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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최일천편


남녘땅을 뒤흔든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해방을 맞은 우리 겨레의 가슴가슴은 20성상 백두산에서 항일의 혈전을 벌리시여 나라를 찾아주신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흠모와 그리움의 정으로 부글부글 끓고있었다.

특히 일전에 민족의 영웅 김일성장군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싸웠거나 또 독립운동의 길에서 김일성장군님의 위대성과 풍모에 대해 잘 알고있던 인사들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 사람들중에는 길림시절부터 김일성장군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흠모하며 그이의 동지로 투쟁해왔던 최일천도 있었다.

8월 15일 최일천은 왜왕의 노루비명같은 패망연설이 있은지 얼마후에 서울에서 조선혁명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서울에 은거해있던 옛 정의부와 조선혁명당계의 반일독립운동자 10여명이 조선혁명당사무실에 모여들었다.

최일천은 동료들에게 하나의 정당이라기보다 옛 정의부와 조선혁명당계독립운동자들이 모여 김일성장군환영준비를 잘해나가기 위한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조선혁명당간판을 내걸었다고 말하며 백로지퉁구리를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활달한 붓글씨로 10여장의 벽보문을 써내려갔다.

《만고의 영웅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거느리시고 래일(8월 16일)쯤에는 서울역에 개선하시게 된다는 소문입니다.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혁명 만세! 조선독립 만세!》

벽보문은 종로의 종각, 서울역전, 남대문, 광화문, 동대문 등 서울시내의 10여개의 번화거리마다에 나붙어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8월 15일 오후 무더위가 수그러드는 석양무렵 곳곳에서 수십명씩 몰켜선 군중이 벽보를 마주하고 환성을 올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날개를 단 《김일성장군 서울입성》소식은 온 서울일판에 삽시에 퍼져가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켰다.

다음날 이른아침부터 서울시민들은 서울역전광장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룡산철도공장 로동자들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서울입성을 환영한다는 글을 쓴 프랑카드를 앞세우고 북통을 치며 광장에 들어섰고 중학생들은 나팔을 불고 주변농민들은 농악을 울리며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다.

광화문거리, 종로거리, 남대문거리와 역전광장은 손에손에 기발과 환영구호판들을 든 시민들의 물결로 차고넘치였고 집집의 창문과 지붕우에도 사람들이 하얗게 덮이였다.

역전광장과 그 주변거리들은 수십만군중들이 모여들어 말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온 거리가 그대로 기쁨의 파도였고 감격의 바다였다.

8월 16일이후에도 서울역전광장은 매일같이 김일성장군님을 손꼽아 기다리는 군중들로 붐비였다.

중부 및 남부조선 각지의 도시와 시골에 있던 수많은 애국인사들도 해방된 새 조선의 령도자로 높이 모실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 뜨거운 인사를 드리기 위해 서울로 달음박질쳐오고있었다.

애국적인민들은 김일성장군님께서 반드시 서울에 개선하시리라 굳게 믿었고 장군님을 만나뵙게 될 력사의 그날만을 고대하고있었다.

애국적민주력량의 기세는 활화산처럼 끓어번졌다. 반면에 친일파, 민족반역자, 착취배들은 머리를 쳐들지 못하고 살구멍을 찾아 전전긍긍했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서울에 모시려는 남녘의 민심은 미군정의 침략적정체가 드러날수록, 정국의 혼잡성이 짙어갈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조국에 개선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평양에서 력사적인 개선연설을 하시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에는 명망있는 학자와 문화예술인들, 젊은 지성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평양으로 향하였다.

남녘의 각지에서는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시며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가지가지의 전설적이야기들이 나돌았다. 당시 남조선인민들은 김일성장군님에 대하여 알고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하였다.

서울의 한 지식인은 출판물에 《과연 김일성장군님은 어떠한분이실가? 년세는 얼마나 되시며 고향은 어디에 두셨을가? 나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리속에 그 어떤 전설적인 거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천하를 한손에 틀어쥐고 뒤흔드시던분이니 아마 50대는 훨씬 지나셨으리라. 무인답게 수염도 기르시고 위엄있는 체격을 가지셨으리라. 인민들에게 축지법이라는 신화적인 전법의 소유자로 알려졌고 일제의 백만관동군을 때려 이기신분이니 그이께서는 용모에서부터 보통인물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썼다.

