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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 회

제 3 장. 겨레의 꿈

1


라주지방에 가을이 찾아왔다.

평평하고 드넓은 전야에서는 온통 누르끼리해진 가을곡식이 무겁게 머리를 숙이고 바싹 마른듯 한 해풍에 줄기를 휘젓고있었다.

온 여름내 마르고 부풀어올라 쩍쩍 갈라터진 큰길에서는 누런 황토먼지가 푸석푸석 일어났다.

가을바람에 얼굴이 암갈색으로 튼 건장한 군사들이 길게 렬을 짓고 지나치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도록 군사들의 렬은 끊기지 않고 계속 지나쳤다.

서슬푸른 창검을 든 군사들의 얼굴은 판에 찍어낸듯 한결같이 무표정했다. 그들은 주위세계에 대한 아무런 흥미도 가지고있지 않는듯 묵묵히 발끝만 내려다보며 걷고있었다.

후백제왕 견훤이 높은 둔덕에 올라 넓은벌 한가운데로 천천히 흘러가고있는 군사들의 대렬을 내려다보고있었다.

그는 마치 자연의 한 부분이나 된듯 꼼짝 않고 한본새로 서있었다.

아무리 지꿎은 사람이라도 저런 모양으로 한식경이나 서있으면 지루해하련만 견훤은 여전히 한모양새로 말뚝처럼 서있었다.

좌우에 시립하고 서있는 수행원들과 호위병들은 연방 터져나오는 하품을 가까스로 참으며 흘끔흘끔 견훤을 곁눈질하고있었다.

그들은 지루함을 참지 못해 군사들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안타깝게 기다리는듯싶었다.

드디여 마지막대렬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후미대렬이 지평선너머로 사라져버리자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갑갑증에 미쳐 갈개는 말을 다잡는 견훤을 향해 수군도독 금달이 달려왔다.

《전하, 전령들이 보고를 가지고 도착하였소이다. 아군이 금성 동쪽에서 적과 조우하였다는 급보이오이다.》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견훤이 거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적 수군은 아직 움직임이 보이지 않느냐?》

《아직까지는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소이다.》

옆에 서있던 일길찬 민각이 금달을 향해 눈을 흘겼다.

《장군, 금성에서 철원까지는 륙로가 이천리요 바다길로도 생각보다는 아름찬 거리요. 설사 궁예가 거병한다고 해도 군사를 모집하여 서해로 달려가 다시 배를 타고 내려오려면 줄잡아도 한달은 쉬이 걸릴것이요. 그러니 우린 륙군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금성을 타고앉을수 있을것이요.》

금달이 대꾸하려는것을 견훤이 큰소리를 치며 말렸다.

《너희들은 싸우기도 전부터 다툴셈이냐? 난 이번싸움에 모든것을 다 걸었다. 저기 금성을 타고앉는가 못하는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결정될수도 있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능환이가 허리를 굽히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전하, 신은 이번싸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고있소이다. 하지만 저 일길찬의 말대로 륙군의 힘으로만 금성을 타고앉자는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오이다. 적을 지내 얕보아서는 안될줄 아오이다.》

능환은 옛날 완산에서 신라의 대신을 암살하였다는 공적과 견훤의 수군함대를 재건하는데 큰 기여를 한것으로 하여 견훤의 특별한 신임을 받고있었다.

능환은 지금 후백제군의 후방보급을 담당한 병참관의 지위에 있었다.

민각이 방자하게 코웃음을 쳤다.

《궁예가 무슨 수로 여기까지 대여올것인고… 병참관은 과민을 보이는게 아니시오?》

속으로 은근히 장사군출신인 능환을 깔보고있는 민각은 이렇게 빈정거렸다. 능환은 속으로 밸이 꼬였으나 꾹 눌러참으며 짐짓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사실 바다에서의 싸움이 제일로 걱정되오이다. 적을 만만히 봐서는 아니되오이다. 이때까지 우리가 궁예와 싸워 변변히 이기지 못한것은 항상 적을 얕보았기때문이온데…》

갑자기 견훤이 한손을 쳐들어 능환의 말을 막았다.

《넌 적에 대한 파악이 깊을테니 한번 말해보거라. 네 말대로 적이 바다로 내려온다면 누가 인솔해올것이냐?》

능환은 더 길게 생각할새없이 그 자리에서 대답을 올렸다.

《신의 소견에는 필시 왕건이라고 생각되오이다. 왕건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러한 중임을 맡지 못할것이오이다.》

견훤은 달다쓰다 아무 대꾸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육중한 몸을 놀려 천천히 수레에 올라앉아 눈을 감았다.

