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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 회

제 2 장. 후삼국

11


신라방의 아압소에서 그동안 밀린 사무를 보고있던 능환은 완산의 장사군일행이 자기를 찾아 등주로 왔다는 사환의 말을 듣고 놀라서 고개를 쳐들었다.

완산이라면 능환이 태여난 고향이였으나 아버지의 넋이 아직도 방황하고있는, 괴로운 추억만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였다.

그럼 아버지의 부하들이 아직 살아있었단 말인가?

능환은 숨을 길게 내쉬고는 사환에게 완산에서 왔다는 장사군일행을 아압소로 들여보내라고 하였다.

《도련님, 나웨다. 영창대행수님의 식객무사였던 금달이오이다.》

중년의 사나이가 이렇게 소리치며 뛰여들어올 때 능환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가 어찌 금달을 잊었으랴.

십여년전 정변당시 금달이 피로써 동문을 열지 않았으면 능환은 오늘까지 살아있지 못했을것이였다.

《아저씨가 살아계셨군요.…》

능환은 금달의 넓은 가슴에 어린애처럼 얼굴을 파묻었다.

능환이 어렸을 때 항상 말등에 태워주군 하던 금달이였다.

금달이도 죽은줄로만 알고있던 능환을 다시 만나는것이 기뻐서 눈물을 흘리였다.

《헌데 아저씬 제가 여기 있는줄 어찌 아셨소이까?》

상봉의 기쁨이 사라지자 능환은 의아하여 이렇게 물었다.

금달은 좌우를 물리치도록 하고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였다.

《견훤대왕님이 보내는 친서이오이다.》

능환은 뚝 굳어진 얼굴로 후백제왕 견훤이 보낸 서신을 받아들었다.

그의 뇌리에는 완산에서 도망쳐 변산에서 수군에 붙잡혔다가 견훤의 도움으로 탈출하던 그때 정경이 불시에 떠올랐다.

서신을 다 읽은 능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탁우에 내려놓았다.

견훤은 서신에서 중히 써줄테니 동주 신라방의 상인세력과 함께 자기한테 귀순하라고 썼던것이다.

능환은 한참만에야 머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견훤대왕의 도움으로 내가 살아난것은 틀림없으나… 나는 의리를 저버릴수 없소이다.》

금달이 답답하다는듯 어성을 높이며 나섰다.

《그것이 어찌 의리를 저버리는 길이오이까? 도련님은 백제사람이라는걸 명심하시오이다. 백제사람이 저 궁예와 같은 역적을 섬기는것이 바로 의리를 저버리는 길이오이다.》

능환은 금달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난 궁예왕을 섬기는것때문에 망설이는게 아니오이다. 날 그래도 이쯤 내세워준것이 바로 송악의 상인들인데 하루아침에 그들을 배반할수 없지 않소이까?》

금달은 능환의 걱정이 무엇인지 안다는듯 쓰겁게 웃었다.

《도련님은 무언가 잘못 아셨소이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그런 인정에나 사로잡혀있으면 큰일을 할수 없소이다. 도련님의 능력이 없었으면 지금의 위치를 차지할수 있었겠소이까. 영창대행수님의 꿈을 이룰수 있는 길이 눈앞에 열려져있는데 무얼 주저하시오이까?》

금달은 고민에 시달리는 능환을 건너다보며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 목숨걸고 어르신과 함께 완산에서 거사를 벌리던 그날을 잊지 마시오이다. 어르신께서 가문의 운명과 자기 한목숨 바쳐 열어놓은 대로가 눈앞에 열려있는데 의리라는 편협한 감정때문에 이 모든걸 포기하겠소이까? 도련님은 신라의 대아찬을 없애버린 공적을 쌓았으니 백제로 돌아가면 백성들이 환호로 맞이할거웨다.》

능환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갈린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 곤난하니 며칠 말미를 주시오.》

《그럼 잘 생각하시오이다. 순간의 실수로 후날 오늘을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오이다.》

금달이 물러간 뒤 능환은 머리를 싸쥐고 심한 고민에 시달렸다.

어떻게 할것인가. 금달의 말대로 견훤을 따르면 자기 앞길이 환히 열릴것은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견훤을 따르는 길은 명백히 자기를 내세워준 사문개의 뜻을 저버리는 배반의 길이였다.

