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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회

제 2 장. 후삼국

9


드디여 왕건의 수군원정군이 송악을 떠나 바다길에 올랐다.

크고작은 백여척의 배에 수천명의 군사를 태우고 각종 군수물자를 실은 원정함대는 곧장 광주앞바다로 내려갔다.

후백제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궁예가 왕건의 원정함대의 공격을 눈치채지 못하게 전선을 들볶고있어 미처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는데 이렇듯 바다로 공격해올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있었던것이다.

북쪽전선에서 매일처럼 진행되는 후고구려군의 맹공격에 하는수없이 신라를 치기 위한 군집단을 전선에 돌릴수밖에 없었던 후백제는 부랴부랴 왕건의 수군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를 사방에서 긁어모았다.

즉시에 후백제의 함대가 출전하였다.

그러나 후백제의 함대가 궁예의 함선들을 쫓고있을 때 은밀히 남하해온 왕건의 원정군은 곧바로 광주앞바다에 상륙하여 수백척의 후백제함선들을 불태워버리고 유유히 금성일대를 타고앉았다.

당황망조한 후백제는 금성주변의 십여개 군, 현의 군사들을 모아 원정군을 격퇴하도록 하였다.

왕건은 이에 대처하여 광주에 오랜 부하인 능산(신숭겸)이 거느리는 천여명의 기병을 떨구어두고는 금성으로 내려왔다.

광주는 후백제군이 금성으로 진격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였다.

능산은 금성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적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고있었다.

그동안 왕건은 금성군과 그 주변일대를 점거하고 후백제군을 반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어놓았다.

적의 주력함대가 아군함대에게 발이 묶이워있는 기회를 리용하여 한시바삐 금성일대를 완전히 타고앉아야만 하는것이였다.

지금 왕건에게 있어서 제일 큰 난사는 역시 군수물자의 보급이였다.

능산은 왕건이 보내온 전령들의 전갈을 받고 광주에서 철수하여 금성으로 내려갔다.

왕건이 자리잡고있는 장막으로 들어선 능산은 한숨부터 쉬며 자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형편이 차츰 어려워지오이다. 우리가 가져온 군수물자가 바닥이 나고있소이다. 지원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패할지도 모르오이다.》

왕건은 무거운 기색으로 허리에 찬 장검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니 백제군이 더이상 죄여들기 전에 퇴각하여야 한다는 소리겠군?》

《어제밤 전투에서만도 삼백명이 죽었소이다.》

왕건은 마치 딴생각이나 하듯 시선을 다른데 주었다.

《조금만 더 버티여보세. 관나행수가 오령행수와 함께 군수물자와 군량을 싣고 출발한다는 기별이 왔으니 우리가 버티면 인춤 도착할걸세.…》

능산이 일어서서 하직인사를 하려는데 왕건이 어깨를 눌러앉히였다.

《성급해말게, 내가 자넬 부른것은 한가지 중요한 일을 맡기자는것일세.》

왕건은 이러면서 능산을 지도가 펼쳐져있는 탁자로 이끌었다.

왕건은 지도를 손으로 일일이 짚어가며 말을 꺼냈다.

《내 결심은 이렇네. 금성군을 차지한데만 만족하지 말고 내밀어 이곳 주위의 십여개 군, 현을 손아귀에 넣자는것일세. 말하자면 견훤의 등에 비수를 좀 깊이 박아넣자는것일세.》

능산은 깜짝 놀란듯 왕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 병력과 가지고있는 군수기재로써는 어림도 없소이다.》

《꼭 해야 될 일일세.》

왕건은 단호하게 잘라 말하였다.

한참만에야 왕건이 우선우선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적의 머리수는 걱정안해도 될것일세. 대야성을 함락하고 신라로 진격하려는 견훤의 꿈은 깨여지고말았으니까.… 지금 적군은 여러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사기가 저락되였네. 더우기 금성을 아군에게 빼앗겨 배후를 위협당하고있으니 크게 혼란되여있는 처지가 아닌가.…》

능산은 그제야 얼굴이 밝아지는듯싶었다.

