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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 회

제 3 장. 겨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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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왕건의 함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금성을 점령하려고 련일 수륙군을 동원하여 맹공격을 들이대였다.

모자라는 식량과 무기를 고이도에서 보충하고 자기가 직접 함선들을 거느리고 금성포구를 공격했다.

진도를 빼앗겼으니 견훤의 후백제군에 전쟁물자를 대줄데라고는 고이도밖에 없었다.

견훤이 피땀흘려 마련해놓은 수군기지인 진도를 또다시 빼앗겼다는것은 이가 갈리고 통분할 일이 아닐수 없었다.

견훤은 금성을 점령하는것으로써 이 패배를 만회해보려고 부하들을 미친듯이 공격에로 때려몰았다.

견훤의 의도는 왕건의 함대가 포구에 당도하기 전에 여기를 점령하자는것이였다.

그가 제일 우려하는것이 아사직전에 이른 금성군에 보급물자들이 들어가는것이였다.

진도와 금성은 손닿을 정도로 가까왔다.

이제 왕건이 포구로 공격해온다면 맞서 싸워야 할 대책이 필요하였다.

금성군 공격전에 한창 몰두하고있을 때 왕건이 뒤통수를 친다면 패전할수도 있는것이였다.

하여 견훤은 금성군을 공격하면서도 상당한 병력을 따로 떼여 왕건의 배후공격에 대비하도록 할수밖에 없었던것이다.

륙지에서는 박영규와 민각이 거느리는 륙군이 각 방면에서 읍성을 향해 진군하였고 견훤은 제가 직접 일일이 지휘하며 바다를 봉쇄하였다.

견훤은 아예 장막을 함선우에 정하고 일체 침식과 전투지휘를 배우에서 하였다.

견훤이 애쓴 보람이 있어 연 시오리에 걸친 수군진이 일어서고 바다쪽에서는 그 누구도 포구에 들어설수 없게 강력한 요새가 구축되였다.

하루속히 금성군을 타고앉은 다음 전력을 기울여 왕건의 함대를 괴멸시켜 왕건을 사로잡고 그길로 수륙량면에서 마진국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는 바로 이것이 견훤이 내세우고있는 전략이였다.

이 라주앞바다는 왕건을 기다리는 옹근 하나의 큰 그물로 될것이다.

여기에 그물을 쳐놓고 여유작작하게 기다리다가 왕건이라는 큰고기가 들면 그물을 올리기만 하면 된다.

금성포구는 십여리에 걸쳐 모래기슭이 아득하게 펼쳐져있어 배를 부리기에 알맞춤하다.

반면에 금성포구로 들어오는 길은 물목이 좁고 또 암초가 많아 천연의 요새로 되고있어 설사 왕건이 배길을 알아 들어온다고 해도 강력한 후백제의 함대가 좌우에서 협공하면 사로잡는것쯤은 어렵지 않을것이다.

견훤은 이러한 타산을 가지고 십여일만에 스물네개의 큰 수문을 가진 수중진을 세워놓았다.

큰 배들을 주런이 늘어세워 마치 성곽처럼 꾸며놓고 작은 배들이 수문으로 들고나갔다.

밤이면 연 십리어간에 홰불이 불뱀처럼 뻗어있어 대낮처럼 밝은데다가 그 함성 또한 천지를 뒤집는듯 맹렬하게 울리였다.

견훤은 높은 루선우에 올라 웅장한 수군진을 흐뭇하게 둘러보았다.

완산성으로 입성할 때처럼 희열이 가슴을 끓어번지게 하였다.

견훤이 웅장한 수군진을 점도록 내려다보고있는데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호위장에게 그 누구도 올려보내지 말라고 하였는데 누가 감히 거역하였는가.

견훤은 못마땅한듯 눈살을 찌프리고 뒤로 돌아섰다.

꼿꼿해있던 견훤의 두눈이 삽시에 휘둥그래졌다.

뜻밖에도 사위인 박영규가 눈에 띄였던것이다.

박영규는 견훤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무장으로서 싸움에 능하고 꾀가 많았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높이 등용되여 무진주(광주)도독의 중임을 맡고있는 그였다.

지금 한창 금성군에 대한 포위전을 벌리고있어야 할 박영규가 이렇듯 아무 기별도 없이 불쑥 나타났으니 견훤이 놀랄만도 하였다.

《전장에서 무슨 급변이 일어난게 아니냐?》

견훤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재빨리 물어보았다.

