 백성들이 살아갈 길을 개척하였기때문이였다. 시전상인들의 횡포에 기를 펴지 못하던 령세상인들과 이중삼중의 착취를 받아 허리를 펼수 없었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응통이 이번에 열어놓은 후량과의 교역로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였다.

응통은 자기의 상업망을 전국에로 확대할 구상이였다.

나라의 상권이 몇몇 시전상인들에게 집중된것을 막고 상업의 자유로운 류통을 실현하려는것이였다.

앞으로 중원대륙 각지로 교역로를 확대하려고 해도 시전상인들의 손에 시장이 통제되는 현상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응통은 그것이 두근을 비롯한 낡은 시전상인세력과 사생결단으로 싸워야 하는것임을 모르지 않았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나섰다.

응통은 왕건의 도움을 받아 이 구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왕건은 기회를 봐서 궁예에게 지금 나라의 상권이 지나치게 시전상인들에게 집중된 결과 나타나는 악페에 대해 그대로 고하였다.

지금 전란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나날이 령락되여 수요가 아예 바닥으로 떨어지고있었다.

이것을 그대로 방임해둔다면 나라의 경제는 엉망으로 되고 국력의 쇠락을 가져오는것은 불가피한 일이였다.

그러나 시전상인들은 상업의 자유로운 류통을 통해 수요를 높이고 생산을 증대시키는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수요까지 조성해가며 횡포하게 날뛰고있었다.

원래 시전상인이란 봉건국가가 국고를 늘일 목적으로 특정한 물건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기 위해 도시에 시전을 내오면서 생겨난 상인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시전상인들은 국가로부터 점포를 배당받아 물장고나 해당 관청을 통해 넘겨받은 상품들을 전매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봉건국가로부터 전매특권을 보장받는것으로 하여 그들의 세력은 나날이 커지고 거액의 상업자금이 시전상인들에게 지나치게 집중되기마련이였다.

그러면 시전상인들은 판매뿐아니라 생산과 류통에도 손을 뻗치게 되고 나중에는 국가기구마저 좌지우지하려고 하는것이다.

실지로 두근의 횡포가 이것을 증명해주고있었다.

두근과 같은 시전상인은 해당 관청을 통해 일정한 물건의 전매특권을 보장받는 그 범위를 벗어나 전국각지의 시장을 손아귀에 넣고 물가를 조작하고 인위적으로 수요를 조성하는 등 나라의 경제를 통채로 주물러대고있었다. 심지어 국고에까지 손을 뻗쳐 조세를 가지고 롱간질을 부려 많은 치부를 하였다.

이러한것을 그냥 묵과하면 류통이 혼란되고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여오르고 수요가 떨어져 생산의 감소와 국력의 쇠락을 가져오게 되는것이다.

왕건은 바로 이러한 편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시전상인들의 횡포를 막아 하루빨리 국력을 일으켜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몇몇 시전상인들, 구체적으로 국고에까지 손을 뻗치며 횡포하게 날뛰는 두근의 치부욕에 대해서는 궁예도 이미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시전상인들이 해마다 해당 관청을 통해 섬겨바치는 막대한 뢰물자금때문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척 눈감아주었던것이다.

그러나 이젠 더이상 두근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을 싸고돌 때가 아님을 궁예는 잘 알고있었다.

이전엔 지방분권제형식의 나라를 유지하려면 두근이와 같은 거액의 자금을 쥐고있는 시전상인들에게 의거할수밖에 없었으나 국가의 체모를 갖춘 오늘날까지 그대로 둘수는 없었다.

더우기 궁예가 우려하는것은 이젠 시전상인들의 세력이 왕궁의 리익, 구체적으로는 궁예 자기의 리익을 침해할 정도로 커졌다는데 있었다.

이것을 그냥 놓아두면 언제 왕궁을 해칠 칼이 될지 모른다고 은근히 불안해하는 궁예의 속내를 잘 알고있는 왕건은 정열적으로 궁예를 설복했다.