이것은 민족이 낳은 절세의 위인에 대해 알고싶어하는 남녘민심을 대변하고있었다.

한편 이런 흐름에 역행하여 손때묻은 주구 리승만을 내세워 식민지통치의 지반을 닦으려는 미국의 책동이 로골화되였고 저들만이 애국지사이고 독립투사인듯이 허황한 요설로 인민들을 기만우롱하는 어중이떠중이들, 황당한 책들을 써내여 우리 인민의 해방투쟁사를 더럽히고있는 매문가들이 또한 서울장안을 돌아쳤다.

그러던 어느날 최일천은 종파분자들이 김일성장군님의 존함을 《金一成》으로 잘못 표기한것을 보게 되였다.

격분을 금치 못한 최일천은 책상을 두드리며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 김일성장군님의 존함을 왜정때 일부 어용출판물들이 오기한대로 쓴다는게 될말인가고 하면서 장군님의 존함을 정확히 표기할데 대해 추상같이 요구하였다.

이 일은 최일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혼잡속에서 진실을 밝히고 진정한 위인을 세상에 알려야 할 지성인의 력사적사명감을 깨달은 최일천은 려운형, 홍명희 등 애국인사들과 함께 연설, 강연으로 낮과 밤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통절히 느낀 최일천은 어느날 안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형세로 보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혁명투쟁자료들을 가지고 글을 써서 책으로 찍어내는것은 우리 지성인들앞에 나서는 가장 중대한 과제요. 나는 이 력사적과제를 곧 해결하기로 결심하였소.》

그리고는 지금껏 수집해온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활동자료와 그것을 수록한 신문, 잡지들, 만주일대에서의 조선독립운동자료들을 궤짝에서 꺼내놓았다. 그 자료 한점한점을 위해 간난신고를 겪으며 만주광야를 헤매였고 때로는 부엌바닥에 파묻은 장독안에 숨기기도 하고 먼길을 걸어 남에게 맡기기도 하면서 귀중히 보관해온것이였다.

그날부터 최일천은 필자가 되고 안해는 조수가 되여 절세의 위인에 대한 책자집필에 달라붙었다.

나라의 해방과 함께 서울로 입성하시는 김일성장군님을 남먼저 만나뵙겠다고 역전광장을 메우며 모여들었던 그 인민들에게 어서빨리 우리 민족이 낳은 절세의 애국자, 만고의 영웅이신 장군님의 혁명력사를 알려주고싶은 강렬한 열망은 그에게 침식을 잊게 하고 밤낮을 잊게 하였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집필과 동시에 최일천은 김일성장군님의 서울입성을 환영하는 준비위원회를 뭇기 위한 사업으로 뛰여다녔다.

최일천은 반일애국활동경력을 가진데다가 《림꺽정》소설련재로 일반군중과 상층, 좌익과 우익, 중간층에서도 명망이 높은 홍명희로 하여금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결성을 발기해나서도록 청원하였다.

홍명희는 《8.15가 참된 해방으로 되지 못하고 38°선에 의한 민족분렬로 말미암아 이남땅이 미군정하의 식민지로 역전되고있는 상황에서 이남민중에게 마음의 기둥을 세워주고 희망의 용기를 안겨주기 위해서는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를 무어야 할것 같다.》고 하면서 그의 제의에 쾌히 동의해나섰다.

그러면서 지금 정계, 사회계, 항간에서 김일성장군님에 대하여 알고싶어하는 열망이 드높아가니 그에 대한 해답으로 최일천이 집필하고있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가 하루빨리 출판되도록 해야겠다고 고무해주었다.

이리하여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결성사업과 최일천의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집필발행사업은 련관된 하나의 사업으로 추진되게 되였다.

