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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회

제 2 장. 후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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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수군기지가 자리잡고있는 등주는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또한 유명한 곳이였다.

발해만의 해안선을 따라 밋밋하게 흘러내리다가 불쑥 거부기대가리처럼 서해로 솟구쳐나온것이 바로 중원의 산동반도라면 거부기눈처럼 박혀있는것이 등주라고 할수 있었다.

등주는 한때 중원최대의 항구도시라고 평판을 들을만치 오랜 력사와 번영을 자랑하고있었다.

춘추전국 제나라시기에 벌써 인구가 10만에 달하는 대도시였으며 수, 당나라시기 최전성기에는 20만이 넘는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주요 해상교역장이 되였다.

등주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것은 수백년간의 분렬을 끝장내고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시기부터였다.

수나라를 세운 양견은 동방의 강국으로 떠오른 고구려를 멸망시킬 야망밑에 여기에 대수군기지를 건설하도록 하였던것이다.

하지만 등주를 떠나 고구려로 북상하던 수군함대는 서해에 들이닥친 폭풍에 수장되여 단 한척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제 아비를 독살하고 임금의 자리를 찬탈한 양광은 아비보다 더한 호전광이였다.

그는 등주에 대수군기지뿐아니라 함선건조장을 대규모로 건설하고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수백척의 대형함선들을 무어내도록 하였다.

수백만의 백성들을 부역에 끌어내여 장안에서 등주까지 도로를 닦게 하고 천여리를 오고가며 전쟁물자들을 나르게 하였다.

함선건조에 내몰린 수십만의 인부들이 고역에 시달리다가 전염병으로 무리지어 쓰러졌다.

이렇듯 수십만 백성들의 고혈의 대가로 등주에는 원망과 처절한 곡성속에서 든든한 성곽으로 둘러막힌 요란한 대도시가 일떠서게 되였다.

수나라 건국초기부터 수십여년간 수많은 인력과 공력을 들여 동방침략의 전초기지로 품을 들여왔으나 중원것들은 단 한번도 그 덕을 보지는 못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그뒤를 이은 당나라시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발해의 공격으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황페화되기도 하였었다.

하지만 동방침략에는 이렇다하게 이바지할수 없었으나 중원최대의 대교역장으로는 발전하게 되였다.

많은 인력과 공력을 들여 대도시와 정박장을 건설한것이 상업류통의 결과물로 나타난것이였다.

군대와 전쟁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해 건설된 정박장으로는 각국의 상선들이 밤낮으로 드나들었으며 수십만의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에는 신라방, 발해관으로 불리우는 외국의 무역중계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저자거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마디로 중원최대의 해상교역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것이였다.

특히 상인들이 때없이 오고가는 기회에 공, 사무역이 발전하고 신라, 발해 등 동방나라들과 국교가 밀접해짐에 따라 상인들의 해외진출이 본격화됨으로써 등주에는 신라인들의 거주지인 신라방, 발해사람들의 거주지인 발해관이 형성되는 판국이였다.

그중에서 신라상인들의 무역중계소를 겸하는 신라방이 유명한데 신라상인들이 수백명씩이나 거주하고있는 이러한 신라방들은 등주의 문등현으로부터 시작하여 양자강이북의 연해지방인 금주, 사주 련수향, 명주, 양주에 이르기까지 당나라 주요대도시들에 자리잡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력사에 동방의 해상왕으로 유명했던 청해진대사 장보고도 초시기에는 신라방에서 무역에 종사한것으로 시작을 떼여 나중에는 동서해의 모든 바다를 제패하는 해상왕이 될수 있었다.

이러한 신라방들은 또한 당나라의 정치정세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였다. 강력한 번진인 평로치청군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앞장선 인물들인 장보고와 정년 등은 다 신라방에서 무역에 종사하던 인물들이였다.

당나라에 진출한 신라사람들은 신라방들에 신라소 또는 아압소라는 행정기구들까지 차려놓고 당나라상인들과의 무역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업활동을 조정하군 하였다.

이러한 행정기구는 구당, 아압, 총관 등으로 불리우는 신라인들에 의해 관리되였는데 해마다 정월이면 신라방에 소속된 모든 상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명망이 높고 능력있는자들로 선출하군 하였다.