모두들 반나절이나 꼬박 서있느라 굳어진 몸을 분주하게 놀리며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전하, 어디로 가시려오이까?》

민각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견훤은 수군도독 금달과 능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함대가 있는 금성의 포구로 가자.》

후백제군은 단번에 금성을 함락하려고 대대적인 포위공격을 벌렸다.

후백제군의 전략은 단숨에 동, 서 두 방면에서 맹공격을 가하여 금성군을 두개로 갈라놓고 보급과 병력의 보충 등을 끊어놓고서 각개격파하자는것이였다.

여기에 대비하여 마진국군사들은 산성에 들어박혀 완강히 저항했다.

크고작은 수십여개 성을 단번에 함락시킨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후백제군은 삼천명의 정예병을 앞세우고 금성에서 가장 큰 읍성에 공격을 집중했다.

바다에서는 후백제의 함대가 금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딱 가로막고있어 마진국은 한척의 배도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있었다.

바다쪽에서의 지원은 오직 덕진포를 거쳐서만 받을수가 있는데 여기는 후백제 수군도독 금달이 수백척의 전함을 둔쳐놓고 물고기새끼 한마리 드나들지 못하게 막고있었다.

후백제는 이밖에 광주에도 예비병력을 배치해놓았고 진도나 고이도에는 증원으로 쓸 전함들을 벌려놓았다.

견훤은 륙군의 싸움을 자기 사위인 광주도독 박영규와 일길찬 민각에게 맡기고 자신은 직접 함에 올라 바다쪽을 경계하였다.

후백제군의 장수들인 박영규와 민각은 전군을 두개로 갈라 금성군에 대한 맹공격을 가하고있었다.

벌써 십여개의 크고작은 산성들이 련이어 떨어져나갔고 선두부대는 읍성을 가까이하고있었다.

금성군을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마진국군사들의 기세가 한풀 꺾이였다.

읍성에는 두겹, 세겹의 방어선이 있고 린접한 현들에는 기병을 두어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있었다.

금성군방어전투를 총괄하고있는것은 만세라는 무관이였다.

그는 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었지만 오랜 무관으로서 성방어전에서는 남다른 지략을 가지고있어 아직까지 패한적이 한번도 없다는 무장이였다.

그는 용의주도하고 침착하게 적이 공격하기 좋은 요로에 군사를 둔쳐놓고있다가 후백제군의 공격을 격퇴하군 하였다.

후백제군이 열흘에 걸쳐 무시무시한 맹공격을 가했지만 금성이 함락되지 않고 버틸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만세의 개별적능력때문이였다.

바로 이러한 성방어전의 명수인 만세의 힘으로 가까스로 버티고는 있으나 지원이 오지 않는다면 패전은 시간문제였다.

금성군의 수비병력은 일체 물자보급과 병력의 보충이 끊어진 악조건속에서 후백제군과 싸우고있었던것이다.

후백제군은 성공격전에 대단히 능한 삼천명의 정예병을 내놓고라도 끊임없이 지원병을 보충받으며 련일 사나운 공격을 들이대고있었다.

드디여 후백제군은 금성군에 대한 포위를 끝냈다.

후백제왕 견훤은 덕진포에 틀고앉아 이제나저제나 금성읍성을 함락시켰다는 보고를 초조하게 기다리고있었다.

싸움이 벌어져 열흘째 되는 날 견훤이 자리잡고있는 장막으로 수군도독 금달이 혼비백산하여 뛰여들었다.

《대왕님, 큰일났소이다. 마진국의 왕건이가 불의에 남하하여 진도를 함락했다는 급보이오이다.》

《뭐라구?!…》

견훤은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나 뜻밖의 소식이 믿어지지 않는지 금달의 너부죽한 얼굴만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저런, 망할…》

견훤은 얼굴이 시뻘개가지고 두손으로 지휘탁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견훤의 얼굴은 보기에도 무시무시했다.

금달이 조심히 나가려는데 견훤이 소리쳐 불러세웠다.

《그래서 모두 전멸했느냐?》

《전령의 보고에 의하면 모두가 죽기로 싸웠으나 워낙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다나니…》

견훤은 눈꼬리를 파들파들 떨며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듯 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견훤은 평상시의 침착한 태도로 돌아간듯싶었다.

하지만 이마에 깊숙이 패인 주름살은 그의 심중이 매우 복잡함을 보여주는듯 했다.

《능환이를 불러라.》

잠시후 병참관인 능환이 장막안으로 뛰여들어왔다.