이름없는 도망군에 불과한 자기를 탓하지 않고 수중에 거두어주었을뿐아니라 자신의 지위와 막대한 재산을 넘겨준 사문개는 자기 상전인 동시에 저에게 재생의 활력을 준 부모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의 생전의 뜻을 저버리고 후백제국으로 넘어간다는것은 량심이 꺼리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번민에 시달리던 능환은 마침내 두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들었다.

난 백제사람이다! 백제의 넋이 나를 부르고있는데 고작 의리라는 감정에만 매달려 심중의 뜻을 저버리겠는가?!…

불쑥 그의 눈앞에는 도척의 개로 살면 살았지 계림의 록을 먹지 않겠다고 하던 아버지 영창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다! 더이상 방황하지 말자. 견훤을 찾아가 품고있던 내 뜻을 이루리라. 뜻하지 않게 기회가 차례졌는데 여기서 주저하겠는가. 금달의 말이 옳다. 장사군은 대세를 잘 가려볼줄 알아야 한다.

내가 아무리 사문개의 뜻을 지킨다 해도 고작 신라방의 아압소 총관으로 끝날 인생이다.

하지만 견훤을 따르면 나의 지위가 크게 달라질것은 물론이요 당초의 뜻대로 그토록 바라던 권력을 손에 그러쥘수 있을것이다.

현명한 새는 가지를 가려서 앉고 어진 사람은 군주를 가려서 섬긴다는데 나라고 어찌 옛날 의리만을 고집할것이냐?!…

드디여 능환은 금달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다만 한가지 걸리는것은 응통이 맡기고 간 막대한 잡화와 약재, 수천필에 달하는 비단에 대한 처리문제였다.

이것은 수만금의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였다.

능환은 이 물건들을 발해관에 맡겨 응통이가 오면 전해달라고 할 생각이였다. 그러나 능환의 가슴속 한귀퉁이에 남은 마지막 한쪼각의 량심은 반나절도 못되여 스러지고말았다.

금달은 능환의 이러한 생각을 알게 되자 놀라서 펄쩍 뛰였다.

지금 후백제는 왕건의 원정군에 의해 참담한 패배를 당하여 수군의 재건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하였다.

이러한 때 수군을 재건할 재물을 가지고간다면 능환의 지위가 높아질것이라고 력설하는것이였다.

능환은 그제서야 금달이 머나먼 등주행을 하게 된것이 결국 자기를 데려가기 위해서보다 수군함대재건에 필요한 자금때문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능환은 금달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왕지사 친구도 배반한 몸에 무엇을 더 꺼리겠는가 하는 생각에 발해관의 여노자를 찾아가 응통의 부탁이라고 둘러대고서 거액의 자금을 융통했다.

등주의 상인들에게도 잡화와 비단 등을 담보로 많은 자금을 빌려가지고 완산으로 갈 준비를 비밀리에 갖추었다.

벗에 대한 의리도, 장사군이 초보적으로 갖추어야 할 상도마저 다 집어던진 능환은 이렇듯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비렬한 배신의 길을 걷게 되였다.…


응통과 미령은 날이 밝을 때까지 한본새로 례성강기슭에 서있었다.

기슭은 축축하고 눅눅한 누기를 풍기고있었다.

발목까지 물에 잠그고 실컷 물을 마신 말이 입술에서 뚝뚝 물방울을 흘리며 다가와서는 잔뜩 시샘이 동하여 응통의 어깨에 애무해달라는듯 주둥이를 비벼댔다.

응통의 마음은 새벽의 상쾌한 공기덕분에 후련하면서도 달콤한 허탈상태에 놓여있었다. 미령이와 함께 이렇게 후련히 말을 달려본지도 이젠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오늘 그는 등주로 떠나기에 앞서 미령이와 함께 이렇듯 례성강기슭에서 한바탕 말을 달렸다.

오령의 생사를 아직 알지 못하여 근심만 하고있는 미령을 위로해주기 위하여 나온 길이였다.

벌써 주위에선 파르스름한 어스름이 걷히고있었다.

미령이도 이렇게 상쾌한 새벽공기를 마시면서 오랜만에 말을 달린것이 후련한듯 한결 밝아진 표정이 되여 동쪽하늘 가장자리에서 불타고있는 아침노을을 바라보고있었다.

응통은 마음고생과 근심으로 패린 미령의 옆모습을 훔쳐보고는 가슴이 아파 저도 모르게 처녀의 허리를 한팔로 안았다.