일단 구당, 아압, 총관 등 우두머리들을 선출하면 일체 아압소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당나라 연해지방들마다 설치된 신라방들이 본국과 당나라와의 무역중계소의 역할을 맡고있다면 아압소는 신라상인들과 당나라상인들과의 마찰과 분쟁을 조정하고 자국상인들의 리익을 도모하는 기구인셈이였다.

청해진대사 장보고가 자객에게 살해되고 나라의 제일가는 해상교역장인 완도의 청해진이 몰락한 후에는 당나라의 신라방들이 차츰 몰락기에 들어섰다.

더우기 《황소의 란》이후 혼란과 무질서가 란무하는 중원의 정치정세는 신라방들에 거주하여 무역에 종사하고있는 신라상인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양자강이북지역 연해에 자리잡고있던 여러개의 신라방들이 페쇄되고 많은 상인들이 미련을 접고 본국으로 떠나가버렸다.

그것은 신라가 쇠락하여 후고구려, 후백제 등으로 갈라져나간 여파가 직접적으로 들이닥친 사정과도 관련이 되였다.

거의 모든 신라방들이 페쇄되고 몰락하였으나 오직 등주에 자리잡고있는 신라방만이 아직까지 검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고있었다.

그것은 등주의 신라방이 새로 《고구려국》이라 선포한 궁예의 정치세력 즉 거액의 상업자금을 가지고있는 송악의 상인세력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고있었기때문이였다.

여기 아압소의 총관은 사문개의 뒤를 이은 능환이였다.

능환은 지금 아압소의 자기 방에 앉아 등주자사가 보내온 공문을 읽고있었다. 등주자사는 공문에서 당나라상인들이 신라의 비단을 사지 않겠다는 불매동맹을 맺고있으니 잘 알아서 조처하라고 장황하게 서술하였다.

능환은 위협절반, 회유절반인 공문을 서탁우에 내려놓으며 밀리는 한숨을 내쉬였다.

마저 읽지 않아도 그 결말은 너무나도 빤드름했던것이다.

등주자사는 로골적으로 거액의 뢰물을 요구하고있는것이였다.

능환은 이를 갈았다. 얼마전에도 울며 겨자먹기로 많은 뢰물을 섬겨바쳤는데 이렇게 불매동맹을 구실로 삼아 렴치없이 손을 내밀고있는 등주자사놈을 단칼에 베여버리면 시원할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신라방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이것을 없애지 못해 안달아하는 당나라것들이였다.

얼마전에도 연해에 나드는 해적들과 결탁한다느니 뭐니 하며 당치않은 트집을 걸어 거액의 돈을 앗아가고도 모자라 이렇듯 뒤에서 상인들을 부추겨 불매동맹을 맺게 하고는 또 돈을 요구하니 능환이 이를 가는것도 무리가 아닌것이였다.

능환은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수년간 공들여 쌓은 탑이 눈앞에서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있었던것이다.

내가 지금의 위치에까지 어떻게 올라섰던가.

사문개의 상단에 배속되여 신라를 떠난지가 벌써 여러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해적의 강탈로부터 상단을 구원한 대가로 사문개의 오른팔이 되여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이국의 풍토사나운 대지를 좁다하게 뛰여다니며 죽을번 한 일은 그 얼마이며 인간이하의 수모는 또 얼마나 당했던가.

이제는 좀 숨을 쉬는가 했더니 나라가 여럿으로 갈라져나가는통에 또다시 그 풍파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이러다가는 대상인이 될 꿈은커녕 쪽박을 차고 한지에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그는 도박밑천을 통채로 내거는 도박군의 심정으로 신라방의 마지막밑천인 대화어아금 오백필과 조하금 천필을 시장에 내다 풀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나라상인들이 작당하여 맺은 불매동맹이라는 거대한 얼음산과 맞다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다.

궁여지책으로 지금까지 크게 상종하지 않고있던 발해관의 총관인 여노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으나 그 역시 발해에서 들여온 진귀한 털가죽값을 터무니없이 깎으려드는 당나라상인들때문에 골머리를 앓고있어 도움을 줄수 있는 처지가 못되였다.

당나라상인들이 신라의 비단에 대해 불매동맹을 맺고있는 리유는 너무도 단순하고 유치한것이였다.

