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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최일천편

《동아일보》 장춘지국의 《요시찰인》


태양은 만물의 싹을 틔워주고 키워줄뿐아니라 아름답게 꽃을 피워주는 우주의 광원이다. 그 광휘로운 태양의 존함을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은 최일천을 변심을 모르고 굴할줄 모르는 혁명가로, 애국자로 성장하게 하였다.

1930년 12월 하순 오가자에서 진행된 조선혁명군 지휘성원 및 혁명조직책임자회의에 참가한 최일천은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혁명운동을 더욱 확대발전시킬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연설을 받아안았다.

오가자회의이후인 다음해 2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활동무대를 두만강연안 동만으로 옮기시며 오가자를 떠나시기에 앞서 최일천에게 오가자마을의 혁명조직들을 책임적으로 조직지도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면서 글재간도 뛰여나니 앞으로 국내의 이름있는 신문인 《동아일보》 장춘지국에서 합법적인 기자로서 항일혁명투쟁에 기여하라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최일천과 조직성원들은 그때 위대한 수령님과 헤여지는것이 너무도 섭섭하여 멀리까지 따라나섰다.

그들의 애절한 심정을 헤아려주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들은 항상 인민을 생각하며 그들의 생활을 적극 도와주고 청년들의 교양에 힘쓰며 조직을 튼튼히 꾸려나가야 하겠다, 그리고 비밀을 엄수하고 경각성을 높여 밀정들을 제때에 적발하여 처단함으로써 조직을 철저히 보호하여야 하겠다고 강조하신 다음 혁명하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헤여지는 경우도 있지만 조선혁명이라는 큰 집안에 언제나 함께 있을것이라고 하시며 한사람한사람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고 오가자를 떠나시였다.

이날은 최일천이 그이를 마지막으로 뵈온 날이였다. 나라가 해방된 후 그가 선뜻 북행길에 올랐더라면 그처럼 뵙고싶던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그동안의 그리움을 터치며 그이의 슬하에서 새 조선건국에 한몫하였을것이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 다진 맹세와 의리를 지켜 남녘땅에 남아 험준한 통일애국의 길에 스스로 나섰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의 의도대로 최일천은 1931년 5월에 이미부터 관계를 가지고있던 《동아일보》 장춘지국에 들어가 기자로, 후에는 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장춘에 나와서도 청년들과의 사업을 계속하였으며 국내애국인사들과의 밀접한 련계밑에 반일투쟁에 대한 선전을 많이 하였다.

한편 9.18사변을 일으키고 전 만주를 강점한 일제는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부의를 내세워 괴뢰만주국을 조작하면서 장춘(신경)을 수도로 정했다.

그때 장춘에서 활동하던 최일천은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이름이 뜨르르해져 봉천(심양), 길림, 연길, 안도, 무송, 장백, 통화, 단동은 물론 본사가 있는 서울까지 합법적으로 오가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항일무장투쟁소식들을 《동아일보》에 신속히 내군 하였다.

물론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 출판검열에 의해 내용이 많이 삭제, 외곡되기도 했지만 신문에 김일성장군님의 항일무장투쟁소식이 련속 나갈 때마다 그는 자기의 본분을 미력하게나마 수행해나간다는 긍지로 가슴을 불태웠다.

최일천은 합법적인 기자활동을 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만주광야에서 벌리시는 무장투쟁소식들을 하나하나 수집해두었으며 반제청년동맹조직을 통하여 직접 육성한 여러명의 핵심청년들을 항일유격대에 보내주는 일도 하였다.

1936년 5월 최일천에게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최일천에게 직접 파견하신 비밀통신련락원이 그를 찾아왔던것이다. 련락원은 그에게 그해 5월 5일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 로동자, 농민, 지식인, 청년학생, 량심적인 민족자본가와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반일애국력량을 결속한 우리 나라에서의 첫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가 창립되고 그 회장으로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추대되시였다는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최일천에게 《조국광복회창립선언》과 《조국광복회10대강령》, 《조국광복회규약》 등을 찍은 등사문건을 전달했으며 앞으로의 사업방향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최일천을 변함없이 혁명동지로 믿고 내세워주시는 크나큰 정치적신임이였다.