《그럼 소장이 어떤 일이 있어도 백제군의 배후를 쳐서 견훤의 잔등에 비수를 깊숙이 박아넣겠소이다.》

《치중보급만 이루어지면 우린 반드시 승전할것이니…》

왕건은 능산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며 힘있게 말하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버티여야 하네.》

관나가 송악의 동시전상단의 오령행수와 함께 금성군을 향해 출발하려 한다는 소식에 접한 두근은 급히 철원을 떠나 례성강포구로 달려왔다.

이번 일을 통해 반드시 해상교역권을 독점하려는 야심에 차있던 두근에게 있어서 이 소식은 천만뜻밖의 소식이 아닐수 없었던것이다.

오령이 비록 어제날의 벗이였으나 지금은 상권을 다투는 적수가 된 이상 금성을 지원하는 일을 절대로 함께 할수 없다고 생각하는 두근이였던것이다. 그만큼 신신당부했건만 관나가 아비의 마음도 리해 못하고 이렇듯 송악의 상인세력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하고는 길게 생각할새도 없이 종주먹을 부르쥐고 달려온것이였다.

오령과 손을 잡고 금성으로 내려갈바에는 이번 일이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명색은 나라를 위한 싸움이라 하지만 아무런 리득도 얻지 못할바에야 거액의 재부를 하늘로 날려보내는 격이 되고말것이다.…

수송선단의 출항준비로 분주하던 관나는 별안간 불쑥 눈앞에 나타난 아비의 성난 모습을 대하고 아예 어리둥절해졌다.

《아버지가 여기까지 어인 일이시오이까?》

관나가 의아한듯 물어보자 두근은 대뜸 소리부터 질러댔다.

《이번 금성을 지원하는 수장의 자리를 이 애비가 어떻게 따낸것이길래 한마디 의논도 없이 제멋대로 결정하느냐?》

그제서야 관나는 아비가 무엇때문에 성이 났는지 짐작하고 쓰겁게 웃었다.

《아버지, 여긴 사람들의 이목이 많으니 조용한데 가서 이야기하시오이다.…》 관나가 이렇게 간청하는데도 두근은 리성을 잃고 소리질렀다.

《난 이번 일에 모든것을 걸었다. 그래 궁예왕이 우리에게 이번 일을 그저 맡겼는줄 아느냐? 금성에 대한 지원물자는 물론 궁예왕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내 재산이 절반이나 들어갔다.》

관나는 당황한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배군들과 상단일군들이 호기심의 눈을 반짝이며 모여드는 모습들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비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리성을 잃은 모습을 보니 필경 무슨 일이든 칠 잡도리였다.

계속 이러다가는 재미가 없으리라 생각한 관나는 좌우에 대고 눈짓했다.

얼마전에 그의 식객무사로 들어온 환선길, 환향식형제가 그의 눈짓에 따라 두근의 입을 틀어막고 관나의 숙소로 끌어갔다.

두근은 아들의 태도에 화가 독같이 치밀어올라 발광하였으나 무사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개처럼 끌려들어갔다.

사처에다 두근을 털어놓은 환선길형제는 관나의 지시로 조용히 물러갔다.

《너… 너, 이놈! 감히 아비에게 무슨 본때냐?》

성이 독같이 난 두근이 관나에게 달려들었다.

관나는 미친놈처럼 발광하는 아비를 밀어붙이며 위엄있게 소리쳤다.

《정신을 차리시오이다. 아래것들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하겠소이까?》

《이놈아, 네가 온전히 처신했으면 내가 이러겠느냐. 난 이번 일에 모든것을 걸었어.…》

관나는 쓰겁게 웃었다.

《알고있소이다. 궁예왕에게 막대한 재부를 섬겨바치고 또 철원의 궁성건설을 빙자하여 이번 일을 맡겨달라고 거래한것을 알고있나이다. 어디 그뿐이오이까? 아버지는 해상교역권을 독점하겠다고 모든걸 걸었지요. 이 아들의 목숨까지도 말이오이다.…》

두근은 깜짝 놀라 말뚝처럼 굳어져버렸다.

《궁예왕이 네게 뭐라고 말하더냐?》

두근이 당황한듯 물어보자 관나는 두눈을 부릅떴다.

