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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 회

제 2 장. 후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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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4년 여름, 력사의 흐름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후고구려국 국왕 궁예가 갑자기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무태》라는 년호를 제정하였던것이다.

이것으로 그가 고구려국의 건국을 선포한것은 단지 고구려의 유민으로 자처하는 백성들의 지지와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위선이였다는것이 적라라하게 드러났다.

뿐만아니라 궁예는 수도를 철원으로 정하고 천도를 결정하였다.

이미전부터 시전상인 두근을 시켜 궁성건설을 시작하였던 궁예는 철원으로 천도하자마자 전국 도처에서 십만명의 백성을 끌어내여 도성건설을 본격적으로 벌리도록 하였다.

또한 사원들과 관청들을 대대적으로 건설하고 제가 들 궁궐을 웅장화려하게 세우게 하였으며 새 국가의 선포에 맞추어 사직단도 세워놓았다.

궁예는 전국에 조서를 내려 부호들을 강제로 철원에 이주하여 살게 하였으며 강릉 등 여러 고을의 백성들을 철원으로 옮겨놓았다.

궁예의 이러한 변덕으로 국가의 재정은 아예 거덜이 나버렸다.

가뜩이나 후백제와의 전쟁으로 막대한 로력이 소모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갔는데 이렇듯 방대한 도성건설을 벌려놓았으니 가장 큰 피해는 백성들이 감수하여야 하였다.

탕진된 국고를 채우기 위해 조세를 배로 올리는 한편 바쁜 농사철에 백성들을 끌어내다 매일과 같이 웅장화려한 건축물을 세우게 하고 도로를 닦으니 땅이 황페화되고 논과 밭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랐다.

이통에 살고난것이 바로 두근이와 같은 시전상인들이였다.

두근은 도성건설을 궁예로부터 전부 넘겨받은 덕에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쥘수 있었다.

백성들이 자기자신과 가족을 굶기면서 내는 조세는 국고가 아니라 두근의 주머니로 쉬임없이 흘러들었다.

토목공사에 필요한 자재와 도구들, 심지어 건설에 동원된 백성들이 소비하는 식량까지도 전적으로 두근의 상단들이 조달하였다.

백성들은 부역에 강제로 끌려나와 혹사당할뿐아니라 자기들이 소비한 식량과 가재도구들을 가을에는 리자까지 덧붙여 두근의 상단에 배로 갚아야 했다.

이렇게 악착하게 긁어모은 덕에 두근은 철원의 도성건설로 나라안의 그 어떤 상단도 견줄수 없는 거대한 재부를 손에 넣을수 있었다.

궁예는 백성들의 불만을 가라앉혀보려고 수많은 승려들과 유교학자들까지 내세웠으나 크게 흔들리는 민심을 가라앉힐수 없었다.

불만은 궁예의 부하들에게서도 공공연히 터져나왔다.

궁예가 처음 송악에 수도를 정하였던것은 송악지방의 토호 왕륭의 세력을 끌어당기려는데 원인을 두고있었다.

물론 서해에 대한 통제권과 북과 남의 세력자들을 누르고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하여 령토를 넓히자는데도 목적이 있었지만 중요하게는 궁예자신이 송악토호 왕륭의 부와 배경을 얻자는데 진목적이 있었다.

궁예가 송악지방을 손에 넣음으로써 새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러나 나라를 세우고 차츰 국가기틀이 마련되여가자 궁예는 왕륭의 아들 왕건과 송악에 깊이 뿌리를 두고있는 세력을 꺼리게 되였다.

역시 송악은 궁예의 지반이 없는 곳이였다.

왕씨일가의 지반이 강한 곳에 터전을 닦을수 없다고 생각한 궁예는 자기를 적극 뒤받침해준 시전상인 두근을 업기로 작정했다.

자기의 지반이 없는 궁예로서는 이것을 최상의 선택으로 여길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러한 야망을 공공연히 내비치지 못한것은 역시 왕건을 위시한 송악세력의 반발이 두려워서였다.

이러한 때 국고를 충당한다는 명색으로 당나라와의 공무역으로 보낸 막대한 잡화와 수천필의 비단이 등주 신라방의 총관인 능환의 배신행위로 견훤의 후백제국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궁예는 이것을 송악세력을 탄압할 좋은 기회로 삼았다.

송악세력을 제때에 짓밟아놓지 않으면 왕건에게 매일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궁예는 로골적으로 두근을 내세우는 한편 탄압의 마수를 송악세력에게로 돌렸던것이다.

송악세력은 오령이 라주를 지원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동시전상단의 행수 응통이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루명을 쓰고 귀양을 가는 바람에 재정적으로 뒤받침할 지반을 잃어 사분오렬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젠 상인들의 중심이 되였던 오령이 죽어 더는 두근의 시전상인세력과 맞설 그런 인물이 없었던것이다.

