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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회

제 2 장. 후삼국

4


후백제군 장수 금달은 약 천여명의 군사들과 함께 간신히 몸을 빼여 달아났다.

괴양읍성앞에는 수천명의 시체가 한벌 뒤덮이였다.

각 부대의 장수들이 로획한 무기와 말, 식량바리, 포로들을 이끌고 천천히 읍성으로 들어섰다.

가장 많은 전리품을 얻은것은 괴산을 가로질러 괴양읍성을 타고앉은 기습군이였다.

적의 후방을 치고 치중병을 사로잡은터이라 수백여대의 수레가 성문이 미여지게 들어왔다.

제일 나중에 읍성으로 들어선 원표가 대바람에 말에서 뛰여내려 마중나온 왕건의 손목을 덥석 잡아쥐였다.

《왕태수, 이 우둔한 놈을 용서해주시오. 그대의 지략이 이처럼 출중한것은 나라의 큰 복이요.》

왕건은 겸손하게 웃으며 원표의 말을 물리쳤다.

《과찬이오이다. 여러 장수들이 힘껏 싸워 이룬 승전이오이다.》

원표는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이로 보나 공적으로 보나 손아래 무장으로만 치부했었는데 이렇게 지략이 출중한 인물인줄 다는 몰랐던것이다.

왕건의 뛰여난 용병술에 원표는 마침내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읍성에 들어서자바람으로 토굴에 갇혀있는 관나를 구원하였다.

관나는 포로로 잡혔던 수치를 이기지 못하여 놓여나오자바람으로 철원으로 가버렸다.

싸움이 끝나 열흘가량 별다른 적정이 없었다.

후백제군이 싸움에서 입은 손실로 하여 더이상 북상을 포기했던것이다.

왕건은 괴양성을 보수하게 하고는 충주를 거쳐 송악으로 개선하였다.

승전하고 돌아오는 개선대오를 궁예가 직접 성밖에까지 나가 맞이하였다.

궁예는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짓고 앞에 부복하고있는 왕건과 원표를 일으켜세웠다.

《장하다! 그대들의 용전분투로 나의 근심이 풀렸도다.》

궁예는 그들을 치하하고나서 말머리를 돌려 송악으로 돌아왔다.

궁예는 곧 조정회의를 열고 왕건과 원표에게 각각 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왕건의 추천으로 이번 전역에서 큰 공적을 세운 오령의 상단은 후고구려국의 도성인 송악의 동시전을 장악할 특혜를 가지게 되였다.

동시전은 말그대로 동쪽에 자리잡은 시전으로 일찌기 상업이 발전한 송악의 상업중심지를 가리키는 말이였다.

력대로 송악의 동시전은 중원과의 대외무역을 독점하여왔다.

하여 응통은 왕건의 총애를 받아 동시전의 행수로 발탁되였고 중원과의 대외무역까지 관할할수 있는 상권을 가질수 있었다.

이것은 응통이 전장에 나가 특출한 능력을 보여준 결과였다.

한편 철원으로 돌아가있던 관나는 오령의 상단이 송악의 동시전을 장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통이 터져 두문불출하며 하루종일 술만 퍼마셨다.

지금껏 궁예를 왕으로 올려앉히고 시전권을 장악하기 위해 불철주야 수고를 아끼지 않고 뛰여다녔는데 이렇듯 어디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오령상단의 한갖 애숭이사환에게 패하고말았다는 생각에 이를 갈았다.

갖은 고생을 다하며 간난신고끝에 쌓아올린 성공탑이 한순간에 무너진듯 앞이 막막하기만 했다.

전장에서 살아돌아온 아들이 매일과 같이 술로 위안을 삼는다는 말을 들은 두근은 성이 독같이 나서 관나의 거처지를 찾았다.

아닌게아니라 관나는 술에 잔뜩 취해 속옷바람으로 쓰러져있었고 방안의 여기저기에는 빈 술방구리들이 나딩굴었다.

두근의 입에서 대바람에 거친 욕설이 터져나왔다.

《시라소니같은 녀석같으니… 그까짓 일에 타락하여 애비앞에서 추태를 부린단 말이냐?》

《아버님은 소자가 그깐 일로 타락하신줄 아시나이까. 소자는 분하여 억장이 무너지는것 같소이다.》

관나는 소리를 높여 아비에게 웨쳤다.

《무슨 일때문에 그러느냐?》

두근은 그제서야 화를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물었다.

관나는 자세를 바로하고서 자기 심중의 말을 아비에게 털어놓았다.

《아버님도 아시다싶이 궁예왕은 송악을 나라의 도읍으로 선포하고 아버님의 옛친구인 오령에게 시전권을 주었다 하나이다. 괴양에서 그의 상단이 큰 공을 세웠다고 일개 행상인이 벼락같이 시전상인이 되지 않았소이까. 어디 그뿐이오이까. 오령의 수하에서 사환으로 있던자가 동시전의 행수가 되고 중원과의 대외무역권을 손에 넣었다고 하니 이거야 어디… 결국 우린 그토록 공력을 들이고도 별치 않은 행상에게 밀린 격이 되였지요. 소자는 이걸 그냥 묵새길수 없소이다.…》

그러자 격분할줄 알았던 두근이 별안간 크게 웃는것이였다.