흠칫했던 미령은 살풋이 두눈을 감고 응통의 듬직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였다. 둘은 여전히 한본새로 그린듯이 한자리에 서있기만 했다.

가엾은 처녀,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따라 로상에서 자란 미령이였다. 처녀의 몸으로 사내들도 다니기 힘든 거치른 길아닌 길을 다니는 미령이를 두고 모르는 사람들은 사내번지기요, 범의 열을 먹은 녀자라는 등으로 말을 돌리고있으나 실지로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처녀였다.

미령이 과년한 나이에 지금껏 시집을 가지 않은것은 물론 어릴적부터 응통을 사모한데도 있겠지만 이런 편견이 작용하여 청혼자가 없는 사정도 있었던것이다.

응통은 이번에 등주에 가서 능환에게 맡겨둔 물건들을 처리하고 안정적인 판로를 개척한 다음에는 송악으로 돌아와 미령에게 청혼할 결심이였다.

의지할 기둥인 아버지의 생사마저 묘연한 지금 미령을 살펴주고 감싸주어야 할 사람은 오직 응통이밖에 없었던것이다.

이것은 활짝 드러난 감정적애착인것이 아니라 모진 현실에 발을 붙이고있는 응통의 진심이였다.

지금까지는 자기와 미령이와의 감정을 하나로 결부시키는것을 주저해왔으나 오늘은 자기의 진심을 터놓을 때가 왔다고 응통은 생각했다.

《저, 아가씨…》 응통이 주저하듯 입을 열자 미령은 어린애처럼 순진한 두눈을 크게 떴다.

응통은 미령의 두눈을 마주보며 말하기가 멋적은듯 얼굴이 수수떡처럼 벌개서 한참이나 우물거렸다.

《무엇을 주저하시나이까? 무슨 말이든 들어주겠으니 하시오이다.》

처녀가 용기를 북돋아주듯 이렇게 말하자 응통은 비로소 긴장이 풀리여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이번에 등주에서 돌아오면… 아가씨와의 혼인을…》

응통이가 수집음으로 얼굴을 붉히며 말을 하는데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그의 말을 삼켜버렸다.

무장한 군졸들이 그들을 향해 질풍같이 말을 몰아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응통은 까닭모를 불안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군졸들의 차림새로 보아 지옥의 형리라고 불리우는 형벌을 맡은 의형대에 소속된 군졸들이였던것이다.

응통은 의아한 얼굴로 군졸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군졸들은 그저 지나치는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표적으로 말을 달려오는것이 분명했다.

응통의 짐작대로 코앞까지 다달은 군졸들은 응통과 미령을 빙 둘러싸는것이였다.

《무슨 일이냐?》

응통은 주위를 날카롭게 둘러보며 소리쳤다.

《대왕의 어명으로 역적을 잡으러 왔소.》

군교로 보이는 중년의 텁석부리가 말우에 앉은채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응통과 미령이 소스라쳐놀라는데 별안간 군교가 호령을 하는것이였다.

《어명이다, 역적 응통은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응통은 영문도 모르고 의형대의 형리들에게 끌려갔다.


국내전쟁의 불길은 꺼질줄 모르고 타번지고있었다.

젊은 장정이라면 누구라할것없이 손에 무기를 잡고 전장에 나가야 하였다.

그들이 떠나간것은 자기 가족과 고향땅, 생활의 터전인 논과 밭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오직 나눌수 없는 천하를 차지하려는 궁예나 견훤과 같은 한두사람의 야망을 실현키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것이다.

아녀자들은 쪼들려진 살림을 이악하게 거두어나가면서 남정네들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백성의 새세상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은 아득하게 뒤전으로 밀려나버렸다.

사분오렬된 겨레와 백성을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싸움이 아니라 더 많은 령토와 사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매일과 같이 벌어지고있었다.

궁예나 견훤같은자들에게 가졌던 백성들의 기대와 꿈이 점차 깨여져나가고있었다.

썩고 병들고 락후한 신라사회를 뒤엎고 새세상을 세운다고 자처하던 세력자들은 백성들의 힘을 빌어 나라를 세우고 힘이 커지자 저마끔 령토확장과 패권다툼에 여념이 없었던것이다.

백성들의 소박한 꿈과는 정 반대의 현실이 펼쳐지고있었다.