계속 시전상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게 놓아두면 전국의 장시를 통해 국고로 들어오는 거액의 세금을 잃기마련이다, 이것은 시전상인들이 섬겨바치는 몇푼의 돈에 비하지 못할 거액의 자금이다, 태평시기도 아닌 전시에 그것도 후백제처럼 강한 나라와 신라를 상대하여야 할 지금 국고가 통채로 시전상인들에게 장악되고 나라의 경제가 몇몇 상인들에 의해 좌우되는 악페를 막지 못하다가는 나라가 멸망할수 있다고 하였다.

왕건은 이어 응통이 내놓은 구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전국각지에 상업거점을 꾸리고 운송을 전문하는 상단을 두어 활발한 류통을 이루자는것이다.

상품화페관계가 존재하고 각지에 시장이 있는것만큼 자연발생적인 류통은 이루어지기마련이다.

그러나 응통의 구상은 의식적으로 수요와 공급과의 밀접한 련계를 취해 령락된 생산력을 높이자는것이다.

국내의 생산력이 장성하여야 대외시장의 폭을 넓힐수 있지 않겠는가?!…

궁예는 왕건의 꾸준한 설복으로 마침내 응통을 비룡성(고려시기의 태복시의 전신)의 벼슬자리에 올려앉히고 전국각지에로 운송업을 확대할 권한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이렇게 응통은 자기가 꿈꾸어오던 구상을 향해 또 한발자국 전진할수 있었다. 응통의 머리속에는 이미전에 상상으로 그려놓은 상업망이 있었다.

북으로는 동족의 나라 발해의 상경룡천부로부터 남으로는 완도에 이르기까지, 동으로는 일본과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광활한 중원을 걸쳐 수만리 서역에 이르는 하나하나의 길이 선명하게 그려져있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응통의 구상에 불과했으나 그후 대상업제국으로 력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긴 고려 5백년력사를 통해 그의 구상이 옳다는것이 실증되였다.

하지만 응통이 아직 철원성에 상업거점을 내오기도 전에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궁예가 갑자기 천하에 대고 국호를 바꾸겠다고 선포한 사건이였다.

이것으로 마진국은 태봉국이라 국호를 달리하게 되였다.

궁예는 911년을 《수덕만세》원년으로 정하였다.

국호가 바뀌고 년호를 새로 정했어도 백성들은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궁예의 폭압무도한 정치는 극도에 달하였다.

궁예라는 한 인간의 손에 수백만 백성이 고통과 괴로움으로 몸부림치지 않을수 없었다.

후백제와의 전쟁에 끌려나가는것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라 할수 있었다.

궁예의 변덕속에 련발하는 칙령으로 백성들은 온갖 부역에 끌려나가 죽을고를 치르었다.

련이어 흉년이 덮쳐들고 기근으로 무리죽음이 뒤를 이었다.

날이 갈수록 류랑민들이 길가에 차고넘쳤으며 버려진 토지는 차츰 황페화되였다.

일반백성들은 말고라도 나라를 세우는데 공적이 있다는 공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말단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궁예의 폭정의 희생물이 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이르렀다.

궁예는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면 《반역》이라는 죄명을 씌워 하루에도 수백명씩 죽이는 판이였다.

대개 《반역죄》를 쓰고 죽은 사람들은 조정의 원훈대신이거나 종실 또는 유력한 인물들이였으므로 그 한명을 제거하면 따라서 죽는 사람이 무려 수백명을 헤아렸다.

궁예는 의형대를 형부로 개편한 후 그 기구를 대폭 늘였으며 따로 자기에게 직속된 폭압기구까지 차려놓았다.

그것도 모자라는지 불교까지 끌어들여 백성들의 반항의식을 억누르는데 리용하였다.

말그대로 궁예는 교권과 정권이 하나로 결합된 자기식의 폭정을 실시하고있었던것이다.

궁예의 이러한 의도는 십여년을 두고 쌓아진것이지 결코 하루이틀새 이루어진것이 아니였다.