어느날 명망있는 인사들이 모여앉은 자리에서 홍명희는 정계, 사회계, 항간에서 이러저러하게 풍문으로 떠도는 백두산의 전설적영웅이신 항일의 령장 김일성장군님의 년세와 고향, 풍모와 존함표기에 대하여, 그이의 혁명활동략력에 대하여 인민들에게 정확히 인식시키는 문제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하고나서 일전에 길림과 오가자에서 김일성장군님을 직접 모시고 활동하였으며 오랜 기간 수집정리한 김일성장군님의 혁명활동자료를 집대성하여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집필하고있는 조선혁명당 정치부장 최일천을 좌중에 소개하였다.

40대의 최일천이 일어섰다.

김일성장군님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알고있습니다. 항간에서 장군별전설이 퍼지고있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좌중은 확신성있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강구었다.

《저는 남만에서 독립군운동의 정의부에 참여하여 오동진사령의 서기로 있던 때인 길림에서부터 김일성장군님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분은 평양 만경대가 고향인데 지금은 33살 되셨을겁니다. 장군님의 부친은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선생님이신데 제가 오동진독립군부대에 있을 때 그분께서 자주 찾아오시여 지도해주셨습니다.

저는 김형직선생님께서 서거하신 후 김일성장군님의 지도를 직접 받았습니다.》

감회에 젖고 격정에 겨운 최일천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1926년 10월에 벌써 자주의 기치밑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직하신 일이며 자기가 오가자에서 반제청년동맹 위원장으로, 잡지 《농우》의 주필로 일하면서 그이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던 때의 일들에 대하여 상세히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이께 태양의 존함을 드린데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1930년에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시여 항일무장소조활동을 지도하신데 대하여, 1932년 4월에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시고 백두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려오신데 대하여 생동한 실례를 들어가며 렬거하였다.

최일천의 이야기에 끝없이 공감한 려운형, 허헌, 홍명희, 최원택, 백남운 등은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경모에 휩싸여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하루빨리 출판하자고 고무격려하였다.

인쇄출판문제는 서울시인민위원회의 힘을 적극 발동하여 내밀도록 합의했다.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의 결성사업과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집필발간사업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에 개선하시여 당창건위업을 실현하시고 온 민족앞에 개선연설을 하시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에 더욱 본격화되였다.

특히 이 시기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결성사업과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집필발간사업에 커다란 고무적힘을 안겨준것은 남조선의 광범한 로동자, 농민, 청년들을 망라한 대중단체결성대회들에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자기 조직의 명예의장으로 높이 추대하고 그이께 충성을 다짐하는 편지를 올리고 성명서를 발표하며 그이의 서울입성을 열망하는 결의들을 채택하는 앙양된 분위기였다.

이런 시대적열망에 부응하기 위해 최일천은 애국적인 정치활동으로 늘 바쁜 몸이였지만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집필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최일천에게 차례진 집필시간은 주로 밤뿐이였다. 앉은뱅이책상에 마주앉아 날이 새도록 집필에 전념하던 그에게 살림이 너무 구차하여 백미밥 한그릇 대접 못한 한스러움이 여직껏 남아있노라고 후날 그의 안해는 가슴아프게 이야기하였다.

두달후 제1집원고가 탈고되였다. 출판하는 일도 수월하지 않았다. 식솔많은 그의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고 《로력자》였던 손재봉기마저 팔고도 부족하여 친척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종이, 인쇄잉크, 륜전기와 조선문활자들을 마련하였다.

드디여 1945년 12월초 최일천의 변함없는 충정과 신념, 불같은 열정과 지성의 산물인 도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제1집이 세상에 나왔다.

자금사정이 너무 어려워 천부밖에 찍지 못하였는데 책은 서점에 나가자마자 순식간에 판매되였다. 사방에서 구독요청이 불같아 재판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여기에서 힘을 얻은 최일천은 제2집의 집필도 련이어 시작하여 얼마후에는 출판본을 내놓게 되였다.

생활에서 가장 고상한 향락은 의무를 수행했다는 기쁨이라고 하였다. 세계명인사에 전무후무한 조선민족이 낳은 걸출한 령도자의 혁명력사를 체험자, 증견자의 한사람으로서 책으로 출판해낸 그때의 최일천의 기쁨을 어찌 한두마디 말로 다 표현할수 있으랴.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출판은 남조선의 각계 인사들과 인민들의 열렬한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결성사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였다.