갈라져나간 이 땅을 통일하고 덧없는 싸움을 끝장내며 백성들의 생업을 지키기 위해서보다 천하의 주인, 이 땅의 유일한 권력자로 남기 위한 야망이 세력자들의 가슴속에 타번지고있었던것이다.

전쟁은 지역적의의밖에 없는 무의미하고 희생적인 싸움으로 번져가고있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든게 뒤죽박죽이였다.

천하의 주인을 꿈꾸는자들이 지어 나이도 채 차지 않은 애숭이들까지 끌어내는 판이였으니 농사일은 연약한 녀인들이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수십, 수백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옥신각신할 때에도 생활은 그런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쓰러졌으며 전란의 불길에 생활터전을 잃은 많고많은 사람들이 류랑민이 되여 떼를 지어 살길을 찾아 흘러다녔다.

일단 싸움이 끝났어도 제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보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다.

전쟁은 바로 이러했다.

전쟁의 시련속에서도 자연만은 여전히 생기를 잃지 않은듯 숲은 설레였고 바람이 어루쓸며 지나가는 은백색의 강물에서는 잔파도가 일렁이였다.

볕에 타서 볼품없이 말라버린 초원의 풀들이 고개를 푹 떨구고있다가도 짧은 밤이 닥치면 또다시 고개를 쳐들고 생명력을 되찾았다.

검은 장막을 뒤집어쓴 하늘에서 별들이 쉼없이 반짝이고있었다.

초생달은 안타깝게 빛을 뿌렸고 밤의 고요함을 깨뜨리며 밤새들이 청승맞게 울어댔다.

대지는 강렬하고도 부드러운 자기 고유의 독특한 포옹력으로 따뜻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세상만물을 안아 자래우고있었다.…

송악산 고개길우에 다 해진 승복을 입은 녀승 한명이 나타났다.

짚신우에 먼지가 뽀얗게 올라앉고 걸승마냥 다 해진 승복을 걸친것으로 보아 멀리에서 왔다는것이 대뜸 한눈에 알렸다.

쓰고있는 송낙을 뒤로 젖히니 중년나이의 녀승의 모습이 드러났다.

먼길을 걸어서인지 누렇게 뜬 얼굴에는 피곤에 늘어진 주름살이 가득 덮였지만 두눈만은 총기가 반짝이였다.

그는 다름아닌 해명이였다.

해명이 이렇듯 송악으로 걸음을 하게 된것은 응통이 불행을 당했다는 불길한 소문때문이였다.

해명이 고개길을 내려 송악성으로 들어가려는데 성문앞에는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행객들이 길게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고있었다.

해명이 눈을 들어보니 형리들이 성문앞에 떡 버티고서서 한명, 한명의 행객들의 짐을 뒤지고 몸을 수색하고있었다.

《무슨 일인데 저기 형리들이 행객들을 단속하는가요?》

해명은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아낙네에게 물었다.

《에그, 무슨 중대한 옥사가 터졌다는지.… 이거 닭이나 한마리 팔려고 성안으로 들어가려다가 해를 보내겠군.》

닭둥구리를 안은 촌녀인은 시간이 한정없이 흐르는데 화가 나는지 이렇게 푸념하였다.

《요즘은 하루밤 지나면 사람을 잡아다 죽여버리니 어디 맘편히 살겠나요.》

촌녀인의 푸념이 여기까지 와닿자 뒤에 선 한 중년의 사나이가 겁먹은 눈길로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거 입부리를 조심하슈. 거 아무 말이나 망탕하다가 남들도 같이 피해를 보겠수다.》

《말이야 바른대로 요즘 세상이 살기가 편한 세상이나 말이예요. 스님, 한번 대답해보시오. 서로 갈라져 싸우다못해 제 사람까지도 잡아죽이니 이 세상이 부처님의 교화를 받는 세상이 옳은가 말이웨다.》

《불심만 굳건하면 부처님이 살펴줄것이니 곧 좋은 세상이 찾아올것이오이다.》

해명은 그들에게 이렇게밖에 말해줄수 없었다.

촌녀인은 코를 훌쩍거리며 한탄하듯 말하였다.

《에그… 그날이 빨리 와야겠는데… 이번 옥사란것도 사실은 애매한 사람을 잡는것이 아니고 뭣이웨까.…》

《무슨 옥사인지요?》

해명이 이렇게 묻자 중년의 사나이가 촌아낙을 대신하여 조심히 입을 열었다.

