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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최일천편

오늘도 신미리애국렬사릉에서


최일천은 해방이 되자마자 정치활동에 참가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체의 노력으로 동방문화사를 꾸려놓고 《동방신문》을 발행하였는데 미군정의 통치하에서도 반일투쟁만화를 찍어내여 청소년들을 반제반일정신으로 교양하였다. 신문은 미제와 반동들의 탄압으로 얼마 발행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최일천은 1946년 9월 신한민족당과 조선혁명당, 신한민주당을 비롯한 여러 정당들이 통합되여 신진당이 결성된 후 신진당 중앙위원회 부장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당을 대표하여 민주주의독립전선,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민족자주련맹 등에 관여하면서 려운형, 홍명희, 김규식, 리극로 등과 손을 잡고 민주력량의 단합과 조국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48년 4월 남북련석회의를 계기로 이를 반대하는 반동분자들을 당내에서 축출하고 당대표들이 련석회의에 참가하도록 하였으며 유엔결의에 의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미군철거와 민주주의통일정부수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해방되자 그는 세 아들을 의용군으로 전선에 내보내였다. 그날 그는 세 아들을 불러앉히고 《이제부터 너희들은 김일성장군님의 전사다. 이 영예를 깊이 새기고 언제나 용감하게 싸워라. 혹시 장군님을 뵙게 되거든 이 아버지는 오가자시절처럼 영원히 장군님을 따를것이라고 말씀올려라.》라고 당부하였다.

최일천은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서울에 남아 사업하다가 행방불명되였다. 그가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자기의 신념과 지조를 굽히지 않고 떳떳하게 살았으리라는것은 의심할바 없었으나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다보니 그의 행방을 알수가 없었다.

그의 안해는 전쟁시기 남편과 헤여진 후 그의 생사여부도 모르고 지내다가 남편때문에 들씌워지는 박해를 견딜수 없어 전후에 남아있는 자식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먼길떠나 소식없는 자식을 찾는 어버이의 심정으로 오랜 세월 최일천의 행방을 찾고 또 찾으시였다.

1966년 8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에서 출판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받아보시게 되였다. 집필자의 이름은 최형우라고 되여있었다.

책을 보시던 그이께서는 내용을 신통히 잘 아는 사람이 썼다고, 그런것을 보아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쓴것 같다고 하시며 그때 최일천이라고도 부른 최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이름을 최형우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그는 《ㅌ.ㄷ》에도 관계하고 신문사지국에서도 일한 사람인데 글재간이 있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후 정주에 살고있던 최일천의 누이로부터 최형우가 최일천이라는것이 확인되였다.

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못내 기뻐하시며 일군들에게 자신께서도 찾아보겠으니 동무들도 최일천을 찾아보라고 간곡히 이르시였다.

그러던중 마침내 최일천이 1950년 11월 5일 원쑤들에게 체포되여 희생되였다는 가슴아픈 사실이 밝혀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처럼 믿고 사랑하시던 최일천의 희생소식을 들으시고 그의 투쟁공적에 대하여 회고하시며 그리움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 서울에서 발행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는 《ㅌ.ㄷ》를 조직한것을 비롯하여 내가 중부만주일대에서 활동할 때의 투쟁자료를 잘 반영한 귀중한 원전도서이라고, 그 책을 쓴 최일천은 《ㅌ.ㄷ》성원이였고 오가자와 공주령일대에서 활동을 잘하였다고, 그는 나의 충실한 동무였다고 하시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일천과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의 생을 빛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일천과의 연고관계와 그의 투쟁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시였다.

민족의 어버이의 추억속에 살아있는것, 그것은 인간이 한생을 통해 지닐수 있는 영광가운데서도 가장 큰 영광이며 혁명가, 통일애국인사가 누릴수 있는 행복가운데서도 가장 큰 행복이 아니겠는가.

1993년 4월 21일 미국에서 살던 최일천의 안해 유태정이 조국에 왔다. 자신과 최일천의 연고관계와 그의 공적에 대해 회고록에서 서술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최일천의 안해 유태정과 자식들이 미국에서 살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조국에 와서 아들들을 만나보도록 불러주시였던것이다.

그의 손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 1, 2권이 들려져있었다.

비행장에서 북에 사는 아들들을 만난 유태정은 수령님의 회고록을 내보이며 《위대하신 수령님께서 지금껏 너희 아버지를 잊지 않고계실줄은… 이걸 보구 내 죽기 전에 조국에 가서 위대하신 수령님께 감사의 인사라도 올려야겠기에 떠나왔구나.》라고 하면서 흐느껴울었다.

그날 최일천에게 수여된 조국통일상 상장을 받아안은 가족들은 곧 애국렬사릉으로 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최일천을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는것은 그의 투쟁공로로 보나 조국에 있는 아들들을 보아서도 해주어야 할 일이라고 하시며 이날 행사를 조직해주시였던것이다.

애국렬사릉에 이르니 《반일애국렬사 최일천동지》라고 씌여있는 묘비앞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화환과 제상이 놓여있었다.

다음날 최일천의 가족들을 친히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는 그들을 한품에 꼭 안아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최동주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시더니 곁에 두고도 늦게야 찾았다고 못내 아쉬워하시였다.

유태정은 《지금까지 남편의 령혼이 떠돌아다녔는데 이번에 애국렬사릉에 안장시켜주시니 너무도 감사해서 잠을 못 잤습니다. 이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수령님께서는 최일천이 깐지고 사업에서 책임감이 높았다고 하시고는 최일천의 뼈는 없어도 비석을 세우는것이 나쁘지 않소, 시신이 없는 사람이야 많지라고 조용히 뇌이시였다.

나라의 독립과 통일애국의 길에서 얼마나 많은 유명무명의 영웅들이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그이의 곁을 떠나갔던가.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전사를 잊지 못해하시는 그이의 고결한 사랑과 의리의 세계에 최일천의 가족들은 한없는 감사의 정을 금치 못하였다.

이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식사까지 마련해주시고 친히 음식들을 권하시였다. 그들의 생활형편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보시던 수령님께서는 나의 혁명생활중에서 가장 중요한 페지가 오가자생활이요, 오가자생활은 회고할것도 많소, 그중 최일천이와 관계되는것도 많소, 최일천이는 가만있기를 좋아하지 않고 글쓰기를 좋아했소, 그는 자기 가시아버지 변대우를 돌려세우는데서 역할을 많이 하였소라고 하시며 오가자시절을 방불하게 회억하시였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일천의 가족들에게 이제는 자주 만나자고, 아버지를 찾아오는것처럼 아무때나 찾아오라고 은정넘친 말씀을 해주시였다.

최일천을 잊지 못해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드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 수록된 항일혁명투쟁자료와 함께 그 필자인 최일천을 출판물에 널리 소개하도록 하시였으며 그의 자식들의 생활을 친어버이심정으로 보살펴주시였다.

이리하여 민족주의자로서 반일애국의 길에 나섰던 최일천,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 인생의 새 출발을 할수 있었던 최일천은 절세의 위인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와 더불어 조국청사에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되였다.

하늘에 태양이 영원하듯이 민족의 태양의 은혜로운 품에 안긴 인생도 영원한것임을 최일천의 한생은 말해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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