해방직후 복잡하고 어려운 정국에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가 출간되고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가 결성된것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해방조선의 유일한 령도자로 받들어모시고 통일된 강토에서 살아가려는 남녘인민들의 일치한 지향과 흠모심의 반영이였으며 반동세력에 대한 통일애국력량의 자랑찬 승리였다.

책의 파급력에 불안을 느낀 미국과 반동세력들은 서점을 페쇄한다, 책을 압수한다 하며 소동을 피웠다.

글로 적은것은 도끼로 찍어낼수 없다고 하였다. 남녘인민들은 놈들의 눈을 피해 책장이 보풀이 일도록 탐독했고 어떤 젊은이들은 전문을 옮겨베끼기까지 했는데 책은 류례없는 인기도서가 되였다고 한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는 위대한 수령님의 항일혁명력사를 수록한 력사문헌인 동시에 해방직후 남조선에서 민족적영웅, 절세의 애국자의 혁명업적을 소개선전하여 출판된 책인것으로 해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것이였다.

최일천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진행하신 혁명활동내용들을 생동한 력사자료를 가지고 활달하면서도 격정적인 필치로 뜨겁게, 열렬히 구사하였다. 책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신 내용, 첫 당조직 건설동지사를 조직하신 내용, 항일유격대를 이끄시고 일제와 결전을 벌리신 내용들이 수록되여있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2집에 있는 《종횡무쌍한 김일성 활동》에는 이렇게 씌여져있다.

《광막한 료하평원(오가자)에서 원기를 기르고 억센 송화강의 파랑으로 몸을 닦은 그는 동지 장아청(주 장울화)과 같이 무송의 산악지대로 돌아갔다는것은 서술한바이어니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김일성 오래동안의 침묵을 깨뜨리고 동천에서 높이 솟은 새별과도 같이 일본제국주의의 근본적타도와 동방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치를 선명히 하고 나타났다. …

무송, 장백은 워낙 산악지대요, 산림이 무성하여 천험의 요새로 이름이 있지만 김일성장군유격대를 공격목표로 서뿔리 달려들었던자는 일본군이고 만주군이고간에 넋이 떨어지고 혀를 깨물게 되였다. 남으로 가면 남만이 흩어지고 북으로 가면 북녘이 물러났다.

뿐만아니라 김일성에게는 남다른 포옹력이 있고 지모가 능하고 선견의 명이 있었다.

…어쨌든 김일성 활약은 그야말로 종횡무쌍하였으며 혁명운동선상에 끼친 공적이 허다하여 금일의 그의 이름은 세계사에 한자리를 잡아도 손색이 없게 되였다.》

최일천은 책의 마지막부분에 《항일련합군의 사령으로 국제적활동을 한데 대해서는 그 체계를 찾는대로 후일 다시 쓰려 한다. 〈구우의 한사람인 필자로서 무성의한 일이다. …〉》라고 썼다.

최일천은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2집을 낸 다음 다음권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활동을 전면적으로 서술할 계획이였으나 해방후 복잡한 남조선정치정세로 인하여 시간을 내지 못함으로써 아쉽게도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쓰시였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는 최일천의 미완성작이다. 그는 원래 2집을 낸 다음 계속하여 다음권을 쓰려고 하였으나 해방후 복잡한 남조선정치무대에 발을 들이민 후 시간을 내지 못하여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책의 다음권에서 필자는 우리의 혁명활동을 전면적으로 서술할 계획이였다고 한다.

최일천이 살아있었더라면 분명 그 책이 세상에 나왔을것이고 그렇게 되였더라면 우리의 혁명력사와 관련된 흥미있는 사료들도 더 나왔을것이다.》

해방직후 정치적혼잡과 무질서가 지배하던 서울장안에서 최일천이 온갖 정신력을 다 동원하여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와 같이 무게있는 글을 써냈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그 글의 가치는 실로 헤아릴수 없는것이였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영광스러운 항일혁명투쟁사의 증견자이며 재능있고 열정적인 문필가인 최일천이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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