《아니오이다.》

견훤은 우선 한숨을 돌릴수가 있었다.

《대왕님, 듣자니 대왕께서 고이도를 비워두고 수군을 여기에 돌리고있다기에 신이 밤도와 달려온 길이오이다.》

박영규가 우려하는바를 터놓자 견훤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손을 홱 저었다.

《걱정할것 없다. 아무렴 왕건이 여기를 치려고 하지 먼 고이도로 가겠느냐? 거긴 이미 금달이와 능환을 보냈으니 설사 왕건이 달려든대도 지켜낼것이다.》

《대왕님, 왕건이 진도를 친 목적이 무엇이오이까. 그는 분명 고이도를 쳐서 아군의 보급로를 끊자고 할것이오이다.》

박영규는 제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는 견훤의 태도가 안타까와 어성을 높이였다.

견훤은 하마트면 손에 들었던 지휘봉을 떨굴번 하였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왕건이에게서 제일 급한것이 아사직전에 이른 금성군에 대한 물자보급이다.》

박영규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대왕님의 짐작이 옳소이다. 하지만 왕건의 용병술은 전혀 예측할수 없는것이기에 고이도를 놓쳐서는 절대로 안되오이다.》

《설마 왕건이가 자칫하면 함정으로 될 고이도로 갔을리야… 그자의 목적은 금성군의 포위를 풀고 제편을 지원하는것이다. 무엇하러 고이도로 갔다고 단정하는것이냐?》

견훤이 여전히 고집하자 박영규는 쓰겁게 웃었다.

《바로 그것이오이다. 아군의 주력이 여기 금성군에 집중된것을 노리고 약한 고리를 치려는것이오이다. 고이도를 잃으면 우리 함대는 어차피 보급이 끊어지는것만큼 더이상 싸울수 없을게 아니오이까.

진도를 빼앗긴 지금에 와서 고이도까지 적의 손에 들어가면 아군은 곧 괴멸될것이온즉 왕건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오이다.》

그제야 견훤은 무엇인가 깨닫는것이 있는지 주먹으로 앞에 놓인 서탁을 내리쳤다.

《내가 미처 왕건의 술책을 깨닫지 못했구나.》

한참동안이나 우리안에 갇힌 범처럼 안절부절하던 견훤이 박영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어서 방도를 내놓거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전함대를 몽땅 거느리고 고이도로 진출해야 하오이다.》

《무슨 황당한 소리냐? 그러다 만약 왕건의 함대가 고이도가 아니라 여기 포구를 목적했다면 어찌 되겠느냐? 고이도는 금달이와 능환이가 지켜낼게다.》

《대왕님, 능환이는 장사군에 불과한자오이다. 그런자가 어찌 중임을 맡을수 있겠소이까? 금달이도 갓 수군도독으로 임명되여 수전에 서툰자이니 어서 고이도를 지원해야 할줄 아오이다.》

박영규가 이렇게 간청하였으나 견훤은 막무가내로 제 고집만 주장했다.

견훤은 곧 호위장을 불렀다.

《너는 이제 당장 전함 이십척을 거느리고 고이도로 가거라. 금달이와 능환이에게 혹시 왕건의 함대가 쳐들어올수 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거길 지켜내야 한다고 내 령을 전하거라.》

견훤은 호위장에게 령을 내리고는 곧 박영규에게 돌아섰다.

《열흘이다, 열흘동안에 금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고이도를 지원할것이다.》

염기가 서린 찬바람이 윙윙 울부짖으며 바다우를 휩쓸고있었다.

검은 띠를 늘여놓은것처럼 멀리에서 어렴풋이 륙지가 바라보였다.

흔히 바다에서 시달린 사람들은 륙지를 구원의 기슭이라 하지만 그와는 정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백여척의 함선에 올라 륙지를 향해 노를 저어가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심정이였다.

누구나 죽음을 맞받아나가라면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한다.

삶에 대한 기대, 믿음, 살려는 사람의 본능이 그물처럼 수천명의 인간을 결박하고있는것이다.

왕건은 맨앞의 지휘선에 높이 올라 차츰 가까이 다가오는 고이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있었다.

그는 지금 운명을 건 큰 모험을 하고있었다.

생사기로에 놓인 라주로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고이도쪽으로 기수를 돌렸던것이다.

왕건은 지금 복잡한 심리에 시달리고있었다.

과연 내 계책이 옳은것일가.

