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려명
4
우주성이 황황히 부엌문을 열어놓은채 방으로 들어가자
방안의 불이 켜졌다.
《아니, 웬일이요? 무슨 책을 또 잊고 나가셨댔수?》
의아해지는 내인의 목소리가 울리다가 쑥 잦아든다. 잠시 있더니 부엌문이 열리면서 우주성과 옷차림을 수습한 안주인 그리고 그뒤에 며느리인듯싶은 젊은 녀인이 당황하고 황송한 낯빛으로 부엌마루바닥에 나와선 모습이 보였다.
식구가 들뿐인줄 알았는데?!…
《저… 어서…》
우주성이 문가에 나와 어줍은 미소를 띠우며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고나신
《안녕들 하십니까.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연구사동지가 한번 꼭 와달라고 초청하였기에 〈명령〉대로 이렇게 왔습니다.》
안주인과 며느리가 감격에 목메인 소리로
《아아, 이러지 마십시오, 어머니, 젊은 사람한테 이 무슨…》
우주성은 대뜸 방웃목에 올라가시는
《괜찮습니다.》
《구들이 찹니다. 이 아래목에 내려와 앉으십시오.》 하며 안주인과 며느리가 민망스런 표정으로 네활개를 펴고 자는 대여섯살났을 사내애를 맞들어 구석쪽으로 옮기려 하자
《아아, 놔두십시오. 〈왕〉님의 침전을 함부로 옮기면 되겠습니까? 곤히 주무시는데.》
환하게 웃으시는
《아니, 어쩌면 우리
두 녀인은 입을 하 벌리며 마주보더니 안벽에 정중히 모신
한쪽벽은 울긋불긋하게 장정한 각종 도서가 들어찬 책장으로 장식돼있고 웃쪽창문옆에는 이불장과 옷장이 놓여있었다. 갓이파리모양의 하얀 성에꽃이 핀 창문아래엔 자그마한 편수책상과 그옆에 텔레비죤수상기가 자리잡았다.
방안은 비록 좁았으나 바지런한 안주인의 성미를 말해주듯 알뜰하고 정갈하였다.
《온돌을 놓은지 오래돼서… 뜯어고친다 하면서두 제가 덜퉁하다보니…》
우주성이 면구스러운 기색을 지으며 변명투로 중얼거렸다. 신태영은 바늘방석에 앉은것만 같아 안절부절하며 몸을 궁싯거리였다.
《이젠 알만 합니다.》 하고
《연구사동지가 왜 지금까지 나를 집에 오라고 하면서도 오지 못하도록 〈지뢰원〉을 만들어놓고 차일피일 미루었는지.》
《예?》
우주성이며 신태영 그리고 두 녀인의 의아한 눈길이 서로 부딪쳤다. 그러지 않아도 금방석에 모시지 못할망정 차디찬 맨구들에
《바로 저기에 있는 각종 외문판원서들을 가져갈가봐 그랬지요?》
《예-에?》
모두의 눈길이 책장에 쏠리였다. 거기엔 우주성이 애독하는 중문, 로문, 영문판 도서들과 기술서적들 그리고 인기있는 장편, 중편소설들을 비롯한 각종 문예서적들, 과학기술잡지들이 종류별로 빼곡이 층을 이루며 정돈되여있었다. 책장은 우주성 외에 누구도 범접 못하는 《위수구역》이였다.
그제야 뜻을 깨달은 모두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꽃이 피였다.
《예, 옳습니다.》
시침을 뻑 따고 능청스럽게 대답올리는 우주성의 말에
《연구사동진 정말 간단치 않은 장서가입니다. 내가 제일 부러워하고
높은 지성과 사색이 깃든
《훌륭한 남편의 뒤에는 현숙한 안해가 있다고 오늘 연구사동지가 이렇게 나라의 귀중한 군사과학자로 될수 있은것은 다 어머니의 덕분일것입니다. 자식을 낳아키우느라, 남편의 뒤바라지를 하느라 모든것이 부족한 이때에 애면글면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아마 이 손이 마를새가 없었을겁니다. 그래서
녀인의 두볼로 뜨거운것이 흘러내렸다.
《어쩌면…
옷고름으로 눈굽을 찍으며 목멘 소리를 하는 안주인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하게 빛났다.
가정을 이루면 의례히 겪게 되는 평범한 이 나라 녀인들의 수고를 그 누가 이렇듯 살틀하고 세심한 심정으로 헤아려보며 따뜻이 위로해준적이 있었던가. 아마도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는
《그래 식솔은 몇이나 됩니까?》
스스럼없고 소탈한 인품에 끌린 녀인은 시종 즐거운 미소를 담고 말씀드렸다.