《하!… 난 또 무슨 큰일이 났는가 했구나. 오령이 송악의 시전권을 가지겠으면 가지라고 해라. 어쨌든 조만간에 그것도 내것이 될테니까.》

관나는 아예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아비를 향해 똑바로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롱담이 아니오이다. 도성의 시전권을 장악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 가문의 운명과도 관련한 중대한 일이 아니오이까?》

두근은 례의 사나운 표정으로 돌아가 관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누가 송악이 나라의 도성이 된다고 하였느냐?》

《?!…》

관나가 아비의 말에 놀라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자 두근이 정색하여 말하였다.

《네가 궁예를 아비앞에 세워주었으니 그를 잘 아는가 했었는데 지금 보니 큰 장사군이 되려면 아직 멀었구나. 그래 궁예가 왕륭의 터밭인 송악에 그냥 머물러있을것 같으냐? 남을 잘 의심하는 궁예는 왕건을 꺼려서라도 반드시 도읍을 옮길것이다.》

관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 그건 어찌 판단하고 하시는 말씀이오이까?》

《그래 내가 돈쓸데가 없어 철원성의 성곽을 높이 쌓고 시전행랑들을 짓는줄 아느냐?》

《그럼 철원을 나라의 도읍으로?…》

두근은 엄한 눈으로 아들을 굽어보았다.

《절대로 말을 내지 말아라. 궁예왕은 원래 신라왕족출신으로 입으로는 곧잘 고구려의 재건을 떠들지만 그것은 한갖 선전에 불과한것이다. 그가 송악을 나라의 도성이라 선포한것은 왕륭의 송악세력을 끌기 위한 기만이였고 이날이때껏 자기의 기반을 물색해왔던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송악이나 철원이나 신라왕족인 궁예왕에겐 매한가지가 아니겠소이까?》

관나의 이런 의아한 물음에 두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 궁예왕이 철원성에 들어와 널 볼모로 잡고 살아돌아갔던 옛날일을 벌써 잊었느냐? 우리 부자의 힘을 얻어 나라를 세운 궁예왕에게 있어서 철원성이야말로 왕업의 기반이고말고.…》

관나는 그제서야 깨도가 되여 고개를 끄덕이였다.

의뭉스러운 늙은이같으니… 결국 제 아들에게조차 이 일을 감추고있었단 소리가 아닌가?

사물을 보는 눈이 남다르다고 자부하는 내가 어쩌면 이렇게까지 어두워졌단 말인가?!…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철원을 떠나지 않는것이 다 리유가 있어서였다. 아버지가 많은 로력과 돈을 들여 시전행랑들과 덩치가 큰 건물을 짓고있는것을 의아하게 여겼었는데 이런 쪼간이 있었는줄 어찌 알았으랴.

《그러니 힘을 내서 일어서거라. 그깐 응통이라는 보잘것 없는 녀석에게 한번쯤 패했다고 해서 주저앉으면 다시는 널 보지 않을테다.》

관나는 쓰겁게 웃었다.

《아버님은 다는 모를것이오이다. 소자 지금까지 아버님의 인정을 받자고 얼마나 뼈를 깎고 살점을 저며가면서 애를 썼는지 아시오이까? 어렸을 때 형님들에게 아무런 리유도 없이 욕을 먹고 매를 맞을 때의 심정을 아시나이까. 심지어 집에서 부리는 종들한테 멸시를 당하면서도 소자는 내가 왜 그런 수치를 당해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했소이다. 차츰 자라면서 첩의 몸에서 태여난 서자라는 단 하나의 리유로 수모와 치욕을 당해야 한다는것을 알았을 때 소자의 심정이 어떠했는가 생각이나 해보셨나이까?》

관나가 이렇게 울분을 터놓자 두근이 벌컥 화를 내였다.

《그래서 내가 널 뒤를 이을 자식으로 내세워주고있지 않느냐. 내가 지금껏 마련한 재부와 권력을 다 너에게 물려주겠으니 지난날의 감정을 깨끗이 잊어버려라.》

아비가 격해서 소리치는데도 관나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여전히 제 말만 계속했다.

《…그래서 이를 악물었소이다, 반드시 아버님의 인정을 받겠다고요.… 이 손에 모든것을 움켜쥐겠다고 하늘에 맹세를 하였나이다. 그런데 이 모든 꿈과 노력을 검용의 아들인 응통이가 한순간에 수포로 만들줄은 생각도 못했소이다.》

두근은 검용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 관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럼 오령상단에 적을 두고있는 응통이라는 녀석이 검용의 아들이였단 말이냐?》

두근이 소리를 낮추어 묻자 관나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소자는 얼마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였나이다. 바로 소자에게 큰 수치를 준 응통이가 바로 아버님이 제거해버린 검용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이오이다.…》

《뭐… 뭐야?!》

두근은 벌떡 상반신을 일으켜 아들을 잡아먹을듯이 노려보았으나 관나는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이 아비의 무서운 시선을 태연하게 맞받았다.