왕건은 전장에서 세운 공적으로 직위가 까마득히 높아졌으나 자기를 재력으로 뒤받침하던 세력지반을 잃게 되였다.

이렇듯 술수를 부려 송악이 아니라 철원에 지반을 굳건히 마련한 궁예는 천도를 단행하고야말았다.

또한 궁예가 철원으로 천도하게 된데는 나라의 일등가는 승려라고 떠받드는 석총의 힘이 크게 작용하기도 했다.

궁예의 뒤받침으로 국선으로 된 석총은 어리석게도 궁예의 부추김을 받아 철원이 지세로나 지맥으로 보아도 수도로서는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크게 떠들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으로 하여 궁예의 철원으로의 천도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였다.

천도를 앞두고 궁예에게는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송악태수 왕건과 그의 세력의 처리문제였다.

당시 궁예의 밑에는 크게 두개의 세력이 갈라져 존재하였는데 하나는 오랜 로장파로서 신훤, 원표 등 처음부터 자기와 함께 싸운 장수들이였고 다른 하나는 령토가 넓어짐에 따라 새로 들어온 소장파의 무장들이였다.

소장파라고는 하나 이들의 세력이 결코 로장파보다 못하지는 않았다.

더우기 중요한것은 그들이 각자가 다 독립적인 세력이라는데 그 원인이 있는것이였다.

왕건이같은 인물은 비록 몸을 숙여 궁예를 섬기고있다고는 하지만 처음 배경과 지금의 그의 세력과 백성들로부터 받는 신망은 궁예가 위기를 느낄 정도였다.

역시 왕건은 궁예가 함부로 무시할수 없는 인물이였다.

바로 이러한 원인으로 궁예는 천도를 서두를수 없었다.

허나 궁예는 왕건 등 송악지방의 여러 소장파무장들을 설득시키는 한편 그 지위를 높여주는것으로써 그들의 의견을 무마시키고 끝내 천도를 단행하고야말았다.

궁예는 왕건의 벼슬을 높여주었으며 겸하여 나라의 수군무력을 총괄할 권한을 주었다.

이렇게 되여 이십대의 청년무장인 왕건은 새 국가의 그 어떤 원로보다도 더 많은 권한을 부여받게 되였으나 그대신 아버지 왕륭으로부터 물려받았던 송악의 상권 즉 재력을 잃지 않으면 안되였다.

또한 궁예는 신라의 관직제도와 군사제도를 본받아 조정을 꾸리였고 중앙과 지방을 강력한 전제군주제의 사슬로 얽매여놓는데 전력을 기울이였다.…

궁예의 《수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궁예는 철원에 천도하는 일을 다그치는 한편 수하의 직속부대를 내몰아 상주지방에도 전선을 펼쳐놓았으며 멸망의 숨을 몰아쉬고있는 신라의 마지막숨통을 힘껏 조이였다.

궁예의 명성이 차츰 드날리기 시작하였다.

더우기 검용의 공적으로 패강이북의 고구려유민세력이 귀순하여 새로 13개의 군진을 설치할수 있어 야인의 침입을 물리치고 북방개척의 토대를 닦을수 있었다.

처음엔 아름차게 보이던 일들이 차츰 눈에 띄우게 바로잡혀나갔다.

천도에 맞추어 철원에는 거대한 도성이 일떠섰으며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이 솟았다.

새 국가의 위용을 보여주듯 덩실한 관청들이 도성안에 비좁게 틀고앉았으며 민호를 더 보충하기 위해 청주지역에서 새로 1천여호를 강제이주시켰다.

궁예는 철원에 천도하기 바쁘게 새로운 관청들을 더 많이 세우고 관직을 수많이 내왔다.

이러한 관청들을 통제하며 전국을 하나와 같이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광평성(국가의 최고기관)을 설치하고 광치나(후세의 시중-정부수반), 서사(후세의 시랑), 외서(원외랑) 등 관원을 갖추었으며 또 대룡부(창부), 수춘부(례부-외교, 봉건적 례의범절, 교육 등을 맡은 기관), 봉빈부(례빈성), 의형대(형부-형벌을 맡은 기관), 납화부, 조위부, 내봉성, 금서성, 남상단, 수단, 원봉성(한림원), 비룡성(태복시), 물장성 등의 중앙관청들과 지방의 관직, 관청제도를 세워놓았다.

또한 궁예는 자기의 지반을 더 굳히기 위해 유력한 장수들과 지방단위로 편성되였던 군사를 병부에 배속시켜 통일적인 군사지휘체계를 내왔다.