고이도를 점령하기 전에 견훤의 손에 먼저 라주가 떨어진다면?…

왕건은 지금 견훤과 경마를 하고있다고 생각했다.

견훤이 먼저 라주성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타서 공격해올것인가 아니면 왕건이 고이도를 타고앉은 다음 견훤의 뒤통수를 때리는가 하는 승부였다.

이번 싸움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른것이였다.

자칫하여 패전한다면 수천명의 목숨은 물론이요 중요하게는 라주를 빼앗기는것이였다.

물론 견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왕건은 이번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그가 이런 모험에 나선것은 잘 타산된 전략에 의한것이였다.

왕건의 전략에서 중심은 수군함대도, 관나의 보급함대도 아닌 응통의 운송상단이였다.

왕건은 라주지원에 나서기에 앞서 궁예에게 청을 넣어 곡도에 귀양가있는 응통을 은밀히 송악으로 불렀다.

이번 라주지원은 국가의 중대사인 동시에 왕건의 운명과도 관련된 일이므로 응통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때 응통은 왕건이도 깜짝 놀랄 한가지 계책을 내놓았던것이다.

그가 내놓은 계책은 라주의 지원을 해상이 아니라 륙로로 하겠다는것이였다.

아무 말도 못하고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는 왕건에게 응통은 자세히 설명하였다.

십여년전에 있은 괴양읍성 공격때처럼 옛날 삼국시기 상인들이 오고가던 길로 보급물자들을 운반하면 머나먼 라주라도 얼마든지 갈수 있다는것이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머나먼 라주까지 방대한 량의 물자들을 운반한다는것이 선뜻 믿어지지 않아 왕건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개 전역을 지원하는 일인것만큼 말파리만 해도 근 백대에 수십대의 차량들과 수백명의 인부들이 움직이여야 했던것이다.

응통은 품속에서 낡은 가죽지도 한장을 꺼내여 왕건에게 펼쳐보였다.

고구려시기에 그려진 지도로서 백제와의 통상로와 신라에로의 길이 세밀히 표시되여있는 지도였다.

응통은 지도를 일일이 손으로 짚어가며 자세히 설명하였다.

흔히 사람들은 륙로로 라주까지 내려간다면 후백제지경을 거쳐 간다고만 생각하기마련인데 바로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를 역리용하여 신라를 거쳐 라주까지 내려갈줄 견훤은 꿈에도 생각을 못할것이라고 하였다.

비록 억울하게 귀양을 가있는 처지지만 언제든지 라주를 지원할것을 내다보고 그 준비를 착실하게 갖추어온 응통이였다.

이미전부터 기맥이 통하던 신라의 상인들과 련계를 취했을뿐아니라 하나하나의 로정을 세심히 따져보며 세운 계획이라는 응통의 말을 들은 왕건은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은 끊어져 사람들의 기억에 없는 길이지만 지도에 표기되여있는 길을 찾아간다면 능히 라주에 제 날자에 도착할수 있다고 장담하는 응통의 말에 마침내 왕건은 그 계책을 받아들일 용단을 내렸다.

자칫하면 파멸할수 있는 극히 위험한 일이였으나 응통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는 왕건은 이런 파격적인 결심을 내리게 된것이였다.

이번 진도싸움과 고이도공격전은 다 이러한 계책의 한 고리로서 견훤의 주의를 해상으로 돌리고 그 기회에 라주를 지원하기로 한것이였다.

왕건은 고이도격전을 앞두고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과연 응통이 해낼수 있을가?!…

이 일은 극히 중대한 일이므로 왕건과 응통을 제외하고 극히 몇사람만 알고있는 계책이였다.

심지어 왕건은 수군부도독으로 따라온 관나에게도 이 사실을 숨기고있었다.

응통에게는 만약을 생각하여 유능한 무사인 유금필을 붙여주어 도와주도록 하였다.

이제 사흘 남았다.

응통이 이 사흘동안에 감쪽같이 라주의 포위를 뚫고 읍성의 만세장군을 지원한다면 마진국은 이번 전역에서 또다시 대승을 거두고 견훤의 야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수 있었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하장수들이 모여왔다.

부도독 관나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듯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한찬은 공연한 싸움에 부하들을 희생시키고있소이다. 대왕이 우리를 떠나보낼 때 라주를 지원하라 하셨지 진도와 고이도를 타고앉으라는 령을 내리지는 않았소이다.》

부장 종회와 김언이도 볼이 부어 투덜거렸다.