《누가 말하든 이 모든건 사실이 아니오이까. 그래 아버지는 해상교역권만 중하지 이 아들의 목숨과 운명같은건 생각이나 해보셨소이까?… 하긴 아버지와 같은 시전상인들이 취할것이란 그 길밖에 없겠지요. 어차피 이번 일이 아니라도 아버지는 자기의 치부를 위해 새로운 전쟁을 요구할테니까.…》

두근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 내가 이 모든 재부를 관에 넣고 가겠니? 이건 다 널 위해서…》

《그만하시오이다.》 마침내 관나가 아비를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질렀다.

《아버지는 항상 절 위해서라고 입버릇처럼 외우며 그 어떤 비렬한짓도 서슴지 않았지요.… 모든것이 그 재부때문이지요. 그래 아버지가 원하는 그 모든 재부를 그러쥔다고 해도 상도를 어긴 죄의식은 어찌하오이까?》

두근은 버릇처럼 두눈을 쪼프리고 관나를 쏘아보았다.

《그래 넌 상도를 지켰느냐? 이 아비가 죄악을 저지른것만큼 너도 그에 못지 않게 죄를 덧쌓지 않았느냐?》

《그렇소이다. 그래서 한번 죄악을 더 저지를려고요.… 이번에 아버지의 옛 벗인 오령을 데리고가는것은 견훤에게 던져줄 먹이감이 필요하기때문이오이다. 이젠 알았나이까?》

관나가 이렇게 소리치자 두근은 한동안 아연하여 아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두근은 정신을 수습하고서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관나야, 넌 이 아비를 넘어 무서운 야수로 자랐구나.…》

금성으로 진격해간 왕건의 함대를 지원하기 위한 수송선단이 드디여 송악의 례성강포구를 출항하였다.

수송선단의 총책임자는 관나였다. 관나가 이끄는 수송선단에는 이밖에도 오령이 인솔하는 동시전상인들의 수송선들도 끼여있었다.

해상교역의 경험이 없고 배를 부려본 경력이 없는 관나는 연해를 따라 내려가다가 후백제국의 령해를 멀리 에돌아 금성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가지고있는 배들이라야 고작 연해를 오르내리며 장사를 하던 배들인것만큼 먼바다로의 항행같은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있었다.

하지만 관나는 속으로 한가지 계책을 꾸미고있었다.

그는 표면상으로는 송악의 동시전상인들과 손을 잡고 금성을 지원하는 수송선단을 인솔한다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딴 꿍꿍이가 있었던것이다.

후고구려의 수송선단이 연해를 따라 내려오다가 후백제의 령해를 에돌아 금성고을로 들어갈것이라는것은 세살난 아이도 다 알수 있는 자명한 일이였다.

아마 견훤이도 그렇게 짐작하고 미리 앞질러 배길을 막아섰을것이라고 생각한 관나는 후백제수군이 전혀 상상못할 곳으로 들어가리라 마음먹고있었던것이다.

이 계책이 성공하려면 어차피 견훤의 수군함대의 주의를 끌 희생물이 필요하였다. 하여 관나는 자기 속을 감추고 오령을 비롯한 송악의 상인세력을 찾아가 자기는 바다에서의 수송경험이 전혀 없으니 함께 손잡고 금성으로 가자고 하였다.

송악의 상인들은 거의다 옛날 왕륭의 수하들이였고 또 송악군 태수이며 아찬인 왕건이 지금 금성을 탈취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 악전고투를 벌리는것만큼 자기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있었던것이였다.

그는 이번 길에 금성에 대한 치중보급은 물론 자기의 중요한 경쟁대상인 송악의 상인세력을 제거하려는것이였다.

말그대로 이번 일만 뜻대로 된다면 일석이조인셈인것이다.

관나의 예견이 적중하게 들어맞았다.

사람이 좋은 오령은 아무 의심도 없이 관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오령은 등주에 가있는 응통을 불러오도록 하기 위해 외동딸 미령을 급히 당나라로 가는 상선에 오르도록 하였다.

미령을 통해 수송선단의 정확한 항로를 알려주고 도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것은 응통이 막대한 잡화와 약재 등을 수십척의 수송선에 싣고 등주에 가있으니 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때문이였다.