《말해주소이다. 어째서 검용을 아버님의 손으로 제거했소이까?》

마침내 두근은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고 평상시의 침착한 태도로 돌아갔다. 그는 옷자락을 젖히고 아들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바닥에서 나딩구는 술잔을 들어 관나에게 내밀었다.

《술 한잔 다오.》

아들이 조심히 부어준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나서 술상우에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두근은 차거운 눈길로 관나를 굽어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검용을 왜 죽이지 않으면 안되였는가를 알고싶으냐?》

《오직 진실만을 말해주소이다. 어째서 아버님은 그를 해치였나이까. 그의 존재가 그렇게도 두려웠나이까? 아버님이 검용을 해치였기에 소자는 응통에게 빚진것이 아니오이까?》

관나가 울분에 잠겨 소리치자 두근은 흠칫 몸을 떨었다.

한참만에야 제정신을 수습한 두근이 음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쓸개빠진 놈… 지금까지 널 헛키웠구나. 그렇다. 검용을 해친건 그가 내 머리를 밟고 설가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이 모든건 다 네 앞길에 거치장스러운 놈들을 미리 치우기 위해 그것이 비렬한짓임을 알지만 일을 벌린게다. 그러니 이 아비를 리해하는가 안하는가 하는것은 다 네 생각에 달려있다.》

두근이는 잠시 말을 끊고 모순에 빠져 몸부림치는 아들을 굽어보다가 아까보다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넌 마음이 너무 여린게 탈이야.… 관나야, 이걸 명심해라. 뜻을 얻으려면 우선 네 마음부터 다잡을줄 알아야 한다. 남을 이기려면 먼저 자기자신부터 이겨야 하느니라. 무자비해라. 장사군에게 있어서 동정은 금물이다. 고통과 좌절로 울것이 아니라 너에게 고통과 좌절을 준 놈에게 그것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장사는 네가 생각하는것처럼 물건을 사고파는것이 아니라 경쟁자와 서로 죽일내기를 벌리는 전쟁판이나 다름없다는걸 명심해야 하느니라. 살아남아라. 이 싸움에선 살아남는자만이 승자이다.》

두근은 이렇게 아들을 신칙하고나서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간다온다 소리없이 사라져버렸다.

관나는 천천히 팔을 뻗쳐 술주전자를 잡아쥐여 숨도 쉬지 않고 꿀꺽꿀꺽 단숨에 비우고 벽에 내던진 다음 이새로 으르렁거렸다.

《아버님은 내게 많은것을 배워주었소이다. 살아남는자가 승자라는 말이 옳소이다. 이 아들은 아버님이 가르친대로 앞을 가로막는자는 가차없이 짓밟겠소이다. 설사 그가 벗이건 원쑤이건 내 앞길을 막아서면 용서치 않겠소이다.》


전란의 불길은 꺼질줄 모르고 뒤설레였다.

파멸적인 무시무시한 죽음의 그늘이 도처에 드리워져있었다.

농민들은 보습날도 대보지 못한채 속절없이 묵어가는 밭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평화로운 생활은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 없었다.

백성들은 차츰 진저리나는 이러한 처지에서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아무리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을 해보았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늘 울타리밖을 맴돌고있는것이였다.

더 많은 령토와 백성들을 차지하기 위한 궁예와 견훤이 같은 세력자들에게 눌리워 땅은 속절없이 시들어가고있었다.

지역적의의밖에 없는 싸움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로 죽어갔다.

내전은 수레바퀴마냥 쉼없이 돌아가고있었다.

궁예의 후고구려건국에 의해 충주, 청주, 당성, 괴양계선에서 북상을 저지당한 견훤은 급히 대야성을 공격하고 금성을 향해 창끝을 돌리였다.

견훤은 궁예의 세력을 잠시 그냥 내버려두고 옛 신라령토를 모두 씹어삼킬 결심이였다.

빈 허울만 남은 신라령토를 빼앗고 세력을 키워 다시 북상하려는것이 견훤의 야망이였다.

그러한 생각은 궁예도 가지고있었다.

패서에까지 발을 뻗친 궁예는 령토를 넓히겠다는 한가지 생각으로 사방 전선을 펼쳐놓았다.

이통에 죽을 고를 치르는것은 죄없는 백성들뿐이였다.

드디여 901년 가을, 궁예는 왕위즉위식을 요란하게 벌렸다.

궁예는 자기가 무력으로 점령한 모든 령토를 《고구려국》의 땅으로 선포하고는 전국에 이런 조서를 내렸다.

《이전에 신라가 당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기때문에 평양의 옛 서울이 묵어서 풀만 무성하게 되였으니 짐이 반드시 그 원쑤를 갚겠다. 나라안의 백성들은 그때의 원한을 가슴에 새겨두고 원쑤의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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