《진도가 함락되였으니 마진국수군의 다음목표는 어딜것 같으냐?》

《아군의 보급기지인 고이도가 분명하오이다.》

능환은 더 길게 생각할새없이 즉석에서 대답을 올렸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느냐?》

견훤의 물음에 능환은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적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이 바로 바다길을 통한 물자보급이오이다. 왕건이 분명 보급함대를 따로 끌고왔겠으나 그것으로는 수군의 보급만 충족할뿐 금성의 수천명 군사들을 먹이지는 못할것이오이다. 하여 왕건은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분명 전번과 같이 아군의 보급물자를 뺏으려고 할것이오이다.》

《네 말대로 왕건이가 고이도를 점령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것이 있겠느냐. 아군이 금성군으로 들어가는 포구를 봉쇄했는데 왕건이가 그걸 무슨 수로 돌파하겠느냐.》

견훤은 비웃음으로 능환의 말을 물리쳐버렸다.

천성적으로 고집이 센 견훤은 아래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새겨듣는 법이 별로 없었다.

그는 제 생각에만 옴하여 왕건이 고이도를 칠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있었다. 하지만 경계는 하여야만 하는것이다.

능환의 말대로 왕건이 고이도를 쳐서 함락한다면 후백제군은 또다시 중요한 보급창을 잃게 되고말것이였다.

견훤의 입새에서는 부지중 한숨이 새여나왔다.

웬만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견훤도 이제는 어지간히 지친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언제한번 말안장에서 내려보지도 못하고 줄곧 권력을 얻기 위한 길로 잠시도 멈춤이 없이 달려온 견훤이였다.

이제는 한 나라의 당당한 주인이 되였다지만 세상은 그에게 조금도 쉴 겨를을 주지 않았다.

신라조정을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킬 때에는 그래도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또 그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것만 이루면 지친 몸을 쉬울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었다.

하다면 그 목적이 어디로 갔는가?

아니였다, 아직도 눈앞에 두고있는 그 목적의 성격이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여 견훤이 왕위에 오르는 그 시각부터 달라졌다고 말해야 옳을것이였다.

신라를 뒤집어엎고 백제의 원한, 일찌기 돌아간 부친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는 목적이 지금에 와서는 궁예를 때려엎고 천하의 주인이 되여야 한다는 오직 하나의 욕망으로 견훤의 가슴속에 불길로 타번졌다.

견훤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힘든것인줄은 다는 몰랐었다.

동족상쟁의 불길속에서 무리로 죽은 백성들의 원성과 피물이 하늘을 찌르고 땅을 뒤덮어도 눈섭 하나 까딱 안했었지만 점차 세월이 흐를수록 정신은 자꾸 지쳐만 갔다.

반드시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된다!

견훤은 이러한 의지로 이 세상을 살아온다고 할수 있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도 죽였고 닥치는대로 짓밟고 불태우고 파괴한것이였다.

견훤은 자기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는 부하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였다.

저들과 나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내가 그토록 로심초사하여 세운 나라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세력지반을 닦는데만 몰두하고있지 않는가. 견훤은 어쩐지 저들이 부러웠다.

자기도 부하들처럼 어느 한가지에만 몰두하고싶었다.

금달, 민각, 능환… 이들모두가 자신이 한명, 한명 목숨을 구해주고 살펴주었으며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지위에 올려세워주었는데 그들이 한 일이란 고작 시키는 일이나 하는 역할뿐이였다.

그러나 견훤자신은 이와 같이 시키는 일이나 수걱수걱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주인의 생각을 앞질러 판단하고 그것을 위해 뛰여다니며 사고하는 살아있는 존재가 필요한것이였다.

그는 궁예가 부러웠다. 구중궁궐에 틀고앉아있는 궁예를 먼발치에서라도 한번 보고싶었다.

그가 늘 자기를 앞지르는것이 그의 개별적능력이 견훤 자기보다 뛰여난것이 아니라 바로 왕건이와 같은 유능한 사람들을 잘 만났기때문이라고 여기고있는 견훤이였다.

궁예가 유명한 시전상인 두근이의 아들 관나를 곁에 끼고도는것처럼 견훤자신도 특별한 인연이 있는 능환이를 수중에 넣고 부리였다.

견훤은 이미 그의 신세를 톡톡히 졌다.

능환이가 없었더라면 수군함대의 재건을 생각도 못했을것이 아닌가.

견훤은 자신이 결단을 내려 등주에 있는 그를 데려오기 참으로 잘했다고 생각하며 능환을 곁으로 불렀다.

《이제 곧 수군도독 금달을 따라 고이도로 가거라. 거기서 내가 주력을 이끌고 들어올 때까지 금달을 도와 고이도의 보급창을 지켜라. 네가 심중의 뜻을 펴기 위한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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