《스님을 믿고 말하니 절대로 말을 내지 마시우다. 여기 송악의 동시전행수가 적국과 내통한 죄로 잡혀갔다오.》

해명은 소스라쳐놀랐다. 동시전의 행수라면 응통이가 아닌가. 그럼 응통이 불행을 당했다는 불길한 소문이 사실이였단 말인가.

《그 행수의 이름이 무엇이오이까?》

해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니 중년의 사나이가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응통이라고 전도가 유망한 젊은이오이다. 얼마전에 왕태수의 원정군을 지원하여 승전을 이루는데 큰 공적을 쌓았다고 명성이 자자했었는데 그만 하루아침에 적국과 내통하였다는 죄를 쓸줄이야…》

해명은 순간 눈앞이 아찔하였다.

응통이가 옥에 갇히다니… 아니, 그 말을 믿을수가 없어. 절대로!

해명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성문입구로 무작정 달려갔다.

오가는 행객들을 단속하던 형리들이 재빨리 해명의 앞을 막아섰다.

《승려라면 도첩을 보이시오.》

해명은 발걸음을 멈추고 야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대들은 누구길래 도첩을 보이라고 강박하는거요?》

《수상한자들을 잡아들이라는 대왕님의 어명을 받고 나온 길이오이다.》

《어서 도첩을 보이시오이다.》

그들이 막무가내로 요구하니 하는수없이 도첩을 꺼내서 보일수밖에 없었다.

해명의 도첩을 본 형리들은 삽시에 눈이 커졌다.

비록 녀승이라도 나한암의 암주 해명대사라면 패강류역은 물론 여기 송악에까지 학식과 재주로 명성이 자자했기때문이였다.

《해명스님이 옳으시오이까?》

해명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자들은 저희들끼리 머리를 모으고 수군거렸다.

해명이 더이상 지체할 겨를이 없어 자리를 뜨려고 하자 형리들이 앞을 막아나섰다.

《대왕님은 우리들에게 명망높은 승려들이 찾아오면 곧장 궁으로 뫼시라 하였으니 저희들과 함께 궁으로 가시오이다.》

해명은 심중히 생각하던 끝에 그들과 함께 궁으로 가기로 작정했다.

어차피 옥으로 가야 응통의 얼굴은커녕 들여놓지 않을것은 뻔한데 그럴바에는 궁예왕을 만나 간청해보리라 작정했던것이다.

해명은 그들이 이끄는대로 곧장 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해명은 내전으로 안내되여 궁예의 앞에 나서게 되였다.

태감이 마중나와 해명을 내전안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해명은 태감이 안내하는대로 여러개의 방을 지나 널직한 전각안에 들어섰다.

아마 그것은 궁예의 서재인듯 네벽이 경전으로 꽉 들어차있었다.

해명이 어리둥절하여 벽에 쌓여있는 경전을 둘러보고있는데 벽 한가운데 쳐놓은 휘장이 들쳐지며 한 사나이가 방으로 들어서는것이였다.

몸에는 누런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옷을 걸쳤고 머리에는 자황색 두건을 둘렀는데 한눈을 검은 비단천으로 싸맨것으로 보아 소문으로 듣던 궁예가 틀림없었다.

궁예는 해명과 얼마간 사이를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태감은 어느새 뒤문으로 사라져버렸는지 넓은 방에는 오직 그들 두사람만 서있었다.

해명이 두손을 합장하여 례를 표하자 궁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것으로써 인사를 대신하였다.

해명이 먼저 침묵을 깨였다.

《대왕님, 소승이 대왕님을 찾아뵙게 된것은…》

궁예는 해명의 말을 다 들어보지도 않고 손을 쳐들어 밀막더니 자리부터 권하였다.

《너무 불안해할건 없소. 여기에 찾아온 사연은 차차 듣기로 하고… 자, 어서 편히 앉으시오.》

해명은 송낙은 벗었으나 녀승의 몸으로 함부로 얼굴을 드러낼수 없어 면의를 쓰고 궁예와 마주앉았다.

