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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안신호편



경력

• 1884년 11월 10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

• 1898년 서울 정신녀학교 입학, 졸업후 반일애국계몽사업에 참가.

• 1945년말 남포시녀맹위원장.

• 1947년 북조선인민회의 대의원, 중앙녀맹부위원장.

• 1948년 9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법제위원.

• 1964년 2월 사망.

• 1990년 조국통일상 수상.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쓰시였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안신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독립인사로서의 안창호의 파란많은 일생을 생각했고 생전에 그가 민족을 위해 바친 로고를 더듬어보며 감개무량해지는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잊지 못하시고 회고록에서 회고하신 안신호녀성, 그는 오늘도 우리 민족의 기억속에 살아있는 반일애국인사 안창호의 누이동생이다.

하기에 안신호라고 하면 그의 오빠인 도산 안창호부터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안신호는 오빠인 안창호라는 후광이 있어 더욱 존재감이 두드러졌던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인척관계나 후광만으로 값있고 빛나는것이 아니다. 하다면 무엇이 독실한 그리스도교신자인 그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값높은 삶을 누릴수 있게 하였고 조국통일상수상자로 인민들의 기억속에 영생하게 하였던가.


그리스도교신자가 녀맹일군으로


1945년 9월 어느날 남포시에 내려가 사업하고있던 파견원의 방으로 성경책을 손에 든 그리스도교신자인 한 녀성이 찾아왔다. 자기를 도산 안창호의 녀동생 안신호라고 소개한 녀성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안부를 정중히 물으며 일제를 쳐부시고 나라를 찾아주신 수령님에 대한 높은 존경과 흠모의 정을 표시하였다.

원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후 조국에 개선하시여 각지에 항일혁명투사들을 파견하시면서 도산 안창호의 녀동생인 안신호를 찾을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제발로 찾아왔으니 그 일군은 반가움을 금할수 없었다.

안신호를 찾았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의 나이가 지금 얼마이며 누구와 같이 살고있는가, 무슨 일을 하는가고 하나하나 물으시였다.

일군의 보고는 위대한 수령님께 깊은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안창호와 안신호에 대해 깊이 알게 되신것은 1927년 2월이였다. 당시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인 길림으로 가시여 조선혁명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시며 청년운동을 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느날 우리 나라 민족주의운동의 거물로 알려진 상해림시정부의 초대국무총리서리였던 안창호가 길림에 찾아와 시국대강연을 한다는것을 아시게 되였다.

길림의 교포들은 《거국가》를 부르며 안창호를 국가수반 못지 않게 성대히 영접하였다. 《거국가》란 안창호가 외국으로 망명할 때 조국을 하직하면서 지은 노래이다.

조선사람들은 《거국가》를 사랑하듯이 이 노래의 창작가인 안창호에 대해서도 굉장히 존경하고 숭배하였다. 안창호의 인품과 실력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대통령감》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길림의 교포들로부터 성대한 영접을 받은 안창호는 강연에 출연해달라는 청년학생들과 독립운동자들의 요청을 받고 《조선민족운동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시국대강연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길림육문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이 강연회에 참가하시였다.

그의 류창한 웅변은 시작부터 청중을 그러쥐였다. 안창호가 동서고금의 력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섞어가며 조선민족의 출로에 대한 주장을 펼칠 때마다 장내에서는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져오르군 하였다.

안창호의 강연을 쥐여짜면 《민족인격완성론》과 리상향론이였다. 우리 나라가 뒤떨어진 나라로서 식민지가 된것은 인격과 수양이 낮은데 원인이 있는것만큼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일하고 서로 화목해지도록 각자가 자기 인격을 높여야 한다는것이 그가 강연에서 모를 세워 주장한 《자아인격혁신론》이였다.

그는 조선민족을 세계에서 정신적수양이 낮은 민족이라고 하면서 우리 민족이 적어도 미국이나 영국사람들만큼 때벗이를 해야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수 있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강연장의 분위기는 안창호의 이런 개량주의주장에 공감하고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감동끝에 눈굽을 찍었다. 이러나저러나 그의 강연은 한마디한마디가 다 애국정신으로 관통된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안창호의 발언에서 인민 특히 청년학생들의 투쟁의욕을 거세할수 있는 위험한 요소들을 발견하고 실망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더 참지 못하시고 안창호에게 세가지 질문을 종이에 써서 들이대시였다.

그러자 사태는 예상외로 번져졌다. 그처럼 도도한 기상을 가지고 장내를 쥐락펴락하던 안창호의 연설이 쪽지편지를 받은 다음부터 그만 김이 빠져버리였다. 안창호는 좀전까지 일사천리로 펴나가던 강연을 성급하게 마무리짓고 연탁앞에서 황황히 물러섰다. 실망한 청중은 도산선생이 왜 갑자기 저렇게 주접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차며 출입문쪽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수백명의 중국경찰들이 불시에 강연장에 달려들어 3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체포했다.