《괜히 여기저기 헤매이며 쓸데없이 시간만 허비하고있소이다. 벌써 수백명의 군사를 잃었는데 고이도에서 또 얼마나 많은 병력을 잃을지 어찌 알겠소이까. 지금 라주에서는 만세장군이 아군의 지원을 애타게 기다리겠는데 우린 이러고만 있으니…》

왕건은 그들의 불평을 사정없이 막아치웠다.

《그대들은 병법을 모르는가. 우리가 바다를 막고있는 견훤이를 정면으로 상대한다면 스스로 화를 청한다는것을 그렇게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것은 오히려 견훤에게 리로운 일로 되는것이다.

병법에 이르기를 항상 적의 약한 고리, 적이 방심하고있는 곳을 치라고 하였거늘 아무리 강한 적이라고 해도 약한 고리만 끊어놓으면 쉽게 이길수가 있다. 그 약한 고리가 바로 진도와 고이도이다.

견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진도와 고이도를 빼앗기면 어디서 지원을 받고 힘을 얻을것이냐. 고립된 처지에 빠진 적들은 우리가 크게 힘을 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것이다.》

《고이도가 그렇게 중요한 곳이면 견훤이 왜 미리 방비하지 않겠소? 만약 견훤이 함대를 이끌고 여기로 들이닥치면 이곳은 우리를 잡을 함정으로 될것이요. 설사 우리가 고이도를 점령했다 하여도 그사이에 라주가 함락되면 대왕께 뭐라고 아뢰겠소이까?》

관나가 석연치 않은듯 이렇게 물었다.

그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라주로 들어가 지원함으로써 공을 세우려는 생각에 몸살을 앓고있었다.

그런데 왕건을 따라 진도요, 고이도요 하면서 여기저기 떠도는것때문에 미쳐죽을 지경이였다.

관나는 왕건이 또 다른 보급로를 리용하고있는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있었다.

《내 확언하건대 견훤은 여기에 오지 않을것이요. 그는 남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병적으로 고집이 세기때문에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것이요. 라주포구로 우리가 들어올줄 알고 수중진을 크게 펼쳐놓았는데 쉽사리 그것을 버릴리가 있겠소? 그러나 조만간에 그와 대결할 시각이 올것이니 그때를 타서 힘껏 싸워 견훤을 잡아야 하오.…》

왕건은 잠시 말을 끊고 라주쪽을 노려보았다.

《사흘이다. 만세장군이 이제 사흘만 더 견디여주면 나는 반드시 견훤을 물리칠것이다. 모든것은 라주에 달려있다.》

드디여 왕건의 함대가 출전북을 울리며 고이도를 향해 짓쳐나갔다.

왕건의 함대가 쳐들어올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금달과 능환이는 갑자기 마진국의 수군함대가 맹렬한 기세로 덮쳐들자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도 그럴것이 금달과 능환의 수하에는 천여명도 못되는 군사들이 있었는데 마진국수군무력은 삼천명이나 되였던것이다.

금달이 아무리 목이 쉬도록 부르짖어도 군사들은 상대방의 기세에 겁을 먹고 뒤걸음쳤다.

후백제수군은 방어진도 미처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좌우로 공격을 받았다.

금달은 하는수없이 능환의 의견대로 배를 버리고 륙지에 오를것을 결심했다.

어차피 렬세한 무력으로 싸움을 치르어봤댔자 패전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하여 그는 고이도에서 항전하며 견훤이 구원하러 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하였다.

금달이 징을 울리자 후백제군사들은 저마끔 배에서 내려 고이도로 달려들어갔다.

왕건은 후백제군이 숨쉴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도록 하였다.

첫 해전에서 이긴 기회에 단숨에 고이도를 함락시키려고 하였다.

마진군사들은 앞을 다투어 상륙하여 도망치는 적의 뒤를 맹렬히 쫓았다.

고이도의 성은 세면이 절벽으로 둘러막혔고 한쪽만 바다가를 면한 평지에 올려쌓은 천험의 요새였다.

가까스로 성안으로 들어간 금달은 곧 성문을 닫고 성우에서 바위돌을 마구 내던져 마진군사들을 멈춰세울수 있었다.

왕건은 즉시에 성을 사면으로 포위하였다.

싸움은 점점 더 치렬하게 번져갔다.…

송악에서 륙로로 출발하여 신라의 수백리 멀고도 위험한 길을 간고한 행군으로 돌파한 응통의 운송상단은 마침내 라주가 멀리서 바라보이는 고개길우에 나설수 있었다.