지금 오령의 수중에는 연해나 드나드는 자그마한 수송선밖에 없었기때문에 응통이 거느리는 선단에 큰 기대를 걸고있었다.

오령의 생각으로는 미령에게서 소식을 받으면 응통이 지체없이 등주를 떠나 곧바로 자기를 지원하리라 여긴것이였다.

응통이 이끌고간 수송선들은 먼바다항행을 위해 건조된 배들인것만큼 등주를 출발하여 금성을 지원하는 일은 식은죽먹기로 해낼수 있었던것이다.

오령은 연해나 드나드는 자그마한 수송선 열척에 군량과 여러가지 군수기재를 싣고서 관나를 따라나섰다.

관나는 오령에게 연해를 따라가다가 태안반도에서 배길을 꺾어 곧바로 남하하여 외연렬도와 길산렬도사이를 질러서 곧장 금성으로 들어가야 이번 계책이 성공할수 있다고 력설하였다.

태안반도의 코앞에 있는 가의도에서 만날것을 약속하고 오령의 수송선단을 한발 먼저 떠나보냈다.

해상에서의 장사경험이 있는 오령이 앞장에 서서 배길을 개척해달라는것이였다.

이것이 관나의 술책인줄 알리없는 오령은 열척의 배들로 이루어진 수송선단을 이끌고 서해의 남양만을 지나 계속 연해를 따라 내려가다가 배길을 꺾어 태안반도를 에돌아 가의도를 향해 배들을 몰아갔다.

그는 길산렬도를 지나 진도앞바다에서 응통과 만날것을 예견하고있었다.

관나의 수송선단은 아산만까지는 기본적으로 먼저 떠난 수송선단과 같은 항로를 리용하였으나 태안반도쪽으로 갈것처럼 하다가 곧장 당나라로 가는 배길에 들어섰다.

그는 비렬하게도 오령의 선단이 가는 항로에 대해 도처에서 정보를 흘려 후백제간자들의 귀에 들어가도록 교묘하게 책동하고는 자기는 비밀리에 출항하였다.

관나는 멀리 서해를 에돌아 가의도가 아니라 석도에 들려 음료수를 보충한 후에 거기서부터 진도로 가는 배길로 금성에 들어갈 생각이였다.

말그대로 오령이 이끄는 수송선단을 견훤의 먹이감으로 던져주고 자기는 여유작작하게 진도를 거쳐 금성군으로 들어가려는것이였다.

실지로 길산렬도와 외연렬도사이에는 후백제군의 함대가 도사리고있었다. 왕건의 계책에 넘어가 배길을 열어주었던 경험으로 하여 후백제의 함대는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있었다.

그들은 관나가 흘린 정보를 입수하여 오령의 선단의 정확한 위치와 항로에 대해 낱낱이 꿰고있었다.

후백제함대가 오령의 수송선들을 쫓고있을 때 관나는 텅 빈 바다로 군수물자를 날라 금성을 지원할것이였다.

이 일이 성공만 하면 관나는 그토록 가지고싶었던 해상교역권을 독점할수 있을것이고 장사에서 만만치 않은 적수인 송악의 상인들을 견훤의 힘을 빌려 제거할수 있으리라 생각하고있었다.

한편 가의도에 머물면서 뒤따라올 수송선단을 애타게 기다리는 오령에게 왕건이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지금 군사들이 변변히 먹지도 못하고 후백제군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 싸우기때문에 한시바삐 지원물자가 들어오지 않으면 패할것이라는 소식이였다.

사자의 입을 통해 들으니 위기도 이만저만한 위기가 아니였다.

화살도 다 떨어지고 창과 검같은 무기마저 변변히 남아있지 않은데다 그보다 더 어려운것은 원정군이 올 때 가져온 식량이 모두 바닥나서 군사들은 하루 한끼 주먹밥으로 연명하며 후백제군과 싸우고있다는것이였다.

이달 보름까지 군수물자의 지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금성군을 지켜낼 도리가 없게 되여 철수할수밖에 없을것이였다.