궁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은 언제든 암주를 꼭 한번 만나보고싶어 사람을 띄우려고 하였소. 그런데 암주가 이렇듯 송악으로 올줄이야…》

《소승에게 분부하실것이 있소이까?》

해명이 긴장한 시선으로 주시하며 물어보자 궁예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 그저 암주의 학식을 존중하는 마음에서였지.… 나도 한때는 부처님을 모셨으니 암주와 같은 명망이 있는 승려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자는거요.》

해명은 궁예의 진의도를 알수 없어 마음이 불안하였으나 자기를 다잡고 궁예가 물어보는대로 대륙에서의 불교교파들간의 격론에 대해 설명하였다.

우선 궁예의 마음을 눅잦혀놓은 후에 응통에 대한 말을 꺼내려는것이였다.

궁예는 참을성있게 해명의 말을 다 듣고나서 한손을 쳐들었다.

《암주, 내 한가지 물을것이 있으니 숨김없이 말해주시오.》

해명은 여전히 두손을 합장한채 공손한 태도로 머리를 숙여보였다.

《어서 분부해주시오이다.》

《나는 이미전부터 암주가 발해땅에 연줄이 깊다는것을 들었소. 그것이 사실이요?》

해명은 궁예의 예상치 않았던 물음에 당황해졌다.

해명은 념주를 부지런히 헤아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왕이 언제 누구한테 그런 헛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다 랑설이오이다. 소승이 패강지역에서 살아 발해사람들과도 여러번 상종하였으나 특별한 인연같은것은 없나이다.》

궁예는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암주, 너무 긴장해하지 않아도 되오. 설사 발해사람들과 래왕이 잦은것이 무슨 흠이 되겠소?》

궁예는 이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해명에게로 다가왔다.

궁예는 례의 그 사나운 외눈으로 해명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실은 암주에게 한가지 청이 있어 이렇게 부른것이요. 어떻소, 암주? 짐은 지금 경전을 집필하고있는중인데 암주의 도움이 필요하오. 짐의 청을 받아들인다면 내 암주를 위해 여기 송악에 사원을 하나 세워주겠소.》

해명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소승은 대왕님이 소문으로 들은것처럼 그렇게 유능한 인재가 아니오이다. 더우기 대왕님의 경전집필에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것이오이다.》

궁예는 팔짱을 낀채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궁예가 경전집필때문에 해명을 붙잡아두겠다는것은 물론 다 위선에 불과했다. 그는 지금 강제로 해명을 붙잡아둘것인가 아니면 설복해야 하는가를 마음속으로 저울질하고있었다.

궁예의 기색을 조심히 살피던 해명은 주저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대왕님, 실은… 대왕님께 한가지 청이 있어 찾아온 길이니 소승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소이다.》

궁예는 해명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엇이요?》

《지금 옥에 잡혀있는 동시전상단의 행수 응통은 소승에겐 아들이나 다름없으니 너그럽게 살피시여 살려주시기 바라오이다.》

해명이 이렇게 간청하는 말을 들은 궁예는 놀란 눈길로 돌아보았다.

한참동안 침묵하고있던 궁예가 살기띤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암주와 인연이 깊다 해도 그건 절대로 안되오.》

해명이 놀라서 미처 입을 열지 못하는데 궁예가 여전히 표표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응통이는 나라의 수만금의 재부를 적국에 넘겨준 역적죄로 옥에 갇혀있소.》

해명은 경악하여 궁예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조사한데 의하면 그가 고의로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소. 하지만…》

궁예는 잠시 말을 끊고 소름끼치는 외눈으로 해명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사실이 어떻든 나라의 수만금의 재부를 적국에 넘겨준 죄는 나를 해치려는 역적죄라 할것이요.》

해명은 어떻게 하나 응통이를 구원해야 한다는 그 한가지 생각으로 궁예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대왕님, 한번만 살펴주소이다. 응통은 대왕님의 창업에 큰 공적을 세운 평양성의 유명한 검용장군의 아들이오이다.》

궁예는 해명의 말이 뜻밖이라는듯 외눈을 크게 떴다.

《대왕이 거병할 때 고구려재건의 기치를 들어 백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것은 바로 응통의 부친인 검용장군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던것이 아니오이까? 사람을 한명 살리면 9층불탑을 쌓는것보다 불심을 깊이 가지는 법이라… 통촉하여주옵소서.》

궁예가 성급하게 해명의 말을 밀막아치웠다.