신라의 어아금과 조하금이 당나라의 비단보다 값이 비싸니 가격을 절반으로 낮추라는것이였다.

신라의 비단은 당나라는 물론 멀리 서역에까지 소문이 난 비단이였다.

옛날 삼국시기는 말고라도 수십년전까지만 해도 신라의 어아금, 조하금과 같은 비단을 서역상인들은 《동방인어의 눈물》 이라고 부르며 앞을 다투어 사갔던것이다.

삼국시기부터 중원의 비단과 짜는 방식에 있어서나 그 무늬의 새김과 질에 있어서 현저히 차이나는 신라의 비단은 옛날 비단의 나라라고 불리우던 고구려, 백제의 전통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아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세련되였다. 이러한 비단들을 지금까지 늘 거래해오던 가격에서 절반으로 낮추라는 요구는 완전히 생억지가 아닐수 없었다.

이것은 분명 신라방의 상인들을 망하게 하려는 당나라장사치들의 바르지 못한 심보가 그대로 반영된 요구였다.

아압소를 통해 가격을 낮출수 없다고 통지하자 당나라것들은 이렇듯 비렬하게도 불매동맹을 맺은것이였다.

어차피 신라상인들이 굴복하고말것이라고 약삭바르게 타산한것이였다.

지금 나라가 여러개로 분렬되여있으니 그 많은 비단을 도로 실어갈수 없을것이고 그냥 묵여둘수도 없는 진퇴량난의 처지라 아예 헐값으로 빼앗을 잡도리였던것이다.

능환은 머리를 싸쥐고서 눈앞에 닥친 이 위기를 극복할 방도를 모색하고있었다.

《지금 송악에서 상단이 건너왔는데 그 행수되는 사람이 총관님을 뵙자고 하오이다.》

가까이 부리는 차인이 들어와 아뢰는 말에 비로소 고개를 쳐든 능환은 짜증을 내였다.

《상단이 건너왔으면 려각으로 데려가면 그만인걸 어찌 아압소까지 데려와 이 성화이냐?》

《저도 그렇게 일렀으나 그 행수는 총관님을 잘 아는 사이라면서…》

능환의 질책을 받은 차인은 이렇게 얼버무렸다.

능환은 차인의 말에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자기와 안면이 깊은 상인이 있다는 소리에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던것이다.

《들여보내거라.》

차인이 분부를 받고 나간 뒤에 능환은 속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혹시 아버지의 옛친구가 아닐가.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도 장사를 하는 상인중에 국내에는 아는자가 있을것 같지 않았다.

문이 벌컥 열렸다. 나이가 스무살쯤 돼보이는 애젊은 총각이 방으로 뛰여들었을 때 능환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비록 세월은 흘렀어도 너무나도 낯익은 모습이였던것이다.

《형님, 나예요. 응통이예요.》

응통이 이렇게 소리치며 다가서자 능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팔을 벌리고 그를 맞았다.

《네가 응통이가 옳으냐? 원, 녀석두… 이젠 헌헌장부로 자랐구나.》

능환은 응통의 어깨를 어루쓸며 이 말만 곱씹었다.

여기서 이렇게 응통이와 만날줄은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지 못한 능환이였다.

《어떻게 여기 등주에까지 왔느냐?》

한참만에야 비로소 정신을 수습한 능환이가 이렇게 물었다.

《통지를 받지 못했나이까? 제가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통지를 띄웠으니 지금쯤이면 형님이 아시리라 생각하였소이다.》

《그럼 송악의 동시전상단 행수가 바다를 건너온다는 기별은 바로 널 두고 하는 소리냐?》

능환이 두눈이 휘둥그래져서 이렇게 되묻자 응통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렇소이다. 이번에 궁예왕의 어명으로 송악에서 짠 40새 흰 모직물과 30새모시들, 문방구와 우황, 인삼과 같은 많은 량의 약재를 싣고왔소이다.》

응통의 말을 들은 능환은 쓴약을 삼킨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흥, 거기서는 당나라에 뭐든 가져오면 쉬이 팔릴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일찌감치 꿈을 깨거라.》

《아니, 그건 무슨 말이오이까?》

응통이 놀라서 이렇게 물어보자 능환은 지금 신라방이 겪고있는 곤경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었다.

