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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최일천편



경력

• 1905년 10월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출생.

• 1913년 부모를 따라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

• 1921년 독립군 입대.

• 1929년 12월 조선혁명당 정치부장.

• 1930년 10월 오가자반제청년동맹 위원장, 잡지 《농우》 주필.

• 1931년 《동아일보》 장춘지국 기자 및 지국장.

• 1945년 12월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 위원.

• 1945년 12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발행.

• 1946년 9월부터 신진당 중앙위원회 부장, 민족자주련맹 집행위원.

• 1950년 11월 5일 피살.

• 1993년 4월 조국통일상 수상.


최일천이라고 하면 한생 펜으로 나라의 독립과 통일애국위업에 이바지해온 깨끗하고 량심적인 투사의 한사람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무시할수 없는 큰 공적을 쌓았지만 필명으로 글을 쓴데로부터 그의 이름은 사람들속에 크게 알려지지 못했고 더우기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엄혹한 시기에 반동들에게 암살되다보니 력사의 조명을 적게 받아왔다. 그러던 그가 독립투사, 통일애국인사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것은 민족의 어버이의 회고록을 통해서였다.

유럽의 한 정치가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훌륭하게 살았는가가 문제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였다.

그의 한생을 통하여 사람들은 일찌기 세상을 떠났고 오래동안 력사의 락엽속에 파묻혔던 한 지성인이 어떻게 되여 겨레와 후손들의 추억속에 길이 빛나게 되였는가에 대한 답을 찾게 될것이다.


오가자의 《농우》 주필


최일천은 이 나라에 망국의 비운이 짙게 드리우고있던 1905년 10월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소작농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릴 때의 본명은 최찬선이였다.

나라잃은 망국노의 멍에는 그의 집에도 례외없이 씌워졌다. 국내에서 더는 살길을 찾을수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1913년경 끝없이 흐르던 이민행렬에 섞여 가족을 이끌고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여살고있었는데 민족주의자들의 영향밑에 민족교육사업과 독립군활동이 활발히 벌어지고있었다.

최일천의 부모들은 중국인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최일천은 이곳에서 소학과정을 마친 다음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지으면서도 독학으로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국땅이라고 하여 결코 편한 곳이 못되였다. 1920년10월 일제의 《토벌대》가 이곳에도 쳐들어와 그의 형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형과 마을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일제에 대한 복수심에 끓어넘친 최일천은 1921년초에 당시 류하현 삼원포에 있던 오동진사령의 독립군부대에 입대하였다. 오동진은 나이어린 그를 곁에 두고 련락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최일천은 독립군병사생활을 하면서도 중학교강의록을 구하여 계속 공부하였다. 1924년에 정의부에서는 류하현 삼원포에 동명중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오동진은 총명하고 남달리 향학열이 높은 최일천을 이 학교 상급반에 추천하였다. 그리고 1년후 학교를 졸업한 최일천을 자기의 서기로 일하게 하였다. 정의부본부는 길림에 있었다.

당시 정의부는 행정, 재무, 사법, 군무, 학무, 외교, 검찰 등 중앙기구와 무송, 반석, 관전, 삼원포, 화전 등 지역에 총관소라는 자치적인 지방기관까지 꾸려놓고 관할구역의 조선동포들한테서 세금까지 받으면서 한개 독립국가와 맞먹는 행세를 하였다.

최일천은 정의부본부에서 중앙행정부서 책임자들과 독립군 각 중대장들의 사업정형을 매일매주 종합하여 오동진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많은 독립운동자들을 알게 되였다.

그는 정의부의 정책적문제들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글들을 써서 《대동민보》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경영하던 신문, 잡지들에 기고하였다.

이러한 집필활동으로 최일천은 정의부내에서 문장가로 알려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화성의숙을 중퇴하시고 길림으로 혁명활동무대를 옮기시였을 때 최일천은 오동진의 소개로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웠다. 오동진이 서기자랑을 많이 하였기때문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최일천에 대해 일정하게 알고계시였다.

그후에도 최일천은 오동진의 집에서 류숙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자주 만나뵙는 과정을 통하여 그이의 뜻과 인품에 매혹되였고 점차 수령님을 따르고 받드는 혁명동지가 될 결심을 품게 되였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뜻대로 민족주의진영안의 진보적인 청년들을 선진사상으로 개조하는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민족주의상층을 단합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오동진이 일제놈들의 간계에 빠져 체포된 다음에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3부통합서기로, 조선혁명당의 정치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운동내 각파들의 무분별한 세력다툼은 그칠새 없었고 상층은 점차 반동화의 길로 나갔다. 1928년에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가 통합하여 국민부가 나오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절반짜리 통합이였고 그와 대립되여 림시혁신회라는 단체가 생겨났다.