이 대검거사건을 조종한것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구니도모란자였다. 이리하여 연사인 안창호는 물론 독립운동자들이 한꺼번에 무리로 붙잡혀 길림독군서에 구금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반동군벌들이 안창호를 포함하여 많은 독립운동자들을 붙잡아간데 대해서 격분을 누를길 없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즉시에 《ㅌ.ㄷ》성원들의 회의를 여시고 붙잡힌 사람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대책을 진지하게 토의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밑에 《ㅌ.ㄷ》성원들과 선진적인 학생청년들이 안창호의 석방운동에 발벗고나서자 적지 않은 사람들은 리해할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기웃거리였다.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공산주의를 한다는 사람들과 지어는 혁명조직의 영향을 받고있는 청년학생들속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안창호리론에 대하여 서면질문까지 들이댄 사람들이 왜 이번에는 그를 구원하지 못해 그리 극성이냐 하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몰리해하고있는 그들을 설복하던 일을 더듬으시며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쓰시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안창호의 사상을 문제시하는것이지 안창호란 인간자체를 반대하는것은 아니다, 안창호도 조선사람이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애국지사인데 어떻게 그를 구원하지 않을수 있겠는가고 설복하였다. 나는 그때 수난당한 조선민족은 어려운 때를 당하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에 내세웠다.

내가 안창호의 강연을 반박한것은 그들이 사대주의적이고 민족허무주의적이며 개량주의적인 립장에서 벗어나 조국을 광복하는 성스러운 싸움에 더 적극적으로 투신해주기를 바랐기때문이였다. 우리가 민족주의자들과 사상투쟁을 한것은 그들을 타도하자는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쳐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반일의 기치아래 묶어세우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은 벌써 10대의 그 시절에 민족단합의 구심점으로서의 위인적풍모를 완벽하게 겸비하고계시였다.

안창호석방을 위한 군중집회가 있은 다음 길림시가지의 담벽과 전주대들에는 중국관헌은 일제의 간계에 속지 말고 감옥에 가둔 조선동포들을 하루빨리 석방하라는 내용의 삐라와 격문들이 나붙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조직지도밑에 《ㅌ.ㄷ》성원들은 중국의 여러 신문사들에 사회여론을 환기시키는 글도 써보내고 시내 청소년학생들과 군중들은 매일같이 독군서에 몰려가 감금된 사람들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는 항의투쟁과 시위를 벌렸다.

날로 더해만 가는 군중의 압력에 못이겨 반동군벌들은 20여일만에 안창호를 비롯한 구속자전원을 석방하지 않을수 없었다.

만약 제때에 안창호를 석방시키지 못했다면 그는 일제경찰의 손에 넘어가 조선으로 압송되여 독립운동은 고사하고 무서운 옥고를 치르었을것이였다.

이 나날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독립운동자인 안창호뿐아니라 그의 녀동생인 안신호에 대하여 알게 되시였다.

1884년 11월 10일에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도룡섬에서 농민의 딸로 출생한 안신호는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오빠 안창호를 부모처럼 여기며 성장하였다.

안신호는 열네살때에 오빠인 안창호를 따라서 서울에 올라가 정신녀학교에 입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았다. 정신녀학교 재학시절에 성적이 우수하고 성격이 활발하여 모든 면에서 오빠인 안창호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안신호는 서울에서 정신녀학교를 졸업한 다음 오빠 안창호와 함께 반일운동에 나섰다. 그러다가 오빠가 일제경찰에 의해 체포되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였다가 세상을 떠나고 반일투쟁에 나섰던 둘째아들이 일제에 의해 학살되자 《하느님》께 일본이라는 악을 징벌하고 나라의 독립을 이루게 해달라고 비는 독실한 그리스도교신자가 되였다.

예수를 믿고 《하느님》에게 빈다고 수난당하는 민족의 처지가 달라질수 없고 독립이 성취되는것은 아니였지만 연약한 녀인의 몸으로 마음속으로나마 국권이 회복되기를 바라고바란 그의 마음은 얼마나 기특한것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종교인들을 대하실 때면 언제나 그와 같은 애국적인 종교인들을 생각하시며 옳은 길로 이끌어주시기 위해 깊은 관심을 돌리군 하시였다. 하기에 해방후 조국에 개선하시자 곧 우리 나라 반일애국운동에서 큰 자취를 남기고 왜놈들에게 희생된 안창호의 동생 안신호를 찾을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던것이다.

안신호를 만났던 일군은 위대한 수령님께 안신호가 안창호의 누이동생, 그리스도교신자로서 민족주의자들과 그리스도교인들 그리고 녀성들속에서 일정하게 이름이 있고 활동성이 있다고 보고드리였다.