능환의 입을 통해 중원의 정치정세와 신라방에 거주한 상인들의 처지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은 응통은 낯색이 어두워졌다.

《우리가 짠 대화어아금이나 조하금과 같은 비단천들은 무늬씨실을 더 길게 띄우기때문에 엮음날실을 쓰는 중원의 문직비단들보다 무늬의 광택이 더 빛나며 금실, 은실의 빛이 더욱 어울려 화려하기 그지없어요. 그래서 당나라상인들이 앞을 다투어 사가군 하였는데 어째서 불매동맹까지 맺고 못되게 노는지 그 리유를 알수 없군요.…》

능환은 응통의 이런 말에 쓰겁게 웃었다.

《그걸 누가 모른다더냐. 우리네 비단이야 생사와 련사의 성질을 재치있게 리용하여 짠 겸포가 대부분이여서 문직기술에만 매달리는 이네들 비단보다야 얼싸하지.… 허나 당나라것들이 혼란으로 류통이 정지되였다는 구실을 대고 반값도 안되게 값을 치르겠다고 버티니 무슨 수로 이걸 막겠니?》

응통이 두눈을 똑바로 뜨고 능환이를 바라보며 정색하여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나서서 비단을 팔겠소이다. 정해진 가격보다 두배로 팔아 반드시 당나라장사치들의 거만한 코대를 꺾겠소이다.》

다음날부터 응통은 능환이와 함께 등주의 저자거리를 돌며 시장형편을 료해했다.

란리통이라 능환의 말대로 시장형편은 말이 아니였다.

더우기 당나라장사치들이 투기를 목적으로 질나쁜 비단을 마구 류통시키는통에 비단값이 많이 떨어진것은 사실이였다.

비단을 창고에 꿍져두고있어야 좀이 쓸고 언제 략탈당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신라방의 상인들은 반값에라도 넘기겠다는것을 응통이 능환을 시켜 가까스로 눅잦혀놓았으나 혼란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만 갔다.

하지만 당나라것들에게 양보했다가는 전례를 만들어놓게 되여 나중에는 그들이 하자는대로 움직일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것이였다.

응통은 분주히 뛰여다니였으나 등주의 비단불매동맹을 깨버릴 방도가 도무지 나지지 않았다.

이러한 때 신라방의 일부 상인들이 불매동맹에 굴복하여 반값도 안되게 몰래 비단을 넘기는 일이 벌어졌다.

자칫하면 그 본을 따서 너도나도 반값에 비단을 매매할수 있었다.

나중에는 능환이마저 맥을 놓고 반값에라도 넘겨 밑천을 놓치지 말자고 하는것이였다.

응통은 절대로 여기서 물러설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혹한 현실은 시시각각 그의 목을 조이고있었다.

마침내 응통은 이 혼란을 막는 방도는 오직 하나 신라방 상인들이 가지고있는 비단을 제가 다 사들이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응통의 결심을 알게 된 능환은 놀라서 펄쩍 뛰는것이였다.

《너 지금 제정신이냐? 내겐 네가 요구하는 거액의 자금을 변통할데도 없거니와 설사 있다고 해도 내주지 못하겠다.》

《형님, 형님도 시장형편을 봐서 잘 알지 않나요? 비단값이 반값으로 떨어진것은 바로 당나라것들이 질나쁜 비단을 마구 류통시켰기때문이예요. 이제 조금만 버티면 우린 제값을 고스란히 받을뿐아니라 잘하면 이전보다 비싸게 팔수 있어요.》

응통의 말에 능환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네가 여기 형편을 잘 몰라서 그래. 우린 지금 당나라땅에서 당나라것들과 힘내기를 하고있어. 나도 눈에서 불이 일지만 어쩔수 없구나. 어쨌든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비단을 반값에라도 팔아야 한다.》

응통은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난 죽어도 당나라장사치들에게 비단을 반값에 넘길수가 없어요.》

능환은 응통의 고집에 혀를 내둘렀다.

《그럼 네가 가져온 물건들을 제값에 팔면 될게 아니냐? 어째서 시키지도 않는 일을 자칭하여 화를 입으려느냐?》

응통은 어성을 높이며 나섰다.