믿음은 그 인간에 대한 최대의 사랑이라고 할수 있다. 하물며 온 민족이 우러러보는 절세의 위인의 믿음임에랴.

이날 최일천은 백두산쪽을 바라보며 위대한 수령님의 그 크나큰 믿음에 한생을 바쳐 보답할 철석의 맹세를 다지고 또 다지였다.

최일천은 그해 7월 《동아일보》본사출장을 빗대고 서울로 가서 리극로를 비롯한 이름있는 인사들을 조국광복회에 망라시키는 공작을 하고 다시 장춘으로 돌아갔다.

당시 최일천으로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항일무장투쟁소식을 자료화해놓으면서도 그것을 기사에 담지 못하는것을 제일 안타까와하였다. 그것은 그때 우리 겨레의 가슴을 세차게 울려준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동아일보》가 얼마동안 정간되여 신문이 발행되지 못했던 사정과도 관련된다.

1937년 6월 4일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거느리시고 보천보를 들이쳐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이어 간삼봉전투에서 일제침략군을 격멸하시였다는 쾌소식에 접한 최일천은 《동아일보》 장춘지국의 동료들과 함께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얼싸안았다.

최일천은 밤새워 그 소식을 등사기로 밀어서 국내와 만주각지에 내보내면서 동료들에게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한 조선은 반드시 해방된다고 고무했다고 한다.

이 일로 하여 최일천은 일본정보계통이 주목하는 요시찰인으로 되여 본사의 상층과 일본관헌의 박해와 감시를 받게 되였다.

요시찰인이란 일제경찰이 일상적인 감시대상으로 지명했던 사람을 말하였다. 일제경찰은 요시찰인으로 등록된 사람들을 늘 감시미행하고 생활정형을 보고하라고 강요하였으며 여러가지 구실을 붙여 구속하였다.

그가 맡아보는 《동아일보》지국의 출입문밖에는 매일같이 일본헌병들과 밀정들이 와서 그를 감시하느라고 당번을 섰다.

적들의 감시를 피해 장춘을 떠나 베이징으로 가서 생활하면서도 최일천은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활동자료들을 수집정리하는 사업을 중단없이 계속하였다.

1940년 8월 중순 《동아일보》본사와의 잔무처리라는 명목으로 서울로 간 최일천은 서울 종로구에 자리잡은 조선어학회를 찾아가 회장 리극로를 만났다.

최일천은 자기가 일본관헌이 지목하는 요시찰인으로서 걸음걸음 감시를 받고있다는것을 이야기하면서 두툼한 미농지에 깨알같이 박아쓴 자료들을 그에게 맡기였다. 그 자료들속에는 최일천이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밑에 오가자에서 발간하였던 잡지 《농우》를 비롯하여 수령님의 혁명활동과 관련된 자료들, 독립운동자료들이 들어있었다.

《이것은 국보적가치를 가지는 자료들입니다. 적의 감시와 추적속에서 사는 나에게는 이 자료들을 간수할 힘이 없습니다. 나라가 독립되면 이 자료들로 력사저술을 하려고 하는데 선생이 어떻게 하나 그때까지 잘 보관해주기 바랍니다.》

이런 부탁을 남기고 만주로 다시 들어갔던 최일천은 얼마후 가정적재난이 닥쳐들어 그곳에 있지 못하고 조국으로 나오게 되였다.

그의 안해의 회상에 의하면 최일천은 서울에 온 후 행처를 알리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갔다가 해방되기 며칠전에 나타났다고 한다.

얼마후 최일천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기쁜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오가자에서 헤여진 후 어디에 가서나 한시도 잊지않고 마음속깊이 간직하고 살던 그이, 종횡무쌍하고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일제의 백만대군을 쥐락펴락하신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드디여 해방천지를 안아오신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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