《예, 령감과 저하고 아들네 식구 셋입니다.》
《그러니 다섯이겠습니다?》
《사실 로친하고 둘이서 적적하게 살댔습니다. 그런데 지방에서 두루 연구사업을 하던 맏이가 몇달전에 갑자기 평양에 소환되여… 이젠 며느리얼굴도 자주 보고 또 손주녀석의 웃음소리도 들리고 해서 요즘은 정말 사는 재미가 있습니다.》
나라없던 세월에 태여나
미제를 괴수로 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끈질긴 군사적압력과 악랄한 경제봉쇄책동, 때없이 들이닥치는 자연재해로 간고한 식량난, 연료난을 겪으면서도
화기롭던 흐름이 약간 정지된듯싶은 방안분위기를 느끼신
《허허, 또 두벌자식얘기군요. 아까 부총장동지도 퇴근하면 꼼짝 못하고 포로병이 되여 손자가 〈이랴.〉하면 말이 되고 〈손들엇.〉 하면 벌벌 떠는 포로병이 돼야 한다던데…》
찬 구들바닥에 허물없이 앉아 집안사람들과 즐겁게 담소하시는
《부총장동지야 수백명 교직원들과
좀전에 하신
그런데 나는 이 옛 중대장이 이런 불편한 생활을 하고있는것을 모르고있지 않았는가?
그러고도 일군이라고… 내가 무슨… 과연 내가 무슨…
신태영은 번열이 나는것 같았다.
이렇듯 한없이 소탈하고 고결한
웃음소리 높던 방안에 부지중 숙연한 기운이 드리웠다.
《아니, 부총장동지, 왜 이러십니까?》
의아한 눈길로 자책에 젖어 축축해진 그의 눈을 바라보시던
《무슨 괴로운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
삼십여년전 전연의 한 소대장, 휴가, 결혼식, 성난 중대장, 찬비뿌리는 가을날, 자동차적재함에서 이사짐을 붙잡고 서있는 중대장, 그의 집웃방, 소대장의 꿀같은 신혼살림, 아래칸의 불편스러운 생활…
이야기가 끝났다.
고개를 떨군 신태영과 어색한듯 불깃한 낯을 외로 돌린 우주성을 바라보시던
《그러니까 그 중대장과 소대장이 지금 여기에 있겠습니다?》
《예,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을 못한다구 그 소대장이란 작자가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오늘 새벽 이렇게
《그래요? 하지만 지금은 또 얼마나 고상하고 훌륭합니까.
《용서해주십시오, 광성이 아버지, 어머니.》
《아니, 부총장어른, 어느 고망년적 일을 가지고…》
옷고름으로 눈굽을 찍던 안주인이 기겁하여 손을 젓고 우주성은 생각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중대장동지! …》
《부총장동지! …》
이글이글하는 눈길이 쩡 부딪치며 우뢰소리를 지르고 그예 녹아붙는듯싶었다.
《결국은 또 이렇게 한지붕밑에서 만났군요. 그런데… 이거 웃방이 없어서 어떻게 한다?》
그들의 진심어린 해후를 기쁘게 바라보시던
《웃방을 〈세〉내지 않아도 아마 더 친근해질겁니다.》
《예, 마음놓으십시오.》
《하하하!》
《호호호!》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난 오늘 연구사동지네 집에 왔다가 일거삼득을 하고 갑니다.》
《예?》
《첫째로는 벼르고벼르던 집구경을 한것이고 둘째로는 일시 소원해졌던 두 로병의 더욱 두터워진 친분관계를 본것입니다.》
《셋째 말입니까? 예, 그것이 기본인데 어머님과 낯을 익혔으니 일하다 목이 클클할 때면 아무때건 김치먹으러 올수 있겠다 하는겁니다. 그렇지요? 어머니.》
《아유,
《하하하.》
우주성일가의 따뜻한 바래움을 안고 집을 나서신
이따금 슬치는 바람결에 소나무가지에 무겁게 얹혀있던 흰눈이 푸실푸실 날린다. 만경봉너머 멀리 동평양쪽 하늘밑이 청보라빛으로 희끄무레해지고있다.
려명전야이다.
신태영은 푸릿한 미명속에 거연히 서계시는
매우면서도 신선한 공기가 감도는 산야를 바라보시며
《새날의 려명이 깃드는것을 보니
강성대국의 려명-그것은 미제국주의자들의 핵위협의 검은구름이 뒤덮인 암야속에서 전인미답의
《부총장동지, 그 휘황한 앞날을 앞당겨오기 위해 우리 이 한몸을 깡그리 태워갑시다!》
《알았습니다,
주체혁명위업계승의 력사적전환점에 서있는 이 시각 신태영은 불세출의 지인용을 겸비한 또 한분의
신태영장령은 끓어오르는 흥분을 누를길 없어 마음속으로 웨치였다.
《아,
×
날이 밝자 눈가래를 들고 밖으로 나온 우주성은 마당을 선뜻 칠수가 없었다. 정갈하고 순결무구한 흰눈우에 찍힌 뚜렷한 발자국이 눈뿌리를 뜨겁게 지지였다. 그것은 이른새벽에 눈길을 헤치며 몸소 집에 찾아오셨던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느새 일어났는지 손자녀석이 달려나와 굳어진듯 서있는 그의 팔을 잡으며 쟁쟁한 소리로 웨치였다.
《해가 솟아요, 해가!》
눈부신 광망을 뿌리며 만경봉너머에서 아침해가 솟아오르고있었다.
누리를 밝히는 그 붉은
《그래그래, 해가 솟는구나. 만경봉에 또다시
주체101(20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