더우기 민족주의진영내에 공산주의사상이 전파되는것을 매우 두려워하던 이들은 새 사조를 따르려는 진보적인 청년들을 마구 살해하는 망동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최일천은 이 파벌싸움과 동족살륙만행을 종식시키기 위해 애써 노력하였지만 민족주의진영의 와해를 막지 못한채 가족이 있던 오가자로 가게 되였다.

오가자라는 지명은 료하기슭에 조선사람들의 리상촌을 건설한다고 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인 변대우, 김해산을 비롯한 다섯사람의 가족들이 먼저 살림을 폈다고 하여 붙여진것이였다.

최일천의 가족은 이미 1924년에 오가자로 옮겨와 살고있었다. 최일천은 몇해전에 오동진의 주선으로 마을의 좌상인 변대우의 딸과 결혼을 하였었다. 오가자에 내려온 최일천은 삼성학교 교원을 하면서 청년회 회장사업을 맡아하였다.

이러한 때인 1930년 10월 위대한 수령님께서 무장투쟁과 관련한 중요회의를 소집하며 겸하여 마을을 혁명화하실 구상을 안으시고 오가자마을로 오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가자에서 활동하시는 기간 최일천의 집에서도 몇주일동안이나 류숙하시면서 마을을 혁명화하기 위한 사업을 벌려나가시였다.

그이께서는 최일천이 책임지고 사업해온 청년회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료해하시였는데 당시 오가자의 청년회는 민족주의자들의 영향하에 개척된 료하농촌의 조선청년들을 망라한 단체로서 이름뿐이지 이렇다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오가자에 오신지 며칠 안되던 어느날 최일천과 함께 삼성학교를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청소년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지금 우리 청년들앞에 조국의 해방을 이룩하고 새 사회를 건설해야 할 무거운 과업이 나서고있다고 하시면서 청년회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시대풍조에서 멀리 뒤떨어져있는 오가자를 혁명하는 마을로 꾸리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앞장에 서야 한다. 지난날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이 실패를 거듭해온것은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몇몇 사람들이 대중과 동떨어져서 독립운동을 소수 집단의 파벌운동으로 만들어버렸기때문이다. 인민대중의 힘에 의거하지 않는 어떤 운동도 실패를 면할수 없다는것을 명심해야 하며 대중을 각성시키고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시면서 수령님께서는 새로 내오는 반제청년동맹은 우선 각 부락에 지부들을 내오고 그 지부들이 조직의 팔과 다리의 역할을 놀도록 튼튼히 꾸려야 한다고, 그리하여 오가자의 전체 청년들이 조직에 결속되여 한사람같이 움직이게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그때로부터 얼마후 오가자반제청년동맹결성모임이 진행되였다. 이 모임에서 최일천은 위대한 수령님의 신임에 의해 오가자반제청년동맹 위원장으로 선거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에서 중요한 연설을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연설에서 국내외정세에 대하여, 카륜회의에서 제시된 조선혁명의 로선과 전략전술적방침에 대하여, 반제청년동맹의 당면과업에 대하여 언급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제청년동맹을 내오신 다음 마을의 대중단체들을 혁명적으로 개편하시였다. 그리하여 청년회가 반제청년동맹으로 개편된데 이어 농우회가 농민동맹으로, 소년학우회가 소년탐험대로, 남만녀자교육련합회 오가자지부가 부녀회로 개편되여 오가자대중단체들의 사업에서는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가자인민들을 계몽하고 교양하는데도 많은 힘을 기울이시였다. 조선혁명군 대원들과 지하조직성원들가운데서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삼성학교에 교원으로 배치하고 그들이 주동이 되여 학교의 교육내용을 혁명적으로 개편하도록 하시였으며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중심부락뿐아니라 주변부락들에도 야학을 내오고 거기에 모든 청소년들을 다 망라시키도록 하시였다.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국치일가》나 부르면서 그 무슨 《리상촌》건설의 허황한 꿈을 꾸어오던 오가자농민들이 혁명조직에 망라되여감에 따라 대중교양사업을 더욱 강화할 요구가 제기되였을 때였다.

대중교양사업의 힘있는 수단으로서 혁명적출판물을 발간할것을 계획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난날 소극적이지만 문필활동을 해본 최일천을 생각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그해 11월 초순 어느날 농민동맹과 반제청년동맹 간부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조선사람모두에게 투쟁의 불씨를 안겨주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늘 보고 배울수 있는 정기적인 출판물을 발간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잡지의 제호를 《농우》라고 달아주신 다음 그 편집사업을 최일천에게 맡겨주시였다.