《형님이 몰라서 내게 묻는거요? 신라방 상인들이 제각기 행동하니 비단을 모두 거둘수밖에… 우리가 뿔뿔이 헤쳐지면 좋아할것은 당나라것들밖에 없어요.》

능환은 응통의 고집에 지친듯 벌컥 화를 내였다.

《난 비단상인이 아니니 어디서 돈을 변통하든, 훔치든 네 마음대로 해라.》

능환에게 더이상 기대할수 없다고 생각한 응통은 혼자서라도 돈을 변통할 생각으로 저자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막상 저자거리에 나와서니 앞이 막막하기만 했다.

어디서 돈을 변통하며 어떻게 비단을 팔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응통이 비단을 몽땅 사서 당나라것들과 맞서려는것은 그것을 팔 자신이 있어서도, 뚝 삐여진 판로가 있어서도 아니였다.

남이 겪는 곤경을 리용하여 횡재를 하려고 날치는 당나라것들의 버릇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만약 이것이 실패하는 경우도 타산해보았다. 그러면 응통은 한순간에 모든것을 잃을것이였다. 그러나 절대로 포기할수는 없었다.

이것은 단지 비단 몇필을 사고파는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기때문이였다.

오늘은 비록 비단에 극한되지만 그것이 나아가서 대외무역 전반에 끼치게 될것이였다.

그러나 그가 만나본 상인들마다 자금을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것이였다. 이제 남은 방도는 등주까지 타고온 상선들을 저당잡히든 팔아버리든 해서라도 자금을 변통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마지막수였다. 만약 응통이 실패한다면 고국으로 돌아갈 길조차 막히게 되고 설사 돌아간다 해도 배값은 어찌한단 말인가.

락심하여 어깨가 축 처진 응통이 터벅터벅 신라방으로 돌아오자 그를 기다리고있던 능환이가 위로술을 마시자면서 자기가 단골로 다니는 취향루라는 술집으로 끄는것이였다.

여느때라면 술마시는것을 삼가하는 응통이였으나 능환이가 끄는대로 순순히 따라나섰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내려갈것 같지 않았기때문이였다.

그들이 술집에 들어서니 키가 작달막하고 몸이 가로 퍼진 중년의 사나이가 웃는 얼굴로 마중나왔다.

능환이가 응통에게 그를 소개하였다.

《자, 이 사람이 이 술집의 주인이니 인사를 해라.》

이제 갓마흔에 들어선듯싶은 술집주인은 직업상특성으로 해서인지 교활하게 눈을 굴리며 허리를 겁석거리는것이였다.

그의 행동거지나 인상이 척 보기에도 사람을 많이 속여 제 욕심을 채우는 형의 인물이라는것이 확연히 드러나있어 별로 호감이 가는 사내가 아니였다. 응통은 능환이가 시키는대로 술집주인과 시답지 않게 인사를 나누고나서 웃층으로 올라갔다.

능환의 말에 의하면 술집주인은 여기 등주자사의 먼 친척으로 여간 안면이 넓지 않다는것이였다.

능환이도 주인의 소개로 큰 거래를 여러번 실현시킨적이 있다고 자랑하듯 말하는것이였다. 사연은 어떻든간에 응통은 술집의 주인사내가 별로 눈에 차지 않기에 그저 잠자코 있었다.

능환이가 단골로 다니는 술집이여서인지 술군들로 초만원을 이루었으나 주인이 마음을 써서 조용한 방 한칸을 내주기까지 하는것이였다.

《자, 어떠냐?》 능환은 등주포구가 열린 창문을 통해 한눈에 바라보이는 위치에 응통을 눌러앉히며 말했다.

《참말 막혔던 가슴이 시원히 열리는것 같아요.》

응통이 상쾌한 바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이렇게 말하자 능환은 크게 웃었다.

《그뿐이냐? 내가 이 술집을 자주 찾는것은 바로 여기서 저기 포구가 한눈에 보이기때문이다. 난 언제나 저기 포구를 바라보면서 언제면 저것이 내것이 될것인가를 꿈꾸군 한단다.》

《그래서 언제쯤이면 형님의것으로 되는가요?》

응통이 능청스럽게 물어보자 능환은 씩 한번 웃고나서 제자리에 가앉았다.