그밖에도 사대(외국어습득을 위한 기관), 식화부(재정을 맡은 기관), 장선부(조선고유의 토착종교인 성황을 관리하는 기관), 주도성(기물제조를 맡은 기관) 등을 설치하였으며 정광, 원보, 대상, 원윤, 라윤, 정조, 보윤, 군윤, 중윤 등 직품을 내와 자기 심복들로 앉혔다.

궁예는 이처럼 방대하고 거창한 일을 불과 몇달사이에 해치우고말았다.

이렇게 놀랄만 한 수완과 술수를 부려 눈깜짝할사이에 지반을 굳건히 한 궁예는 조정내에서 세력이 강한자들을 서서히 깎아내리는 일부터 벌려나갔다. 드디여 905년 봄에 궁예는 모든 천도를 끝내는것과 때를 같이하여 통치지반을 새롭게 마련할수가 있었다.

철원으로 옮겨온 궁예가 맨 처음으로 벌린것은 년호를 바꾼것이였다.

하여 제정된지 한해도 못되는 사이에 《무태》년호는 《성책》이라는 년호로 바뀌였다.

변덕을 부려 한해동안에 두개의 년호를 제정한 궁예는 새로운 일을 벌려나가기 시작하였다.

국호와 년호를 새로 정했다고 해서 궁예의 야망이 달라지는것은 아니였다. 궁예는 군사를 대대적으로 내몰아 신라의 죽령동북쪽지역에까지 진출시켰으며 상주에로 진격하고있는 견훤의 군사를 막기 위한 새로운 전선을 펼쳐놓았다.

후백제왕 견훤에 비할바없이 방대한 령토와 힘을 가지게 된 궁예는 드디여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마진국의 수도 철원성에서는 사람들을 경악케 하는 행위가 일어났다.

상주지역과 죽령동북쪽에서 사로잡은 천여명의 신라군포로를 철원으로 압송해왔는데 그 처리문제가 상정되였던것이다.

조정대신들은 한결같이 옛날 법도대로 포로들을 지방군에 편입시켜 후백제군과의 싸움에 동원시키자고 의견을 같이하였다.

그것은 이때까지의 전례를 그대로 따른것으로서 모자라는 병력의 보충을 포로로 충당하려는것이였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의 제의를 유심히 듣고있던 궁예가 별안간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폭언을 하는 바람에 온 조정이 깜짝 놀랐다.

궁예는 포로들, 천여명의 신라군 포로전원을 참형에 처하라는 령을 내렸던것이다.

놀라서 술렁거리던 조정안이 삽시에 침묵속에 잠겨버렸다.

궁예의 외눈이 사납게 휘둘러보자 조정대신들은 하나와 같이 움츠러들었다.

그 누구도 선뜻 반대할념을 하지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요즘은 매일과 같이 비정상적인 행위만 해대는 궁예인지라 조정대신들중 누구도 서뿔리 입을 벌리지 않았다.

더우기 궁예의 명에 반박할수 있을만 한 유력한자들은 모두 강제이다싶이 전장에 나가 악전고투를 벌리고있었다.

궁예는 소장파의 무장들을 끊임없이 전장으로 내보내여 조정내에서 지반을 닦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들이 거느리고있던 군사는 모두 병부에 배속시키고 엇바꾸어가며 출전하도록 하였기에 차츰 세력이 약해질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러니 설사 궁예가 잘못 처신하는 일이 있더래도 조정내에서는 누구도 감히 그것을 일깨워줄 용기를 가지고있는자가 없을 정도였다.

궁예의 령은 곧 집행되였다.

궁성앞 대광장에서 천여명의 신라군포로가 일시에 목이 잘리웠다.

참변은 이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궁예가 귀순해오건 포로이건 신라에서 오는자는 모조리 죽이라는 소름끼치는 령을 또 내리였던것이다.

민심이 삽시에 뒤숭숭해졌으나 궁예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궁예는 하루가 멀다하게 새 칙령을 발표하여 조정대신들과 백성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력사에 기록된 궁예의 공포정치는 이때로부터 시작되였다.…


드디여 910년에 후백제왕 견훤은 자기가 직접 수륙군을 이끌고 금성공격에로 나섰다.

라주를 거점으로 전쟁을 치르는 마진국은 우단점을 다같이 가지고있었다.

그것은 라주를 거점으로 서남해의 제해권을 쥐고 항상 우세한 력량으로 적을 제압할수 있으며 북부전선이 어려운 고충을 겪을 때마다 라주방향에서 대대적인 공격으로 적의 배후를 칠수 있기때문이였다.

하지만 반면에 아주 불리한 점도 가지고있었다.

라주는 마진국과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있었던것이다.