최일천의 가슴에서 열정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는 《농우》의 발간을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석유등잔불밑에서 밤이 지새는줄 모르고 원고집필에 전심전력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일천을 도와 창간사와 함께 심오한 내용을 담은 글도 친히 집필하여주시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직접적인 지도밑에 발간된 《농우》는 최일천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농민동맹기관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잡지 《볼쉐위크》와 마찬가지로 간도에까지 배포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에서 그 당시 내게 제일 그리웠던것은 김혁과 최일천이였다고, 카륜과 오가자시절의 막역지우들이였던 《볼쉐위크》의 주필 김혁과 《농우》의 주필 최일천은 쌍벽을 이루는 재능있는 문장가들이였다고, 시인인 김혁의 글이 범람하는 장강처럼 호방하고 격동적이였다면 최일천의 글은 민족적인 색채가 짙으면서도 지성도가 높고 분석이 예리하였다고 회고하시였다.

그는 반제청년동맹 위원장사업을 하면서도 꾸준한 사색속에서 혁명적출판물을 발간하였으며 공주령의 도자판매소에 파견되여 지하사업도 능숙하게 벌려나갔다.

최일천은 오가자에서 민족의 대통운을 맞이한 인민들의 환희를 보았고 눈부신 천지개벽을 보았다.

불과 몇달사이에 시대사조에서 멀리 뒤떨어졌던 료하농촌이 어린이들모두가 무료로 공부하고 누구나 병치료를 받으며 농민들과 청년들, 녀성들과 소년들모두가 각각 자기의 혁명조직에 망라되여 생활하는 혁명촌으로 전변되고 여기에 도처에서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모여들게 된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때 독립운동을 한다고 국내와 만주 각지는 물론 쏘련의 원동지방에도 드나들며 세상의 《영웅호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만나도 보고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다는 마을의 좌상 변로인이나 글과는 담을 쌓고 농사일밖에 모르던 박로인도 지나온 생활에 대한 후회속에 새로운 인생길에 나서서 혁명에 뛰여든 오가자의 현실은 실로 천지개벽이라고밖에는 달리 부를수 없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정력적인 지도에 의하여 오가자마을은 이렇듯 짧은 기간에 《리상촌》으로부터 《혁명촌》으로 개조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하해같은 인간사랑, 겨레사랑은 그대로 평범한 인민을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되게 하고 인민의 힘을 불러일으키는 위대한 지도사상으로 되였고 그이의 모든 활동은 애국애족에 기초를 두고있었다.

주의주장에 앞서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시는 위대한 사상과 걸출한 령도력을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적풍모에 감탄을 금치 못해하던 최일천은 변대우를 비롯한 마을의 유지들과 차광수, 계영춘 등 청년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을 밤하늘에 빛나는 새별에 비겨 부르던것을 태양에 비기여 부를것을 발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위대한 수령님께 민족의 영원한 태양으로 빛나시기를 바라는 뜨거운 마음을 담아 한일(一)자, 별성(星)자 대신 날일(日)자와 이룰성(成)자로 된 존함을 드리였던것이다.

김일성!

정녕 그 존함은 그 어떤 개인이나 계층이 아닌 전체 조선인민이 마음을 모아 지어드린 태양의 존함으로서 그것은 그처럼 절절하게 바라던 조선민족해방운동의 통일단결과 령도의 중심, 위대하고 걸출한 령수를 맞이한 민족의 환호였으며 민족대통운의 상징이였다.

이때의 감격을 최일천은 해방직후 자신이 집필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 이렇게 썼다.

《1926년이다. 김일성(본명 김성주 평양출신)은 길림에서 소년운동지도자의 1인으로 1년유여의 시일에 심혈을 짜내였다.

사회적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김일성 순진한 심리에는 고민의 파동이 일어났다. …

좌우익의 소아병적경향을 배제하고 〈ㅌ.ㄷ〉 즉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직하였다. …

김일성 대한 기대와 이 단체들의 운동은 컸다. 열의인, 정의인 김일성 대한 민중의 지지도 컸다. 아니 지지라기보다… 소년혁명가 김일성 완전히 민중의 친애하는 아들로서의 동생으로서의 사랑을 받았고 또 김일성 그들 민중에 대해 진심으로 봉사할것을 심약하였다. …》

글에는 일찌기 혁명의 길에 나서시여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시려고 사대와 교조에 물들지 않은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참다운 전위조직인 《ㅌ.ㄷ》에 묶어세우시고 조선혁명의 령도의 중심으로, 민족의 태양으로 칭송되신 위대한 수령님의 초기혁명활동력사가 방불하게 서술되여있다.

해방후 최일천이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초기혁명활동력사를 그토록 생동하고 방불하게 그리고 짧은 기간에 써낼수 있은것은 당시 위대한 수령님께 매혹되고 민족의 태양으로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른 그의 사상정신세계의 반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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