《글쎄… 한 오년쯤이면 될가.… 어쨌든 조만간 등주를 내 손아귀에 넣고야말것이니 두고봐라.》

《등주의 상업계를 쥐고흔드는 대상이 되려는가요?》

응통이 이렇게 물어보자 능환은 대바람에 고개를 저었다.

《고작 등주의 상업계를 쥐자고 내가 안달복달하는줄 아느냐?》

《그럼 형님의 뜻은 무언가요?》

응통이 놀라서 이렇게 되묻자 능환은 야심으로 두눈을 번뜩이였다.

《내가 왜 장사길에 들어선줄 모를테지.…》

《그거야 형님이 송악에 있을 때 저에게 말하지 않았는가요, 상인이였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 상계에 나서겠다고.…》

《흥… 고작 돈이나 몇푼 번다고 내 운명이 뭐가 달라지겠느냐? 완산의 대상인이였던 내 부친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하면서 난 반드시 권력을 이 손에 쥐겠다고 갈망했다. 내가 장사군이 된것은 돈을 벌자는게 목적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것을 얻기 위해서다.》

응통은 사나와진 능환의 기색을 조심히 살피며 입을 열었다.

《하루아침에 가문이 적몰된 형님의 심정은 나도 잘 아나이다. 허나… 뒤를 돌아보며 슬퍼할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며 장엄한 미래를 맞이할줄 알아야 하오이다. 장사를 하는것도 옳바른 명분과 도리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지난날의 감정은 모두 잊으시오이다.》

능환은 응통의 앞에서 너무 쉽게 제 속을 드러내보였다고 생각했는지 곧 자기를 수습하였다.

《그런 따분한 이야기는 접고 술이나 마시자꾸나.》

그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는새에 사환이 들어와 술단지와 료리들을 상우에 벌려놓는것이였다.

《저… 홍매를 불러올가요?》

술상을 차린 사환이 이렇게 넌지시 물어보자 능환은 기다렸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는것이였다.

《홍매뿐아니라 예쁘고 노래 잘 부르는 애를 하나 더 불러오너라.》

능환이 기생들을 불러들일 잡도리인것을 보고 응통이 얼른 그를 만류하려들었다.

《형님, 몇년만에 만난 회포를 나누려는데 기생까지 불러들일 필요가 있겠소이까? 후날 일이 잘되면 내가 그때 한턱 쓰지요.》

응통은 이제야 갓 스물을 넘긴데다 기생집출입을 삼가하는터에 더우기 낯설은 타국에서 기생들과 마주하기가 싫었던것이다.

《원, 이렇게 고지식하다구야.… 네 나이엔 녀자를 알아야 하는거야. 송악의 동시전행수나리가 당나라기생을 데리고 놀았다고 누가 흠을 잡겠니?》

《그래도 난 별로 흥미가 동하지 않으니 형님이나 생각이 있으면 불러들이세요.》

응통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자 능환의 두눈이 대뜸 커졌다.

《이것 봐라. 설마 했더니 그새 혹 녀자를 봐둔게 아니냐?》

응통이 얼굴을 붉히자 능환은 껄껄 웃어제쳤다.

《내 짐작이 옳은게로구나. 그렇다고 이 좌석을 물리겠니? 바다건너 당나라에 왔으면 그래도 화류계의 논다니계집구경을 한두명 해보는것도 나쁘지는 않아.》

능환의 말이 여기까지 와닿자 사환이 제꺽 끼여들었다.

《그럼요. 그렇지 않아도 제법 인물인 계집이 하나 들어왔으니 나리님들을 모시라고 하겠소이다.》

사환의 말에 능환은 뜻밖이라는듯 입을 열었다.

《아니, 언제 그런 계집이 들어왔다는게냐? 이름은 뭐게…》

《며칠전에 여길 다녀간 하남지방의 장사군들이 기방에 넘긴 계집이오이다. 제법 인물이여서 사들였는데 년이 어찌나 독한지 노래 한번, 웃음 한번 짓는 법이 없소이다. 무엇이 가슴에 맺혔는지 지금까지도 눈에서 독기가 빠지지 않는군요.…》

사환은 짐짓 우는소리를 해가며 은근히 손님들의 감질을 돋구는 수법을 쓰는것이였다.