그것과 이어주는것은 오직 해상로밖에 없는데 만약 이것이 끊기는 날이면 일체 보급이 차단되고 고립된 처지에서 앞뒤로 포위되는 상황에 부딪치고마는것이였다.

하여 마진국에서는 항상 그것을 경계하여 해상에서의 제해권을 잃지 않으려고 후백제의 함대가 해상에 나타나면 전력을 기울여 타격하군 하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사정이 달랐다.

비밀리에 전함건조를 다그쳐온 견훤은 불의에 광주앞바다에서 마진국함대를 타격하고 제해권을 장악한것이였다.

후백제의 륙군이 라주에 상륙하였고 동시에 여러 방면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이것은 마진국에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라주는 함락전야에 이르렀다.

대경실색한 궁예는 곧 어전회의를 열고 라주를 급히 지원할 방책을 토의하였다. 이것은 극히 중대하고도 위험천만한 일이였다.

여러 무장들중에서 누구도 선뜻 라주로 진격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철원에서 라주까지는 그 거리가 너무도 멀었던것이다.

륙로로는 어림도 없으니 서해에까지 달려가 배를 타고 내려가야겠는데 그러기에는 시각이 매우 급했다.

설사 수군이 해상로로 내려가 견훤을 공격한다고 해도 그 승패여하에 대해서는 가늠할수가 없었다.

방책으로서는 수군무력으로 급히 진군하여 견훤의 수군본영과 건조장이 자리잡고있는 고이도를 들이쳐야 하였으나 그것은 너무도 큰 모험이였다. 만약 속전속결로 결속하지 못하고 장기전에라도 말려드는 경우에는 그야말로 야단이였다.

제일 난사가 군대의 치중보급이였기때문이였다.

수군이 떠날 때 보급물자를 실은 수송선들을 뒤에 달고 떠난다 해도 어느 정도이지 자칫하면 후백제수군을 격멸하는 싸움이 아니라 수송선들을 보호하는 싸움이 될수 있었다.

일이 될려면 전번 라주지원작전에서처럼 함선 대 함선들이 싸움을 벌리는 틈을 리용하여 보급함대가 따로 라주로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이것이 실패하는 경우 마진국은 엄청난 손실을 당하고 나중에는 라주를 잃게 되는것이다.

싸움에서 패하면 패전지장의 루명을 쓰고 궁예에게 죽음을 당할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궁예의 행악이 도를 넘어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기만 해도 잡아다 죽여버리는 판이였다.

설사 승천하여 공을 세운다고 해도 궁예의 시기심을 받을가 두려워하는 마진국의 무장들이였다.

조정대신들이 일체 함구하고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궁예는 살기띤 눈초리를 마침내 왕건이와 관나에게로 돌렸다.

왕건은 이때 아찬의 벼슬을 지니였고 관나는 나라의 재정을 맡은 식화부의 대상으로 있었다.

《어떤가? 아찬과 대상은 어떤 해결책을 가지고있는가?》

궁예가 다우쳐묻자 왕건은 태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궁예의 속대사를 읽은 왕건은 어차피 전장에 자기가 아니면 나갈 사람이 없다는것을 깨달은것이였다.

《페하, 신이 한번 죽기로 싸워 나라의 위기를 막겠소이다.》

관나도 그에 뒤질세라 한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왕건장군이 함대를 인솔하고 라주로 내려간다면 신이 라주를 지원할 보급함대를 거느리겠소이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온 조정안이 놀라 술렁거렸다.

다른 일도 아닌 이러한 위험천만한 일에 왕건과 관나가 자원하여 나섰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당시 왕건은 조정내에서 세번째의 실권자였으며 이때까지 쌓은 공적으로 원훈대신으로 지칭되고있었다.

그러한 왕건이 승패가 어찌될지도 모르고 자칫하다가는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한 전선에 나간다는것은 당시에 있어서는 상식밖의 일이 아닐수 없었다.

식화부의 대상으로 있는 관나는 원래부터 전쟁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는 시전상인출신이라 그가 나선것은 별로 놀라울것이 없으나 조정의 원훈대신인 왕건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전장에 직접 출전하겠다고 나서니 모두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왕건과 관나가 스스로 위험한 라주공격을 떠맡자 궁예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과시 경들은 짐의 둘도 없는 부하들이로다. 특별히 경들의 관직을 한급씩 올리겠으니 힘껏 싸워 짐의 근심을 덜어주길 바라노라.》

궁예는 즉시에 왕건의 벼슬을 시중 다음가는 한찬으로 올리고 겸하여 수군대장으로 임명하며 관나는 원윤의 벼슬을 겸하여 수군부도독으로 임명한다는 조서를 발표하도록 하고 군사를 동원시킬수 있는 발병부를 내주었다.

이렇게 되여 왕건과 관나는 두번째로 라주지원의 길에 나서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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