《흥, 지금 세월엔 오직 무력을 쓰는자에게 천하가 돌아오기마련이요. 검용이 날 도왔다면 패강진의 무력을 내게 바치겠다고 약조한것뿐이요.》

《하오면 백성들의 정신도 힘으로 다스릴수 있다고 생각하시오이까? 대왕의 뜻이 그러하오면 어찌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사람들을 불러모으셨나이까. 검용장군이 대왕님을 적극 도와나서지 않았으면 패강이북의 고구려유민세력의 지지를 받으실수 있었나이까?》

궁예는 순간 자기앞에서 고구려의 넋을 이어 백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펴야 한다고 절규하던 검용의 모습을 그려보았는지 부르르 몸을 떨며 저도 모르게 외눈을 감았다.

이게 무엇인가. 하늘의 벌은 피할수 있어도 사람이 만든 화는 피할수 없다고 하더니 죽은 검용의 그림자가 이렇게 지꿎게 따라다닐줄 몰랐다.

과연 내가 그때 두근이를 시켜 검용을 없애게 한것이 잘못이였단 말인가?

그의 포부와 웅지가 두려운 나머지 검용을 해할 결심을 내렸으나 그가 죽은지 이미 여러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악몽이 사라지지 않고 항상 주위에 그림자를 던질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궁예는 속으로 이를 사려물었다.

그랬으니 어쨌단 말이냐. 예로부터 승자는 임금이요, 패자는 역적이라고 했다. 이젠 가슴속 한귀퉁이에 아프게 배겨 어두운 그늘을 던져주는 검용이라는 존재를 뽑아던질 때가 되였다.…

사실 궁예는 응통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솔직한 말로 응통은 이번에 라주에 대한 원정군의 보급지원으로 궁예를 크게 도운 인물이였다.

거기에 비하면 그가 잃은 재부라는것은 별로 큰것도 아니였다.

다만 이번 일로 왕건의 송악세력이 득세하여 자기를 릉가할가봐 우정 응통에 대한 사건을 크게 버르집어놓았을뿐이였다.

그래서 관나가 이번 일로 응통을 해치려고 날뛰는것을 우정 모르쇠를 하고있었다.

하지만 만약 응통을 죽이면 왕건의 반발은 물론 송악의 민심을 잃을가 걱정하고있던 찰나에 이렇듯 명망높은 해명의 간청을 듣게 된것이였다.

궁예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싶었다.

응통이 검용의 아들임을 알면서도 그를 처형했다는 비난을 받을바에야 해명의 청을 받아들이는것도 나쁘지는 않을것이다.

이제 응통의 일로 해명의 발목을 잡아맬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것으로 끝날수 없었다.

응통이 검용의 아들이라면 언제까지나 무한정 살려둘수가 없었다.

궁예는 자기앞에 꿇어앉은 해명을 내려다보다가 아까보다는 퍽 가라앉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암주, 손에 든 검만이 유일한 힘이라는 말이 아니요. 나라를 다스리는 힘은 바로 부처님의 교화와 통치자의 의지가 있어 가능한게 아니겠소. 그래서 나는 암주와 같은 명망높은 승려들의 도움이 필요하오…》

해명이가 입을 열려는것을 손을 쳐들어 막으며 궁예는 말을 계속했다.

《암주가 날 따르면 패강이북의 발해의 세력을 포섭할수 있게 해준 검용의 공적을 참작하여 응통을 살릴수도 있으나 이것을 거절하면 국법으로 다스릴것이요.》

한편 옥안에서 처형장에 끌려나갈 시각을 기다리고있던 응통은 별안간 사형에서 한급 감등하여 곡도로 귀양을 보낸다는 궁예의 어명을 받게 되였다.

그는 자기가 사형으로부터 귀양으로 감등된것이 해명의 희생의 대가라는것을 전혀 모르고서 곡도로 귀양의 길을 떠났다.

궁예는 해명을 《미록암》이라는 암자의 암주로 임명하였다.

미록암은 왕후 강씨의 전용암자였다.

궁예는 해명뿐아니라 나라안의 명망높은 승려들은 모두 궁성으로 끌어들이였다. 도선의 뒤를 이어 생불이라고 명성이 자자하던 석총도 국선이라는 명색으로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세상사람들은 어째서 궁예가 제 주위에 명망높은 승려들과 이름난 재사들을 끌어들이는지 그 리유를 알수 없었다. 과연 궁예가 자기의 말대로 경전이나 집필하기 위해서 이러한 황당한 일을 벌리였는가.

세상사람들은 그 해답을 세월이 흘러서야 알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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