수백대를 헤아리는 차량과 백여대의 마차들, 수백명의 인부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송악에서 라주까지 천여리 먼길을 온다는것은 정말 상상밖의 일이였다.

신라 역시 마진국과 적대국이나 다름없기에 그곳을 통과하는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였다.

하지만 응통은 기맥이 통하는 신라상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신라지경을 통과할수 있었다.

그런데 라주로 들어가는 중요길목인 한댓재에서 응통은 상단을 멈추어세울수밖에 없었다.

예상은 하였지만 후백제군이 읍성을 겹겹이 에워싸고있어 그곳으로 들어갈 방도가 없었기때문이였다.

소문그대로 광주도독 박영규는 유능한 무장이였다.

그는 물샐틈없이 라주읍성을 에워싸고 마진국군사들이 반격을 할수 없게 근 십리에 달하는 참호를 파고 참대울타리까지 쳐놓았다.

말그대로 읍성으로는 개미새끼 하나 맘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이러한 삼엄한 경계선을 뚫고 방어군주력이 있는 라주읍성으로 들어간다는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였다.

예상치 못했던 정황은 아니지만 응통은 포위된 라주읍성을 보고 정신이 아뜩해졌다.

라주읍성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인 태봉산을 뒤에 두고 국사벌로 발을 뻗고있는 형세를 취하고있었다.

유금필은 무장답게 성을 포위하고있는 후백제군을 치고 들어가자고 하였으나 응통은 그 의견을 따를수 없었다.

후백제군이 낌새를 채기 전에 성안으로 들어갈 무슨 방도가 없겠는가.

응통은 송악을 떠나기 전에 라주의 지리, 민심, 심지어 풍물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었었다.

그가 어찌나 심도있게 라주를 파고들었으면 같이 따라온 유금필조차 응통을 두고 라주사람보다 라주를 더 잘 안다고 하였겠는가.

태봉산의 산세를 살피던 응통의 뇌리에는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옛날 백제시기 발라군으로 불리우던 이 지방에는 한가지 전설이 전해지고있었다.

그것은 백제가 멸망할 당시 당군에게 포위된 성에서 항전하던 항전군이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모두가 하늘로 올라가서 밤하늘을 밝히는 별무리가 되였다는 전설이였다.

누가 들어도 그저 스쳐보낼 이야기였으나 응통은 그 전설의 신빙성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얼핏 들으면 허황한 이야기같았으나 여기에는 무언가 숨은 진실이 있었다.

전설은 발라군의 항전군이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모두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진실을 담은것이 아니겠는가?!

외적에게 공포를 주고 이 지방 사람들에게 신심을 주기 위하여 살아남은 항전군이 이런 전설을 지어 류포시킨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질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응통은 항전군이 어떻게 삼엄한 포위를 뚫고서 빠져나갔을가 생각하던 끝에 분명 그들이 땅굴을 팠을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왕건이 읍성을 탈취했을 때 작성한 읍성의 지형도를 세심히 분석한 결과 자기의 짐작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발라읍성 즉 지금의 라주읍성에는 지나칠 정도로 우물이 많았던것이였다.

그중에서 지금 쓰고있는 우물은 불과 네개이고 나머지 수십여개 우물은 이미 메워진지 오랜 우물들로서 지금은 우물터의 잔해만 남아있었다.

응통은 그중 어느 하나가 바로 땅굴의 입구라고 확신했다.

그러면 출구는 어디겠는가?! 읍성이 태봉산에 의지하여 축성된것만큼 광활한 개활지대가 아니라 산으로 출구가 나있을것이다.

응통은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태봉산기슭을 참빗으로 훑듯이 수색하던 끝에 마침내 입구가 허물어진 동굴을 찾아내였다.

곧 인부들을 동원하여 굴을 열고 들어가보니 알릴듯말듯 바람이 통한다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이것은 이 굴이 막힌게 아니라 다른 출구와 련결되여있음을 알려주는것이였다. 시간이 없었다. 여기가 아무리 읍성으로 통하는 비밀굴이라고 해도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기때문에 군데군데 굴간이 무너졌을것이니 빨리 수복해야만 했다.

굴을 찾기 전까지 응통의 생각이 전혀 얼토당토않다고 뒤에서 비웃던 사람들까지도 막상 굴을 찾게 되니 성수가 나서 괭이를 휘둘러 길을 내였다.

그중에서 무장인 유금필의 놀라움은 제일 컸다.