그의 말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안신호를 잘 키워야 하겠다고, 안신호에게 우리의 건국로선을 잘 해설해주어 그가 남포시내 그리스도교인들과 녀성들을 건국사업에 동원하는데 앞장서게 하여야 하겠다고 이르시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안신호녀성을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는 역군으로 키우시기 위하여 남다른 관심을 돌리시며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여러모로 미숙한 그에게, 그것도 그리스도교신자에게 남포시녀맹위원장의 책임을 맡겨주시였는데 이것은 세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직 당의 건국로선에 대하여 모르는것이 많고 정치적으로 미숙한 그를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 제1차확대위원회를 비롯한 주요회의에 참가시켜 정치적안목을 넓히고 사업방법을 터득하게 하시였다.

1946년 2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할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조선 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 대표들과 함께 남포시녀맹위원장인 안신호도 이날의 력사적인 회의에 불러주시였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후에는 그를 몸가까이 불러 만나주시였다.

그이의 환하신 존안을 뵙는 순간 안신호는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자기 가정의 최대의 소원을 풀어주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감사의 정을 금치 못하며 큰절을 올리였다.

지난날 안창호오빠가 드리지 못한 인사까지도 합쳐 백번천번 큰절을 드리고싶은것이 당시의 그의 심정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갑다고 하시며 그간 건강하였는가고 다정히 물어주시였다.

이어 그이께서는 자리를 권하시고 남포시녀맹위원장이 건국사업에 힘쓰고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소탈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리스도교신자라고 하여 나무라지나 않을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순간에 정화시켜주시는 말씀이였다.

너무도 소탈하고 다심하신 그이의 말씀에 감격을 금치 못해하며 안신호는 어려움을 잊고 장군님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고있다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애로되는것은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안신호는 모르는것이 많아서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있다고 말씀드리였다.

그러자 수령님께서는 모르는것이야 배우면서 하면 된다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이윽고 화제를 돌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번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는 회의에 참가하니 소감이 어떤가고 물으시였다.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많은 애국자들이 피를 흘렸고 눈을 감지 못한채 타향에 묻혔는데 드디여 우리 인민정권이 섰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섰습니다.》

아마 그 시각에 안신호는 나라의 독립을 일일천추로 갈망하며 심신을 불태우던 오빠와 반일애국의 길에서 희생된 둘째아들 생각에 더더욱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을것이다.

자기의 진정을 이렇게 털어놓은 안신호는 평범한 종교인인 자신을 국사를 론하는 회의에 참가시켜주신 위대한 장군님께 무슨 말로 감사를 올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연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시면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로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지식인, 상기업가, 종교인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인민의 참다운 민주의정권이기때문에 인민정권을 수립하는 회의에 응당 애국적인 종교인도 참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남포시녀맹위원장이야 일본놈들에게 오빠인 안창호선생도 잃었고 아들도 잃었으며 지금은 새 민주조선건설을 위하여 높은 애국심을 가지고 헌신하고있지 않는가고 하시며 안창호선생은 나라의 독립을 념원하여 활동한 반일애국자였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과시 하늘같은 도량과 인덕을 지니신 위대한분이시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저도 모르게 이런 심장의 웨침이 터져나왔다. 해방전 나라의 해방을 위해 크게 해놓은 일도 없는 오빠를 반일애국인사로 내세워주시는 그 하늘같은 믿음에 목이 메였고 그리스도교신자가 된 자기를 나라의 정사를 토의하는 회의에까지 참가시켜주신 그 은정이 고마워 눈굽을 적셨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나라가 있어야 진정한 신앙의 자유도 있다고 하시며 종교인들도 모두 새 조국건설에 떨쳐나설데 대하여 가르치심을 주시였으며 그의 가정생활에도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어느 한 시인은 사람은 희망이 있는 한 젊어지고 실망과 더불어 늙고 사라진다고 하였다.

해방과 함께 북조선에 펼쳐진 현실은 안신호에게 새로운 희망과 생의 활력을 안겨주었다. 더우기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남포에 내려간 안신호의 안색은 날이 갈수록 밝아졌고 단아한 조선치마저고리차림으로 종교인들과 녀성들을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워졌으며 왕년의 우아한 기품이 되살아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청춘의 활력을 되찾고 새 조국건설에 헌신하는 그를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창립되였을 때에는 북조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내세워주시였으며 인차 중앙녀맹부위원장의 책임적인 사업도 맡겨주시였다.

해방된 조국에서의 한 그리스도교신자의 인생전환은 참으로 놀라운것이였다.

하기에 당시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저마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정치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수 없는 특별한 정치라고 탄복하면서 조선의 통일은 반드시 장군님의 치하에서 이루어질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던것이다.

참으로 안신호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믿음은 한 독립인사에 대한 뜨거운 경의와 련결되여있었으며 그의 누이동생을 옳은 길로 이끌어 삶을 빛내여주시려는 숭고한 의리심과 잇닿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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