오령은 지금 관나가 어떤 술책을 꾸미고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못하고있는지라 그들이 가의도로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기다리던 주력선단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더이상 한정없이 기다리고만 있을수 없었다. 자칫하면 응통이와 약속한 기일을 어길것을 념려한 오령은 고민하던 끝에 자기가 거느리는 선단만이라도 먼저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가의도를 떠나려던 오령의 귀에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길산렬도쪽에서 후백제함대의 전함들을 보았다고 그곳에 갔던 어부들의 말을 들은 오령은 그제서야 비로소 눈앞에 들이닥친 사태를 알아차릴수 있었다.

관나가 늦잡는 리유가 바로 이것이란 말인가?!…

오령은 배신감에 이가 갈렸다.

어쩌면 이럴수가 있는가? 상대의 선의를 이렇게 원쑤로 갚는 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무리 장사에서 경쟁하는 처지라고 해도 상대를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사지판에 밀어넣는 관나의 비렬한 행위에 이가 갈렸다.

오령은 가슴을 치며 통탄했다. 그가 한가지 망각한것은 관나가 바로 비렬하기 그지없는 두근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였다.

자기의 상권을 지키고 남의것을 빼앗기 위해서는 친구의 가슴에도 서슴없이 칼을 박는 두근의 포악한 기질을 그대로 빼여닮은 관나였다.

오령은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이제라도 선단의 기수를 돌리면 나는 살수 있으나 그렇게 되면 후백제함대의 눈초리는 어디에로 쏠릴것인가?

이러한것을 모르고 항해하는 응통의 수송선단에로 후백제수군이 덤벼든다면 또 어찌할것인가?!…

이러한 생각에 오령의 가슴은 싸늘해졌다.

이제 얼마 안있어 응통이 수송선단을 이끌고 이쪽으로 올것이였다.

오래동안 고민하던 끝에 오령은 죽기를 각오하고 후백제함대를 유인하리라 결심했다.

설사 이 길이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고 해도 수많은 송악의 젊은이들의 운명이 걸린 길이기에 가기로 작정한것이였다.

오령은 죽으면 죽었지 응통이를 절대로 위험에 빠뜨릴수 없었다.

본의아니게 두근의 술책에 말려들어가 응통의 아버지 검용을 죽을고에 밀어넣었던 자기자신이였기에 비명에 돌아간 검용을 위해서라도 오령은 응통을 살리고 죽을 결심이였다.

가의도에는 련락을 띄울 자그마한 협선 한척을 남겨두고 선단을 이끌고 길산렬도쪽으로 항로를 잡은 오령은 지금 눈앞에 무서운 위험이 드리워있는줄 뻔히 알면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후백제함대를 향해 배들을 몰아가고있었다.

가의도를 떠나 반나절쯤 지나서였다.

갑자기 하늘에 검은구름이 덮이더니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폭풍이 일기 시작했던것이다.

경험많은 배사공들이 흔히 하백바람이라고 부르는 무서운 폭풍이였다.

륙로행상과 배길장사에서 막히는데가 없이 유능한 오령이였지만 갑자기 맞다들린 폭풍앞에서는 무력함을 통탄하며 하늘에 대고 빌었다.

이러한 폭풍에 맞다들리면 배건 사람이건 살아남는 법이 드물 정도였으니 오령이 당황해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무정한 폭풍은 열척의 자그마한 수송선단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산같은 파도가 덮쳐들고 무시무시한 태풍이 수송선들을 날려보내려는듯 기승을 부렸다.

난다긴다하는 송악출신 배사공들로 이루어진 선단이였으나 이러한 폭풍앞에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련 이틀동안 계속된 폭풍으로 세척의 수송선이 형체도 없이 부서져 바다에 가라앉았고 두척의 배는 어디로 밀려갔는지 종적조차 묘연했다.

남은 배들도 돛대가 부러지고 키가 부서지는 등 온전한 배는 한척도 없었다. 이러한 배들로 후백제의 함대가 도사리고있다는 길산렬도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언제 배를 수리하고 선단을 수습할 시간적여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오령은 예정된 항로로 선수를 돌리도록 했다.

이제 항로를 바꾸면 후백제수군의 주의가 등주에서 한창 오고있을 응통의 선단으로 향할수 있으므로 이렇듯 위험을 맞받아나갔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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