호기심이 잔뜩 동한 능환이 어서 데려오라고 거듭 재촉해서야 사환은 마지못한 걸음으로 나가더니 잠시후에 기생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비록 연지를 바르고 곱게 단장하였으나 기생들의 얼굴에 하얗게 바른 분밑에는 수심이 짙게 내비치고있었다.

방에 들어서자바람으로 능환에게 담뿍 안기는것은 그와 친한 홍매라는 기생인 모양이였다.

다른 기생은 홍매와는 달리 성격이 차분하고 얌전한 처녀였다.

능환이와 응통의 시선은 아까 사환이 말한것도 있고 하여 그 처녀에게 가닿았다.

처녀의 눈은 정말 비애로 가득차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가싶어 응통은 곧 시선을 거두었으나 능환은 능란한 당나라말로 기생에게 말을 걸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기생이 대답 한마디 없이 계속 침묵만 지키고있자 홍매가 안타까운듯 대신 대답했다.

《이 애의 이름은 성문이예요.》

《그럼 고향은?…》 호기심에서인지 능환은 지꿎게 캐여물었다.

《아유, 이 애는 벙어리나 마찬가지이니 더이상 물어보지 마세요. 여기 술을 마시러 오셨지 호구조사를 나왔는가요?》

성미가 활달한 홍매가 야유하듯 말하며 능환의 무릎에 앉아 억지로 술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좋아, 오늘은 마음껏 취해보자구.》

능환은 성문이라는 기생의 래력을 캐여묻는 일을 단념하였는지 응통의 옆자리에 억지로 앉히고 호기있게 술잔을 들었다.

응통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녀인들과 싱겁게 지분거리기보다는 화제를 장사이야기로 돌리기 위해 능환에게 말을 건네였다.

《발해관에 가서 한번 도움을 청해보는게 어떨가요?》

응통이 이렇게 말하자 흥이 깨진 능환은 대바람에 손을 저었다.

《발해사람들도 곤경을 겪기는 우리나 마찬가지이다. 교활한 당나라것들이 공정한 거래를 하자고 하겠니? 얼마전에도 도움받을 일이 있어 발해관에 가서 여노자총관을 만났댔는데 당인들과의 모피거래가 잘 안되는것으로 하여 골머리를 앓고있더구나.》

《그 여노자총관은 어떤 인물이오이까?》

응통이 이렇게 묻자 능환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를 어떻게 알겠니? 나이는 한 쉰댓쯤 되는데… 사람이 풍채가 좋고 서글서글한 사람이라는것밖에 아는게 없다. 참, 그렇지.… 내 듣기로는 발해에서 변방무역에 오래 종사하던 상인으로 여기 등주에 온지는 몇달밖에 안된다고 하더라만…》

《그럼 형님은 발해상인들과의 거래를 활발히 벌리지 않았는가요? 그들은 동족의 상인들인데 서로 합심만 하면야…》

응통의 말이 여기까지 와닿자 능환은 손을 홰홰 내저었다.

《흥, 동족이라… 말은 좋지만 서로 갈라져서 상종하지 않는지가 언제라고… 장사에서 흥정은 있어도 우정은 있을수가 없어. 너도 이 당나라에서 동족이니 뭐니 하는 그 잘난 감정을 내세우지 말아라. 그러다가는 큰 랑패를 보기 쉽단다.》

능환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내 너한테만 얘기하는것이니 절대로 내색하지 말아. 지금 등주자사를 비롯한 당나라것들은 발해사람들을 여기서 내쫓을 궁리를 하고있단다. 한마디로 눈밖에 난셈이지.… 그러니 우리가 동족이니 뭐니 하면서 상종하다가는… 이젠 알겠니?》

능환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응통은 더이상 발해상인들에 대한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하는수없이 응통은 다른 화제로 돌아갔다.

《형님, 등주의 장사군들과만 거래를 할것이 아니라 장안이나 다른 큰 도시들에 비단을 가져가 직접 먹일 생각을 해보았는지요?》

응통이 이렇게 묻자 능환은 큰일이나 난것처럼 펄쩍 뛰였다.