설마하니 응통이 이런 비밀굴까지 찾아낼줄은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지 못한 그였다.

동서고금에 이렇게 땅굴을 찾아내면서까지 물자보급을 해본 일이 있었는가.

유금필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평범하다는 말밖에 더 할수 없는 이 응통이라는 상인의 능력과 직심이 너무 놀라와 한마디 말조차 꺼낼수 없었다.

드디여 땅굴을 찾아낸지 사흘만에 응통의 일행은 출구를 찾아 성안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이것으로 굶주림으로 함락직전에 이르렀던 라주는 위기를 면할수 있었다.

같은 시각에 왕건은 고이도에 대한 총공격령을 내리였다.

마진군사들은 고이도를 사면으로 에워싸고 쳐들어갔다.

성우에서의 저항도 맹렬했다.

금달은 이리뛰고 저리뛰며 목청껏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자, 좀더 힘을 내서 싸워라. 며칠만 지켜내면 대왕께서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진격해올것이다.》

삽시에 전장은 함성과 비명소리, 창검이 부딪치는 소리로 떠나갈듯 했다.

왕건은 배에서 석포와 포노를 떼여내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공방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치렬해졌고 량측의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그러나 마진군사들은 왕건의 독려를 받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성벽을 기여올랐다.

마침내 마진군사들은 성벽우에 올라섰다.

성벽의 한모퉁이를 탈취한 군사들은 그곳을 거점으로 치렬한 싸움을 전개해나갔다.

싸움은 성가퀴에서부터 회랑으로, 회랑에서 성안으로 번져졌다.

왕건은 그 기세를 늦추지 말고 계속 맹공격을 가하도록 하였다.

성문이 열렸다.

종희가 선봉을 이끌고 성안으로 돌입하였고 김언이 거느리는 군사들은 서쪽 성가퀴들을 완전히 장악했다.

바람이 몹시 불면서 죽어가는자들의 비명소리와 비릿한 피냄새를 멀리로 날라갔다.

금달과 능환은 형세가 위급해지자 보급창에 불을 지르고 황급히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왕건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직접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우선 관나에게 령을 내려 보급창의 불부터 끄게 하였다.

고이도를 완전히 타고앉은 왕건은 불속에서 구출한 모든 기재와 무기, 식량을 배에다 옮기게 하였다.

한편 라주를 점령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리고있는 견훤에게 고이도가 함락된 소식이 전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읍성에서 굶어죽었으리라 여겼던 만세의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반격해나오자 견훤은 아뜩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에야 견훤은 마진국의 치중부대가 감쪽같이 륙로로 막대한 량의 군량과 무기 등을 운반하여 라주읍성으로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것도 철통같은 포위진을 화살 하나 허비하지 않고 땅굴을 통해 날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예 두눈을 뒤집고 쓰러져버렸다.

견훤은 왕건에게 또다시 패하였다.

일체 보급이 끊어진 수군이란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라주를 아직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고이도마저 빼앗겼으니 견훤은 진퇴량난에 빠졌다.

이 상태로 왕건의 함대와 맞서싸우는것은 실로 무의미했다.

견훤은 하는수없이 수군력량을 보전하기 위해 박영규의 권고대로 퇴군을 결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견훤의 라주공격은 이렇게 끝났다.

견훤의 후백제군이 패해서 물러간 뒤 마진국의 원정함대는 여유작작하게 라주포구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응통과 대면하게 된 관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앞에 불쑥 나타난 수염터가 거밋거밋한 이 사나이가 제 손으로 죽을고에 몰아넣었던 응통이임을 어찌 생각이나 해보았으랴.

더우기 곡도에서 귀양살이나 하고있는줄 알았던 응통이가 자기로서는 상상도 못할 기발한 생각으로 라주의 위기를 풀었다는 말을 듣고는 너무도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결국 자기는 이번에도 주역이 아니라 부차적인 역할만 맡았다는 생각에 미쳐죽을것만 같았다.

드디여 라주의 위기를 극복한 왕건의 원정군은 개가드높이 송악을 거쳐 철원으로 개선하였다.

왕건을 통해 응통이 세운 공적을 알게 된 궁예는 그를 다시 송악의 동시전상단의 행수로 임명하고 겸하여 해상교역권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벌써 전국에 이번 라주전역에 대한 소문이 짜하게 나서 응통을 표창하지 않을수 없게 된것이였다.

이리하여 응통은 3년만에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910년에 있은 제1차 라주원정의 전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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