건국초기부터 자기 주위에 명망있는 재사들과 승려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리용하여 발판을 꾸준히 닦아나간 궁예는 이렇듯 자신의 힘이 커지게 되자 제멋대로 횡포한 정치를 펴기 시작한것이다.

나라안에서 생불이라고 떠들던 석총이 같은 경우는 아주 난처한 처지에 빠져있었다.

가령 불교경전에 대한 강론을 할 때면 부처의 말을 인용한 후에는 반드시 궁예의 《가르침》과 결부시켜야 했던것이다.

유학자들이나 도사들의 사정도 매한가지였다.

《태봉》이라 국호를 바꾼지 이태도 못되여 궁예가 이번에는 부처로 둔갑해나섰다. 허나 이것만은 그 누구도 받아들일수 없었다.

세상에 왕과 부처는 명백히 구분되여있지 않는가.

하지만 궁예는 태연하게 강압적으로 내려먹이기 시작했다.

그때에야 비로소 석총을 비롯한 《명망》높은 인물들은 궁예의 진짜의도를 깨닫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원래 궁예가 어려서 불가에 들어갔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서는 자그마한 불심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가 독실하게 불교를 믿는것처럼 하였던것은 많은 사람들을 죽인 죄의식과 불안에서 벗어나보려는 속심에서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예 부처로 둔갑하다못해 자기자신을 미륵불이라고까지 자칭하였다.

미륵은 래세에 나타나 중생을 고초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부처인데 현세는 석가의 세상이지만 래세를 다스릴자는 미륵불이며 그 미륵불이 궁예라는 화신으로 현세에 왔으니 복된 세상이 찾아올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돌린 궁예는 심지어 20여권의 방대한 《경전》이라는것까지 만들어내였다.

그는 자기의 두 아들을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 부르게 하고 어디 행차할 때면 늘 흰 말을 타고다녔는데 비단으로 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고 소년, 소녀들로 하여금 일산과 향과 꽃을 받쳐들고 앞서게 하였다.

행차의 뒤에서는 비구니 이백여명을 시켜 자작 지은 불교노래를 부르면서 따르게 하는 해괴망측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궁예의 미침증은 이렇듯 점점 날이 바뀔수록 도를 넘어갔다.

그래도 한때는 큰 뜻과 포부를 가졌었다던 궁예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극도로 타락하고 죄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여버린 피해의식과 죄의식으로 분별을 잃은 존재로 되고말았다.

태여나자바람으로 제 친아비에게서까지 버림을 받은 충격과 어린시절에 겪은 생활고초, 남다른 기량과 재주가 있었지만 애꾸눈이라고 뭇사람들에게서 받은 수모로 하여 궁예라는 인간에게서 인간다운 면모는 깡그리 사라져버렸던것이다.

궁예는 신라왕실에 대한 복수, 구체적으로는 인간 그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 평생을 살아왔다고 할수 있었다.

신라의 배신행위로 멸망한 고구려를 재건하고 발해를 통합함으로써 민족의 꿈을 이루겠다고 표명한것은 한갖 위선에 불과했다.

사실상 궁예는 만사람의 우에 올라서겠다는 오직 하나의 야망을 안고서 지금까지 달려왔던것이다.

그끝이 바로 지금의 《태봉》이였다.

여기서 궁예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제나름의 정사를 시작했다.

흔히 다른 사람뿐아니라 자기자신도 믿지 않는자들이 그러하였던것처럼 인간 그자체를 증오하는 궁예의 감정이 뒤섞인 그의 《정사》는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후세의 력사가들은 궁예가 기훤과 량길에게로 자리를 옮겨가며 10여년간 싸워 제 야망을 실현하였지만 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인정해왔다.

군사가로서의 재능과 뛰여난 무예를 소유한 궁예를 일개 미치광이로만 간단히 치부할수 있겠는가.

성격으로만 단정할수 없고 단순히 변질되였다거나 미쳤다는 등의 평가로 규정지을수 없는 인간이 바로 궁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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