《이 애,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중원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어. 그런 큰 상단이 움직였다가는 등주경내를 벗어나보지도 못하고 쫄딱 털리고말게다.》

《여기 포구에만 들어박혀있으면 물건을 어찌 팔수 있겠소이까. 설사 도적들에게 털린다 해도 한번 모험을 해봐야지요.》

능환은 응통의 생각이 천진하다는듯 로골적으로 비웃었다.

《네가 여기 실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네 생각대로 모든 일이 척척 풀리면 얼마나 좋겠니? 우선 여기 등주를 벗어나 장사를 하재도 등주자사의 승인을 받아야 하겠는데 그놈의 입을 씻어주려면 비단값이 통채로 들어갈게다. 너도 란리를 겪으며 행상을 다니는 처지니 도적들이 들끓고 무법천지인 이 땅에서 행상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게다.…》

그래도 응통은 지지 않고 뻗대였다.

《형님의 말이 옳을수도 있어요.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해보겠소이다. 형님 말대로 나는 고국에서 무수한 위험을 겪으며 행상을 해본 경험이 있기때문에 두렵지 않거던요.》

《무슨 소릴 하는거냐? 여긴 고국보다 더 위험한 곳이야.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중원각지를 떠돌다가 무슨 화를 입으려고 그러니? 아마 누구도 널 따라나서자고 하지 않을게다.》

응통은 그 말에 더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아유, 여기에 왔으면 술을 마시고 색을 즐겨야지 밤새도록 장사얘기만 하겠어요?》

홍매가 아양을 떨며 술을 권하자 능환이 껄껄 웃었다.

《허, 이년이 감질이 난게로구나. 장사군이 장사얘기를 하지 전략을 세우겠니? 좋아, 오늘은 마음껏 놀겠으니 술도 치고 노래도 불러라.》

기생들에게 호기있게 소리친 능환은 응통에게 술잔을 들어보였다.

《자, 시름도 풀고 회포도 나눌겸 술이나 마음껏 마시자꾸나. 오늘 하루만은 따분한 장사얘기를 그만두고 우리 맘껏 취해보자.》

능환이가 이렇게 말하며 눈짓하니 홍매가 기다렸다는듯 일어나 취흥을 돋굴 노래를 부르는것이였다.

성문은 여전히 말 한마디 없지만 아까보다는 응통을 여겨보는 눈빛이 달랐다. 그는 홍매의 노래에 맞추어 단정한 자세로 비파를 뜯었다.

《비파곡 〈십면매복지계〉로군.…》

중원의 물을 어지간히 먹은 능환이가 흥이 돋아 노래가락을 흥얼거렸다.

노래를 다 들은 다음 응통은 술 몇잔을 마시고는 피곤하다는것을 구실로 능환이만 떨구어두고 밖으로 나왔다.

포구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할뿐 밤이 이슥해서인지 호젓한 밤길에는 사람그림자도 보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술을 먹어서인지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했는데 밖에 나와 바다바람을 쏘이니 일시에 취기가 깨였다.

숙소를 향해 저자거리를 걷고있던 응통은 누군가가 뒤를 따르는 기척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집집의 대문마다 내건 등불들이 골목길을 비치고있어 길이 훤히 내다보였으나 골목길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는가싶어 돌따서서 걷는데 분명 뒤에서 자박자박 발걸음소리가 들려오는것이였다.

순간 응통은 머리칼이 쭈뼛이 일어서고 오한에 살이 떨리는것이 감촉되였다. 이거 내가 타국의 밤길에서 말로만 듣던 귀신을 만나는게 아니야?

마음을 단단히 도사려먹은 응통은 오던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발볌발볌 소리를 죽여가며 걸을수록 귀전에 정체불명의 발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는것이였다.

발걸음소리는 분명 자기가 돌아든 골목길에서 나는것이 분명했다.

잠시 걸음을 멈춘 응통은 크게 숨을 들이그어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나서 홱 몸을 돌쳐 골목길로 돌아들었다.

《악!-》 나지막한 비명소리와 함께 자기 못지 않게 놀란 그림자가 풀썩 주저앉는것이였다.

응통은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껏 자기뒤를 쫓아온것은 취향루에서 만난 성문이라는 기생이였기때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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